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s home > 삼한(三韓)시대 연대기 > 475년부터 561년 사이 |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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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7 | R
(백제)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이곳으로 한강 이북의 민가를 옮겼다. 修葺大豆山城移漢北民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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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5 백제 한성 함락 | 11
0475 백제기(百濟記) | R    0475-07(<47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475-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475-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475-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475-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475_ (<476)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475_ 5세기 중국-요동-한국-일본의 외교와 전쟁 | R    0475_ 고려의 냉정한 실리외교 | R    0475_ 백제 개로왕의 외교실패 | R    0475_ 풍납토성은 제방의 역활도 하지 않았을까? | R    
0475 위서(魏書554) | R
안(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로부터 바다를 건너가 여경(개로왕)에게 새서를 내려 그의 정성을 포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安) 등은 바닷가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 끝내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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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5-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788
0476-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791
0476-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축하고 이곳으로 한강 이북(漢北)의 민가를 옮겼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200
0476-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송(劉宋 420-479)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았으므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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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6-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탐라국(躭羅國)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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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6-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였다.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해 공격하여 물리치고 2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220
0476-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792
0476-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793
0477 송서(宋書 488) | R
倭國遣使獻方物。 (승명 원년 11월에) 왜국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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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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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구마나리를 문주왕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다. 일본구기에서는 “구마나리를 말다왕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의 하치호리(下哆呼唎)현의 별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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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의 아우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임명하고,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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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군사를 일으켜 다섯 방면의 길로 침입해 왔지만 마침내 성과없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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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내신좌평 곤지가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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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문주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외부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으로 하여금 그를 해치게 하여, 왕이 마침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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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삼근왕(三斤王)은 문주왕(文周王)의 맏아들이다. 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이었으니, 나이 13세였다. 군사 임무와 나라 정사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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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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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8 남사(南史 659) | R
흥(興)이 죽자 아우인 무(武)가 서서 사지절 도독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였다. 순제 승명 2년(478)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렸는데 아뢰기를 "과거의 조상으로부터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산천을 누비느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동으로는 모인 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는 중이 66국을 복종시켰으며 해북 95국을 평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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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8 남사(南史 659) | R
왕도는 화락하고 편안하며 땅을 넓히고 왕기를 아득히 크게 하였으며 여러 대에 걸쳐 조공하여 해마다 어긋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구려가 무도하여 집어삼키려고 합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고자 하였으나 갑자기 아버지와 형의 상을 당해 거의 다 된 일이 한순간의 모자람으로 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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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8 남사(南史 659) | R
이제 병사를 단련시켜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하여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를 가수하고 그 나머지도 모두 각각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하여 무(武)를 사지절 도독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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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송(劉宋)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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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백제의 연신(燕信)이 투항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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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8 송서(宋書 488)의 왜(倭) | 6
0478 송서(宋書 488) | R    0478 송서(宋書 488) 1 | R    0478 송서(宋書 488) 2 | R    0478 송서(宋書 488) 3 | R    0478 송서(宋書 488) 4 | R    0478 송서(宋書 488) 5 | R    
0479 송(劉宋)-제(南齊) 왕조교체 | R
송(劉宋) 말기 소도성은 난릉 출신의 하급병사로 유휴범의 반란을 진압하여 권력자가 된 뒤 황제를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479년 순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南齊)를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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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 가라왕의 조공 | 4
