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s home > 삼한(三韓)시대 연대기 > 660년에서 676년 사이 |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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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3 삼국사기 신라본기 | R
당나라의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장군 유백영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칙명으로 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응원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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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이 달 …… 또 온 나라 백성들이 까닭없이 무기를 들고 길을 왔다갔다 했다. 國老가 “백제국이 땅을 잃을 징조인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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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5-26 삼국사기 신라본기 | R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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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6-18 삼국사기 신라본기 | R
남천정에 다다랐다. 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가 천 리에 이어져서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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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6-21 삼국사기 신라본기 | R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에 백제의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서 의자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과 흠춘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에 가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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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6-21_ 삼국사기 백제본기 | R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에 이르자, 신라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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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6-21_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 R
무열왕은 태자와 장군 유신·진주·천존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백 척에 군사들을 싣고 그들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가 장군 소정방을 만나니 정방이 태자에게 “나는 바닷길로 가고 태자는 육지길로 가서 7월 10일 백제의 왕도인 사비의 성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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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고려의 사신 을상 하취문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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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09 웅진구와 황산벌의 전투 | 7
0660-07-09 삼국사기 신라본기 | R    0660-07-09_ 구당서(舊唐書 945) | R    0660-07-09_ 신당서(新唐書 1060) | R    0660-07-09_ 신당서(新唐書 1060) | R    0660-07-09_ 삼국사기 백제본기 | R    0660-07-09_ 삼국사기 백제본기 | R    0660-07-09_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 R    
0660-07-10_ 구당서(舊唐書 945) | R
遇潮且上 連舳入江 定方於岸上擁陣 水陸齊進 飛楫鼓噪 直趣真都 去城二十許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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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0_ 삼국사기 백제본기 | R
我軍大敗王師乗潮舳艫銜尾進鼓而譟定方將歩騎直趍眞都城一舎止 당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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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0_ 삼국사기 백제본기 | R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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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0_ 삼국사기 신라본기 | R
삼군이 보고 분에 받쳐서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자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은 죽고, 좌평 충상과 상영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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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1_ 삼국사기 신라본기 | R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인 김문영을 군문에서 목을 베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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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1_ 삼국사기 신라본기 | R
백제의 왕자가 좌평 각가를 시켜서 당나라의 장군에게 글을 보내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애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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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2 삼국사기 신라본기 | R
12일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들이 의자의 도성을 에워싸기 위하여 소부리 벌판으로 나갔다. 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서 전진하지 않았으므로 유신이 그를 달래서 두 나라의 군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나란히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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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2_ 삼국사기 신라본기 | R
백제의 왕자가 또 상좌평을 시켜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정방이 거절하였고, 왕의 여러 아들이 몸소 좌평 여섯 명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그것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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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2_ 삼국사기 백제본기 | R
우리(백제)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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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3 삼국사기 신라본기 | R
13일에 의자가 좌우의 측근을 데리고 밤을 타서 도망하여 웅진성에 몸을 보전하고, 의자의 아들인 융이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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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3_ 삼국사기 백제본기 | R
의자왕은 마침내 태자 효(孝)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泰)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태(泰)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주기를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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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8 삼국사기 신라본기 | R
18일에 의자가 태자와 웅진 방령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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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8_ 삼국사기 백제본기 | R
이때 의자왕과 태자 효(孝)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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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2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의자의 항복 소식을 듣고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이르러 제감 천복을 당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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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구당서(舊唐書 945) | R
定方自城山濟海,至熊津江口,賊屯兵據江。定方升東岸,乘山而陣,與之大戰,揚帆蓋海,相續而至。賊師敗績,死者數千人,自餘奔散。遇潮且上,連舳入江,定方於岸上擁陣,水陸齊進,飛楫鼓噪,直趣真都。去城二十許裏,賊傾國來拒,大戰破之,殺虜萬餘人,追奔入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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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신당서(新唐書 1060) | R
自城山濟海至熊津口,賊瀕江屯兵,定方出左涯,乘山而陣,與之戰,賊敗,死者數千。王師乘潮而上,舳艫銜尾進,鼓而噪,定方將步騎夾引,直趨真都城。賊傾國來,酣戰,破之,殺虜萬人,乘勝入其郛,王義慈及太子隆北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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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신당서(新唐書 1060) | R
自城山濟海。百濟守熊津口,定方縱擊,虜大敗。王師乘潮帆以進,趨真都城一舍止。虜悉衆拒,復破之,斬首萬餘級,拔其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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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성상(聖上)께서는 선왕(先王)의 뜻이 끝나지 않았음을 유감으로 여기시고 지난날에 남겨둔 실마리를 풀고자 배를 띄우고 장수에게 명령하여 수군을 크게 일으키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저를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대군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동서가 서로 화합하고 수군과 육군이 모두 나아갔습니다. 수군이 겨우 백강 어구에 들어섰을 때 육군은 이미 큰 적을 깨뜨려서 두 부대가 같이 왕도에 이르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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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 R
호암으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소산 아래에 이르러, 한 괴석이 강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돌 위에는 용(龍)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강에 임하여 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홀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흰 말로 미끼를 만들어 용 한 마리를 낚으니, 잠깐 사이에 날이 개어 드디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강을 백마강이라 이르고, 바위는 조룡대라고 일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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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어떤 책에는 ‘660년 7월에 이르러 백제가 사자를 보내, 당과 신라가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여 이미 의자왕과 왕비, 태자를 포로로 하여 갔다고 아뢰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가는 병사들을 서북 경계에 진을 치게 하였다. 성책을 수리하고 산천을 나누어 막을 징조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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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논하여 말하다 - 김부식 | R
