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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2-06-16 고려사(高麗史 1451) | R
최우(崔瑀)가 왕을 협박하여 강화(江華)로 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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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12-14 고려사(高麗史 1451) | R
몽고 산길(散吉, 산지) 대왕과 보지관인(普只官人)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옛 화주(和州) 땅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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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12-14 고려사(高麗史 1451) | R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이 화주(和州) 이북 지방을 몽고에 넘겨주었다. 몽고가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摠管)으로, 탁청을 천호(千戶)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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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12-23 고려사(高麗史 1451) | R
달포성(達甫城) 사람들이 방호별감(防護別監) 정기(鄭琪) 등을 잡아서 몽고에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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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9-10-03 고려사(高麗史 1451) | R
을해 서북면병마사영의 기관 최탄·한신과 삼화현인 전 교위 이연령, 정원도호부 낭장 계문비, 연주인 현효철 등이 임연을 죽인다는 명분을 내걸고 용강현·함종현·삼화현의 사람들을 불러모아 함종현현령 최원을 살해하였고, 밤에 가도로 들어가서 분사어사 심원준과 감창사 박수혁, 경별초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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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9-10-28 고려사(高麗史 1451) | R
최탄이 서경유수 및 용주·영주·철주·선주·자주 등 5개 주의 수령을 죽이니, 서북지역 여러 고을의 관리가 모두 반적에게 살해되었다. 최탄이 몽고 사신 탈타아에게 거짓말로 말하기를, “고려는 온 나라가 장차 깊은 섬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여러 고을의 수령을 죽이고 원(元)에 들어가서 보고하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의주부사 김효거 등 22인을 붙잡아서 몽고에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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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02-07 고려사(高麗史 1451) | R
최탄이 몽고 군사 3천 명을 요청하여 서경에 주둔시키자, 몽고 황제가 최탄·이연령에게 금패를, 현효철·한신에게 은패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조서를 내려 〈서경을〉 직접 몽고에 속하게 하고, 동녕부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자비령을 〈왕고와의〉 국경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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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2-02 고려사(高麗史 1451) | R
"저 일본만은 성스러운 덕화를 입지 못했으니 조서를 휴대한 사신을 보내고 계속 군세를 과시해야 할 터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함과 군량의 확보가 필수적일 것입니다. 그 일을 저에게 맡기신다면 심력을 다해 미력이나마 상국의 군대를 도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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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3-04 고려사(高麗史 1451) | R
김방경이 힌두·홍다구와 함께 전라도 함선 160척과 수군과 육군 1만여 명을 지휘해 탐라에서 싸워 수많은 적군을 죽이거나 노획하니 적이 궤멸되었다. 김원윤 등 여섯 명을 참수하고 항복한 적군 1,300여 명을 배에 나누어 실어 육지로 옮겼으며 원래 탐라에 거주했던 자는 예전처럼 안거하게 했다. 적이 완전히 평정되자 장군 송보연 등을 시켜 그대로 머물러 지키게 한 후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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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03 원사(元史 1370) | R
三月己卯,詔以勸課農桑諭高麗國王王禃,仍命安撫高麗軍民總管洪茶丘提點農事。己醜,呂文煥隨司千戶陳炎謀叛,誅首惡二人,其隨司軍並其妻子皆令內徙。庚寅,敕鳳州經略使忻都、高麗軍民總管洪茶丘等將屯田軍及女直軍,並水軍,合萬五千人,戰船大小合九百艘,征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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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04 고려사(高麗史 1451) | R
"저희나라는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은 관계로 군인과 농민의 구분이 없으며 그 위에 생활마저 매우 피폐한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번 탐라정벌에 동원되었던 병졸과 뱃사공들이 이제 다시 배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으며, 이번 일본원정에 나설 병졸과 초공들도 전번 부역에 나왔던 일꾼들 가운데 뽑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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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06 고려사(高麗史 1451) | R
왕(원종)이 제상궁(堤上宮)에서 죽으니 15년간 왕위에 있었고 향년은 5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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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07 고려사(高麗史 1451) | R
김방경(金方慶)이 일본 정벌군의 선봉별초(先鋒別抄)를 거느리고 먼저 원정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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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10 고려사(高麗史 1451) | R
도독사 김방경으로 하여금 중군을 지휘하게 하고 박지량과 김흔을 지병마사로 임개를 부사로 김신을 좌군사로 위득유를 지병마사로 손세정을 부사로 임명했다. 또 김문비를 우군사로 나유와 박보를 지병마사로 반부를 부사로 임명해 삼익군이라 이름지었다. 이들은 원나라의 도원수 힌두와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유복형과 함께 몽고·한족 연합군 2만 5천, 아군 8천, 초공·바닷길 안내자·선원 6천 7백 명과 전함 9백여 척으로 일본 정벌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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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10 고려사(高麗史 1451) | R
