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s home > 1. 우리는 처음부터 한 민족이었나? > 왕고와 이조시대의 다문화 | 48
in Silla's webmarks all the webmarks
0936 고려사 태조 19년 | R
대상인 유금필(庾黔弼)과 원윤인 관무(官茂)·관헌(官憲) 등에게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등 변방의 정예 기병 9천 5백 명을 지휘하게 하며,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40115
1030 고려사 현종 21년 | R
거란의 수군지휘사(水軍指揮使)·호기위(虎騎尉) 대도(大道)와 이경(李卿)6) 등 여섯 사람이 투항해왔다. 이 사건 이후 많은 거란 사람들과 발해 사람들이 투항해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40116
1216 고려사절요(1452) | R
이지영이 삭주분도장군으로 있을 때에 양수척이 흥화·운중도에 많이 살았다. ... 양수척 등이 크게 원망하였다. 거란의 군사가 이르자 양수척이 맞아들여 항복하고 길을 인도한 까닭으로 ... 모두 알게 되었다. 양수척은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에 제어하기 어려웠던 유종으로 본래 관적과 부역도 없었다. 수초를 따라 옮겨 살면서 일정한 거주가 없이 다만 사냥을 일삼고 또 고리를 엮어 이를 판매하여 생업을 삼았다. 대개 기생들은 본래 유기장의 후예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66
1217 고려사절요(1452) | R
거란병 6명이 국청사(國淸寺)로 들어오니, 중이 한 사람을 사로잡아 죽이자, 나머지가 다 흩어져 달아났다. 또 첩자 3 명이 선의문으로 들어오자 문졸이 잡아서 신문하니 바로 양수척(楊水尺 조선 후기의 백정과 같음)과 항복한 우리 군사였다. 적 5, 6 명이 또 와서 문졸 세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을 사로잡아서 달아났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67
1219 고려사절요(1452) | R
합진이 부녀자와 사내 아이 7백 명, 우리나라 백성 중에 적에게 포로로 잡혔던 자 2백 명을 우리에게 돌려 보내고, 15세 내외의 여자 9명씩과 준마 9필씩을 조충과 취려에게 각각 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자기를 따르게 하였다. 조충이 거란 포로를 각도의 주ㆍ현에 나눠 보내어서 빈 땅을 골라 모여 살게 하고, 그들에게 토지를 주어 농사를 지으며 백성이 되게 하니, 이것이 속칭 거란장(契丹場)이란 것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64
1278 고려사절요(1452) | R
상국에서 굳이 소방에 군대를 두려고 한다면, 차라리 달단(韃靼)과 한인의 군대를 보내시고 다구는 소환하시기 바랍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72
1370 고려사절요(1452) | R
3월에 달단왕(韃靼王) 합라팔독(哈刺八禿)과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71
1382 고려사절요(1452) | R
양수척(楊水尺)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왜적 행세를 하며 영월군을 침범하여 관사와 민가를 불태우니, 판밀직 임성미(林成味) 등을 보내어 쫓아 잡아서 남녀 50여명과 말 2백여 필을 노획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68
1389 고려사절요(1452) | R
달단(韃靼) 수척(水尺)은 소를 잡는 것으로써 농사를 짓는 것에 대신하니, 서북면이 더욱 심하여 주ㆍ군의 각 참(站)마다 모두 소를 잡아서 손님을 먹여도 이를 금하지 않습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70
1392 조선왕조실록 태조 01년 | R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은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면서 농업을 일삼지 않으므로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여 상시 모여서 도적질하고 소와 말을 도살하게 되니, 그들이 있는 주군(州郡)에서는 그 사람들을 호적에 올려 토지에 안착(安着)시켜 농사를 짓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죄주게 할 것이며, ...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73
1404 조선왕조실록 태종 04년 | R