당나라의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한을 풀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 하면서도 안으로는 이를 어겨 대국에 죄를 졌으니, 그들이 패망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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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당(唐)-신라와 백제의 전쟁 과정 | R
사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해본 당(唐)-신라와 백제의 전쟁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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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의자왕은 왜 망했을까? | R
의자왕의 실패는 잘못된 외교노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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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8-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의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에 불을 질러서 없앴기 때문에 온 성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이고,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서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고, 백제와 더불어서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지를 찢어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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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8-02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의 나머지 적병이 남잠성과 정현성성을 차지하고 버텼다. 또 좌평 정무가 무리를 모아서 두시원악에 진을 치고 당(唐)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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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8-26 임존성(任存城) 전투 | 5
0660-08-2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660-08-26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0660-08-26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1432 세종실록 지리지 | R    네이버 지도 | R    
0660-09-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낭장 유인원이 군사 1만 명으로 사비성에 남아서 지켰는데, 왕자 인태가 사찬 일원과 급찬 길나와 함께 군사 7천 명으로써 보좌하였다. 정방은 백제의 왕 및 왕족과 신료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唐)으로 돌아갔다. 김인문과 사찬 유돈 , 대나마 중지 등이 함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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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9-03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소정방이 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연(演) 및 대신과 장사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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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9-03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백 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등 5개의 도독부를 두어 각각 주·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자사·현령을 삼아 관리하게 하고, 낭장 유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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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9-2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의 남은 적병이 사비성에 들어와서 항복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남아서 지키던 인원이 당(唐)과 신라 사람들을 내어 이를 쳐서 쫓았다. 적병이 물러가서 사비의 남쪽 산마루에 올라 네댓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진을 치고 모여서 틈을 엿보아가며 성읍을 노략질하였는데, 백제 사람들 중에서 배반하여 부응한 것이 20여 성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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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9-23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唐)의 황제가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보내서 웅진 도독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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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9-2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삼년산성에 이르러서 조서를 전달하였는데,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칙명을 전한 후에 문도가 당(唐) 황제의 예물을 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죽었으므로 따라 온 사람이 대신하여 일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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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9-28_ 신당서(新唐書 1060) | R
[당나라가] 문도가 바다를 건너 가서 죽으니, 유인궤로 대신케 하였다. 삼국사기(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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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0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의 좌평 귀실복신이 좌평 귀지 등을 보냈는데, 와서 당(唐)의 포로 100여 명을 바쳤으니, 지금의 미농국 불파·편현 2군의 당인(唐人)들이다. 또 군대를 빌고 구원을 청했다. 조를 내려 “장군들에게 나누어 명하여 여러 길로 함께 나아가게 하라. 구름처럼 모이고 번개처럼 움직여 함께 사록에 모여, 악한 무리들을 베고 저 위급한 나라를 도우라. 마땅히 유사들은 함께 참여하여 예를 갖추어 출발시켜 보내라”고 운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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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0-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무열]왕이 태자와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이례성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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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0-1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가 이례성을] 빼앗아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움에 떨고 모두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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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0-3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가] 사비 남쪽의 산마루에 있던 군대를 공격하여 1천 5백 명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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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0_ 구당서 | R
백제의 중 도침과 옛 장군 복신이 무리를 거느리고 주유성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다 왕으로 세웠다. 서부와 북부가 모두 성을 뒤집고 여기에 호응하였다. (其西部北部並翻城應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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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0_ 신당서(新唐書 1060) | R
장(璋)의 조카 복신은 일찍이 군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때에 중 도침과 함께 주유성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왜(倭)에서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다 왕으로 삼으니, 서부가 다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인원을 포위하였다. (西部皆應引兵圍仁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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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1-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여 군주 필부가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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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1-0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장군 소정방 등이 사로잡은 백제왕 이하 태자 융(隆) 등 여러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국변성 이하 37명, 모두 50여 명을 조당에 바쳤다. 급히 인도하여 천자에게 나아가니, 천자는 은혜로운 칙명으로 보자마자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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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1-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무열]왕이 계탄을 건너서 왕흥사잠성을 공격하였는데, 7일에 이겨서 7백 명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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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1-2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 사람들도 모두 그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였는데, 좌평 충상과 상영, 달솔 자간은 일길찬의 관등을 주어 총관의 직을 맡겼고, 은솔 무수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대감의 직을 맡게 하였으며, 은솔 인수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제감의 직을 맡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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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1-2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고려의 사신 을상 하취문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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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천황이 난파관에 행차하였다. 천황은 복신이 청한 뜻에 따라 은혜롭게 축자에 행차하여 구원군을 보낼 것을 생각하고, 처음 이곳에 와서 여러 군기(軍器)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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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_ 삼국유사 卷 第一 태종춘추공 | R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이르기를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는 강물과 만난다. 서로 전하여 내려오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일컬어 말하기를 ‘차라리 자진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여 서로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속칭 타사암(墮死岩)이라 한다.”라고 했으나, 이것은 속설이 와전된 것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35852
