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s home > 삼한(三韓)시대 연대기 > 391년부터 474년 사이 |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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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倭의 한국 침공 | 5
0391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 | R    0391-03(<-249)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애처로운 광개토왕릉비 해석 | R    일본서기 기록의 연대 보정 | R    임나 각 국의 위치 | R    
0391-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58
0391-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78
0391-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남녀 5백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또 본국이 빼앗겼던 백성 1만 명을 불러서 타일러 이끌고 돌아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978
0391-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977
0392(<-27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의 진사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倭)의 천황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기각숙니(紀角宿禰)·우전시대숙니·석천숙니·도목숙니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에서는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등은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989
0392(<-35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기각숙니를 백제에 보내어 처음으로 나라의 강역을 나누고 그 땅에서 나는 산물을 모두 기록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1713
0392-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517
0392-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해 왔으므로,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79
0392-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988
0393-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25021
0393-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백제가 침략해 왔는데, 왕은 정예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맞아 쳐서 이겼다. 나머지 적들이 밤에 도주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80
0393-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은 마침내 1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 싸고 굳게 방어하였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59
0394-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고구려와 수곡성 밑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60
0394-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 왕 담덕이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니 사망자가 8천 명이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81
0395-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으므로 군사를 내어 그들을 실직의 들판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504
0395-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그때 마침 큰 눈이 내려 병졸들 가운데 동사한 자가 많이 발생하자 왕은 회군하여 한산성에 와서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61
0396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 | R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50
0396-09(<-276)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고려인·백제인·임나인·신라인이 함께 내조하였다. 그 때 무내숙니에게 명하여 여러 한인(韓人)들을 이끌고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때문에 이 연못을 이름하여 한인지라 불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958
0397-03(<-27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는,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지침·곡나·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53
0397-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91
0397-419 양서(梁書 636) | R
진(東晋) 안제(397-419)때 왜왕 찬(贊)이 있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1787
0397-419 남사(南史 659) | R
晉安帝時,有倭王贊遣使朝貢。 진(東晋)의 안제 시기(397-419)에 왜왕 찬(贊)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 양서(636)와 진서(648)의 기록을 합친 것으로 보인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1788
0398-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서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병영 안에 떨어져 소리가 났다. 왕이 이를 심히 꺼리어 곧 중지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92
0399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 | R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倭)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64
0399-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왕이 사신을 연(燕)에 들어 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82
0399? 양서(梁書 636) | R
구려왕 안(安)을 평주목으로 삼고, 요동·대방의 2국왕에 봉하였다. 안(安)은 처음으로 장사·사마·참군의 관직을 설치하였고, 후에는 요동군을 경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8245
0399? 진서(晉書648) | R
고구려왕 안(安)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5528
0400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 | R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벌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65
0400-01 자치통감(資治通鑑 1084) | R
고구려왕 안(安)이 연(燕)을 섬기는데 태도가 오만하였다. 2월에 연(燕)왕 성(盛)이 몸소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표기대장군 희(熙)로 선봉을 삼아 신성과 남소 두 성을 빼앗고 5천여 호를 옮기어 돌아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83
0401-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이 돌아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514
0402 왜(倭)의 볼모 | 4
0402(<0391)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 | R    0402(<200-10) 일본서기(720) | R    0402-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402-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402-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실성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나물이 죽고 그 아들이 어려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세워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4719
0402-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슬을 구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93
0402-05(<-4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왕이 병력을 보내 숙군성을 공격하니, 연(燕)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84