0479 남제서(南齊書 537) | R    0540-056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562 이전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562 이전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479 남제서(南齊書 537) | R
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爲鎮東大將軍。 건원 원년(479)에 왜(倭) 임금에게 새로 벼슬을 내려주어 사지절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으로 삼았다. 왜(倭) 임금 무(武)는 호칭을 진동대장군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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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이 해 백제에서 바친 조부가 평상시보다 많았다. 축자의 안치신·마사신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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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796
0479-0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의 문근왕(文斤王)이 죽었다. 천왕이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末多王)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병기를 주고 아울러 축자국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 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동성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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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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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삼근왕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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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이니, 문주왕의 아우 곤지의 아들이다. 담력이 대단히 컸으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삼근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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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482 남사(南史 659) | R
齊建元中,除武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鎮東大將軍。 제(南齊) 건원 연간(479-482)에 무(武)를 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진동대장군에 제수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1814
0480-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제(南齊)의 태조 소도성이 왕을 책립하여 표기대장군을 삼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812
0480-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왕이 사신 여노 등을 보내 남제와 통교하게 하였다. 위(北魏)의 광주인이 바다 가운데서 여노 등을 잡아 대궐로 보냈다. 위(北魏) 고조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경이 우리의 경역(境域)을 넘어 외교를 하여 찬탈한 도적과 멀리 통하려 하니, 어찌 이것이 번신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이겠는가?”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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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0-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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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제(南齊)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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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1-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 등 7성을 빼앗았고, 또한 미질부에 진군해 왔다. 우리 군사와 백제· 가야의 구원병이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이 패해 물러갔다. 이하 서쪽까지 추격해 그들을 물리쳤는데 1천여 명을 목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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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2-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변경을 침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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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2-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靺鞨襲破漢山城虜三百餘戸以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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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王以獵出至漢山城撫問軍民浹旬乃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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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3-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웅진 북쪽에서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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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4-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은 제(南齊 479-502)의 태조 소도성이 고구려왕 거련(장수왕)을 책봉하여 표기대장군으로 삼았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복속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7415
0484-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백제와 함께 모산성 아래에서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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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4-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내법좌평 사약사를 제(南齊 479-502)에 보내 조공하려 했으나, 약사가 서해에서 고구려 군사와 조우하여 가지 못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7416
0484-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인(魏人)이 우리 나라가 강하다고 여겨,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南齊 479-502)의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에 두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798
0485-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백제가 와서 예방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7414
0485-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799
0485-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800
0486-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사신을 제(南齊 479-502)에 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880
0486-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892
0486-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801
0487-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802
0488-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803
0488-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804
0488-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805
0489-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806
0489-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807
0489-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과현에 이르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405
0489-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가) 호산성을 함락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39360
0489-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808
0490 남제서(南齊書 537) | R
위(北魏)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에 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그리고 목간나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 여기에 나오는 위(北魏)는 고려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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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0 남제서(南齊書 537) | R