참지의정부사 최이가 진언한 것 가운데에, ‘외방 각도에서 활과 말에 능한 자는 모두 갑사와 시위에 속하게 하고, 재인·화척 가운데 활과 말에 능한 자도 또한 시위에 속하게 하고, ... 원하건대, 이제부터 재인·화척의 무리는 모두 각 진(鎭)에 속하게 하여 번병(藩兵)을 충실하게 하소서.’ 하였고,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91
1406 조선왕조실록 태종 06년 | R
달단(韃靼) 화척(禾尺)에게 소와 말을 잡는 것을 금하도록 거듭 밝혔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75
1407 조선왕조실록 태종 07년 | R
“... 향화를 자원하여 해변 각 고을에 나누어 둔 왜인과 흥리 왜인이 서로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으므로 언설(言說)이 난잡하니, 장래가 염려됩니다. 빌건대, 육지의 먼 곳에 옮겨 두도록 하소서. ...”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86
1407 조선왕조실록 태종 07년 | R
소와 말을 잡는 것은 나라에 금령이 있으니, 유사가 엄하게 금하여 다스리고, 화척·재인 등이 도살로써 생업을 삼는 자는 마땅히 소재처로 하여금 모아들여 구제하게 하되, 전지를 주어 경작하게 하여 이산하지 않게 하소서. 이들 무리인들 어찌 쓸 곳이 없겠습니까?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92
1410 조선왕조실록 태종 10년 | R
덕릉(德陵)·안릉(安陵) 두 능을 옮기어 함주(咸州) 달단동(韃靼洞) 언덕[原]에 합장하였는데, 달달동은 함주(咸州) 북쪽 50리에 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77
1413 조선왕조실록 태종 13년 | R
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 명하여 몰이꾼을 뽑아 보내게 하였다. 임금이 임실현 지방에 금수가 많다는 말을 듣고 순행하고자 하여, 경상도·충청도에서 각각 1천 명씩과 전라도에서 2천 명을 본월 24일에 금주 남제원에 모이도록 기약하였는데, 각각 10일 양식을 싸 오게 하였다. 전라도에서는 재인·화척과 각진의 번상한 군관과 번하한 시위군을 전부 다 뽑아 보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93
1413 조선왕조실록 태종 13년 | R
“국가에서 비록 재인(才人)이나 화척(禾尺)의 무리들로 하여금 유이(流移)하지 못하도록 하더라도 호패가 있지 않은 까닭으로 이사하는 것이 무상하고 농업을 일삼지 않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비단 이러한 무리뿐만 아니라, 또 모든 백성들에게 모두 호패를 지급하소서.”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94
1413 조선왕조실록 태종 13년 | R
명하여 면성군 한규에게 갑사 5백 인으로써 광주(廣州)에 가서 사냥하게 하고, 이어서 광주에 전지하기를, “재인(才人)·화척(禾尺)을 빠짐 없이 모아놓고 대령하라.” 하니, 대개 상왕(上王)을 받들고 사냥을 구경하고자 함이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95
1414 조선왕조실록 태종 14년 | R
“화척(禾尺) 등은 일찍이 농사에 힘쓰지 않고 유수(游手)로서 먹으므로 국가에서 그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여, 재인(才人)은 저화(楮貨) 50장(張)을, 화척(禾尺)은 저화 30장을 세공(稅貢)으로 내자시(內資寺)에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평민(平民)과 더불어 잡거(雜居)하고, 모두 군역(軍役)에 종사하니, 원컨대, 세공을 면제하여 생활을 후하게 하소서.”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96
1415 조선왕조실록 태종 15년 | R
“각 고을에 산재한 향화인(向化人)들이 장가들고 시집가는데, 이성(異姓) 4, 5촌(寸)도 꺼리지 않으며, 심지어는 형(兄)이 죽으면 형수(兄嫂)를 데리고 살므로 윤리(倫理)를 패상(悖傷)합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 일절 금단(禁斷)하여 더러운 풍속을 변화시키시되, 만약 어기는 자가 있다면 율문에 의하여 죄를 주소서.”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84
1417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 R
“함길(咸吉)·평안(平安)·풍해도(豐海道) 각 고을의 산접 생안간(散接生雁干)·소유간(酥油干)의 명목(名目)을 추고(推考)하되, 그 중에서 달달(韃靼)은 그전대로 정체(定體)하고, 평민(平民)은 모조리 군역(軍役)에 붙이도록 하라.”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78
1419 조선왕조실록 세종 01년 | R