0403(<-28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은 우리나라 120현의 인부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습진언을 파견하여 궁월의 인부를 가라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995
0403-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왕이 이들을 환영하고 위로하였으며,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94
0403-02(28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왕이 봉의공녀를 바쳤다. 진모진이라고 하는데, 이가 오늘날 내목의봉의 시조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994
0403-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25853
0404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 | R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 ▨▨▨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 지역에 침입하였다. …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 連船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왜군은 바닷길로 온 듯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66
0404-08(<-28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곧 경의 산비탈 부근에 있는 마굿간에서 길렀는데, 아직기로 하여금 사육을 맡게 하였다. 아직기는 또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인 토도치랑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때 천황은 아직기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으니, “왕인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모야군의 조상인 황전별과 무별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997
0404-12(<-4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군대를 내어 연(燕)을 침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85
0404_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충돌 | R
391년 이후만 놓고 본다면 요동과 일본의 대결구도에 한국이 휘둘린 시기였다. 이것은 '한반도는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에 의해 크게 휘둘려 왔다.'는 반도사관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0598
0405-01(<-4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연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해왔다. 성이 함락되려 하는데 모용희가 장수와 병사들에게 명하기를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짐이 황후와 더불어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서 방비를 엄히 할 수 있게 되어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86
0405-02(<-28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왕인이 왔다. 태자 토도치랑자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여러 전적들을 배웠는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른바 왕인은 서수 등의 시조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999
0405-02_ 고사기(古事記 712) | R
又科賜百濟國「若有賢人者、貢上。」故受命以貢上人・名和邇吉師、卽論語十卷・千字文一卷幷十一卷、付是人卽貢進。此和邇吉師者文首等祖。 천황은 또 백제국에 "현자가 있으면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그 명을 받아 보낸 사람의 이름이 화이길사라 하였다. 논어 열 권과 천자문 한 권, 모두 11권을 이 사람에게 부쳐 보내왔다.【이 화이길사가 문수의 시조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8449
0405-02_ 속일본기(續日本紀 797) | R
最弟等言 漢高帝之後曰鸞 鸞之後王狗轉至百濟 百濟久素王時 聖朝遣使徴召文人 久素王即以狗孫王仁貢焉 是文 武生等之祖也 於是最弟及眞象等八人賜姓宿祢 최제 등이 말하기를, 한 고제의 후손으로 앵(鸞)이란 자가 있었고, 앵의 후손인 왕구가 백제로 옮겨갔는데, 백제의 구소왕 때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문인을 불러, 구소왕은 곧 구(狗)의 손자인 왕인을 바쳤다. 이는 문(文), 무생 등의 시조이다. 이에 최제 및 진상 등 8인에게 숙니(宿祢)의 성(姓)을 주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1622
0405-02이후 08이전 (<-285) 일본서기 | R
백제의 아화왕이 죽었다. 천황은 직지왕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한의 땅을 주어 보냈다. [동한은 감라성·고난성·이림성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922
0405-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의 군사들이 와서 명활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의 남쪽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번 싸워 그들을 격파하여 3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512
0405-08(<-28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평군목토숙니·적호전숙니를 가라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를 내려, “습진언(襲津彦)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틀림없이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토숙니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하였다. 그래서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3000
0405-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전지왕은 아신이 재위 6년에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14년에 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을 듣고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전지는 왜인을 머물러 두어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거하여 기다렸더니, 나라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987
0405-1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연왕 희가 거란을 습격하여 형북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이 두려워 돌아가려고 하여, 마침내 군대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채 우리를 습격하였다. 연(後燕)의 군대는 3천여 리를 행군하였으므로 병사와 말이 피로하고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고, 우리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87
0406-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97
0407 燕(後燕) 멸망 | R
모용희는 사치를 일삼고 폭정을 행하여 민심을 잃었다. 또한 402년, 404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요동 일대를 모두 상실하고 수도까지 위협받았다. 이에 모용희는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무리한 작전으로 희생만 컸을 뿐 모두 실패하였다. 407년 정변이 일어나 모용희가 살해되고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慕容雲 : 고운高雲)이 옹립됨으로써 후연은 멸망하고 북연(北燕)이 성립되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518
0407-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연(北燕)에 보내 종족의 정을 베풀자 연왕 운이 시어사 이발을 보내 답례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88
0407-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510
0407-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1백 명을 노략질해 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511
0408 덕흥리 고분 | R
節 東夷校尉 幽州刺史 鎭 年七十七薨焉以永楽十八年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574
0408-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509
04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야명주를 보내니 왕이 후한 예로 대접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498
