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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8.26 ↶ 三國史記(1145)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니, 흑치상지는 휘하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소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고 병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였다. 흑치상지는 이를 두려워하여 주위의 추장 10여 인과 함께 달아났고, 도망친 이들을 불러 모아 任存山에 의거하여 스스로 굳게 지켰다. 열흘이 되지않아 돌아온 자가 3만이 되었다. 소정방은 병사를 이끌고 흑치상지를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니 마침내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
4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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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9.03
劉仁願이 군사 1만 명으로 泗沘城에 남아서 지켰는데, 왕자 인태가 군사 7천 명으로써 보좌하였다.┆定方은 백제의 왕 및 왕족과 신료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데리고 泗沘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당나라 사람들이 백제 왕과 신료 93명, 졸 20,000명을 붙잡아 9월 3일 泗沘에서 배를 띄워 돌아갔다.┆定方이 왕과 태자 孝, 왕자 泰, 隆, 演 및 대신과 장사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8189#2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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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9.03 三國史記(1145)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백 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 등 5개의 도독부를 두어 각각 주·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자사·현령을 삼아 관리하게 하고, 낭장 劉仁願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4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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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9.23 三國史記(1145)
백제의 남은 적병이 사비성에 들어와서 항복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남아서 지키던 仁願이 唐과 신라 사람들을 내어 이를 쳐서 쫓았다. 적병이 물러가서 사비의 남쪽 산마루에 올라 네댓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진을 치고 모여서 틈을 엿보아가며 성읍을 노략질하였는데, 백제 사람들 중에서 배반하여 부응한 것이 20여 성이나 되었다.
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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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0 日本書紀(720)
백제의 좌평 귀실복신이 좌평 귀지 등을 보냈는데, 와서 唐의 포로 100여 명을 바쳤으니, 지금의 미농국 불파·편현 2군의 당인들이다. 또 군대를 빌고 구원을 청했다. 조를 내려 “장군들에게 나누어 명하여 여러 길로 함께 나아가게 하라. 구름처럼 모이고 번개처럼 움직여 함께 사록에 모여, 악한 무리들을 베고 저 위급한 나라를 도우라. 마땅히 유사들은 함께 참여하여 예를 갖추어 출발시켜 보내라”고 운운하였다.
32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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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2 三國史記(1145) 新羅
백제의 남은 적병들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으로 삼고, 잡찬 문왕, 대아찬 양도, 아찬 충상 등으로 보좌케 하였으며,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으로 삼고, 아찬 진왕으로 보좌케 하였다. 아찬 의복을 하주 장군으로, 무훌과 욱천을 남천 대감으로, 문품을 서당장군으로, 의광을 낭당장군으로 삼아 구원하게 하였다.
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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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3 三國史記(1145) 百濟
인궤가 군사를 엄하게 통솔하고 이동하면서 싸우고 전진하니, 복신 등이 熊津江 어귀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워 그들을 방어하였다. 인궤가 신라 군사들과 합세하여 공격하니, 우리 군사들이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들어와 강을 저지선으로 삼으니,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복신 등이 이에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와서 任存城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라 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4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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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4.19 三國史記(1145) 新羅
군사를 돌이켰는데, 대당과 서당이 먼저 가고 하주의 군사는 뒤에 갔다. 賓骨壤에 이르러 백제의 군사를 만나 패하여 물러났다. 상주와 낭당은 角山에서 적을 만났으나 진격하여 이기고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서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왕은 군대가 패배하였음을 듣고 장군 금순·진흠·천존·죽지를 보내서 군사를 증원하여 구원케 하였으나 加尸兮津에 이르러서 군대가 물러나 加召川에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 돌아왔다.
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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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5.09 三國史記(1145) 新羅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이 말갈의 장군 생해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述川城을 공격해 왔다. 이기지 못하자 北漢山城으로 옮겨가서 공격하는데, 포차를 벌여놓고 돌을 날리자, 그것에 맞는 성가퀴나 건물은 그대로 부서졌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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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6 三國史記(1145)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던 인문과 유돈 등이 돌아와 왕에게 “황제께서 이미 소정방을 보내 수군과 육군 35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왕께 군사를 일으켜 서로 도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라고 알렸다. “비록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지만 황제의 칙명을 어기기는 어렵습니다.”고 하였다.
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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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8 三國史記(1145)
문무대왕은 유신·인문·문훈 등을 거느리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로 향하다가 남천주에 행차하게 되었다.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은 군사를 거느리고 사비에서 배를 띄워 혜포에 이르러 배에서 내렸으므로 또한 남천주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때 해당 일을 맡은 관리가 “앞길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옹산성에 주둔하며 길을 막고 있으니 곧바로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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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8 日本書紀(720)
전장군 대화하 아담비라부련, 소화하 하변백지신 등과 후장군 대화하 아배인전비라부신, 대산상 물부련웅, 대산상 수군대석 등으로 하여금 백제를 구원하게 했다. 그리고 무기와 5곡을 보냈다. 어떤 책에는 이 끝부분에 이어서 “따로 대산하 협전련국빈랑, 소산하 진조전래진으로 하여금 백제를 지키게 했다”고 하였다.