이끼도(一岐島)에 이르러 천여 명을 죽이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왜인들이 달아나는데 쓰러진 시체가 삼대같이 즐비했다. 날이 저물어 공격을 늦추었는데 마침 밤에 들이닥친 폭풍우로 전함이 바위 언덕에 부딪쳐 많이 침몰했으며 김신은 익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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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11 고려사(高麗史 1451) | R
일본 원정군이 합포(合浦)로 귀환해 오자 왕이 동지추밀원사 장일을 보내 노고를 위로하게 했는데, 귀환하지 못하고 전사한 자가 무려 13,500여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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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08 고려사(高麗史 1451) | R
왕이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가 왕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호종한 신하들도 참석하도록 했다. 이에 앞서 왕이 박의를 시켜, “일본 정벌의 일은 제가 입조해 직접 지시를 받겠습니다.”라고 건의해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 힌두·홍다구·범문호가 모두 먼저 명령을 받은지라 ... 이에 왕은 전제조건으로 일곱 개 항목을 들어 수락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황제는, “건의한 사항들을 모두 받아들이노라.”고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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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08 원사(元史 1370) | R
고려왕 왕춘이 와서 조회하고 병사 3만을 더하여 일본을 정벌하려 한다고 하자 범문호·흔도·홍다구를 중서우승으로 삼고 이정·장발돌을 참지정사로 삼아 중서성의 일을 아울러 행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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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04 고려사(高麗史 1451) | R
힌두·홍다구·김방경·박구·김주정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일본을 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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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06 고려사(高麗史 1451) | R
범문호도 전함 3,500척으로 만군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오다가 태풍을 만나 만군이 모두 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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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07 고려사(高麗史 1451) | R
원수 김방경이 중랑장 박온을 시켜, “각 부대가 다자이후(太宰府)까지 진군해 여러 차례 교전하다가 아군과 적군이 다 퇴각해 있던 차에 만선 50척이 뒤미처 도착하므로 다시 성을 향해 진격 중입니다.”라는 보고를 올리고는 노획한 갑옷과 투구, 활과 화살, 안장 딸린 말 등의 물품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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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08 고려사(高麗史 1451) | R
별장 김홍주가 합포현으로부터 행궁에 와서 일본정벌에 나섰던 군사들이 패배한 사실과 원수들이 합포현으로 귀환한 것을 보고했다. 힌두·홍다구·범문호 등이 원나라로 돌아갔다. 일본 원정에 나섰던 군사 가운데 귀환하지 못한 자가 무려 십만 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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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 홍건의 난 | R
하북성에 본거를 둔 비밀종교결사 백련교회의 두령 한산동은 일찍부터 미륵불하생의 설을 가지고 포교활동을 하여 허베이·허난·안후이 등 각지에서 널리 신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때마침 1351년 대범람을 일으킨 황허강 수리를 위하여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를 징발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생긴 민심의 동요를 틈타서 '송(宋) 휘종 8세의 손자'라고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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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03 고려사(高麗史 1451) | R
이자춘이 입조하자 왕이 영접하는 자리에서, 완악한 백성들을 어루만지느라 고생이 많노라고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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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05 고려사(高麗史 1451) | R
대사도 기철, 태감 권겸, 경양부원군 노책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하고 그 일당들은 죄다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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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06 고려사(高麗史 1451) | R
왕이 지정(元 순제의 연호)의 사용을 중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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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07 고려사(高麗史 1451) | R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유인우(柳仁雨)가 쌍성(雙城)을 함락시키자 총관(摠管) 조소생(趙小生), 천호(千戶) 탁도경(卓都卿)이 도망쳐버리니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 및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함주(咸州) 이북은 고종(高宗) 무오년부터 원이 차지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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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 명(明) 건국 | R