0411(<-291) 해사록(연대기) 응신천황 22년 | R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는 대판(大阪)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丘隴)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3009
0412 광개토왕은 한국인인가 중국인인가? | R
고려왕조는 부여에서 나와서 낙랑에 머물다 당나라로 들어간 것이다. "광개토왕의 후손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라고 물으면 "중국"이라고 답하지 않을 수 없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0602
041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나물왕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508
041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 또한 미사흔의 형 복호를 볼모로 삼고자 하였다. 대왕은 또 복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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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송서(宋書 488) | R
고구려왕 고연(장수왕)이 장사 고익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자백마를 바쳤다. (東晋의) 안제는 고연을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871
0413 진서(晉書 648) | R
是歲,高句麗、倭國及西南夷銅頭大師並獻方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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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5-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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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송서(宋書 488) | R
(동진이) 백제왕 여영(전지왕)을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 고조가 즉위한 뒤 진동대장군으로 벼슬을 올려 주었다. - 삼국사기(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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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눌지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나물왕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삼았으므로,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자 나물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해 그 아들을 해쳐 원한을 갚으려 했다. 눌지가 이를 원망해 도리어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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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09(29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고려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그리고 표(表)를 올렸는데, 그 표에 “고려왕은 일본국에 교(敎)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 때 태자는 그 표를 읽고 노하여 고려의 사신을 꾸짖었다. 그리고 그 표문이 무례하다고 하여 파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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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여름에 사신을 왜국에 파견하여 흰 면포 열 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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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왜(倭)의 볼모 귀국 | 6
041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418(<20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418(<426 이후) 삼국유사(1281) | R    0418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418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418-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왕의 동생 복호가 고구려에서 나마 제상과 함께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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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01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마침내 사신의 예로써 고구려에 들어갔다. 왕에게 말하기를 “만약 대왕께서 호의로써 그를 돌려보내 주신다면 소 아홉 마리에서 털 하나가 떨어지는 정도와 같아서 잃을 것이 없으며, 우리 임금은 대왕을 덕스럽다고 함이 한량이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것을 생각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승락한다.”라고 말하고,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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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진(東晉)-송(劉宋) 왕조교체 | R
궁중 음모로 세력이 약화된 동진에서는 무장들의 정변 기회가 무르익었다. 처음으로 제위를 찬탈한 것은 환현(桓玄)이었는데, 그는 북조 왕조들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명성을 얻은 유유(劉裕)에게 타도되었다. 유유는 황제를 죽이고 꼭두각시 황제를 세웠다. 그러나 그 역시 죽이고 끝내 스스로 제위에 올라 송(宋:南宋 또는 劉宋)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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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29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 곧 아들 구이신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는데, 왕의 어머니와 서로 정을 통하여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천황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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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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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구이신왕은 전지왕의 맏아들이다. 전지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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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08(30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신라의 조공 사신이 모두 무고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신라 사신의 숙소에서 갑자기 불이 나 모아 놓은 배에까지 번져 많은 배가 타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인을 책망하였다. 신라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즉시 뛰어난 장인을 바쳤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3005
0421 송서(宋書 488) | R
高祖永初二年,詔曰:「倭讚萬里修貢,遠誠宜甄,可賜除授。」 고조가 영초 2년(421)에 조서를 내렸다. "왜의 찬(讚)이 만리 먼 곳에서 공물을 바쳤다. 먼 곳에서 보인 성의를 널리 알리기 위해 벼슬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1794
0421 남사(南史 659) | R
及宋武帝永初二年,詔曰:「倭贊遠誠宜甄,可賜除授。」 송(劉宋) 무제 영초 2년(421)에 이르러 조(詔)를 내려 "왜(倭)의 찬(贊)이 멀리서 온 정성이 참으로 크므로 제수를 내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1793
0424 송서(宋書 488) | R
영(映 전지왕)이 장사 장위를 파견하여 조정(劉宋)에 공물을 바쳤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3006
0424-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왕이 그를 위로하였는데 특별히 후하게 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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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송서(宋書 488) | R
원가 2년(425)에 찬(讚)이 또 사마 조달을 보내어 표를 올리고 특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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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남사(南史 659) | R