"지난 490년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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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0(<-48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위(北魏)가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 여기에 나오는 위(北魏)는 고려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407
0490-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809
0490-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810
0490-10(<-37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오국(吳國)과 고려가 함께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33021
0491 위서(魏書 554) | R
연(璉 장수왕)이 죽은 나이가 100여세였다. 고조는 동쪽 교외에 나가 거애하고, 알자복야 이안상을 보내 차기대장군 태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에 추증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다. 또 대홍려를 보내 연(璉)의 손자 운(雲 문자왕)을 사지절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에 배하고, 의관과 복장·기물 및 수레·깃발 따위의 물건들을 하사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566
0491-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811
0491-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787
0493-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백제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벌찬 비지의 딸을 그에게 보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893
0494-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장군 실죽 등이 고구려와 살수의 들판에서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견아성을 지켰는데, 고구려 군사가 그곳을 포위하였다. 백제왕 모대가 군사 3천 명을 보내 구원하니 포위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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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5-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자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하자, 고구려 무리들이 도망하였다.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고마움을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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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6-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가야국에서 흰 꿩을 보냈는데, 꼬리의 길이가 5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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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6-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해 왔다. 장군 실죽이 출격해 이하 상류에서 그들을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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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7-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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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7-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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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8-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탐라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그를 직접 치려고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耽羅, 탐라는 곧 躭牟羅이다)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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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도적이 많이 생기자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한산 사람들 중에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2천 명이나 되었다. 漢山人亡入髙句麗者二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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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0-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왜인이 장봉진을 쳐서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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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50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신찬에 이르기를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함께 제거했다. 무령왕이 즉위하였는데 휘는 사마왕(斯麻王)이고 곤지왕자의 아들이니 말다왕의 이모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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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서 묵었다.이전에 왕이 백가로 하여금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퇴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백가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러서 12월에 이르러 왕이 사망하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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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斯摩, 혹은 隆이라고도 한다)이니 모대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척이오,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 모대왕이 재위 23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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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달솔 우영을 보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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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제(南齊)-양(萧梁) 왕조교체 | R
제나라 말기 황제 동혼후는 폭거를 저질러 많은 대신들을 살해하고, 종족인 소의을 살해했다. 옹주자사로써 양양에 주둔하고 있던 동생 소연이 폭군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동혼후를 죽이고, 화제을 옹립한 뒤 502년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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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양서(梁書 636 唐·姚思廉) | R
진(東晉) 안제(397-419)때 왜왕 찬(贊)이 있었다. 찬(贊)이 죽자 동생 미(彌)를 왕으로 세웠다. 미(彌)가 죽자 아들 제(濟)를 왕으로 세웠다. 제(濟)가 죽자 아들 흥(興)을 왕으로 세웠다. 흥(興)이 죽자 동생 무(武)를 왕으로 세웠다. 제(南齊) 건원(479-482)때 무(武)에게 지절독 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 육국제군사 진동대장군의 벼슬을 내렸다. 고조(502-549)가 즉위하자 무(武)를 정동장군 직함으로 올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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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남사(南史 659) | R
梁武帝即位,進武號征東大將軍。 양(萧梁) 무제가 즉위하여 무(武)의 칭호를 정동대장군으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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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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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말갈이 마수책을 소각하고 고목성(髙木城)으로 진공하여 오자 왕이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들을 물리쳤다. -- 고목성은 경기도 연천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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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우전팔번 신사 인물화상경 | R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 8월 10일 대왕의 연간에 남제왕이 의자사가(おしさか)궁에 있을 때 사마가 장수를 염원하며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보내어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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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1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국이 마나군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 천황은 백제가 해가 지나도록 조공의 직무를 닦지 않았다고 하여 붙잡아 놓고 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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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507 위서(魏書 554) | R
