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by Silla on 2020-02-09
유신의 12대 조상은 남가라를 세운 수로왕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남가라의 건국 설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원래 이곳에는 왕이 없었고 아홉 명의 추장이 백성들을 이끌고 있었다. 서기 42년 3월에 북쪽 구지(龜旨)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사람들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또 사람들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그러자 또 소리가 들렸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산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추장들이 이 말을 따라 모두 노래하고 춤을 추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그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어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섯 알은 변해서 아이가 되었는데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하였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 (伽耶國)이라 하니 곧 여섯 가야 (伽耶)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증조 할아버지인 구해왕에 이르러 남가라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구해왕의 셋째 아들인 무력은 신주에 주둔한 신라군의 총사령관이었는데 관산성 전투가 벌어지자 군대를 이끌고 가 백제군을 크게 무찔렀다.
무력의 아들이자 유신의 아버지인 서현은 길에서 숙흘종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눈짓으로 그녀를 유인하여 중매를 기다리지도 않고 정을 통하였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어 장차 함께 떠나려 하자 숙흘종이 비로소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 이를 미워하여 별제에 가두고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때 느닷없이 벼락이 옥문을 쳤고 지키던 자가 놀라 우왕좌왕하자 만명은 뚫린 구멍을 통해 빠져나와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에 다다랐다. 595년 두 사람은 그곳에서 유신을 낳았다.
15세에 화랑이 된 유신은 잦은 전쟁에 시달리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17세에 중악에 들어가 기도를 하였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자네는 어리지만 삼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장하지 아니한가?”라고 하며 비법을 가르쳐 주고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게. 만약 의롭지 못한 데 쓴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것이네.”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중악은 지금의 단석산으로 비정되며 단석상 정상에는 김유신이 칼로 갈랐다는 쪼개진 바위가 있다.
고려와 백제의 침략이 더욱 심해지자 다시 보검을 가지고 열박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여 빌기를 “천관(天官)께서 빛을 드리워 보검에 영험함을 내려주소서.”라고 하였다. 3일째 되던 날 밤에 허성과 각성 두 별의 빛이 환하게 내려와 드리우더니 검이 동요하는 것 같았다. 

단독 돌격
629년 진평왕이 서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 낭비성을 공격케 하였다. 고려인들이 군사를 출동시켜 역공하니 신라군이 불리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마음이 움츠러들어 다시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졌다. 유신은 그때 중당당주였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 “제가 평생 충효를 스스로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해서는 용맹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개 듣건대, ‘옷깃을 바루면 갓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고 하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곧 말에 올라 검을 뽑아들고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을 드나들면서 장군을 베어 그 머리를 끌고 왔다. 신라군이 이를 보고 승기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해 5천여 명을 참살하고 1천 명을 사로잡으니 성안에서는 두려워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642년 백제가 대야성에 침공해와 성을 함락시키고 품석 부부를 처형하였다. 품석의 부인은 춘추의 딸이었기 때문에 춘추가 분노하여 고려의 힘을 빌려 백제를 치고자 하였다. 춘추는 선덕왕의 허락을 받고 유신을 만나 60일 이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군사적 보복을 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고려로 떠났다. 춘추를 만난 보장왕은 도리어 신라가 차지한 마목현과 죽령 이북의 옛 땅을 요구하였다. 춘추는 이를 거절하였고 보장왕은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때 보장왕의 신하 선도해가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에 병이 났는데 토끼의 간을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의원이 말하였다. 이에 용왕이 근심하자 거북이가 토끼의 간을 구해보겠다며 육지로 나왔다. 토끼를 찾은 거북이는 ‘바다 속에 섬이 하나 있는데 샘은 맑으며 돌은 하얗고 수풀은 무성하고 과일은 맛이 좋으며 추위와 더위는 이르지 못하고 매와 송골매도 침입하지 못한다. 네가 만일 가기만 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어서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고 꼬셨다. 꼬임에 넘어간 토끼를 등에 업고 바다 가운데로 헤엄쳐간 거북이는 그때서야 비로소 사실을 말하였다. 그러자 토끼는 ‘나는 신명의 후예라 능히 오장을 꺼내 씻어 넣을 수 있다. 일전에 간과 심장을 꺼내 씻은 후 잠깐 바위 아래에 두었는데 너의 달콤한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오느라 간을 두고 왔으니 어찌 간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겠는가. 나는 비록 간이 없어도 또한 살 수 있으니 어찌 서로 좋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거북이는 그 말을 믿고 토끼를 다시 육지로 데려다 주었다. 그러자 토끼는 풀 속으로 도망가며 '어리석구나. 간 없이 살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춘추는 그 이야기의 듣고 의미를 깨닫아 보장왕에게 글을 보내 자신을 풀어주면 요청한 영토의 반환을 선덕왕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하였다. 마침 유신이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치려한다는 첩보까지 들어왔으므로 보장왕은 춘추를 풀어주었다. 춘추는 국경을 넘으며 고려인에게 보장왕에게 쓴 글은 거짓말이었다고 알려주었다.

