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명태조 주원장은 고려인이었다(7)
보스톤코리아  2006-11-27, 01:35:37 
백 린 (역사학자)

홍건적과 명나라의 건국


주원장은 홍건적의 일원으로서 다른 홍건적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건국의 대업을 성취한다. 그런데 그의 출세는 장인 곽자흥의 덕택이 크다고 하겠지만 그 보다도 주원장의 탁월한 무술과 출중한 재략이었기 때문일것이다. 그건 그렇다하고, 주원장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홍건적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할 것 같다. 원나라 순제(順帝)의 초년경 중국의 각지에서 반란이 계속 일어난다. 천재지변과 전염병의 만연, 한해의 계속으로 기근, 거기에 더하여 몽고족의 통치에 의한 차별과 억압에 시달려온 중국인들은 원나라 타도의 구호와 함께 산동과 강남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 반란군을 주도적으로 지도한 것이 백련교이다. 그들 반란군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르고 다녔기 때문에 홍건적이라 하였다. 홍건적 중에 비교적 큰 세력을 가졌던 자는 방국진(方國珍) 유복통(劉福通) 장사성(張士誠) 서수휘 진우량(陳友諒) 한림아(韓林兒) 등이 있다.

1.) 방국진은 강남에서 기병하여 먼저 온주를 점령하고, 1352년 3월에 절강성의 태주에서 관군을 대파한 다음 경원지방으로 나아가 그 세력을 떨쳤으나, 1356년 3월 주원장에게 패하여 온주, 태주, 경원의 3주를 주원장에게 바치고 항복하고 만다.
2.) 홍건적의 두목 유복통은 1351년 5월 산동에서 기병하여 방국진을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백련교의 교주인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 송재(宋宰)라고 추대하여 남송의 재기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355년 11월 관군에게 대파된다. 1358년 5월 유복통과 한림아가 연합하여 변양(卞楊)을 공략하여 거기에 근거하고 있다가 1363년 장사성의 부하장수 여진(呂珍)에게 살해된다. 송제라고 자칭하였던 한림아도 1366년 12월에 죽음으로 소위 송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3.)  서수희는 1351년 5월 유복통과 같이 기병하여 항주를 골략하고, 점수(漸水)에서 관군에게 패하였으나 안휘의 호주를 점령하고 난 다음 국호를 천완(天完)이라 하면서 황제임을 자칭한다. 그러나 1360년 5월 한왕이라고 진우량에게 살해되고 만다.
4.) 진우량은 유복동의 부하로서 1358년 안동을 공략하고 강주로 나아가 서수휘를 친 다음 국호를 한 이라 하고 황제임을 자칭하였다. 그러나 1363년 7월 주원장에게 패하여 사살되고 만다.
5.) 유복동의 부하였던 명옥진은 1357년 12월에 성도(成都)를 공략하고 1362년 운남(雲南)으로 내려가 사천(四川)을 점령한 다음 다시 성도로 돌아와 1363년 1월에 국호를 하(夏)라 하고 황제임을 자칭하였다. 그런데 1366년 3월에 그가 사망하자 아들 명승(明昇)이 아버지를 뒤이어 하(夏)나라 황제임을 자청하였다. 명승은 1371년주원장의 고향친구이며 부하장수인 탕화(湯和)의 군에게 패하여 주원장에게 항복하였다. 명승은 주원장의 특사를 받아 처형을 면하고 교려로 보내졌다. 이에 대하여는 뒤에서 다시 설명키로 하겠다.
6.) 장사성은 1353년 강소성 지방에서 일어나 고우(高郵)를 점령하고 국호를 대주(大周)라 하여 성왕임을 자처하였다. 이지음 장사성이 이끄는 군대는 그 무리가 무려 10만에 이르었다고 한다. 그런데 1354년 9월 고려군을 선봉으로하는 승사 탈탈(脫脫)의 관군에게 크게 패하여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여기서 고려군의 원나라 파병에 한 일을 간단히 알아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인순제가 고려 공민왕 2년 (1353년)에 내란을 일으킨 홍건적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청해 왔다. 공민왕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권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원병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유탁, 권제신, 권겸, 최영 등은 3천명의 정예군사를 이끌고 원나라로 들어가 원의 연경에 있던 본국인 2만 3천명을 합하여 긍상 탈탈 (脫脫:은 이름이 아니라 색목인 타타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 것 이다.)이 이끄는 관군의 검봉이 되어 장사성 반란군 토벌에 나선다.

유탁 등이 이끄는 고려군은 134년 9월 고우에 근거하고 있는 장사성을 대파하고 계속하여 강소성의 회안로와 안휘성의 여러지방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공민왕은 왠일인지 원나라에 파견하였던 유탁 등의 원군을 1355년 5월에 귀환시킨다. 고구려군이 물러간 후 장사성의 세력은 오히려 더 강성했다. 장사성은 고우에서 고려군에게 패한 후 1356년 3월 평강을 점령하고 이어 항주를 장악한다. 그런데 반란군 토벌에 있어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고려군이 무슨 이유에서 철군했을까. 사실 알고보면 고려의 원군은 종래 원수로 생각했던 원나라를 돕기 위하여 파견한 셈이다. 그러므로 고려군의 귀환은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는 공민완 2년(1356년)에 몽고어 사용과 원나라 풍속에 따른 편발을 금지하는등 개혁을 강행한다. 그리고 원나라의 연호 사용을 정지하는 한편 내정간섭을 위하여 설치하였던 원의 정동행성(征東行省)이 문소를 폐지하고 원나라 순제의 기황후의 오라버니로 원나라 황실의 배경을 믿고 권력과 부정을 자행했던 기철(奇轍) 일당을 숙청하는 등 노골적으로 원나라에 반대하는 정책을 실행했다. 그로 말미암아 원나라의 황제는 1364년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의 왕으로 세워 최유로 하여금 몽고병 1만명을 이끌고 고려의 개경에 가게하였다. 최유는 압록강을 건너 선천까지 밀고 들어왔다가 최영, 이성계 등에게 패하여 연경으로 도망쳐 버렸다. 어쨌든 주원장은 고려군이 장사성의 군사를 물리치고 강남의 통로를 열어주었기 때문에  1355년 6월에 태평로를 취할 수 있었고 따라서 1356년 4월 방국진의 항복을 받고 그해 7월에 오국공(吳國公)임을 선언한다.

1358년 5월에는 안휘성 영국등의 여러고울을 점령하고 1359년에는 방국진이 점령하였던 절강성의 온주, 태주, 경원의 3주를 통합하였다. 1363년 7월에는 진우량을 공격하여 그를 사살하였다. 1366년에 호주(湖州)를 취한 다음 장사성을 잡아죽이고 오왕(吳王)임을 선언하였다. 이제 주원장은 산동, 안휘, 호북, 강서등 하남일대를 수중에 넣었다. 그리하여 서달(徐達)과 이문충(李文忠)을 파견하여 북벌을 시작한다. 그리고 1398년 1월 남경에 정도하여 국호를 대병이라 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분이 명나라 태조 홍무황제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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