홍건적에 속한 장수였던 가난한 농부 출신 주원장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장강유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여 1368년 명(明)을 건국하였다. 주원장는 건국하자마자 북벌을 개시하여 원(元) 순제는 북경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明)에 의해 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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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09 고려사(高麗史 1451) | R
우리나라 사람 김지수가 원(元)으로부터 돌아와서, “명(明) 수군 함선 1만여 척이 통주에 닻을 내리고 원(元) 수도를 공격하니 황제와 황후는 상도로 도망가고 황태자도 싸우다가 패하자 역시 상도로 도망갔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백관들에게 명(明)과 서로 사신을 주고 받을 방법을 의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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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11 고려사(高麗史 1451) | R
예의판서 장자온을 시켜 오왕(주원장을 말하는 듯)을 예방하게 하니 오왕이 예법에 따라 매우 후대하면서 6부와 어사대를 시켜 위로 잔치를 열어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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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11 고려사(高麗史 1451) | R
원(元)에서 이용감태경 만자한을 보내, “장수들로 하여금 명(明)에 점거당한 영토를 회복할 전략을 세우도록 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전달하게 하자 왕이 행성에서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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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9-04 고려사(高麗史 1451) | R
명(明) 황제가 부보랑 설사를 보내 ... 황제의 친서는 다음과 같았다. "대명황제가 고려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송(趙宋)이 정치를 그르쳐 하늘의 버림을 받게 되자 우리 한족(漢族)이 아닌 원(元)이 천명을 받아 백 년 넘게 중국의 주인 노릇을 해 왔다. ... 하늘이 이미 그 국왕의 덕을 살펴 왕으로 삼았으니 우린들 어찌 길이 그를 고려의 국왕으로 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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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9-05 고려사(高麗史 1451) | R
원(元) 연호인 지정을 쓰지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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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2 고려사(高麗史 1451) | R
설장수가 명나라 수도에서 돌아와 황제의 말을 전하였다. "철령(鐵嶺)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니 요동(遼東)에 귀속시키겠다. 그 나머지 개원(開元)·심양(瀋陽)·신주(信州) 등지의 군민(軍民)은 원래의 생업에 복귀시키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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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2 고려사(高麗史 1451) | R
우왕이 박의중을 보내어 청하였다. "철령 이북은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1258년에 몽골의 산길대왕·보지관인 등이 여진을 정복하자 본국의 정주인 탁청과 용진현인 조휘가 화주 이북 지방을 들어 항복하였습니다. 金의 요동 함주로(咸州路) 부근의 심주에 쌍성현(雙城縣)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본국의 함주(咸州) 근처 화주의 오래된 작은 성 2개와 혼동시켜 화주를 쌍성(雙城)이라 칭하고 조휘와 탁청을 각각 쌍성총관과 천호로 삼아 인민을 관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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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3 고려사(高麗史 1451) | R
명(明) 후군도독부에서 요동백호 왕득명을 보내 철령위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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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3 고려사(高麗史 1451) | R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가 보고하기를,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指揮) 2인을 보내 병사 천여 명을 데리고 강계(江界)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합니다. 황제가 먼저 본 위(衛)의 진무(鎭撫) 등의 관원을 설치하여 모두 요동(遼東)에 이르렀습니다.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참(站)을 두고 참마다 백호(百戶)를 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725#2350
1388-04 고려사(高麗史 1451) | R
당초 우왕이 최영과 둘이서만 의논해 요동 공격을 결정지어놓고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날 최영과 우리 태조를 불러, “과인이 요양을 공격하려고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해야 할 것이오.”라고 당부했다. ... 좌군과 우군을 합친 총 병력은 38,830명이었고, 사역하는 인원이 11,634명이었으며 동원된 말이 21,682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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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4 명사(明史 1739) | R
우왕의 표문에 황제가 답하였다. “고려가 예전에는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으면서 이제와서 철령이라 꾸며 말하니 거짓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뜻을 짐의 말로서 타일러 본분을 지키게 함으로써 쓸데없는 상쟁의 원인을 낳지 않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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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5 고려사(高麗史 1451) | R
“만일 명나라 영토를 침범함으로써 천자로부터 벌을 받는다면 즉각 나라와 백성들에게 참화가 닥칠 것이다. 내가 이치를 들어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노쇠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자세히 아뢰고 측근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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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6 고려사(高麗史 1451) | R