선지하기를, “주상의 몸이 너무 무거우니, 내일은 주상과 더불어 노상왕을 모시고 동쪽 교외 광진(廣津)에 가고자 한다. 또 앞으로 양근(楊根)·광주(廣州)에서 사냥을 할 터이니, 곧 병조로 하여금 경기도 각관(各官)의 재인(才人)·화척(禾尺)을 초벌리(草伐里)로 모이도록 약속하라.”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97
1419 조선왕조실록 세종 01년 | R
상왕이 하명하여 농민을 부리지 말고 방패(防牌) 5백 명과 재인(才人)·화척(火尺) 백 명으로 몰이꾼을 삼고, 무릇 농민에게 피해될 만한 것은 일절 제거하며, 갑사(甲士) 및 시위 대소 인원에게 각기 10일 동안 먹을 양식을 쌓게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98
1419 조선왕조실록 세종 01년 | R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명하여,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이숙묘·황상을 중군 절제사로, 유습을 좌군 도절제사로, 박초·박실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이순몽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 척과 하번 갑사, 별패, 시위패 및 수성군 영속과 재인과 화척·한량 인민·향리·일수·양반 중에서 배 타는 데 능숙한 군정들을 거느려, 왜구의 돌아오는 길목을 맞이하고,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99
1419 조선왕조실록 세종 01년 | R
“이제 여러 도(道)에 있는 병선이 대마도에 나가 정벌하므로 각 포구의 방어가 허술하니, 방어하기 위하여 남아 있는 병선에 명령하여 요새지에 나누어 보내어 머물러 둔을 치게 하고, 육지에 또한 명령하여 하번 갑사(下番甲士)·별패(別牌)·시위패(侍衛牌)·진속(鎭屬) 및 재인(才人)·화척(禾尺)·일수(日守)·양반(兩班)에 방어할 만한 자들로 네 번(番)으로 나누어 교체해서 방어에 나가게 하소서.”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900
1420 조선왕조실록 세종 02년 | R
화척이나 재인들이 농업에는 종사하지 아니하고 활쏘고 말타는 것으로 일을 삼아서, 양민과는 혼인도 하지 아니하고 저희끼리 한 떼를 이루어서 모였다 흩어졌다 하기를 한결같지 아니하며, 소나 말을 도살하여 양민에게 손해를 끼치게 하니, 청컨대, 이들을 각 지방에 나누어 두어서 평민과 혼인도 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직업에 안착하여 살도록 하고, 그래도 옛날 버릇을 고치지 않는 자는 그가 기르는 축산을 몰수하고 아울러 이정·장까지 죄를 주라 하였고,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80
1421 조선왕조실록 세종 03년 | R
황해도·평안도에 수유적이 있는데, 스스로 달단(韃靼)의 유종(遺種)이라 하면서 도재(屠宰)로써 직업을 삼고 있었다. 매 호(戶)에 해마다 수유(酥油) 한 정(丁)을 사옹방(司饔房)에 바치고는 집에 부역(賦役)이 없으니, 군역(軍役)을 피하는 사람이 많이 가서 의지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81
1422 조선왕조실록 세종 04년 | R
“군적에 오르지 않은 재인이나 화척들은 검찰할 길이 없으므로, 이로 인하여 으슥한 곳에 모여 살면서 간음과 도적질을 몰래 행하고, 혹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니, 청컨대, 각도로 하여금 군적에 오르지 않은 재인과 화척을 샅샅이 찾아내어 군적에 등록시키고, 평민들과 섞여 살아서 농업을 익히게 하고, 3년마다 한 번씩 출생된 자손들을 찾아내어 호적에 올리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만약 출입할 일이 있거든 날짜를 한정하여 여행증을 주게 하소서.”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901
1423 조선왕조실록 세종 05년 | R
재인과 화척(禾尺)은 본시 양인으로서, 업이 천하고 칭호가 특수하여, 백성들이 다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고 그와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니, 진실로 불쌍하고 민망합니다. 비옵건대, 칭호를 백정(白丁)이라고 고쳐서 평민과 서로 혼인하고 섞여서 살게 하며, ...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69
1432 조선왕조실록 세종 14년 | R
“향화인(向化人)으로서 우리 나라의 관직을 받은 자가 과전(科田)을 받고자 하옵는데, 그 족파(族派)를 상고하온즉, 그 근본을 알지 못하여 족류(族類)를 가릴 수 없사오매, 과전을 주는 것은 법에 어긋남이 있사오니, 어떻게 처리하오리까.”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85
