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05.31 광주사태에 대한 계엄사 발표
by politician on 2020-02-09
지난 5월18일 광주시내 대학생시위에서 발단하여 5월27일 진압되기까지 광주시 일원에서 발생하였던 폭동사태는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국정의 정상적 수행을 저해하였을 뿐 아니라 국민여러분에게도 큰 불안과 깊은 염려를 끼치게 한 유례없는 비극이었다. 다행히도 5월27일 계엄군의 효과적인 진압에 의해 질서와 안정을 되찾게되었고 사태수습이 진행되고 있음에 즈음하여, 계엄사령관으로서 국민여러분께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하면서 광주사태의 경위 및 진상과 사후처리의 방침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는 바이다.

<사태 배경 및 동기>
금년3월 개학이후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지역에서 전개되어왔던 각종 농성 및 시위가 소요폭동화로 발전함에 따라 5월18일 비상계엄의 전국화 확대와 휴교조치로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시에서만은 전남대학생 2백 명의 가두시위가 5월18일 에도 계속되어 경찰과의 격렬한 대치로 저지가 어려워지자 부득이 계엄군이 포고령을 위반한 학생난동시위를 저지키 위해 투입되었으며, 저지과정에서 일어난 군과 시위군중간의 충돌과 오해 통해 비어의 난무로 급격히 확대됨으로써, 끝내는 총기를 탈취한 무장폭도의 난동으로 광주시 일원을 무법 천지 하게 된 것이다.
시국에 대한 집단적 의사표시의 한계를 훨씬 넘어 폭력과 무질서를 격화시키고 무질서를 격화시키고 무장폭도에 의한 살상과 파괴·방화·약탈과 심지어는 정부에 대항하는 시민 군을 자처하여 저항, 봉기를 선동·획책한 이번·광주사태의 진상은 비록 일부 소수의 불순선동분자와 철없는 난동폭도의 소행이라 하더라도 우리 국민들이 다같이 깊은 성찰과 회오의 계기로 삼아야 할 중대사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뜻에서 그 동안 일부 보도와 일부 구전을 통해 그릇되게 알려진 광주사태의 진상과 경위를 규명하고, 여기에서 파생된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통하여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다짐하려 한다.

<사태 경위>
가, 군과 「데모」군중과의 충돌진상
5월 18일 상오 10시쯤 광주시의 중심가로 불법진출한 전남대생 2백여명의 시위행렬은 계엄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점차 격렬화, 하오 2시쯤에는 1천 여명으로 늘어나 경찰과 투석전으로 대치하면서 경찰 지프에 방화하는 등 도저히 경찰력으로는 지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계엄당국은 부득이 하오4시40분쯤 군병력을 투입하여 강력 저지에 나섰으며 이때의 시위 군중은 대부분 학생들이었는바 저지에 나선 젊은 군인에게 학생들은 투석과 폭행으로 대항하였고, 주변 건물의 일부시민이 합세하여 군인에게 투석함으로써 상호간 부상자가 발생하자 다같이 혈기왕성한 젊은 군인과 학생들은 감정이 폭발, 욕설과 고함으로 대항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소란 중에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보이는 유언비어로서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러 왔다」「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는 등 냉철한 이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지역감정을 촉발·선동하는 말들이 삽시간에 전 광주시내에 퍼져, 시민을 흥분시키고, 시위양상을 극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근거 없는 유언비어는 젊은 군인이 격렬한 소란의 와중에서 저지임무를 수행하게되니 자연 시위학생을 군중 면전에서 제지연행하지 않을 수 없고 학생에게 얻어맞으면서 다소 과격하게 다루거나 도피하는 학생을 추적하여 잡는 과정에서 기물이 파손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위군중과 시민들을 고의적으로 자극·흥분시키려는 목적 하에 조작·유포시킨 것으로서 이는 우리내부의 분열과 혼란을 극대화시키려는 고첩과 불순분자들의 계획적 소행이었다.
나, 진압 시까지의 난동경과
19일에도 유언비어는 시내에 더욱 퍼져 이성과 냉철을 상실한 군중심리가 광주시내를 휩쓸게 되었고 흥분한 일부군중이 극렬한 시위를 감행하면서 화염병으로 파출소를 방화하는가하면 차량도 방화·파괴하였으며 유언비어도 더욱 감정을 자극하는 내용이 시시각각으로 조작되어 유포되었다.
