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우장춘과 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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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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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박무덕이었다. 네 살 때까지는.

1882년 박무덕이 태어난 곳은 일본 가고시마 현 나에시로가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 70명이 마을을 이루고 400년을 살아온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 박수승은 도자기 사업으로 번성하자 무덕이 네 살 때 일본 평민보다 상위계급인 사족(士族)의 성(姓) 도고(東鄕)씨를 산다. 그 후 박무덕은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됐다.

시게노리는 1897년 가고시마 제1중학교에 입학했다. 사족 자제들이 다니던 이 학교의 학생들은 그가 가짜 사족, 조선 핏줄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는 무섭게 공부에 매달렸다(김충식의 ‘슬픈 열도’). 그는 1904년 도쿄제국대 독문과에 입학한다.

시게노리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2년 전인 1895년. 한반도에서는 을미사변이 터졌다. 당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들을 경복궁에 데리고 들어간 한국인이 있었다. 조선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 그는 사변 직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처자가 있었지만 단신으로 건너간 그는 일본 여성과 결혼해 1898년 4월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우장춘(禹長春).

그러나 우범선은 장춘이 여섯 살 때인 1903년 11월 민씨 집안 청지기 출신의 자객 고영근에게 목숨을 잃는다. 아버지가 살해된 뒤 조선총독부는 장춘 형제에게 학비를 지원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이종각 일본 주오대 강사는 저서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에서 일본이 얼마나 명성황후 살해의 성공을 높이 평가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장춘은 1916년 도쿄제대 농과대 실과에 입학한다.

한편 시게노리는 우장춘이 대학에 입학하기 4년 전인 1912년 일본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승승장구한 그는 1941년 외무대신(장관)에 임명된다. 그는 이듬해 사직했으나 1945년 4월 다시 외무장관이 되어 일본의 패전협상을 맡게 된다. 도고 장관은 군부의 암살기도와 협박에도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는 일본 내 평가를 받았다.

그의 고향 마을 뒤쪽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있다. 1964년 일본 각료가 쓴 기념관 송덕비문은 이렇게 끝난다. “…종전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일본 국민을 구했다.”

다시 우장춘으로 돌아가보자. 장춘은 1936년 도쿄제대 농학부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육종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우장춘 박사 환국위원회가 결성된다. 1950년 3월 입국한 우 박사는 광복 전까지 일본에서 전량 들여오던 채소 종자를 우리 손으로 개발해 우량한 종자를 생산했다. 또 한국의 육종기술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납치된 조선 도공의 후예가 ‘일본국과 일본 국민’을 구하고, ‘조선 국모 시해범’의 자식이 불모의 한국농업 재건의 기초를 닦은 이 부조리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도고 시게노리가 한국 핏줄을 속이고 일본과 일왕에 부역했다고 침을 뱉을 것인가. 우장춘이 매국노의 아들인 데다 조선총독부 돈으로 공부한 친일파라고 돌을 던질 것인가.

8일 발간되는 친일인명사전에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고(故) 박정희 대통령과 우국의 절창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남긴 위암 장지연 선생이 포함됐다고 한다. 친일문제에 그렇게 단세포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것을 한일관계의 격랑 속에 얽힌 우장춘과 도고 시게노리의 삶이 웅변한다.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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