1433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 | R
“용성(龍城)에 거주하는 향화인(向化人)을 단천·북청 등처에 옮기기를 청하나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61
1435 조선왕조실록 세종 17년 | R
“향화(向化) 한 왜인 마삼보로(馬三甫老)가 광주 호장 이간(李間)의 양자(養子)가 되어 성을 이씨로 가칭하고는 양주(楊州)의 호장 한원(韓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이근(李根)을 낳았사온데, 근이 글을 읽어 이제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청하옵건대, 그의 응시를 허용하옵소서.”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60
1435 조선왕조실록 세종 17년 | R
“향화(向化)한 왜인 마삼보로가 광주 호장 이간의 양자가 되어 성을 이씨로 가칭하고는 양주의 호장 한원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이근을 낳았사온데, 이근이 글을 읽어 이제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청하옵건대, 그의 응시를 허용하옵소서.”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88
1446 조선왕조실록 세종 28년 | R
강석덕을 이조 참판으로, 이승손을 인순부 윤으로, 이계린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의지를 한성부 윤으로, 신기를 호조 참의로, 성봉조를 공조 참의로, 김고을도개(金古乙道介)를 첨지중추원사로, 김조를 경상도 도관찰사로, 이사임을 전라도 도관찰사로, 양후를 충청도 도관찰사로 삼았다. 고을도개는 향화한 야인이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87
1456 조선왕조실록 세조 02년 | R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달(韃靼)’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국가에서 그 제민(齊民)하는 데 고르지 못하여 민망합니다. ... 지금도 대소(大小)의 도적으로 체포된 자의 태반이 모두 이 무리입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82
1469 조선왕조실록 예종 01년 | R
우리 나라의 풍속으로 말하더라도 양수척이라는 것은 전조(왕고)의 초기에 있었는데, 강도(강화도로 도읍을 옮겨갔을 때)때에도 또한 있었으며, 재인과 백정은 충렬왕 때에 있었는데 공민왕 때에도 있었으므로, 먼 것은 5, 6백 년, 가까운 것은 수백 년을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 현가(현악기를 타고 노래를 부르는 것)의 풍습과 재살(가축을 잡는 일)의 일은 지금까지도 고치지 않았으며, ...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911
1547 조선왕조실록 명종 02년 | R
이보다 먼저 장연(長淵) 백령도(白翎島)·대청도(大靑島) 등에 황당인(荒唐人) 40여 명이 와서 정박하고 집을 크게 짓고 대장간을 설치하여 배를 수리하였는데, 잡아다가 나누어 가두었었다. 이 장계에 ‘장연(長淵) 등의 관아에 갇혀 있는 왕준(王俊) 등은 중국의 도역인(逃役人)이 분명하니 함부로 형신(刑訊)할 수 없다.’고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62
1554 조선왕조실록 명종 09년 | R
제주 목사(濟州牧使) 남치근(南致勤)과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김빈(金贇)이 왜변(倭變)을 치계하였다. "... 25일 황당인(荒唐人)이 부서진 배의 판자를 타고 떠내려 오기에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보니 왜인 23명과 중국인 2명이 부서진 배의 판자를 타고 떠내려와 해안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63
1559 조선왕조실록 명종 14년 | R
한 백성이 적당을 고발한 일이 있었는데, 하루는 들에 나가 나무를 하다가 도적들에게 붙잡히어 적들이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산 위에 있다가 바라보고는 달려와서 적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을 고발한 것은 나이고 아버지가 아니니,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기를 바란다.’ 하였습니다. 적들이 곧 그 아비를 놓아주고 그 아들을 결박하여 촌가에 도착하여 밥을 짓게 하고는 둥그렇게 둘러앉아 배를 갈라 죽이고 갔다고 합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41005