0660_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이 해 백제를 위해 장차 신라를 정벌하려고 준하국에 배를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다 만든 후 속마교에 끌어왔을 때, 그 밤중에 까닭없이 배의 머리와 꼬리가 흔들렸다. 뭇사람들이 마침내 패할 것을 알았다. 과야국에서 “파리떼가 서쪽으로 향해 거판을 날라서 지나갔는데, 크기가 10아름쯤이고 높이는 하늘까지 닿았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군이 패배할 징조임을 알았다. 동요가 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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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1-06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어선이 서쪽을 정벌하려고 비로소 바닷길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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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1-08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어선이 대백해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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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1-1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어선이 이예 숙전진의 석탕행궁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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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의 남은 적병들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으로 삼고, 잡찬 문왕, 대아찬 양도, 아찬 충상 등으로 보좌케 하였으며,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으로 삼고, 아찬 진왕으로 보좌케 하였다. 아찬 의복을 하주 장군으로, 무훌과 욱천을 남천 대감으로, 문품을 서당장군으로, 의광을 낭당장군으로 삼아 구원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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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인궤가 군사를 엄하게 통솔하고 이동하면서 싸우고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워 그들을 방어하였다. 인궤가 신라 군사들과 합세하여 공격하니, 우리 군사들이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들어와 강을 저지선으로 삼으니,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복신 등이 이에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와서 임존성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라 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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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3-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도중에 이르러서 품일이 휘하의 군사를 나누어 먼저 가서 두량윤성 남쪽에서 군영을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백제의 사람들이 진영이 정돈되지 않았음을 보고 갑자기 나와서 생각지도 않게 쳤는데, 우리 군사는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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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3-1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대군이 고사비성의 밖에 와서 주둔하면서 두량윤성으로 나아가 공격하였으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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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3-2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어선이 돌아와 나대진에 이르렀다. 반뢰행궁에 머물렀다. 천황이 이곳의 이름을 바꾸어 장진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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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의 복신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그 왕자 규해를 맞아가기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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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4-1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군사를 돌이켰는데, 대당과 서당이 먼저 가고 하주의 군사는 맨 뒤에 가게 되었다. 빈골양에 이르러 백제의 군사를 만나 서로 싸웠지만 패하여 물러났다. 상주와 낭당은 각산에서 적을 만났으나 진격하여 이기고, 드디어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서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왕은 군대가 패배하였음을 듣고 크게 놀라서 장군 금순 · 진흠 · 천존· 죽지 를 보내서 군사를 증원하여 구원케 하였으나 가시혜진에 이르러서 군대가 물러나 가소천에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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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5-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이 말갈의 장군 생해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술천성을 공격해 왔다.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으로 옮겨가서 공격하는데, 포차를 벌여놓고 돌을 날리자, 그것에 맞는 성가퀴나 건물은 그대로 부서졌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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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5-2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661년 정월 25일에 돌아와 월주에 도착했다. 4월 1일에 월주로부터 길을 떠나 동쪽으로 돌아왔다. 7일에 행렬이 정안산 남쪽에 도착했다. 8일 닭이 울 무렵에 서남풍을 타고 대해로 배를 몰았다. 바다에서 길을 잃어 표류하여 큰 고통을 겪었다. 8박 9일만에 겨우 탐라 섬에 도착했을 때 바로 섬사람 왕자 아파기 등 9명을 불러 위로하고, 함께 객선에 태워 천황의 조정에 바치게 했다. 5월 23일에 조창의 조정에 바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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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열이라 하고, 영경사의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 묘호를 올려서 태종이라고 하였다. 고종이 죽음의 소식을 듣고 낙성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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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문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으로, 태종왕의 맏아들이다. 태종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평정할 때 법민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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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던 인문과 유돈 등이 돌아와 왕에게 “황제께서 이미 소정방을 보내 수군과 육군 35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왕께 군사를 일으켜 서로 도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라고 알렸다. “비록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지만 황제의 칙명을 어기기는 어렵습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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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나라 고종황제가 장군 소정방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케 하였다.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고 있던 김인문은 명을 받고 돌아와 출병 기일을 알리고 아울러 출병하여 함께 정벌해야 함을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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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이 달 蘇將軍이 突厥 왕자 契苾加力 등과 수·륙 두 길로 高麗의 城 아래에 이르렀다.註 003 皇太子가 長津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점차 바다 밖 軍政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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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대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에 이르러 머물렀다. 때에 사자가 와서 “백제의 남은 적들이 옹산성에 머물면서 길을 막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알렸다. 대왕이 먼저 사신을 보내 타일렀으나 복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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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문무대왕은 유신·인문·문훈 등을 거느리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로 향하다가 남천주에 행차하게 되었다.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은 군사를 거느리고 사비에서 배를 띄워 혜포에 이르러 배에서 내렸으므로 또한 남천주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때 해당 일을 맡은 관리가 “앞길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옹산성에 주둔하며 길을 막고 있으니 곧바로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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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8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전장군 대화하 아담비라부련, 소화하 하변백지신 등과 후장군 대화하 아배인전비라부신, 대산상 물부련웅, 대산상 수군대석 등으로 하여금 백제를 구원하게 했다. 그리고 무기와 5곡을 보냈다. 어떤 책에는 이 끝부분에 이어서 “따로 대산하 협전련국빈랑, 소산하 진조전래진으로 하여금 백제를 지키게 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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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9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황태자가 장진관에서 직관을 백제 왕자 풍장에게 주고, 또 다신장부의 누이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대산하 협전련빈랑, 소산하 진조전래진을 보내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본국에 호위하여 보내 주었다. 이에 풍장이 나라에 들어갈 때 복신이 맞이하러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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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9-1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대왕이 웅현정에 나아가서 여러 총관과 대감들을 모아 놓고 몸소 가서 서약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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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9-2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군사들이 나아가 옹산성을 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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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9-2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유신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성을 에워싸고는 사람을 시켜 성 아래에 가까이 가게 하여 적장에게 이야기하도록 하였다. “너희 나라는 공손하지 않아 큰 나라의 토벌을 받은 것이니 명을 따르는 자는 상을 내리고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일 것이오. 