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s home > 삼한(三韓)시대 연대기 > 290년에서 390년 사이 |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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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1-07(<023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이찬 우로(于老)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하여 함락시키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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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2-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의 군사가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므로, 일길찬 대곡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고 지키게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739
0293-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2월에 사도성(沙道城)을 고쳐 쌓고 사벌주(沙伐州)의 호민(豪民) 80여 가를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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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3-07(<023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침입해 왔으므로 우로가 사도(沙道)에서 추격하여 싸웠는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다 물에 빠져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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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여름에 왜의 군사가 장봉성(長峯城)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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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4(<BC0006-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으니 북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 패하는 예성강, 주양은 춘천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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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왕이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꾀하여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라고 묻자 홍권이,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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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6-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모용외가 침략해왔다. 고국원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파는 사람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있고 또 무덤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는가 두려워하여 곧 물러갔다. --> 모용외는 5호16국시대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으로 훗날 연(前燕)을 세운 모용황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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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이서국(伊西國)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우리 편에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왔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그 사람들은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달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하여 깨뜨린 후 어디로 간지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 이서국은 청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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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국(倭國)과 사신을 교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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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와서 항복하였다. --> 낙랑은 313년에, 대방은 314년에 각각 고려에 병합되었다. 이때는 단지 망하기 직전에 있던 낙랑과 대방의 난민들이 신라로 들어온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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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1-08(<006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마한의 장군 맹소가 복암성(覆巖城)을 들어 항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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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2-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 명을 붙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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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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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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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5(<245-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그날 밤이 몹시 추웠는데, 우로가 사졸들을 위로하고 몸소 장작을 피워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니 모두 마음으로 감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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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新羅)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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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10(<00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만은 굳게 수비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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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9 신공황후의 신라침공과 우로 피살 | 13
0309(<020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309(<025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309(<025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309(<025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309-02(<020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309-04(<020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309-04(<024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309-09(<020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309-10(<020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309-12(<020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309-12(<020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309이후 (<262-298) 삼국사기(1145) | R    석우로 피살사건 연도 조정 | R    
0309-04(<00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이 항복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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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9-07(<00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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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흘해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나해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각간 우로(于老)이고 어머니는 명원부인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군신들이 의논해 말하기를, “흘해가 어리지만 노련한 덕이 있다.”고 하며 이내 그를 받들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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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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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2-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국왕이 사신을 보내 아들을 위해 혼인을 청하여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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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04 자치통감(資治通鑑 1084) | R
遼東張統據樂浪 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爲之置樂浪郡 以統爲太守 遵參軍事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외(慕容廆)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廆)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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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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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4-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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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2월에 현도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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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6 晉(西晉) 멸망 | R
311년 흉노족은 진의 수도인 낙양(洛陽)을 약탈하고 황제를 죽였다. 진은 고대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에 새 황제를 세우고 나라를 재건했지만 이는 이민족의 침입을 잠시 늦추는 것에 불과했다. 316년 사마염의 손자인 민제(愍帝)는 흉노족의 부족장에게 항복하고 퇴위했다가 후에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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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6-10(<001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牛谷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주근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처자들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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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7 晉(東晉) 건국 | R
진의 낭야왕(琅邪王)인 사마예는 건업(建業)으로 피하여 낭야의 호족 왕도의 힘을 빌려 이 땅에 동진을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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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8-08(<001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원산과 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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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조(後趙) 건국 | R
갈족(羯族)의 석륵(石勒)에 의해 건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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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0199)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이 나라보다 더욱 寶物이 많은 나라가 있으니 비유하면 처녀의 눈썹과 같고 津의 건너편에 있는 나라이다睩은 우리말로 麻用弛枳(まよびき)라고 한다. 눈부신 금과 은, 비단이 그 나라에 많이 있다. 이 나라를 栲衾新羅國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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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1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진(晉)의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도망쳐 왔다. 모용외가 모용한과 모용인을 보내 우리를 치게 하였는데, 왕이 화해를 청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돌아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748