세종이 동당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기를,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 여러 대에 걸쳐 충성하여 땅에서 나거나 거두어들이는 것을 조공에 빠뜨리지 않았었습니다. 오직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珂는 섭라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 國의 王인 臣 雲은 끊어진 나라를 잇는 의리를 생각하여 모두 저희 나라로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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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0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왕이 사아군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전에 조를 바친 사신 마나는 백제국주의 골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가 사아를 보내어 조정을 섬깁니다”라 하였다. 드디어 아들이 있어 법사군이라 하였는데 곧 왜군의 선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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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경기도 연천)을 격파하고 6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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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함께 한성을 치기 위하여 횡악(橫岳) 아래에 와서 진을 치니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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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0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에 사신을 보냈다[백제본기에 구라마치지미가 일본으로부터 왔다고 하였으나 자세하지 않다. ] 임나의 일본 현읍(日本 縣邑)에 있는 백제의 백성으로 도망하여 호적에서 빠진 지 3·4대(代) 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백제로 옮기고 호적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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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사신을 양(梁 502-557)에 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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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0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여름 4월 辛酉 초하루 丙寅 穗積臣押山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내어 筑紫國의 말 40필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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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다시 군사를 옮겨 원산성을 격파하니 죽이거나 약탈하여 간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용감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위천 북쪽에 나가 싸우니 고구려 병사들이 왕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가벼이 여겨 진을 치지 않았으므로 왕이 기발한 작전을 써서 기습을 하여 크게 무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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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1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의 상치리(上哆唎)·하다리(下多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4현을 청했다. ... 이로 말미암아 사신을 바꾸어 칙을 선포하고 내리는 물건과 제지를 붙여서 표에 따라 임나의 4현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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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06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가 저미문귀 장군과 주리즉이 장군을 수적신압산에 딸려 보내어 오경박사 단양이를 바쳤다. 따로 아뢰기를 “반파국이 저희 나라 기문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엎드려 청하옵건대 천은으로 본래 속했던 곳으로 되돌려 주게 해주십시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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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08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 태자 순타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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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1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이 달 반파국(伴跛國)이 집지를 보내어 진기한 보물을 바치고 기문(己汶)의 땅을 요구했으나 끝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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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1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조정에서 백제의 저미문귀 장군과 사라의 문득지, 안라의 신이해와 분파위좌, 반파(伴跛)의 기전해와 죽문지 등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己汶)과 체사(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32496
0514-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반파(伴跛)가 자탄과 대사(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와 이어서 봉수와 군창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했다. 또 이열비와 마수비에 성을 쌓아 마차해와 추봉에 걸치게 했다. 사졸과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여 백성을 약탈하고 촌읍을 노략질하였으니 흉악한 세력이 가해진 곳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었다. 포학하고 사치하였으며 괴롭혀 해를 끼치고 침략하여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루 다 실을 수 없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4656
0515-0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의 사신 문귀장군 등이 물러가기를 청했다. 이에 명을 내려 물부련(이름은 빠졌다)을 딸려 보내어 돌아가게 했다(백제본기에는 물부지지련이라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874
0515-0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이 달 사도도에 이르러 반파(伴跛)인이 한을 품고 독을 머금었으며 강성함을 믿고 사납기 이를 데 없음을 전해 들었다. 물부련은 수병 5백 명을 이끌고 곧바로 대사(帶沙)강으로 나아갔으며 문귀장군은 신라로부터 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799
0515-0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물부련이 대사(帶沙)에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반파(伴跛)가 군사를 일으켜 가서 정벌했다. 옷을 벗기고 가지고 간 물건들을 빼앗고 막사를 모두 불태우자, 물부련 등이 두려워 도망해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여 문모라(섬 이름이다)에 머물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798
0516-0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가 전부의 목리부마갑배를 보내어 물부련 등을 기문(己汶)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이끌어서 나라로 들어왔다. 여러 신하들이 각각 옷과 부월·옷감을 내어 국물에 더하여 조정에 쌓아놓고 은근하게 위로했으며 상과 녹이 매우 많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797
0516-09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가 주리즉차장군을 보냈는데 물부련을 따라 와서 기문(己汶)의 땅을 내려준 것에 사례하였다. 따로 오경박사 한고안무를 보내어 박사 단양이와 교대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청에 따라 교대시켰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796
0516-09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戊寅 백제가 灼莫古장군과 일본의 斯那奴阿比多를 보내었는데 고려의 사신 安定 등이 따라와 來朝하여 우호를 맺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795
0521 제번공직도(526-539) 사로국 | R
처음으로 백제 사신을 따라와서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655
0521-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사신을 양(梁 502-557)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쇠약해진지가 여러 해였다. 이 때에 이르러 표를 올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드려 비로소 우호를 통하였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일컬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414