문제 원가 2년(425)에 찬(贊)이 다시 사마 조달을 보내어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찬(贊)이 죽고 아우인 진(珍)이 서고 사신을 보내어 공헌하였는데, 스스로 칭하기를 사지절 도독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하고 표를 올려 제수해 주기를 구하였다. 조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에 제수하였다. 진(珍)이 또한 왜유 등 13인의 평서 정로 관군 보국장군의 호를 정식으로 제수해주기를 바라므로 조를 내려 모두 허락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1791
042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보내 위(北魏)에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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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02(306)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왜) 고려에 도착하였으나 오(吳, 중국 남조의 송나라로 추정됨)나라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길을 아는 사람을 고려에 구하니, 고려왕은 구례파와 구례지 두 사람을 딸려 보내어 안내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오나라에 이를 수 있었다. 오나라의 왕은 공녀(工女) 4명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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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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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왜국의 사신이 이르렀는데 수행자가 5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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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02(<-308)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의 직지왕이 누이 신제도원을 보내어 섬기게 하였다. 신제도원은 7명의 여자를 이끌고 와서 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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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가을에 사신을 송(劉宋)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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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송서(宋書 488) | R
是月,倭國王遣使獻方物。 (원가 7년 정월) 이달에 왜국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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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송서(宋書 488) | R
백제왕 여비가 다시 공물을 바치므로 여영의 작호를 이어 받게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3327
0431-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병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여 명활성을 포위하였는데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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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3-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27426
0434-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사신을 신라에 파견하여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27423
0434-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다시 흰 매를 (신라에) 보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27424
0434-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신라에서 좋은 금과 명주를 답례로 보내 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26563
043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가을에 왕이 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은혜에 감사하였다. 위(北魏)의 사람들이 연(燕)을 자주 쳐서 연(燕)이 날로 위태롭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연왕 풍홍(馮弘)이 말하기를 “만일 일이 급하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의지하였다가 나중에 나라를 일으키겠다.”고 하고,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몰래 보내 우리에게 맞이해주기를 청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4992
0435-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왕이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고, 또 그 나라의 휘(諱)를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서 황제 계보와 휘를 기록하여 주게 하고, 원외산기시랑 이오를 보내, 왕에게 벼슬을 내려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삼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4990
043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연(燕)왕이 사신을 위(魏)에 들여보내 조공하고 시자(侍子)를 보내겠다고 청하였으나, 위(魏) 왕이 허락하지 않고 병력을 일으켜 이를 토벌하고자 사신을 보내 널리 알렸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4993
0436-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위(北魏)가 연(北燕)의 백랑성을 공격하여 이겼다. 왕이 장수 갈로와 맹광을 보내 무리 수 만을 거느리고 양이를 따라 화룡에 이르러 연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성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명하여 해어진 옷을 벗게 하고, 연(北燕)의 무기고에서 정교한 무기를 취하여 나누어 주고 성 안을 크게 약탈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4994
0436-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연(北燕)왕이 용성에 당시 거주하던 호구를 이끌고 동쪽으로 옮겨오면서 궁전을 불태웠는데 불이 열흘이 되도록 꺼지지 않았다. ... 위(北魏)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산기상시 봉발을 보내 연(北燕)왕을 보내라고 하였다. 왕이 사신을 위(北魏)에 보내 표(表)를 올려서, 마땅히 풍홍과 함께 왕의 가르침을 받들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4997
0437-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4998
0438 송서(宋書 488) | R
己巳,以倭國王珍為安東將軍。 (원가 15년 4월) 기사에 왜국왕 진(珍)을 안동장군으로 임명했다. 是歲,武都王、河南國、高麗國、倭國、扶南國、林邑國並遣使獻方物。 이해에 무도왕, 하남국, 고려국, 왜국, 부남국, 임읍국이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0664
0438 송서(宋書 488) | R
삭로(북위)의 공격을 받은 풍홍은 패하여 고려의 북풍성으로 달아나서 표문을 올려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고 하였다. 태조는 왕백구와 조차흥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이들을 맞이하게 하고 아울러 고려에게 보내 주도록 하였다. 거련은 풍홍이 남쪽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손수·고구 등을 보내 기습하여 그를 죽여버렸다. 백구 등은 휘하의 7천여명을 거느리고 손수 등을 몰래 공격하여 손수를 사로잡고 고구 등 2명을 살해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0771
0438-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처음에 연(北燕)왕 풍홍이 요동에 도착하자 왕이 사신을 보내 그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용성왕 풍군이 여기에 와서 들판에 묵으니 군사와 말이 고달프겠다.”고 하였다. ... 송(劉宋) 태조가 사신 왕백구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하고, 아울러 우리에게 비용을 보내라고 명하였다. 왕이 풍홍을 남쪽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 장수 손수와 고구 등을 보내 풍홍을 북풍에서 죽이고, 아울러 그 자손 10여 인도 죽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4999