지금 너희들이 홀로 고립된 성을 지켜 무엇을 하고자 함이더냐? 마침내 반드시 패멸할 것이니 차라리 나와서 항복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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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9-2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적들이 큰 목소리로 “비록 작은 성이지만 무기와 식량이 모두 충분하고 군사들이 의롭고 용맹하니 차라리 싸우다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오.”라고 외쳤다. 유신이 웃으며 “궁지에 몰린 새와 곤경에 처한 짐승은 오히려 스스로를 구할 줄 안다고 하였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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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9-2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이르러 먼저 큰 목책을 불태우고 수천 명을 잡아 목베어 죽여 마침내 항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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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9-2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이에 깃발을 휘날리고 북을 두드리며 그들을 공격하였다. 대왕이 높은 곳에 올라 싸우는 군사들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격려하니 군사들은 모두 떨치고 나아가 창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9월 27일 성이 함락되자 적장을 붙잡아 죽이고 그 백성들은 풀어주었다. 공을 논의하여 장수와 병졸들에게 상을 주었고 유인원 또한 비단을 나누어주되 차등있게 하였다. 이에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을 배불리 먹여 가서 당나라 군사와 합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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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9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상주 총관 품일이 일모산군 태수 대당과 사시산군 태수 철천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우술성을 공격하여 1천명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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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10-2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대왕이 당나라 황제의 사신이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서울로 돌아왔다. 당 나라 사신이 조문하여 위로하였고, 아울러 칙명으로 선왕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여러 채색의 비단 5백 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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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10-2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유신 등이 군사를 쉬게 하고는 다음 명령을 기다렸는데, 함자도 총관인 유덕민이 와서 ‘평양으로 군사의 양식을 보내라.’는 황제의 뜻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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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1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무술 천황이 죽었으므로, 비도의 천원에 관을 안치했다. ……일본세기에 “11월에 복신이 사로잡은 당나라 사람 속수언 등이 축자에 이르렀다”고 했다. 어떤 책에는 “辛酉年에 백제의 좌평 복신이 바친 포로 106명을 근강국 간전에 살게 하였다”고 했다. 庚申年에 이미 복신이 당(唐)의 포로를 바쳤다고 했으므로, 지금은 주로 두니 결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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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12_ 삼국사기 신라본기 | R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먼저 웅진에 양식을 나르자니 황제의 뜻을 어길까 두렵고, 만약 평양으로 수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늙고 약한 자를 뽑아 보내 웅진으로 양식을 나르게 하고 건장하고 날랜 군사들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웅진에 양식을 수송하러 간 사람들은 가는 길에 눈을 만나 사람과 말들이 모두 죽어 1백 명 중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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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나라 사신이 객관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왕을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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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유신 인문 양도 등 아홉 장군에게 명령하여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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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1-1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풍수촌에서 묵었다. 물이 얼어 미끄럽고 길이 험하여 수레가 나아갈 수 없었는데, 모두 소와 말에 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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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1-2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칠중하를 건너 산양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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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1-2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귀당 제감 성천과 군사 술천 등이 이현에서 적의 군사를 만나 공격하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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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2-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유신 등이 장새에 이르렀는데, 평양에서 3만 6천 보되는 곳이다. 먼저 보기감 열기 등 15인을 당나라의 군영으로 보냈다. 이 날에 눈보라가 치고 춥고 얼어서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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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2-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양오에 이르렀다. 유신이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 등을 보내 군량을 가져다 주었고, 정방에게는 은 5천 7백 푼, 가는 실로 짠 베 30필, 두발 30량, 우황 19량을 주었다. 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 전투를 그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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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2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유신 등이 당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을 건넜다.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오자 군사를 돌려 맞싸웠는데,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소형 아달혜 등을 사로잡았으며 병기 1만여 점을 획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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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2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 손발이 얼고 상해서 길에서 죽은 사람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행렬이 호로하(瓠瀘河)에 이르자 고구려 군사와 말이 막 뒤를 쫓아와서 강 언덕에 군영을 나란히 쳤습니다. 신라 군사들은 피로하고 굶주린 날이 오래되었지만 적이 멀리까지 쫓아올까 두려워서 적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싸웠는데, 선봉이 잠깐 싸우자 적의 무리가 무너져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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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2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탐라국의 임금인 좌평 도동음률이 항복해 왔다. 탐라는 무덕 이래로 백제에 속했기 때문에 좌평으로써 관직의 호칭을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복하여 신라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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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이 달 당인과 신라인이 고려를 정벌했다. 고려가 우리나라에 구원을 청했으므로 장군을 보내 소유성(疏留城)에 웅거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당인들이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으므로, 신라가 서쪽 진지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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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5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대장군 대금중 아담비라부련 등이 수군 170척을 거느리고 풍장 등을 백제국에 보내주었다. 칙명을 내려 “풍장 등으로 하여금 그 왕위를 잇게 한다. 또 복신에게 금책을 주어 그 등을 두드려 위로하고 작록을 상으로 준다”고 하였다. 이 때에 풍장 등은 복신과 더불어 머리를 조아리고 칙명을 받았으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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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6-28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가 달솔 만지 등을 보내 조와 물건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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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이찬 김인문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토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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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7 구당서 | R
인원·인궤 등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이끌고,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무리들을 크게 무찔러 지라성 및 윤성·대산·사정 등의 책을 빼앗고, 많은 무리를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이어서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에 바짝 닿아 있는 데다 높고 험하며, 또 요충의 위치라 하여 군사를 증원시켜 지켰다. 인궤는 신라의 군사를 이끌고 ... 마침내 신라의 군량운송로를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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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인원, 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를 대파하고, 지라성 및 윤성, 대산, 사정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는데,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군사들을 나누어 그곳에 계속하여 주둔시키고 수비하게 하였다. 마침내 신라에서 오는 군량 수송로가 소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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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7 신당서(新唐書 1060) | R