0521-1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양(梁 502-557) 고조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명하여 말하기를 "행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여륭은 해외에서 번방을 지키며 멀리 와서 조공을 바치니 그의 정성이 지극하여 나는 이를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옛 법에 따라 이 영광스러운 책명을 보내는 바,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으로 봉함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872
0523-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한성(漢城)으로 가서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 등에게 명령하여 15세 이상 되는 한수 이북(漢北)주·군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423
0523-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한성(漢城)에서 돌아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424
0523-05 무령왕릉지석(武寧王陵誌石) | R
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斯麻王)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5월 (병술일이 초하루인데)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계유일이 초하루인데)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249
0523-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무령(武寧)이라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974
0523-0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의 王 武寧이 죽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738
0523-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고구려 군사가 패수(浿水)에 이르자 왕이 좌장 지충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주어 출전케 하니 그가 적을 물리쳤다. -- 이때의 패수는 예성강으로 추정된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873
052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양(梁) 고조가 조서를 내려 왕을 책봉하여 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868
0524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 R
법흥왕을 모즉지매금왕(牟即智寐錦王)이라 칭하고 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394
0524-0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의 태자 명(明 성왕)이 즉위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527
0525-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신라와 서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869
0526-539 양직공도(梁職貢圖) | 7
0502-0557 양(萧梁) | R    梁職貢圖 - 고려국 신라국 | R    梁職貢圖 - 백제국 | R    梁職貢圖 - 백제국사 | R    梁職貢圖 - 백제국사 | R    諸番貢職圖 - 사로국 | R    직공도에 나타난 각국의 외교력 | R    
0527 이전 (<53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아들인 노종, 둘째 아들인 무덕, 막내 아들인 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5883
0527-06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근강모야신이 군사 6만을 이끌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게 멸망당한 남가라·녹기탄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이 때 축자국조 반정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꾸물거리다가 해를 넘겼다. ... 이 때문에 모야신은 길이 막혀서 중도에서 지체했다. 천황은 大伴大連金村과 物部大連麤鹿火·許勢大臣男人 등에게 “축자의 반정이 반란을 일으켜 西戎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 누가 장수가 될 만한가”라고 조를 내렸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6660
0529 다사진(多沙津) 분쟁 | 4
0529-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529-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529이후 (<522-03) 삼국사기(1145) | R    0529이후 (<524-09) 삼국사기(1145) | R    
0529-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근강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명령을 내려 신라에게 남가라와 녹기탄을 다시 세우도록 권하게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208
0529-0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임나왕 기능말다한기가 와서 조회하였다(기능말다란 대개 아리사등이다). 대반대련금촌에게 아뢰기를 “바다 밖의 여러 번국들은 태중천황이 내관가를 두었을 때부터 본토를 저버리지 않았으므로 그 땅을 봉하였는데 그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라는 원래 내려주었던 경계를 어기고 자주 경계를 넘어 침략해 오니 청컨대 천황께 아뢰어 신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209
0529-0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신라는 그 상신 이질부례지간기로 바꾸어 보냈는데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칙을 듣기를 청했다. 모야신이 멀리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고 무리가 수천 명인 것을 보고, 웅천(熊川)으로부터 임나의 기질기리성으로 들어갔다. 상신은 4개의 촌(金官·背伐·安多·委陀가 4개 촌이다. 어떤 책에는 多多羅·須那羅·和多·費智를 4개 촌이라 하였다)을 노략질하여 빼앗고 사람과 물건을 다 가지고 본국에 들어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2216
0529-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고구려왕 흥안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 혈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좌평 연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 벌판에서 항전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사망자가 2천여 명이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415
0530-09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아리사등은) 구례사기모를 보내어 신라에 가서 청병하고 노수구리를 백제에 보내어 청병했다. 모야신이 백제병이 온다는 것을 듣고 배평(背評은 지명인데 또한 능비기부리라고도 한다)에서 맞아 토벌했는데 부상하거나 죽은 자가 반이었다. 백제는 신라와 함께 성을 에워쌌다. 두 나라는 편리한 곳을 찾아 한 달을 머물다가 성을 쌓고 돌아갔는데 구례모라성이라 한다. 돌아올 때 길목의 騰利枳牟羅·布那牟羅·牟雌枳牟羅·阿夫羅·久知波多枳의 다섯 성을 쳐부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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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1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조길사가 임나로부터 와서 “모야신은 사람됨이 거만하고 거칠며 다스리는 것을 익히지 않아 끝내 화해시키지 않고 가라를 소란하게 했습니다. 거침이 없고 마음대로 하여 환난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라 아뢰었다. 그리하여 목협자를 보내어 불러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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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10 이후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모야신이 부름을 받아 대마에 이르러 병에 걸려 죽었다. 장송을 위한 배는 강을 거슬러 올라 근강에 이르렀다. 그 처가 노래하였다. "매방을 거쳐 피리를 불며 배가 올라오네. 근강의 모야라는 젊은 서방님이 피리를 불며 올라오네." 한편 목협자가 처음 임나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 있는 일본인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가라구이(柯羅屨儞 からくに)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목협자는 왔는가. 저 멀리 일기로부터 목협자가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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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4-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사절을 양(梁)에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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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4-0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가 下部의 修德 嫡德孫과 上部의 都德 己州己婁 등을 보내어 常例의 調를 바치고 따로 表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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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봄에 서울을 사비<다른 이름은 소부리였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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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0-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장군 연회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을 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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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0-09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천황이 여러 신하에게, “어느 정도의 군사가 있으면 신라를 칠 수 있겠는가”하고 물었다. 