0320-1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는데, 모용인이 막아 싸워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749
0320-12 진서(晉書 648) | R
明年,高句麗寇遼東,廆遣眾擊敗之。 이듬해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였다. 외(廆)가 무리를 보내어 그들을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41537
033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후조(後趙)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싸리나무 화살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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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진(東晉)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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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7 연(前燕) 건국 | R
요서 일대에 살던 모용선비는 307년 모용외(慕容廆)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며 자립하고 319년에 진(西晉)의 최비(崔毖)를 물리치며 요동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의 아들 모요황(慕容皝)은 337년에 연왕을 칭하고 단부, 조(後趙), 고려, 우문선비 등과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모용준(慕容儁)은 352년에 하북을 점령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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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7-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백제에 사신을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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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8 자치통감(資治通鑑 1084) | R
송황(宋晃)은 338년에 후조의 석륵이 모용황을 공격하자 전연의 성주내사 최도(崔燾), 거취령 유홍(游泓), 동이교위 봉추(封抽) 등과 함께 이에 내응하였다. 그러나 석륵이 오히려 패하고 모용황이 반했던 성들을 토멸하자, 최도는 석륵에게로, 송황은 봉추·유홍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해 왔다. 석륵이 같은 해 고구려에 양곡 30만 곡(斛)을 배 300척에 실어 보낸 것도 이러한 사정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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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침략해 와서 그 병력이 신성에 도달하였다. 왕이 화해하자고 하니 이에 돌아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526
034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왕이 세자를 보내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을 만나보게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527
0340-09(<004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화려현과 불내현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26051
0342-08(<004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26052
0342-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모용황이 스스로 굳센 병력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오고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 왕우 등을 보내 병력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도로 나와 침략해 왔다. 왕이 혼자 말을 타고 달아나 단웅곡으로 들어갔다. 장군 모여니가 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비를 추격하여 사로잡아 돌아갔다.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에 있던 여러 대의 보물을 약탈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버리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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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3 양서(梁書 0636) | R
모용외의 아들 황(晃)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쇠(釗)는 더불어 싸우다 크게 패하여 단신으로 말을 타고 달아났다. 황(晃)은 승리한 기세로 계속 추격하여 환도(丸都)에 이르러 궁실을 불지르고 남자 5만여구를 노략질하여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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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3-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왕이 그의 동생을 연(前燕)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왕 모용황이 이에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보내고 그 어머니는 아직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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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3-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겨 살았다. 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 중에 있다. 진(東晉)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530
0344-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국에서 사신을 보내와 혼인을 요청하였으나, 딸이 이미 시집갔다고 하여 사절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500
0345-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왕이 글을 보내와 국교를 끊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501
0345-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연왕 황(皝)이 모용각(慕容恪)을 시켜 공격해 와서 남소를 빼앗아 주둔병을 두고 돌아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531
034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체격과 용모가 기이하고 빼어났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계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42
034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의 군사가 갑자기 풍도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또 진군하여 금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왕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적은 식량이 떨어져 장차 물러가려 하였다. 강세에게 명하여 날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쫓아버렸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502
0347-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내고, 진정(眞淨)을 조정좌평으로 삼았다. 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흉악하고 어질지 못하였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까다롭고 잔소리가 많았다. 그는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여,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41148
034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왕이 전(前) 동이호군 송황(宋晃)을 연(燕)으로 보내다. 연왕 모용준이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바꾸어 활(活)이라 하고 벼슬을 내려 중위(中尉)를 삼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532
0349 자치통감(資治通鑑 1084) | R
高句麗王釗送前東夷護軍宋晃于燕,燕王俊赦之,更名曰活,拜爲中尉。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41539
0353 동리(佟利) | R
永和九年遼東韓玄菟太守領佟利造 353년에 요동·한·현도군을 관할하는 태수인 동리가 만들었다. --> 안악3호무덤의 동수(佟壽)처럼 고려의 지배체제로 흡수된 낙랑인으로 추정된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41535
035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겨울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 조감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533
0357 동수(佟壽) | R
무덤의 주인은 동수(冬壽)로 진서(晉書)와 자치통감에 나오는 동수(佟壽)로 추정된다. 명문에 있는 ‘永和十三年’는 동진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에 해당된다. 使持節 都督 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相 昌黎玄菟帶方太守 都鄕侯 사지절 도독 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토대방태수 도향후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575
0359(<0059-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26054
0363-10(<006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백제 왕이 땅을 넓혀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26056
036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여름 4월에 왜의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 왕이 듣고서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그리고 용맹한 군사 1천 명을 부현의 동쪽 들판에 숨겨놓았다. 왜인이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 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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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4-08(<006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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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4-10(<006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다시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자 왕이 기병 2천을 보내 공격해 패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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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6(<006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해 함락하고서 2백 인을 남겨 머물러 지키게 했으나, 얼마 안 가 이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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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6(<0246)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사마숙니는 종자 이파이와 탁순인 과고 두 사람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였다. 이 때 백제 초고왕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다섯가지 빛깔의 채색비단 각 1필과 각궁전 및 철정 40매를 이파이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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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6-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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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7-04(<024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왕이 구저‧미주류‧과고를 보내어 조공하게 했다. 이 때 신라국의 조사가 구저와 함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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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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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 칠지도명(七支刀銘) | R