인원 등이 웅진에서 백제군을 무찌르고 지라성을 탈취한 다음, 밤에 진현으로 육박하여 날이 밝을 무렵에 안으로 쳐들어 가서 머리 8백급을 베니, 신라의 군량수송로가 비로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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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의 남은 적들이 내사지성에 진을 치고 모여 나쁜 짓을 하였으므로, 흠순 등 열 아홉 장군을 보내 쳐서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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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12-0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왕 풍장, 그 신하 좌평 복신 등은 협전련·박시전래진과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 끝내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避城)에 도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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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2-12_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이 해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무기를 수리하고 선박을 갖추었으며, 군량을 비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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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거열성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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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또한 거물성과 사평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고, 덕안성을 공격하여 1천 7십 명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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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2-02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가 달솔 김수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신라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주를 불태우고, 아울러 안덕 등의 중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피성이 적과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 주유에 돌아와 살았으니, 전래진이 헤아린 바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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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2_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좌평 복신이 당(唐)의 포로 속수언 등을 올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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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전장군 상모야군치자·간인련대개, 중장군 거세신전신택어·삼륜군근마려, 후장군 아재인전신비라부·대택신겸병을 보내 2만 7천 인을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491
0663-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나라가 우리 나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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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5-0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견상군이 달려가 군사에 관한 일을 고려에 알리고 돌아왔다. 석성에서 규해를 보았는데 규해가 복신의 죄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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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6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전장군 상모야군치자 등이 신라의 사비기노강 2개의 성을 빼앗았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머리를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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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6_ 구당서(舊唐書 945) | R
이때 복신은 벌써 병권을 모두 장악하여 부여풍과 점점 서로 시기하여 사이가 나빠지고 있었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굴방에 누워서 부여풍이 문병오기를 기다려 덮쳐 죽일 것을 꾀하였다. 부여풍은 알아차리고는 그의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덮쳐 죽이고, 또 고려와 왜국에 사자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여 관군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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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6_ 신당서(新唐書 1060) | R
복신은 국권을 장악하고 풍(豊)을 죽일 것을 꾀하였다. 풍(豊)은 친히 심복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베고, 고려 및 왜(倭)와 연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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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7-1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신라) 대왕은 친히 유신·인문·천존·죽지 등의 장군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서 웅진주에 머무르며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과 군사를 합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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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8-1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신라는 백제왕이 자기의 훌륭한 장수를 목베었으므로 곧장 백제에 들어가 먼저 주유(州柔)를 빼앗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백제는 적이 계획한 바를 알고 여러 장수들에게 “지금 듣건대 일본국에서 구원하러 온 장수인 노원군신이 씩씩한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로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한다. 여러 장군들은 미리 도모하기를 바란다. 나는 직접 가 백촌(白村)에서 기다려 연회를 베풀고자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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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8-1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적의 장수가 주유(州柔)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당(唐)의 군장이 전선 170척을 거느리고 백촌강(白村江)에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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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8-17_ 구당서(舊唐書 945) | R
於是仁師·仁願及新羅王金法敏帥陸軍進, 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率水軍及糧船, 自熊津江往白江以會陸軍, 同趨周留城. 이에 인사·인원 및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이끌고 진군하고, 유인궤 및 별수 두상·부여융은 수군 및 군량선을 이끌고 웅진강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육군과 회합하여 함께 주유성(周留城)으로 진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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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8-17_ 신당서(新唐書 1060) | R
仁願已得齊兵, 士氣振, 乃與新羅王金法敏率步騎, 而遣劉仁軌率舟師, 自熊津江偕進, 趨周留城. 인원은 제병을 증원받고 나서 사기가 진작되었다. 이에 신라왕 김법민과 함께 보병·기병을 이끌고, 유인궤로 하여금 수군을 거느리고 가게 하여 웅진강에서 동시에 진군하여 주유성(周留城)으로 육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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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8-17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총관 손인사가 군사를 이끌고 부성을 구원하러 왔는데, 신라의 병사와 말도 또한 나아가 함께 정벌하여 가서 주유성(周留城) 아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왜(倭)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 와서 왜의 배 1천 척이 백강(白江)에 정박해 있고 백제의 정예기병이 언덕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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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8-2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일본의 수군 중 처음 도착한 배들이 당(唐)의 수군과 만나 싸웠는데, 일본이 불리하여 물러났다. 당(唐)은 굳게 진을 치고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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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8-28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다시 일본의 어지러운 대오와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唐)의 군대를 쳤다. 당(唐)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관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고 배의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박시전래진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했다. 이 때 백제왕 풍장이 여러 사람과 배를 타고 고려로 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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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8-28_ 구당서(舊唐書 945) | R
인궤가 백강어귀(白江之口)에서 부여풍의 무리를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척을 불사르니, 적들은 크게 붕괴되고, 부여풍은 몸만 빠져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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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8-28_ 신당서(新唐書 1060) | R
풍(豊)의 무리는 백강구(白江口)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을 사면에서 공격하여 다 이기고, 4백 척의 배를 불사르니, 풍(豊)은 도망쳐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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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9-07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백제의 주유성이 비로소 당(唐)에 항복했다. 이 때 나라 사람들이 서로 “주유가 항복하였으니, 일이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끊어지게 되었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에 어떻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다만 호례성에 가서 일본의 군장들과 만나 서로 현 상황에서 필요한 것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처음부터 침복기성에 있던 처자들로 하여금 나라를 떠나려는 마음을 알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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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9-07(<08-13) 삼국사기(1145) | R