0438_ 송서(宋書 488) | R
찬(讚)이 죽자 아우 진(珍)이 왕이 되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불렀다. 표를 올려 바른 벼슬을 요청해와 조서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에 봉했다. 진이 또 왜수 등 13명에게 평서, 정로, 관군, 보국장군의 이름을 붙여 달라 하므로 모두 들어 주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1795
0438_ 남사(南史 659) | R
찬(贊)이 죽고 아우인 진(珍)이 서고 사신을 보내어 공헌하였는데, 스스로 칭하기를 사지절 도독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하고 표를 올려 제수해 주기를 구하였다. 조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에 제수하였다. 진(珍)이 또한 왜유 등 13인의 평서 정로 관군 보국장군의 호를 정식으로 제수해주기를 바라므로 조를 내려 모두 허락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1796
0439 송서(宋書 488) | R
거련(장수왕)이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였다. 태조가 북(北 북위)를 토벌하고자 거련에게 말을 바치라 조서를 내리자, 거련이 말 8백필을 바쳤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4991
0439-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0773
0439-1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0774
044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남쪽 변경에 칩입하여 백성을 붙잡아 갔다. 여름 6월에 또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25902
0440-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또 (왜인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2521
0440-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사신을 송(劉宋)에 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27421
0443 송서(宋書 488) | R
是歲,河西國、高麗國、百濟國、倭國並遣使獻方物。 (원가 20년) 이 해에 하서국, 고려국, 백제국, 왜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1797
0443 송서(宋書 488) | R
二十年,倭國王濟遣使奉獻,復以為安東將軍、倭國王。 (원가) 20년(443)에 왜국왕 제(濟)가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므로 다시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삼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1798
0443 남사(南史 659) | R
二十年,倭國王濟遣使奉獻,復以爲安東將軍、倭國王。 (원가) 20년(443)에 왜국왕 제(濟)가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므로 다시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삼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0690
0443(<-32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대답하기를, “신은 모릅니다. 신의 아우 오자롱만이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이 때 오자롱은 한국에 파견되어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대초요존은 어우숙니에게, “네가 직접 한국에 가서 오자롱을 불러 와라. 밤낮을 가리지 말고 빨리 가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담로의 해인 80명을 뽑아서 뱃사공으로 하였다. 이에 어우숙니는 한국에 가서 즉시 오자롱을 데리고 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3011
0444-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倭)의 군사들이 금성을 열흘 동안 에워싸고 있다가 식량이 다 떨어져 되돌아갔다. 왕이 수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독산 동쪽까지 뒤쫓아가 싸우다가 적에게 져서 장수와 사졸 가운데 죽은 사람이 반이 넘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25901
0444-07(<-32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고려국이 철로 만든 방패와 과녁을 바쳤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3013
0444-08(<-32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고려에서 온 사신들에게 조정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 날에 군신 및 백관들을 모아놓고 고려에서 바친 철로 된 방패와 과녁에 활을 쏘아 보게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과녁을 쏘아 꿰뚫지 못하였으나 적신의 조상인 순인숙니만이 철로 된 과녁에 활을 쏘아 통과시켰다. 이 때 고려에서 온 사신들이 그것을 보고 그 활쏘는 솜씨의 훌륭함에 두려워하며 모두 일어나 절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3014
0445 후한서(後漢書) | R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島為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 國皆稱王 世世傳統 其大倭王居邪馬臺國 왜(倭)는 한(韓)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100여개의 나라로 되어 있다.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漢)과 사신의 왕래가 통하는 곳이 30여개 된다. 나라의 수장은 모두 왕을 칭하는데 대대로 왕통이 이어졌다. 그 대왜왕(大倭王)은 야마대국(邪馬臺國)에 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26647
0449-09(<-329)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적신의 조상인 지전숙니와 소백수조의 조상인 현유신을 보내어 조공을 거른 일을 문책하였다. 이에 신라인은 두려워하며 공물을 바쳤다. 공물은 비단 1,460필 및 여러 가지 물품을 합하여 모두 80척이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3016
0449?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 R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란 표현은 중원고구려비 건립 단계에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는 실정을 알려주며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부른 표현은 당시 고구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9362
0449? 중원고려비의 의미 | R
남한강 상류는 475년 이전에 이미 고려의 영토가 되었고 신라와는 조령쯤을 경계로 국경을 접했을 것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0419
0450 송서(宋書 488) | R
(백제의) 여비가 방물을 바치며, 국서를 올려 사사로이 대사 풍야부를 서하태수로 삼을 것을 추인해 주고, 표문으로여 역림·식점 및 요노를 요구하자 태조는 모두 들어 주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33328
0450-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悉直)의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하슬라(何瑟羅) 성주 삼직이 군사를 내어 불의에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고구려 왕이 그것을 듣고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왕이 겸허한 말로 사과하자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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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1 송서(宋書 488) | R
秋七月甲辰,安東將軍倭王倭濟進號安東大將軍。 (원가 28년) 가을 7월 갑진, 안동장군 왜왕 제(濟)를 안동대장군으로 올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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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1 송서(宋書 488) | R
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并除所上二十三人軍、郡。 (원가) 28년(451)에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를 더하고 안동장군은 전과 같이 하고 아울러 올린 23인의 군(軍)과 군(君)을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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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1 남사(南史 659) | R