태화(泰和)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다. 모든 병해를 물리칠 수 있고 후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가 만든 것이다. 선세 이래 아직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세자(百濟王世子)가 뜻하지 않게 성음이 생긴 까닭에 왜왕(倭王)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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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고구려 왕 사유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사로잡은 적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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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진(前秦)의 왕맹이 연(前燕)을 정벌하여 이를 무너뜨렸다. 연(前燕)의 태부 모용평(慕容評)이 도망해오자 왕(고국원왕)이 잡아서 진(前秦)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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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0 연(前燕) 멸망 | R
367년에 모용각이 죽자 모용평(慕容評)이 실권을 잡고 부패한 정치를 하면서 전연의 국력은 쇠퇴하였다. 369년에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북벌군을 일으켜 연을 공격하였는데 전진(前秦)의 구원군과 모용수(慕容垂)의 활약으로 물리쳤다. 모용평은 모용수의 전공을 두려워하여 모용수를 죽이려고 하였고, 모용수는 전진(前秦)으로 망명하였다. 370년, 전진의 부견(苻堅)의 침입을 받아 항복함으로써 전연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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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0(<0250) 일본서기(720) 1 | R
50년 봄 2월 황전별 등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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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0(<0250) 일본서기(720) 2 | R
여름 5월 千熊長彦과 久氐 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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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0-10(<007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백제가 침입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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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34
0371(<0251) 일본서기(720) 1 | R
51년 봄 3월 백제왕이 또 久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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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0251) 일본서기(720) 2 | R
이 해 千熊長彦을 久氐 등에게 딸려 백제국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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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백제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에 장사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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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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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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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1 진서(648) | R
(백제) 二年春正月辛醜,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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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진(秦)나라 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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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6 진서(648) | R
(백제) 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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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9(<025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久氐等從千熊長彦詣之 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 及種種重寶 구저 등이 천웅장언을 따라와서 칠지도 1자루와 칠자경 1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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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봄 2월에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독산성 성주(禿山城主)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달아났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36
0374-08(<007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백제가 변경을 침공하니 군대를 보내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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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5(<025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55년 백제 초고왕이 죽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43
0375-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고구려가 북쪽 변방의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37
0375-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사망하였다. 고기(古記)에는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때에 와서 박사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書記)를 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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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5-11_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또는 수(須)라고도 하였다.>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 근초고왕이 재위 30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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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6(<0256)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56년 백제왕자 귀수가 왕이 되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543
0376-09(<007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군대를 보내 백제를 정벌하고 와산성을 다시 회복했다. 백제로부터 와서 머물던 사람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1254
0376-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69
0377-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백제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침공해 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70
0377-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고, 사신을 부진(符秦)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1258
0378-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여덟 부락을 빼앗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71
0379-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는데 그 사신이 바다에서 모진 바람을 만나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54
0382(<026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이 해에 습진언을 보내어 신라를 쳤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52
0384 燕(後燕) 건국 | R
전연(前燕)이 멸망한 뒤 전연의 왕족이었던 모용수는 전진(前秦)의 부견(苻堅) 휘하에서 복무하였다. 384년 정월에 모용수는 연왕(燕王)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77
0384(<026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국 귀수왕이 죽었다. 왕자 침류왕이 즉위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48
0384-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근구수왕이 죽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751
0384-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침류왕(枕流王)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아이부인(阿尒夫人)이다.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호승 마라난타가 진나라에서 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41
0385(<026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 침류왕이 죽었다. 왕자 아화가 어렸으므로 숙부 진사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49
0385-01(<008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백제가 변경을 침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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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5-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왕이 병력 4만 명을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왕 모용수가 대방왕 모용좌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을 지키게 하였다. 모용좌가 아군이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것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보내 병력을 이끌고 가서 구하게 하였다. 아군이 이를 쳐서 패배시키고,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빼앗고,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72
0385-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침류왕이 죽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38
0385-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진사왕(辰斯王)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요 침류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고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63
0385-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연(燕)의 모용농(慕容農)이 병력을 거느리고 침략해 와서 요동·현도 2군을 다시 차지하였다. 처음에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유민이 많이 투항해오므로 모용농이 범양(范陽) 사람 방연(龐淵)을 요동태수로 삼아 이들을 불러 어루만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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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6 魏(北魏) 건국 | R
탁발십익건(拓跋什翼)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전진에게 멸망당했다.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부견이 비수 전투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십익건의 손자 탁발규(拓跋珪: 후의 道武帝)는 386년 대나라 왕을 칭하고 자립했다. 그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920
0386-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왕은 군대를 내어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76
0387-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말갈과 관미령(關彌嶺)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55
0389-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08#32456
0390-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달솔 진가모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쳐서 도곤성(都坤城)을 함락시키고 200명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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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오주갑인상(五周甲引上) | R
삼국사기에는 마한이 망한 시기가 8년이라고 되어 있고 진서에는 마한의 조공 기록이 289년까지 나타나며 광개토왕릉비에는 391년의 기록에서 마한이 사라졌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기록에 오류가 있었다면 5주갑 300년의 착오가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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