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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려사 : 세가

현종 원년(1010) 경술년

• 원년 봄 정월

을축일. 상원도량(上元道場)1)을 폐지하였다.

• 윤2월

갑자일. 연등회(燃燈會)2)를 다시 열었다.

• 여름 4월

계축일. 왕이 친히 태묘(大廟)3)에 제사를 지냈다.
기미일. 서숭(徐崧)4) 등을 급제시켰다.

• 5월

갑신일.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화주방어낭중(和州防禦郞中)5) 유종(柳宗)6)을 먼 섬으로 유배보냈다. 하공진이 과거 동여진(東女眞)7)을 치다가 패배한 일을 두고 유종이 한스럽게 생각하던 차에 마침 여진족 95명이 우리 조정에 입조하던 길에 화주관(和州館)8)에 당도하자 유종이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같이 유배를 당한 것이다. 여진이 거란에게 이 사정을 호소하자 거란 임금은 신하들에게, “고려의 강조(康兆)는 임금을 죽인 대역 죄인이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겠다.”고 선언했다.

• 가을 7월

초하루 무인일. 거란이 급사중(給事中) 양병(梁炳)과 대장군 나율윤(那律允)을 보내 전 왕이 죽은 정황에 대해 힐문했다.

• 8월

초하루 정미일.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진적(陳頔)과 직중대(直中臺)·상서우승(尙書右丞) 윤여(尹餘)를 거란으로 보냈다.

• 9월

○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김연보(金延保)를 거란으로 보내 가을 문안을 하게하고, 좌사낭중 왕좌섬(王佐暹)9)과 장작승(將作丞) 백일승(白日昇)을 거란의 동경(東京 : 지금의 만주 遼寧省 遼陽縣)으로 보내 우호관계를 맺게 했다.

• 겨울 10월

초하루 병오일. 참지정사(叅知政事) 강조(康兆)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10)로,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상장군 안소광(安紹光)을 행영도병마사(行營都兵馬使)로, 소부감(小府監) 최현민(崔賢敏)을 좌군병마사로, 형부시랑(刑部侍郞) 이방(李昉)11)을 우군병마사로, 예빈경(禮賓卿) 박충숙(朴忠淑)12)을 중군병마사로,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사위(崔士威)를 통군사(統軍使)로 각각 임명해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에 진지를 구축해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게 했다.
계축일. 거란이 급사중(給事中) 고정(高正)과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한기(韓杞)를 보내 선전포고했다. 이에 참지정사(叅知政事) 이예균(李禮均)13)과 상서우복야 왕동영(王同穎)을 거란에 보내 화의를 요청했다.

• 11월

초하루 병자일. 기거랑(起居郞) 강주재(姜周載)14)를 거란으로 보내어 동지를 하례했다.
○ 거란 임금이 장군 소응(蕭凝)을 보내 자신이 친히 정벌에 나서겠다고 통보해 왔다.
경인일. 팔관회(八關會)15)를 복구하고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거둥하여 관람했다.
신묘일. 거란 임금이 친히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16) 흥화진(興化鎭 : 지금의 평안북도 피현군 백마 동쪽)을 포위하였으나, 양규(楊規)와 이수화(李守和)17) 등이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기해일. 강조(康兆)가 거란과 통주(通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사로잡혔다.
경술일. 거란군이 곽주(郭州 : 지금의 평안북도 곽산군)를 함락시켰다.
임자일. 거란군이 청수강(淸水江 : 지금의 청천강)에 이르자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府使)·공부시랑(工部侍郞) 박섬(朴暹)18)은 성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주민도 모두 흩어져 도망갔다.
계축일. 거란군이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특별시)에 이르러 중흥사(中興寺)19)의 탑을 불태웠다.
갑인일. 숙주(肅州 : 지금의 평안남도 숙천군)가 함락되었다.
경신일. 큰 유성(流星)이 곽주에 떨어졌다.
신유일. 거란 임금이 서경을 공략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진격했다.
계해일. 서경 신사(西京神祠)20)에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거란의 군마(軍馬)를 모조리 쓸어버렸다.
○하공진(河拱辰)과 유종(柳宗)을 소환하여 관직을 회복시켰다.
임신일. 밤에 왕과 후비(后妃)가 거란군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21)갔다.
갑술일. 왕이 양주(楊州 :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남양주시)에 유숙하면서 하공진과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고영기(高英起)22)를 시켜 표문을 지니고 거란의 진영에 가서 화의를 청하도록 하였다.

元年 春正月 乙丑 廢上元道場.

閏二月 甲子 復燃燈會.

夏四月 癸丑 親祀太廟. 己未 賜徐崧等及第.

五月 甲申 流尙書左司郞中河拱辰, 和州防禦郞中柳宗于遠島. 拱辰嘗擊東女眞見敗, 宗恨之, 會女眞九十五人來朝, 至和州館, 宗盡殺之, 故並坐流. 女眞訴于契丹, 契丹主謂群臣曰, “高麗康兆弑君, 大逆也, 宜發兵問罪.”

秋七月 戊寅朔 契丹遣給事中梁炳, 大將軍那律允來, 問前王之故.

八月 丁未朔 遣內史侍郞平章事陳頔, 直中臺尙書右丞尹餘如契丹.

九月 遣左司員外郞金延保如契丹, 秋季問候, 左司郞中王佐暹, 將作丞白日昇如契丹東京, 修好.

冬十月 丙午朔 以叅知政事康兆爲行營都統使, 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安紹光爲行營都兵馬使, 少府監崔賢敏爲左軍兵馬使, 刑部侍郞李昉爲右軍兵馬使, 禮賓卿朴忠淑爲中軍兵馬使, 刑部尙書崔士威爲統軍使, 率兵三十萬, 軍于通州, 以備契丹. 癸丑 契丹遣給事中高正, 閤門引進使韓杞來, 告興師. 叅知政事李禮均, 右僕射王同穎如契丹, 請和.

十一月 丙子朔 遣起居郞姜周載如契丹, 賀冬至. 契丹主遣將軍蕭凝來, 告親征. 庚寅 復八關會, 王御威鳳樓, 觀樂. 辛卯 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 渡鴨綠江, 圍興化鎭, 楊規·李守和等固守不降. 己亥 康兆與契丹, 戰于通州, 敗績就擒. 庚戌23) 丹兵陷郭州. 壬子 丹兵至淸水江, 安北都護府使工部侍郞朴暹棄城遁, 州民皆潰. 癸丑 丹兵至西京, 焚中興寺塔. 甲寅 陷肅州. 庚申 大流星隕于郭州. 辛酉 契丹主攻西京不拔, 解圍而東. 癸亥 西京神祠, 旋風忽起, 契丹軍馬皆僨. 召還河拱辰·柳宗, 復其爵. 壬申 夜, 王與后妃, 避丹兵南幸. 甲戌 次楊州, 遣河拱辰及戶部員外郞高英起奉表, 往丹營請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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