이성계가 마침내 암방사의 북쪽 고개로 올라가서 대라를 한 차례 불게 하자 모든 부대들이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최영을 내놓으라고 고함을 질렀다. ... 우왕이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자 최영이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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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6 고려사(高麗史 1451) | R
다시 홍무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명(明)의 복색제도를 습용하고 몽고 복장을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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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6 고려사(高麗史 1451) | R
원수들이 부대를 동원해 대궐을 지키면서 우왕더러 강화부로 갈 것을 요구했다. 우왕이 어쩔 수 없이 대궐을 나와 채찍을 잡고 안장에 올라, “오늘은 벌써 날이 저물었다.” 고 말하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릴 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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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6 고려사(高麗史 1451) | R
당시 명(明)에서는 우왕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고려 정벌에 나서기 위해 황제가 친히 종묘에서 점을 치려고 사흘 동안 재계를 하다가 회군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재계를 중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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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8 명사(明史 1739) | R
고려의 천호 진경이 내항하며 말하기를, “올해 4월, 우(禑)가 요동을 침범하기 위하여 도군상 최영과 이성계로 하여금 서경에 군대를 집결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성계는 진경으로 하여금 애주에 주둔하도록 했으나, 군량이 이어지지 않아 군대를 후퇴시키고 말았습니다. 왕이 노하여 성계의 아들을 죽이니, 성계는 군대를 돌려 왕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왕과 최영을 가두어 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725#40362
1388-10 명사(明史 1739) | R
우(禑)가 그의 아들 창(昌)에게 양위할 것을 청원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앞서 그 왕이 유인되었다고 들었다. 이것은 성계의 책략이 분명하니 잠시 기다리며 그들의 동정을 살피기로 하겠다.”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725#40363
1389 명사(明史 1739) | R
권국사 창(昌)이 상진하여 입조할 것을 청하였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 해에 성계는 창(昌)을 폐위시키고 정창국원군 요(瑤)를 즉위시켰다. 이듬해 정월에 사신을 보내와 이 사실을 통고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725#40364
1391-03 명사(明史 1739) | R
고려에 가서 말을 사오라는 조서를 내렸다. 8월에 권국사 요(瑤)가 사들인 말 1천 5백필을 올려 보내자, 황제는 말하기를, “삼한의 군신들이 정의에 반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 요즈음만 해도 두 번이나 되지만, 지금 왕위를 이은 왕요는 왕씨의 후손이니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725#40365
1391-12 명사(明史 1739) | R
요(瑤)가 그의 아들 석(奭)을 보내어 이듬해 정단을 조하하도록 하였는데, 석(奭)이 미처 돌아가기 전에 성계가 스스로 왕위에 올라 그 나라를 차지하고, 요(瑤)를 원주에 내쳐서 살게 하였다. 왕씨는 5대10국 때부터 수백년 동안 나라를 이어 왔는데 이 때에 이르러 끊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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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07 조선왕조실록 | R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이 드디어 문하 평리 정희계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의 시좌궁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하여 사기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725#40368
1392-09 명사(明史 1739) | R
고려의 지밀직사사 조반 등이 그 나라 도평의사의 주문을 가지고 왔는데, 이르기를, “신 등이 나라의 기로들과 상의하여 그(이성계)에게 국사를 맡아 주도록 다같이 추대했사오니, 오로지 성주의 윤허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유시케 하기를, “과연 천도에 순응하고 인심에 화합할 수 있으며, 변경을 침범하지 않고 사신이 왕래할 수 있다면, 이는 진실로 그대 나라의 복이니 내가 또 무엇을 책망하겠소.”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725#40367
1392-11 조선왕조실록 | R
예문관 학사 한상질을 보내어 중국 남경에 가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으로써 국호를 고치기를 청하게 하였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과 화령 등의 칭호로써 천총에 주달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2725#40359
1392-11 명사(明史 1739) | R
성계가 황태자의 훙거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위로의 표문을 올리고 아울러 국호를 고칠 것을 청원하므로, 황제는 이에 그 나라의 옛 칭호에 따라서 조선이라 부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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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06-01 조선왕조실록 | R
"1388년에 신우(우왕)와 최영 등이 군대를 함부로 일으켜 요동으로 향하고자 했으며, 1392년에 왕요(공양왕)와 정몽주 등이 신우의 부정한 뜻을 계승하여 장차 상국을 범하려 하므로, 신이 온 나라 신민들에게 효유하여, 오랑캐가 중화를 소란하게 할 수가 없으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할 수 없다고 말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역리와 순리를 알게 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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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 선조수정실록 | R
현소가 다시 말하기를, "옛날 고려가 원(元)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고자 하니, 이는 사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하였다. 그의 말이 점점 패려하여 성일이 다시 캐묻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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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 해동역사(海東繹史) | R