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並除所上二十三人職。 (원가) 28년(451)에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를 더하고 안동장군은 전과 같이 하고 아울러 올린 23인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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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4-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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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송(劉宋)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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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5-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개로왕[혹은 근개루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경사이니 비유왕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사망하자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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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5-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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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8-0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의 지진원은 천황이 장차 동침하려는 것을 거스리고 석천순과 몰래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대반실옥대련에게 명하여 내목부를 시켜 부부의 사지를 나무에 펼쳐 임시로 만든 시렁 위에 올려 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 (백제신찬에는 “기사년에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천황이 아례노궤를 보내와 여자를 물색하게 하였으므로 백제에서 모니부인의 딸 적계여랑을 잘 꾸며서 천황에게 바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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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9-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병선 100여 척으로 동쪽 변경을 습격하고 나아가 월성을 에워싸고는 사방에서 화살과 돌을 비오듯이 퍼부었다. 왕성을 굳게 지키자 적들이 장차 물러가려고 하였다.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쳐부수고 북쪽으로 바다 어구까지 뒤쫓아갔다. 적들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반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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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0 송서(宋書 488) | R
倭國遣使獻方物。 (대명 4년 12월 정미) 왜국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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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1-0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 개로왕은 지진원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의논하기를 “옛날에 여자를 바쳐 채녀로 삼았다. ...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아우 군군(곤지)에게 “네가 일본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 개로왕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며 “나의 임신한 아내는 이미 해산할 달이 되었다. 만약 도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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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1-06 무령왕 출생 | 6
0461-06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501-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50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523-05 무령왕릉지석(武寧王陵誌石) | R    各羅嶋(かからのしま・加唐島) | R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 | R    
0461-0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왜) 군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이미 다섯 아들을 두었다. 백제신찬에 “신축년에 개로왕이 아우 곤지군을 보내어 대왜(大倭)에 가서 천왕을 모시게 했는데, 형인 왕의 우호를 닦기 위해서였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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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2 송서(宋書 488) | R
以倭國王世子興為安東將軍 (대명 6년 3월 임인) 왜국 왕세자 흥(興)을 안동장군으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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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2 송서(宋書 488) | R
제(濟)가 죽자 세자인 흥(興)이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였다. 세조 대명 6년(462)에 조하여 "왜왕의 세자 흥(興)은 여러 해 동안 충성을 하고 바깥 바다의 번국이 되어 교화를 받아들여 변경을 편안히 하였고 공손히 공직을 닦았다. 새로이 변경의 왕업을 이었으니 마땅히 작호를 내리되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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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2 남사(南史 659) | R
濟死,世子興遣使貢獻。孝武大明六年,詔授興安東將軍、倭國王。 제(濟)가 죽자 세자인 흥(興)이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였다. 효무제 대명 6년(462)에 조하여 흥(興)을 안동장군 왜국왕에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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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2-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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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2-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활개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백성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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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송(劉宋) 세조 효무황제가 왕을 책립하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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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왜) 천황이 전협신의 아들 제군과 吉備海部直赤尾에게 명하여 “너희들은 마땅히 가서 신라를 징벌하라”고 하였다. ... 이에 제군은 명을 받들어 무리를 이끌고 백제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데 나라의 신이 늙은 여자로 변하여 홀연히 길에서 맞이하였다. 제군이 나라의 멀고 가까움을 묻자 늙은 여자가 “다시 하루를 더 간 다음에야 다다를 수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제군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길이 멀다고 여겨 정벌하지 않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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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3-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삽량성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벌지와 덕지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중도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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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4-0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신라왕은 사람을 시켜 임나왕에게 “고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일본부 행군원수(日本府 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나왕이 선신반구, 길비신소리, 난파길사적목자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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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5-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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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5-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기소궁숙니·소아한자숙니·대반담련·소록화숙니 등에게 칙명으로 “신라는 본래 서쪽 땅에 있으면서 ... 