(신라) 두솔성에 이르니 백제인들이 왜인들과 함께 나와 진을 쳤다. 우리 군사들이 힘껏 싸워 그들을 크게 패배시켰고, 백제와 왜인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대왕이 왜인들에게 말하였다. “생각컨대 우리와 너희 나라는 바다로 가로막혀 영역이 나누어져 일찍이 서로 얽힌 것이 없었고 다만 우호를 맺고 화목함을 꾀하여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서로 왕래하곤 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늘 백제와 함께 악한 짓을 같이 하여 우리 나라를 도모하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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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9-07_ 구당서(舊唐書 945) | R
위왕자 부여충승·충지 등이 사녀 및 왜(倭)의 무리를 이끌고 함께 항복하니, 백제의 모든 성이 다시 귀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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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9-07_ 신당서(新唐書 1060) | R
위왕자 부여충승과 충지가 남은 군사와 왜인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니, 다른 여러 성들이 모두 따라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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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9-11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모호로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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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9-13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호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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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9-2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 R
일본의 수군 및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와 국민들이 호례성에 이르렀다. 다음날 배를 띄워 비로소 일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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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10-2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그들(임존성의 지수신)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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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11-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임존성에서) 군사를 돌렸는데, 설리정에 이르러서 전투의 공을 따져 상을 차이나게 주고 크게 죄수를 풀어주었다. 의복을 만들어 남아 있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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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11-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인궤가 그들(흑치상지, 사탁상여 등)에게 진심을 보이면서, 그들로 하여금 임존성을 빼앗아 그들 자신의 성의를 나타내는 기회를 갖게 하려고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다. 그들 두 사람이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잔당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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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_ 백제의 2차 패망 | R
660년 7월 당(唐)과 신라는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켰지만 이것으로 백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방 곳곳에는 저항세력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 저항은 663년에 왜(倭)의 원병과 당(唐)이 벌인 백강구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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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4-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각간 김인문 이찬 천존이 당나라 칙사 유인원, 백제 부여륭 등이 웅진에서 함께 맹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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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4-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사비산성에 머물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웅진 도독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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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4-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장군 인문 품일 군관 문영 등에게 일선주와 한산주 두 주의 군사와 함께 부성의 병사와 말을 이끌고 고구려의 돌사성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성을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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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5-08 구당서(舊唐書 945) | R
융(隆)이 웅진성에 이르러 신라왕 법민과 백마를 잡아 놓고 맹약하였다. 먼저 천신·지기 및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나서 피를 마셨다. ... 전백제태자 사가정경 부여융을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아서 제사를 받들고 그의 고장을 보존하게 하였다. ... 삽혈을 마치고 나서 단하 깨끗한 곳에 폐백을 묻고, 맹서문은 신라의 종묘에 간직하였다. 인원·인궤 등이 돌아오자, 융(隆)은 신라를 두려워하여 곧 경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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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5-08 신당서(新唐書 1060) | R
[부여융이] 신라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백마를 잡아 놓고 맹약하였다. 맹사는 인궤가 작성하였다. ... 전태자 융(隆)을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이다. ... 인원 등이 돌아 오자, 융(隆)은 유민들이 분산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역시 경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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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5-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칙사 유인원, 웅진 도독 부여륭과 함께 웅진의 취리산에서 맹세를 맺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35741
066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연개소문은 666년에 죽었다. (천남생 묘지명에 의거하여 665년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36813
0666-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천존의 아들 한림과 유신의 아들 삼광은 모두 나마의 관등으로 당 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35742
0666-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없애고자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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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6-1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나라는 이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사열소상백 안륙 사람인 학처준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의 높은 신하인 연정토가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연정토와 부하 24명에게 의복과 식량, 집 등을 주고 서울 및 주(州), 부(府)에 두었으며, 여덟 개의 성은 상태가 완전하였으므로 모두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546
0667-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나라 황제가 칙명을 내려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싸움에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곧 지경을 파진찬 개원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또한 황제가 칙명을 내려 대아찬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삼았는데, 왕은 왕궁의 뜰에서 칙명을 받도록 명령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547
0667-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종이 유인원(劉仁願)과 김인태(金仁泰)에게 비열도(卑列道)를 따르도록 하고, 또한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과 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서 평양에서 모이도록 명령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616
0667-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 등 30명의 장군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617
0667-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하여 영공(英公)을 기다렸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618
0667-10-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영공(英公)이 평양성(平壤城)의 북쪽으로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동혜(尒同兮) 촌주(村主) 대나마(大奈麻) 강심(江深)을 뽑아 보내면서 거란(契丹) 기병(騎兵)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阿珍含城)을 거쳐 한성(漢城)에 이르러 편지를 전하여 군사 동원 시기를 독려하니 대왕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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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7-11-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장새(獐塞)에 이르렀는데, 영공(英公)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왕의 군사도 또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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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아마(阿麻)가 와서 항복하였다. 원기(元器)와 함께 정토(淨土)를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게 하였다. 정토는 그곳에 머물러 돌아오지 않았고 원기만 돌아왔다. 그 뒤로는 여인을 바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칙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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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이에 파진찬(波珍湌) 용문(龍文)을 총관(摠管)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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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1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요동도안무부대사 요동행군부대총관 겸 웅진도안무대사 행군총관 우상 검교 태자좌중호 상주국 낙성현개국남 유인궤가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숙위인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에 도착하였다. 왕이 각간 김인문에게 성대한 예식으로 인도하여 맞이하게 하였다. 이에 우상은 약속을 마치고는 천강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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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2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삼았고, 각간 김인문과 흠순 천존 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 개원 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삼았으며, 이찬 진순과 죽지를 경정 총관으로,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삼았다. 