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천황(神武天皇 じんむてんのう)
by Silla on 2020-02-09
신무 천황의 이름은 언화화출견으로 아버지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과 어머니 옥의희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천조대신의 후손이고 어머니는 바다 신의 둘때 딸이다.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언니다.

나이 45세에 이르러 형들과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옛날 우리의 천신 고황산령존과 대일령존이 풍위원서수국을 모두 우리의 천조 언화경경저존에게 주셨으므로, 화경경저존이 하늘의 문을 열고 구름길을 헤치고, 행인을 물리치는 일을 맡은 신을 앞서 보내고 오셨다. 이때 세상은 태고 시대로 어둡고 질서도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어두운 세상에서 바른 길을 가르치시고 서쪽 변방을 다스리셨다. 우리 할아버님과 아버님은 신성하셔서 오랫동안 선정을 펴셨다. 지금 천조께서 내려오신 지 179만 2,470여 년이 되었지만 먼 지방은 아직 왕택에 젖지 않아 읍에는 군(君)이 있고 촌에는 장(長)이 있어 각각 영역을 나누어 서로 이기려고 싸움을 한다. 그런데 염토로옹이 ‘동쪽에 아름다운 땅이 있는데, 청산이 사방을 둘러싸고 그 안에 또한 천반선을 타고 내려온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 땅이 필히 대업을 펴서 천하를 다스리기에 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중심이 되지 않겠는가. 하늘에서 날아왔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 요속일일 것이다. 그곳에 가서 도읍으로 정해야겠다.”고 말하니 여러 황자들도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항상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속히 행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666년이었다.

일향을 출발한 신무의 군대는 토협을 거쳐 강수문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나와 안예를 거쳐 길비에 이르렀다.

길비에서 3년간 머무르며 근기 지방을 공략할 준비를 했다.

기원전 663년, 준비를 마친 신무의 군대는 길비를 출발하여 하내에 이르러 강을 거슬러 올라가 백견진에 진을 쳤다.

(당시의 오사카 해안은 지금보다 훨씬 내륙 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이 부분은 이 이야기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닐까?)

신무는 용전을 지나 내량 분지로 들어가려 했으나 길이 좁아 되돌아왔다. 다시 첨구산 북쪽으로 넘어가려다 공사위판에서 장수언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패배했다. 이때 신무의 맏형 오뢰명이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신무의 군대는 퇴각하여 모정을 거쳐 조산에 이르렀는데 이때 오뢰명은 죽었다.

다시 협야를 거쳐 황판진으로 가는데 배가 표류하자, 신무의 둘째 형 도반명과 세째 형 심택입야명이 상황을 비관하며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황판진에 도착한 신무의 군대는 그곳을 장악하였으나 무기력에 빠졌다.

이때 웅야의 고창하라는 사람이 무옹뢰신으로부터 받았다며 칼을 하나 바치므로 사기를 회복했다.

그러나 역시 산이 험준하여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때 신무의 꿈에 천조대신이 나타나 두팔지오란 까마귀를 따라가라는 계시를 주므로 깨어나 까마귀를 따라갔다.

마침내 신무의 군대는 토전에 이르렀다.

신무는 토전의 토착 세력인 형활과 제활 형제를 불렀으나 형활은 오지 않고 제활만 와서 신무를 죽이려는 형활의 음모를 알려주었다.

이에 신무는 형활을 죽이고 제활이 베풀어주는 잔치에서 노래를 불렀다.

"토전의 고성에 도요새 그물을 치고 내가 기다리는데 도요새는 안걸리고 매가 걸렸다. 전처가 반찬거리를 달라면 메밀의 열매가 없는 것을 많이 주고 후처가 달라면 제현목과 같이 열매가 많은 것을 많이 주어라."


신무는 길야 지방을 순시하였는데 이때 길야 지방의 세력들이 복속해 왔다.

한편, 내량 분지의 방어가 매우 견고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무는 제사를 지내며 승리를 기원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국견구에서 적을 격파하고 인판읍에서는 계략으로 적을 유인하여 참살하였다.

신무는 남은 10여 무리를 마저 제압하기 위해 진영을 옮겼다. 

그리고 기성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형기성에게 두팔지오를 보냈으나 형기성은 이를 거부하였다. 두팔지오는 다시 제기성에게 가서 항복을 권유하니 제기성은 신무에게 와 항복하였다. 신무는 제기성을 보내 형기성의 항복을 재차 권유하였으나 형기성은 이를 듣지 않았다. 마침내 신무는 안판 쪽으로 여군을 보내 형기성의 정예병을 끌어낸 다음 묵판으로 남군을 보내 쳐부수고 형기성의 목을 베었다.

다음으로 신무는 장수언을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가 없었다. 

그때 장수언이 사람을 보내와 자신이 천신의 아들 요속일명을 임금으로 모시고 있다며 천신의 후손을 자처하는 신무를 의심하였다. 신무가 천신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징표를 보여주었으나 장수언은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요속일명이 장수언을 죽이고 항복해 왔다.

기원전 662년 신무는 강원에 궁을 짓기 시작했다.

“내가 동쪽을 정토한 지 이제 6년이 되었다. 천신의 위광 덕분에 흉도를 멸하였다. 그러나 변방의 땅은 아직 평정되지 않아서 요상한 무리가 아직 버티고 있지만, 중주 땅에서는 다시는 풍진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도 평온하다. 그러니 황도를 넓히고 대장 괘를 본떠 대궐을 만들자. 그런데 지금 세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민심도 소박하다. 나무 위에서 살고 굴 안에 살면서 미개한 습속은 그대로이다. 무릇 대인은 제도를 세우는 존재로 그 도리는 반드시 시세에 적합한 것이다. 만약 백성에게 이익이 된다면 성인이 행하는 일에 무슨 방해가 있겠는가? 마땅히 산림을 개척하고 궁전을 조영하여 삼가 보위에 올라 백성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위로는 건령이 나라를 주신 덕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황손이 바른 길을 닦은 마음을 넓히고자 한다. 그 후 육합을 통일하여 도읍을 열고 팔굉을 덮어서 우리 집으로 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바라다보니 무방산 동남쪽의 강원 땅은 깊숙이 안주할 만한 땅이다.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자.”

기원전 661년 신무는 원비도오십령원명을 새로 황후로 맞아들였다.

기원전 660년 1월 1일에 신무는 강원궁에서 천황에 즉위하고 이 해를 천황 원년으로 하였다.

신일본반여언화화출견 천황이라고 하였는데 신일본은 미칭이고 반여는 신무가 내량 분지에 입지를 닦은 전략적 요충지를 말하며 언화화출견은 신무의 이름이다.

*八紘一宇
그 후 육합을 통일하여 도읍을 열고 팔굉을 덮어서 우리 집으로 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然後 兼六合以開都 掩八紘而爲宇 不亦可乎
-- 여기서 팔굉은 세계를 말한다. 따라서 팔굉일우란 세계를 통일하여 하나의 지붕 아래에 둔다는 뜻이 된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이 내세운 이 구호는 신무가 했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