고려의 조공을 막고 백제의 성을 병탄하였다. 하물며 다시 조빙을 이미 걸렀으며 공물도 바치지 않았음에 있어서이겠는가. ... 그대들 네 경을 대장으로 삼으니 왕사를 거느리고 가 쳐서 하늘이 내리는 벌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였다. ... 얼마 후 남은 무리들이 스스로 물러가니 관군도 따라서 물러났다. 대장군 기소궁숙니는 병에 걸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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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위(北魏)의 문명태후가 현조의 육궁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므로 왕에게 교서를 내려 왕녀를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표를 올려 “딸이 이미 출가하였으니 아우의 딸로써 응하겠습니다.”고 하였다. 허락하고 이에 안락왕 진(眞), 상서 이부 등을 보내 국경에까지 폐백을 보내왔다. ... 왕은 마침내 글을 올려 딸이 죽었다고 핑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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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7-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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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7-0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국으로부터 도망해 온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이름을 귀신이라고 하였다. 또 귀신은 오(吳)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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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봄에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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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9-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0780
047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삼년산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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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0-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0781
0472 위서(魏書554) 1 | R
백제왕 여경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기를, “신(臣)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워 승냥이와 이리들에게 길이 막히니, 비록 대대로 신령하신 교화를 받았으나 번신의 예를 받들 길이 없었습니다. ... 삼가 사서(私署)한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파도에 배를 던져 망망한 바닷길을 더듬게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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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2 위서(魏書554) 2 | R
... 만일 천자의 인자와 간절한 긍휼이 멀리라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면 급히 장수 한 사람을 보내어 신의 나라를 구원하여 주십시요.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마굿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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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2 위서(魏書554) 3 | R
... 신의 나라 서쪽 국경에 있는 소석산의 북쪽 바다에서 10여구의 시체를 발견함과 아울러 옷과 기물·안장·굴레 등을 얻었사온데, 살펴보니 고려의 물건들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들으니 이는 폐하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오는 것을 뱀처럼 흉악한 것들이 길을 막고 바다에 침몰시킨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렇게 하였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깊이 분노를 느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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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2 위서(魏書554) 4 | R
현조는 사신 소안을 파견하여 그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 그대의 나라가 고려와 불화하여 여러 차례 침범을 당하였으나, 진실로 의(義)에 순응하고 인(仁)으로써 방비한다면 어찌 원수를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 그대 나라에서 보내온 안장을 그 때 사신이 탔던 안장인가 대조해 보니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소. 반신반의한 일을 가지고 꼭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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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2 위서(魏書554) 5 | R
... 고려는 선대의 조정에 번신이라 칭하며 직공하여 온지 오래인지라, 그대들과는 오래 전부터 틈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아직 영을 어긴 허물이 없소.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여서 곧장 정벌하여 달라 요구하기에 얼마 동안 일의 시비를 따져 보았으나 사리에 역시 맞지 않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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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2 위서(魏書554) 6 | R
안(安) 일행이 고구려에 이르니, 련(璉)은 옛날 여경과의 원수관계가 있음을 말하며 동쪽으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안(安) 일행이 이로 말미암아 모두 되돌아왔다. 이에 조서를 내려 준절히 질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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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2-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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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3-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0785
0473-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0783
047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위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위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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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4-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8#40782
0474-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을 송(劉宋)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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