진서(韓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봉천부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을 헤아려 보면 봉황성 근방에 이른다. 홍무 21년에 이곳에 철령위를 설치하고서 고려의 북계(北界) 지역을 떼어 여기에 예속시키려고 하다가 그 뒤에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26년에 이르러서는 봉천부의 북쪽으로 철령위의 치소를 옮겼는데, 지금의 철령현이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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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5 복기대 | R
“대부분의 역사책에는 철령위 자리를 오늘날 함경도 원산만 일대로 설명하고 있는데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공격에 나선 이성계는 함경도가 아니라 중국 요동으로 향했다. 이 모순을 발견하고 중국 지리 역사서를 확인한 결과 철령위의 위치를 랴오닝 성 번시 시 부근으로 새로 설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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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林農安縣 | R
초기 개원로 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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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平路 | R
金置。初曰咸州路。金亮升咸州爲府。路因改焉。今奉天開原以北迄於吉林伊通境。治咸平府。卽今奉天開原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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开原市 | R
개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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懷遠府 | R
渤海国设置的府。 治所在今吉林省怀德县新集城,一说在黑龙江省同江县。在越喜靺鞨故地。下辖达州、富州(辖境约当今辽宁省铁岭市)、美州、越州、怀州、纪州、福州、邪州、芝州。辽国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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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溪市 | R
본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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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中교체기(3) - 원(元)과 명(明) 사이에서 | R
원(元)이 쇠약해지고 명(明)이 등장하자 왕고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왕씨왕조가 망하고 이씨왕조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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铁岭县 | R
铁岭县位于中国辽宁省东北部,是铁岭市下辖的一个县。 辽置银州,隶辽阳府。金为新兴县,隶咸平府。明移卫至此始称铁岭。清废卫建铁岭县,中华民国十八年(1929年)隶辽宁省。1956年隶铁岭专区,1970年隶铁岭地区,1984年隶铁岭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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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元路 | R
元置。屬遼陽省。滿洲源流考。開元本金上京境内地名。元兵至此遂定其地。而故上京一帶倶已殘毀。因改建開元路。非開元卽上京也。其初寄治黄龍府。(卽今吉林農安縣)後徙治咸平府。(在今奉天開原縣)明初以其地設衞。始改元爲原。亦非今開原縣即黄龍府也。又按元史。開元路即古肅愼、隋唐黑水靺鞨地。東瀕海。南界高麗。西北與契丹接壤。蓋全有今吉林境。元統志言。南鎭長白之山。北浸鯨州之海。則有今長白山至黑龍江東北瀕海之地。與開原衞所轄。廣狹亦逈不侔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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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城縣 | R
遼置。金廢。故治在今遼寧鐵嶺縣西六十里。⦿金爲上京會寧府之西南境。元爲廢地。明爲阿憐部。清嘉慶間置協領於雙城堡。管理駐京八旗移墾事宜。隸阿勒楚喀副都統。光緖間置雙城廳通判。宣統初升府。屬吉林省。民國改縣。舊屬吉林濱江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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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凰城 | R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큰 산성의 하나로, 오골성(烏骨城)이라고 불렸다.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중국 요녕성 단동시의 동북쪽 20여 km쯤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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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녕부 | R
1269년(원종 10년) 서북면 병마사의 기관(記官)인 최탄(崔坦)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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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통지(盛京通志) | R
철령현은 周와 秦 때 숙신씨 지역이며 漢과 晉 때에는 읍루국 지역이고 隋 때에는 월희말갈 지역이었다. 唐 때에는 발해 대씨가 월희말갈의 땅을 취하여 부주라고 고치고 회원부에 속하게 하였다. 金과 元 때에는 함평부였다. 明 때에는 철령위로 고쳤다. 옛날에는 철령성이 칠령위의 치소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에 있어서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1388년에 철령위를 그곳에 설치하였다가 1393년에 이곳으로 옮기고서는 그대로 철령위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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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의 일본침공 | R
일본침공은 왕고에게 득될 것이 없었다. 일본으로부터 복종을 받아내더라도 그 열매는 원(元) 왕조에게만 돌아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력과 물자를 부담하느라 왕과 백성들 모두 고통스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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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가계 | R
이안사 - 이행리 - 이춘 - 이자춘 -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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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령위 사건 | R
철령위를 설치하러 왔다가 압록강에서 저지당하자 인근의 성(城)에 임시로 머물렀는데 몇 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자 지금의 철령시로 옮겨갔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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