물부대련미여 등이, “적은 군사로는 쉽게 칠 수 없습니다. 지난 번 남대적천황 6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임나의 상치리(上哆唎)·하치리(下哆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네 현을 청하였는데, 대반대련금촌이 표에서 청하는 대로 구하는 곳을 내려 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의 원망이 여러 해 동안 쌓여 갔으니 가볍게 칠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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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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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사신을 양(梁)에 보내 조공하고 겸하여 표문을 올려 모시 박사와 열반 등의 의미를 풀이한 책과 기술자, 화가 등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니, 양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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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안라의 차한기 이탄해, 대불손, 구취유리 등과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의 한기, 산반해의 한기의 아들, 다라의 하한기 이타, 사이기의 한기의 아들, 자타의 한기 등이 임나 일본부의 길비신과 더불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칙을 들었다. 백제의 성왕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천황에게 의지하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기뻐하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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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는 안라의 일본부가 신라와 더불어 계책을 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 나솔 비리막고, 나솔 선문, 중부 나솔 목리미순, 기신 나솔 미마사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신라에 온 임나의 집사를 불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안라 일본부의 하내직이 신라와 공모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그리고 왕은 임나에게, “경(卿) 등이 번번이 감언을 믿고 경솔하게 거짓말에 속아서 임나국을 멸하고 천황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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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3-1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진수련을 보내어 백제에 명령하기를 “임나의 하한에 있는 백제의 군령과 성주는 일본부에 귀속시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조서를 가지고 가서 선포하여 “그대가 여러 번 표를 올려 꼭 임나를 세우겠다고 말한 것이 10여 년이 되었다. 표에서 아뢴 바는 이와 같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다. 대저 임나는 그대 나라의 동량이다. 만일 동량이 부러지면 어떻게 집을 짓겠는가. 짐의 걱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대는 모름지기 빨리 세우도록 하라.”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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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4-1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일본부 신하와 임나 집사를 불러 “천황에게 조알하기 위하여 보낸 나솔 득문, 허세의 나솔 기마, 물부의 나솔 기비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이제 일본부 신하와 임나국 집사는 마땅히 와서 칙을 듣고 함께 임나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길비신, 안라의 하한기 대불손과 구취유리,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군, 사이기군, 산반해군의 아이, 다라의 이수위 흘건지, 자타한기, 구차한기가 이에 백제에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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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5 | R
이 해 고려가 크게 어지러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 백제본기에는 “12월 갑오에 고려국 세군과 추군이 궁문에서 싸웠는데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이 패하고 군사를 해산하지 않은 지 사흘이 되자 세군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에 박국(狛國)의 향강상왕(안원왕)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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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5-09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가 중부 호덕 보제 등을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어 오(吳, 중국 남조를 가리킨다)나라의 재화를 일본부의 신하와 여러 한기에게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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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8 마진성(馬津城) 전투 | 5
0548-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548-04-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1145 삼국사기(三國史記) | R    1432 세종실록 지리지 | R    네이버 지도 - 충청남도 예산군 | R    
0548-01-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의 사신 전부덕솔 진모선문 등이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를 내려 “청하는 구원병을 반드시 보내어 구원할 것이니, 마땅히 빨리 가서 왕에게 보고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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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8-06-0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에 사신을 보내 조를 내려, “덕솔 선문이 돌아간 후에 잘 도착하였는가. 또한 소식은 어떠한가. 짐이 듣건대 너희 나라는 박적(狛賊 고려)의 침해를 받았다고 하는데, 마땅히 임나와 함께 힘써 도모하여 전과 같이 막도록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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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9-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양나라 서울에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성과 대궐이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들 대궐 단문 밖에서 소리내어 울었는데, 행인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侯景)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투옥하였다. 그 후 그들은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비로소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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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 제(北齊) 건국 | R
위(東魏)의 실권자 고징이 살해되자 그의 동생 고양이 뒤를 계승하여 난을 수습하였는데 그 여세를 몰아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제(北齊)를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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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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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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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제(北齊)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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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북제가 왕을 봉하여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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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 백제와 신라의 고려침공 | 3
055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55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55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551(<0016) 이후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봄 2월에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 바쳤다. --> 북명은 지금의 안변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신라가 죽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것은 551년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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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사신을 제(北齊)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35352