1562 국조보감(國朝寶鑑) | R
해서의 포악한 도적 임꺽정(林巨正) 등이 주벌을 받았다. 임꺽정은 양주(楊州)의 백정인데, 성품이 교활하면서도 사납고 용맹스러웠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27266
1609 조선왕조실록 광해 01년 | R
용인(龍仁)에 거주하는 향화인(向化人) 박길상(朴吉祥) 등 10여 호의 남녀 합계 80여 명이 고을 5리 안에 있는 장터 큰 길가에 거주해 살아온 것이 이제까지 7, 8년입니다. 그곳은 크고 작은 행인들이 밤낮으로 오고가는 곳인데, 길상 등이 수하 16, 18명을 거느리고 밤에 산행(山行)을 한다고 칭하면서, 어떤 자는 말을 타고 어떤 자는 걸으며 혹 활과 화살을 들거나 혹 장검과 몽둥이를 들고, 무리를 지어 행인이나 짐을 쫓아가 약탈하였는데, ...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55
1686 조선왕조실록 숙종 12년 | R
영광(靈光)에 사는 향화인(向化人) 25명이 물에 빠져 죽고, 전주(全州)에서는 민가 여러 10호가 불에 타 사람 네 명이 타 죽었는데, 모두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58
1700 조선왕조실록 숙종 26년 | R
고창(高敞)의 유학(幼學) 유신우(柳新雨)가 상소하여, "... 이른바 향화인(向化人)이란 자들은 옛날 중국 사람으로서 표류하여 우리 땅에 이르러 이내 우리의 백성이 된 자입니다.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백성이 된 지가 몇백 년이 되었는지 모르는데, 늘 향화인(向化人)이라 일컫고는 어업(漁業)을 하는 자나 농사를 짓는 자 모두 신역(身役)이 없습니다. ..."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56
1717 조선왕조실록 숙종 43년 | R
이른바 향화인(向化人)은 본디 다른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조정(朝廷)에서 특별히 고휼(顧恤)하여 역사(役事)를 부과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충청도(忠淸道) 연해(沿海)의 고을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선척(船隻)이 있는 자들에게 예조(禮曹)에서 매년 사람을 보내어 어속(魚束)을 받아가지고 오고 있습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57
1740 성호사설 | R
발해(渤海)가 망하고 나서 그 백성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글안이 망했을 때도 그 백성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이것을 글안장(契丹場)이라 하므로 서쪽 사람들은 대체로 건장하고 힘쓰기를 좋아하여 옛날 풍속이 없어지지 않았다. 지금 해변의 여러 고을에는 왜인들로서 돌아가지 않고 거주하는 자들이 매우 많아 명칭을 향화(向化)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혼인도 하지 않고 따로 부락을 형성하여 그 수가 점점 많아졌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59
1740 성호사설 | R
삼포(三浦)의 왜적을 토벌한 후에도 그 종자가 아직도 많아 지금도 연해에 향화촌(向化村)이라고 이르는 마을이 이루 손꼽을 수 없으니 고려 때의 글안장(契丹場)과 같은 것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65
1804 계산기정 | R
의무려산 밖은 옛 흉노(凶奴)의 땅인데, 명 나라에서는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하였고 지금은 몽고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것이 하늘이 이적과 중화를 한계지어 준 것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76
위키백과: 형평사 운동 | R
형평사 운동(衡平社運動)이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을 말한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13#35874
execute:0.998 sec, load: sec [ refresh ] [ Twttr ] [ Fcbk ] [ Gplus ] [ Email to Silla ]
Qindex.info 2004,   Introduction | 소개 | 介绍 | 導入 | qindex.inf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