3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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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9 日本書紀(720)
황태자가 장진관에서 직관을 백제 왕자 풍장에게 주고, 또 다신장부의 누이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대산하 협전련빈랑, 소산하 진조전래진을 보내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본국에 호위하여 보내 주었다. 이에 풍장이 나라에 들어갈 때 복신이 맞이하러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
32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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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11 日本書紀(720)
무술 천황이 죽었으므로, 비도의 천원에 관을 안치했다. ……일본세기에 “11월에 복신이 사로잡은 당나라 사람 속수언 등이 축자에 이르렀다”고 했다. 어떤 책에는 “辛酉年에 백제의 좌평 복신이 바친 포로 106명을 근강국 간전에 살게 하였다”고 했다. 庚申年에 이미 복신이 당(唐)의 포로를 바쳤다고 했으므로, 지금은 주로 두니 결정하라.
39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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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12_ 三國史記 新羅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먼저 웅진에 양식을 나르자니 황제의 뜻을 어길까 두렵고, 만약 평양으로 수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늙고 약한 자를 뽑아 보내 웅진으로 양식을 나르게 하고 건장하고 날랜 군사들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웅진에 양식을 수송하러 간 사람들은 가는 길에 눈을 만나 사람과 말들이 모두 죽어 1백 명 중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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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2_ 三國史記(1145)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 손발이 얼고 상해서 길에서 죽은 사람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행렬이 瓠瀘河에 이르자 고구려 군사와 말이 막 뒤를 쫓아와서 강 언덕에 군영을 나란히 쳤습니다. 신라 군사들은 피로하고 굶주린 날이 오래되었지만 적이 멀리까지 쫓아올까 두려워서 적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싸웠는데, 선봉이 잠깐 싸우자 적의 무리가 무너져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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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5 日本書紀(720)
대장군 대금중 아담비라부련 등이 수군 170척을 거느리고 풍장 등을 백제국에 보내주었다. 칙명을 내려 “풍장 등으로 하여금 그 왕위를 잇게 한다. 또 복신에게 금책을 주어 그 등을 두드려 위로하고 작록을 상으로 준다”고 하였다. 이 때에 풍장 등은 복신과 더불어 머리를 조아리고 칙명을 받았으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32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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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7
인원·인궤 등이 군사를 이끌고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무리들을 무찔러 支羅城 및 尹城·大山·沙井 등의 책을 빼앗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眞峴城이 강에 바짝 닿아 있는 데다 높고 험하며 요충지라 군사를 증원시켜 지켰다. 인궤는 신라의 군사를 이끌고 그 성을 점거하여 신라의 군량 운송로를 텄다.
인원이 증병을 진청하니 조서를 내려 淄州·靑州·萊州·海州의 군사 7천명을 징발하여 손인사로 하여금 웅진으로 가 도와주게 하였다.
8189#2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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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12.01 日本書紀(720)
백제왕 풍장, 그 신하 좌평 복신 등은 협전련·박시전래진과 의논하기를 “이 州柔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 끝내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避城에 도읍하였다.
40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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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2 三國史記(1145)
흠순과 천존이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의 居列城을 공격하여 차지하니, 목을 벤 것이 7백여 급이었다. 또한 居勿城과 沙平城을 공격하여 항복시켰으며, 徳安城을 공격하여 1,070명의 목을 베었다.
▐ 居列城은 가라12곡에 나오는 居烈로 추정되며 지금의 거창이다. 居勿城은 백제 완산주의 居斯勿縣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청웅이다. 신라가 섬진강 상류를 거쳐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백제 남부를 겨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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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2.02 日本書紀(720)
백제가 달솔 김수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신라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州를 불태우고, 아울러 安德 등의 중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避城이 적과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 州柔에 돌아와 살았으니, 전래진이 헤아린 바와 같았다.
▐ 삼국사기(1145)에 나오는 663년 2월의 사건에 대응하는 기록이다. 삼국사기에는 徳安城으로 나오는데 이 기록의 安德과는 오기의 관계로 보인다.
40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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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6 日本書紀(720)
전장군 상모야군치자 등이 신라의 사비기노강 2개의 성을 빼앗았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以革穿掌而縛).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머리를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40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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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8.13 日本書紀(720)
신라는 백제왕이 자기의 훌륭한 장수를 목베었으므로 곧장 백제에 들어가 먼저 州柔를 빼앗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백제는 적이 계획한 바를 알고 여러 장수들에게 “지금 듣건대 일본국에서 구원하러 온 장수인 노원군신이 씩씩한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로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한다. 여러 장군들은 미리 도모하기를 바란다. 나는 직접 가 白村에서 기다려 연회를 베풀고자 한다”고 하였다.
40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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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11.04 三國史記(1145)
인궤가 그들(흑치상지, 사탁상여 등)에게 진심을 보이면서, 그들로 하여금 임존성을 빼앗아 그들 자신의 성의를 나타내는 기회를 갖게 하려고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다. 그들 두 사람이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잔당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4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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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_ 百濟의 2차 패망
660년 7월 당(唐)과 신라는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켰지만 이것으로 백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방 곳곳에는 저항세력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 저항은 663년에 왜(倭)의 원병과 당(唐)이 벌인 백강구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40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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