0551-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려) 돌궐이 와서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옮겨서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을 보내 병력 1만을 거느리고 막아 싸워서 이기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35353
0551년까지 고려는 한강하류 지역을 차지했었을까? | R
475년 이후 백제와 고려는 한성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했을 가능성이 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40425
0552 북사(北史 659) | R
문제는 영주에 이르러 박릉 최유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 위(北魏) 말에 흘러 들어간 백성들의 송환을 요구케 하면서, ... 고려에 이르러 허락을 받지 못하자, 최유는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주먹으로 양원왕을 쳐 용상 밑으로 떨어뜨렸다. 왕의 좌우 신하들은 숨을 죽이고 감히 꼼짝도 못한 채 사죄하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최유는 5천호를 돌려받아 복명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35351
0552-0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 가라 그리고 안라가 중부 덕솔 목례금돈, 하내부 아사비다 등을 보내어 “고려가 신라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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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2_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과 니미방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35344
0552년을 전후한 한반도의 정세 | R
신라는 450년 또는 464년 이후 고려와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고 백제는 태고적부터 고려와 싸움을 벌여왔다. 신라와 백제는 고려의 위협에 맞서 대체로 공조하고 있었는데 특히 551년에는 함께 고려를 공격하기도 했다. 한편, 고려는 남쪽의 백제와 신라 뿐만 아니라 북쪽의 돌궐과도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렇게 고립된 고려로서는 비록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는 했지만 신라와 공조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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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3-0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왜) 백제가 상부의 덕솔 科野次酒·杆率 禮塞敦 등을 보내 군사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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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3-06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왜) 내신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좋은 말 2필, 동선 2척, 활 50장, 화살 50구를 주었다. 칙을 내려 “청한 군대는 왕이 바라는 바에 따르겠다.”고 하고, 다른 칙을 내려 “의박사·역박사·력박사 등은 순번에 따라 교대시켜야 한다. 지금 위에 열거한 사람들은 바로 교대할 때가 되었으니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 교대시키도록 하라. 또 복서 및 역본과 여러 가지 약물도 보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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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3-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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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3-08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왜) 백제가 상부의 내솔 科野新羅, 하부의 고덕 汶休帶山 등을 보내 표를 올려 “... 올해 문득 들으니 신라가 고려와 함께 모의하여 ... '일본의 군대가 떠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아 일본과의 통로를 끊자’라 하였다고 합니다. ... 천황께서 빨리 전군과 후군을 보내 서로 이어 와서 구원해주기를 원합니다. ... 천황께서 활과 말을 많이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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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3-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진흥왕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소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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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3-1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의 왕자 여창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을 향했는데 백합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백제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고려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백제군의 환호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부장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을 동성산(東聖山) 위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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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 관산성 전투 | 8
0554-0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554-0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554-0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554-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554-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554-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554-1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0554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554-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웅천성을 침공하였다가 패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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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5-0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왜) 백제 왕자 여창이 왕자 혜(위덕왕의 아우)를 보내어 “성명왕이 적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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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6-0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왜) 백제 왕자 혜가 돌아가기를 청하자 병기와 좋은 말을 매우 많이 주었다. 또한 빈번히 상으로 물품을 내려 주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찬탄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아재신, 좌백련, 파마직을 보내어 축자국의 수군을 이끌고 그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여 보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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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7 양(萧梁)-진(陳) 왕조교체 | R
진패선은 경제의 선양을 받아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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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7-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 왕자 여창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가 위덕왕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491#35155
056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신라가 久禮叱 及伐干을 보내어 調賦를 바쳤다. 司賓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예우가 평상시보다 덜하였다. 及伐干이 분하고 한스럽게 여기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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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이 해 다시 奴氐 大舍를 보내어 지난 번의 調賦를 바쳤다. 難波의 大郡에서 여러 蕃國들의 서열을 매겼는데, 掌客 額田部連과 葛城直 등이 백제의 아래쪽 열에 서게 하여 인도했다. 大舍가 화를 내고 돌아가 館舍에 들지 않고 배를 타고 돌아가 穴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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