이찬 인태를 비열도 총관으로,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 아찬 용장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삼았고, 잡찬 숭신,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를 비열성주 행군총관으로 삼았으며, 파진찬 선광, 아찬 장순, 순장을 하서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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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2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부성(府城)의 유인원(劉仁願)이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 고구려의 대곡(大谷)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귀순하여 항복하였음을 알렸다. 왕은 일길찬(一吉湌) 진공(眞功)을 보내 축하하였고, 인문(仁問) 천존(天存) 도유(都儒) 등은 일선주(一善州) 등 일곱 곳의 군과 한성주(漢城州)의 군사와 말을 이끌고 당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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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2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서울을 출발하여 당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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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2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여러 도(道)의 총관들이 행군을 시작하였다. 왕은 유신이 풍병을 앓았으므로 서울에 남도록 하였다. 인문 등은 영공을 만나서 영류산(서경 북쪽 20리 되는 곳) 아래에 진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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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7-1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한성주에 이르러서 여러 총관들에게 “가서 당나라 군대와 회합하라.”고 명령하였다. 문영 등이 사천 들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맞서 싸워 크게 무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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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9-2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군과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갔고 인태 의복 수세 천광 흥원 등도 좇아 갔다.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을 출발하여 평양에 이르러 힐차양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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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10-2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유신에게 태대각간을, 인문에게 대각간의 관등을 내렸다. 그 외에 이찬과 장군 등을 모두 각간으로 삼았고, 소판 이하에게는 모두 한 등급씩 더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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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11-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포로로 잡힌 고구려 사람 7천 명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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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9-0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급찬 기진산 등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가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 또한 각간 흠순과 파진찬 양도를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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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였지만 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감옥에서 죽었다.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남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여 황제가 책망하고 성내면서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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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사찬 설오유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각각 정예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에 이르렀는데, △△△ 말갈 군사들이 먼저 개돈양에 이르러서 기다리고 있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608
0670-04-04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맞서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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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구려 수임성 사람인 대형 모잠이 남은 백성들을 모아서 궁모성으로부터 패강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에 이르러서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인 안승을 보고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소형 다식 등을 보내어 슬피 아뢰었다.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에 머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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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돌이켜 뒤집을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도독부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곧 사마 예군을 보내 우리를 엿보았다. 왕은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예군을 머물게 하고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 문충 중신 의관 천관 등이 63곳의 성을 쳐서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내지로 옮겼다. 천존과 죽지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군관과 문영 등은 12성을 빼앗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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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사찬 수미산을 보내어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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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1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한성주 총관 수세가 백제의 [6글자 결락]를 얻고 마침 일이 발각되어 대아찬 진주를 보내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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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군사를 내어 백제를 쳐들어가서 웅진 남쪽에서 싸웠는데, 당주 부과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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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말갈 군사가 와서 설구성을 포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장차 물러가려고 할 때 군사를 내어 쳐서 3백여 명의 목을 베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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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唐)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러 오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과 아찬 △△△△ 등을 보내 병사로 옹포를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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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장군 죽지 등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서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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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마침내 당(唐) 군사와 석성에서 싸워 5천 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의 장군 두 명과 당 나라의 과의 여섯 명을 포로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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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7-2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唐) 총관 설인귀가 임윤법사에게 편지를 맡겨 보냈다. "... 고장군의 중국인 기병과 이근행의 변방 군사, 오(吳) · 초(楚) 지방의 수군, 유주(幽州)·병주(幷州)의 사나운 군사가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배를 나란히 하고 내려가 험한 곳에 의지하여 요새를 쌓고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면 이는 왕에게는 가슴에 남는 병이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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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7-2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대왕이 편지에 답하여 말하였다. "선왕께서 중국에 들어가 태종문황제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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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7-2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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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10-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唐) 조운선 70여 척을 쳐서 낭장 겸이대후와 병사 1백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물에 빠져서 죽은 사람은 가히 셀 수가 없었다. 급찬 당천의 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의 관등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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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장수를 보내서 백제의 고성성(古省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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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백제의 가림성(加林城)을 쳤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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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唐)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이근행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한 번에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의 군영을 설치하고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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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이)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백수성(白水城)에서 5백 보 쯤 되는 곳까지 군사를 전진시켜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맞서 싸워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 등이 후퇴하자 추격하여 석문(石門)에 이르러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대아찬 효천, 사찬 의문, 산세, 아찬 능신, 두선, 일길찬 안나함, 양신 등이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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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8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는 4,360보(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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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지난번에 백제가 당 나라에 가서 하소연하여 군사를 요청해 우리를 쳤을 때, 일의 형세가 급하게 되어 황제에게 사실을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내어 그들을 쳤다. 