멸사봉공
644년 유신은 선덕왕의 명을 받아 백제가 차지한 가혜성, 성열성, 동화성 등 7성을 되찾았다. 이 성들의 위치를 볼 때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신라는 낙동강 서안을 모두 백제에게 빼앗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45년에는 다시 매리포성에 침공해온 백제군을 물리치고 돌아와 선덕왕에게 보고하였으나 미처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또 백제 병사가 국경에 와서 주둔하며 장차 군사를 크게 일으켜 침공하려 한다는 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유신은 다시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손질하여 서쪽을 향해 떠났다. 이때 그 집안 사람들이 모두 문 밖에 나와 오기를 기다렸는데 유신은 문을 지나쳐 돌아보지 않고 지나갔다. 50보 쯤 가서 말을 멈추고는 사람을 시켜 집에서 마실 물을 가져오게 하여 그것을 마시고는 “우리 집의 물은 여전히 예전 맛 그대로구나.”라고 말하였다. 유신의 군대가 국경에 이르자 백제군은 바로 물러갔다.

심리전
647년 비담과 염종이 여자 임금을 몰아내겠다며 난을 일으켜 명활성에 주둔하고는 월성에 있는 선덕왕과 공방을 벌이기 시작했다. 10여 일이 지나 월성에 별똥이 떨어졌는데 이에 선덕왕의 군대가 크게 동요하였다. 유신은 밤에 허수아비에 불을 붙여 연에 실어 날려보내고는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 흰 말을 잡아 제사를 지낸 뒤 장졸들을 독려하여 반란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마침내 그들을 쫓아내고 9족을 죽였다.

이 해에 백제의 의직이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고 감물과 동잠 두 성을 공격하였다. 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나갔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에 비령자에게 “오늘의 상황이 급박하구나. 자네가 아니면 누가 능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분발시키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비령자가 절을 하며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아들 거진과 종 합절이 그를 따랐고 검과 창을 부딪치며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군사들이 그것을 보고 감격하여 나아가 싸워 적병을 크게 물리쳤으며 3천 명을 참수하였다. 의직은 홀로 돌아갔다.

유인 매복 기습
648년 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있었는데 마치 군사 일에는 뜻이 없는 듯 술을 마시고 풍류를 즐기며 몇 달을 보냈다. 주의 사람들이 유신을 어리석은 장수로 여겨 그를 비방하면서 “여러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낸 날이 오래인지라 힘이 남아 한 번 싸워볼 만한데도 장군께서는 게으르니 어이할꼬.”라고 말하였다. 유신이 이를 듣고 백성들을 쓸 수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진덕왕에게 대야성에서의 패배를 설욕할 것을 청하였다. 진덕왕이 “작은 것이 큰 것을 범하려다가 위태로워지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하니 유신은 이렇게 답하였다. “군사가 이기고 지는 것은 크고 작은 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주(紂) 임금에게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마음이 떠나고 덕이 떠났으므로, 주(周)나라 10명의 어진 신하들이 마음을 합치고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저희들은 뜻이 같아서 더불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할 수 있으니 저 백제라는 것은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드디어 주의 군사들을 선발하여 단련시켜 적에게 나아가게 하여 대량성 밖에 이르렀는데, 백제가 오히려 막고 있었다. 이기지 못하여 도망치는 체하면서 옥문곡까지 이르니 백제가 그들을 가볍게 여겨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왔다. 복병이 그 앞뒤에서 일어나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물리쳤는데, 백제 장군 8명을 사로잡고 죽이거나 사로잡은 이가 1천 명에 달하였다. 유신은 사로잡은 백제의 장수들과 품석 부부의 유골을 교환한 뒤 다시 백제의 영역으로 들어가 악성 등 12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2만 명을 참수하였으며 9천 명을 사로잡았다. 또 진례성 등 9성을 무찔러 9천여 명을 참수하고 포로로 6백 명을 획득하였다. 

역정보
다시 백제장군 은상이 석토성 등 7성을 공격해 오자 유신이 나아갔지만 열흘이 지나도록 승부가 나지 않아 엎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고 흐르는 피가 절굿공이를 띄울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도살성 아래에 주둔하며 말을 쉬게 하고 군사들을 잘 먹여 다시 공격을 꾀하였다. 또 사람을 시켜 진영 안을 돌아다니며 “진지를 굳게 지키며 움직이지 마라. 내일 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결전할 것이다.”는 명을 내렸다. 첩자가 이를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알렸다. 은상 등은 군사의 증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은 일시에 분발하여 공격해 크게 승리를 거두고 장군인 달솔 정중과 군사 1백 명을 사로잡았으며, 좌평 은상과 달솔 자견 등 10명과 병졸 8천 9백 8십 명을 죽이고 말 1만 필과 갑옷 1천 8백 벌을 획득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백제 좌평 정복과 병졸 1천 명이 항복해 오는 것을 보고, 이들을 모두 풀어주어 각자 가고 싶은 대로 가도록 하였다.
654년에 진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유신은 재상 이찬과 논의하여 춘추를 왕으로 세웠다.

간첩포섭
앞서 부산현령 조미갑이 백제에 포로로 잡혀 좌평 임자의 종이 되었는데 임자의 신뢰를 얻어 도망나올 기회가 있었다. 조미갑은 유신을 찾아와 백제의 사정을 고하였다. 유신은 조미갑을 돌려보내며 임자에게  ‘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 없으니 만약 그대의 나라가 망하면 그대는 우리 나라에 의지하고 우리 나라가 망하면 내 그대의 나라에 의지하겠소.’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 유신의 제안을 받은 임자는 몇 달 간 고민하다 마침내 마음을 굳히고 백제 내부의 정보를 알려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