이 때문에 당나라의 조정에 죄를 얻게 되었다. 마침내 급찬 원천과 나마 변산, 붙잡아 머물게 하였던 병선 낭장 겸이대후 , 내주 사마 왕예, 본열주 장사 왕익,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 증산 사마 법총, 그리고 군사 170명을 보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려 죄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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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3-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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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3-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唐) 군사가 말갈과 거란의 군사와 함께 와서 북쪽의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서 우리 군사가 이겨 2천여 명의 목을 베었고, 당(唐) 군사 중에서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 빠져 죽은 자는 가히 셀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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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3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일찍이 태종왕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국경을 지키는 병사를 없앴다가 이 때 이르러 다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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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4 신당서(新唐書 1060) | R
고려의 항거하는 무리들을 받아들여 백제 땅을 점령하여 지키게 하였다. 고종이 노하여 조서를 내려 관작을 삭탈하고, 그의 아우 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경사에서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좌진군대장군 이근행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가서 힘을 다하여 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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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4-0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에 살면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자, 당(唐)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인 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김인문이 당나라의 서울에 있었는데, 신라의 왕으로 세우고 귀국하게 하였다.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대장군 이근행이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와서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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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서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치고 사죄하였다. 황제는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은 오는 길에 되돌아갔는데 임해군공으로 고쳐서 봉하였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빼앗기에 마침내 고구려 남쪽 경계까지 주와 군으로 삼았다. 당군이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부대의 병사를 내보내 막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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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2 신당서(新唐書 1060) | R
인궤가 칠중성(七重城)에서 그들을 쳐부수고, 말갈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 지역을 공략하니, 목을 베고 또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조서를 내려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매초성(買肖城)에 주둔시키니, 세 번 싸워서 노(虜)가 모두 패배하였다. 법민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사죄를 하는데, 공물의 짐바리가 줄을 이었다. 인문 또한 돌아와 왕위를 내놓으므로, 조서를 내려 법민의 관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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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군이 와서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는데, 현령 거시지가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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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진주가 본국에서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풍훈을 길을 이끄는 사람으로 삼아 천성(泉城)을 쳐들어왔다. 우리 장군인 문훈 등이 맞서 싸워 이겼는데, 1천4백 명의 목을 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가자 전마 1천 필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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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9-2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매초성(買肖城)에 진을 쳤다.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도망가게 하고는 전마 30,380필을 얻었으며 남겨놓은 병기도 이처럼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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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9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사신을 보내 당(唐)에 들어가 토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448
0675-09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말갈이 아달성(阿達城)에 들어와 위협하고 노략질하자 성주 소나가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449
0675-09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군이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七重城)을 둘러쌓았지만 이기지 못하였고, 소수 유동이 죽임을 당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450
0675-09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말갈이 또한 적목성(赤木城)을 에워싸서 없애뜨렸다. 현령 탈기가 백성을 거느리고 막아 지키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451
0675-09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당(唐) 군사가 또한 석현성(石峴城)을 둘러싸고 쳐서 빼앗았는데,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452
0675-09_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또한 우리 군사가 당군과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싸움을 벌여 모두 이겼는데, 6천 4십 7명의 목을 베었고 말 2백 필을 얻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453
0675-11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는데 연이어 패배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을 벌여 이기고서 4천여 명을 목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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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02 구당서(舊唐書 945) | R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다. 移安東都護府於遼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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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678 신당서(新唐書 1060) | R
(부여융을) 대방군왕으로 승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무렵 신라가 강성하자, 융(隆)은 감히 구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려에 의탁하고 있다가 죽었다. 무후 때 또 그 손자 경(敬)으로 왕위를 승습케 하였으나, 이때 그 땅은 이미 신라·발해말갈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어,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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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7 구당서(舊唐書 945) | R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을 제수하여 본번에 돌아가 남은 무리들을 안집케 하였다. 이때 백제의 옛 땅이 황폐하여 점점 신라의 소유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융(隆)은 끝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채 죽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40636
0677-02 구당서(舊唐書 945) | R
공부상서 고장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으로 봉하고 안동부로 돌아가 고려의 무리를 안집하게 했다. 사농경 부여융을 웅진주도독 대방군왕으로 봉하고 백제의 무리를 안집하게 했다. 안동도호부가 신성으로 옮겨가자 거기에 통합하였다. 工部尚書高藏授遼東都督,封朝鮮郡王,遣歸安東府,安輯高麗餘眾;司農卿扶余隆熊津州都督,封帶方郡王,令往安輯百濟餘眾。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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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 부여융묘지명 | R
中國 河南省 洛陽. 公은 이름이 隆이고 字도 隆으로, 백제 辰朝人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636#1938
699 흑치상지묘지명 | R
中國 河南省 洛陽. 府君은 이름이 常之이고 字는 恒元으로 百濟人이다. 그 조상은 扶餘氏로부터 나왔는데 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氏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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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신라에 흡수되는 과정 | R
신라는 당(唐)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바로 이 지역을 차지한 게 아니었다. 왜(倭)의 원병을 물리치고 당(唐)의 침공마저 꺾은 뒤에야 이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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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은 물귀신 | R
백제와 고려 두 왕조는 모두 한 사람 때문에 패망의 늪으로 말려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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