20일에는 흥분한 군중1만 여명이 시위하면서 MBC방송국을 방화, 시청파괴, 도청 앞 저지 경찰관 4명을 차로 역사하는가 하면, 시내 수 개 파출소를 파괴하면서 철야시위를 계속하였다.
21일에는 광주세무서를 방화, 전소케하면서 평소의 원념을 발산하는 난동으로 CBS방송국과 차량을 탈취, 방화하였고 방산 업체인 아세아자동차공장을 습격, 군에 납품할 장갑차를 비롯한 군용차량과 민수용 차량 2백 여대를 탈취하여 분배, 시내를 고속으로 질주하는가하면 도청을 점거한 후 무기를 탈취하여 전주·화순방면으로 진출하면서 TNT·총기를 닥치는 대로 약탈, 완전히 무장 폭도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특이 이날 계엄폭도들은 간첩 및 좌익수1백 70여명이 내포된 2천7백 여명의 복역죄수가 수용되어있는 광주교도소를 5회에 걸쳐 습격하여 이들을 탈소시켜서 폭도에 가담시키기 위해 교도소를 지키고 있는 계엄군과 교전, 양측에 사상자를 내게 하는 폭거를 자행하였으며 시내에서 흉기를 난사하면서 약탈·파괴행위로 무법천지의 공포도시화하였다.
더우기 시민의 봉기를 선동하는 가두방송 외에도 용의주도하게 만들어진 전단과 심지어는 지하신문(18일부터 26일간 9호까지 발행)까지 발행하면서 계엄군 섬멸을 구호로 외치는 외에 연행된 김대중석방을 요구, 주장하였다. 또한 공교롭게도 이날 신현환 전 국무총리 사임과 전 각료 사퇴를 계기로 『우리들의 항쟁으로 신 총리 이하 전 각료가 굴복, 퇴진하였다.』 『최 대통령은 곧 하야하게 되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폭도들을 고무하였고 시민들을 현혹시킨 바 있다.
군은 무장폭도들과의 충돌로 무고한 시민의 생명과 재산에 손상을 입히는 불행한 결과를 회피하기 위해 21일 밤 외곽지대로 철수, 시내와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봉쇄하는 한편 여타지역에서의 난동을 진압하는데 주력하였으며, 계엄군에 일체 발포치 않도록 엄중히 시달, 최소한의 자위권 발동마저도 자제하였던 것이다.
22일 광주시는 무장폭도들의 지배하에 완전히 장악되어 치안부재의 무법천지가 계속되는 가운데, 도청 앞 광장에 시체를 진열한 폭도들이 합동장례식을 거행한다는 명목 하에 시민을 동원하는 진풍경들이 벌어졌고, 약탈행위는 극에 달하였는데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이 냉정을 회복하기 시작, 점차 이탈하는 기색이 늘어났으며 폭도들은 불량배와 특정 정치목적을 가진 불순분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학생은 30%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장폭도들의 난동은 극렬화된 채 시내전역을 공포분위기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23일에 이르러 일부 지방유지와 온건파 학생들이 사태의 수습 필요성을 내세워 수습위원회를 구성, 무기의 회수와 당국과의 협의를 통한 사태수습을 모색하였으나, 강경파인 불순 배후 조종분자와의 대립으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도리어 일부 회수된 무기를 강경파분자들에게 탈취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희생자 시체를 진열하고는 분향을 구실로 시민집결을 유도하였다고, 특히 이날 온건파 수습위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현지 계엄 분소를 방문하였는데, 이들은 수습위원회의 명분을 세우기 위하여 구속자 석방과 책임면제 사망자 보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한편으로 강경파 폭도들은 광주에서의 봉기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에서도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외국우방이 자신들을 지원하기로 되었다는 유언비어를 시내에 퍼뜨리기도 하였다.
24일 폭도들은 시민의 호응과 집결을 유도하기 위해 위령제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1만5천명이 모인 가운데 궐기대회를 열었고, 특정인의 화형식을 가진 뒤 위령제는 연기 조치하였는데, 한편에서는 수습위원회가 강·온 양파로 갈린 채 각기 수습을 둘러싼 대결상을 보이면서 난동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25일에도 수습위원회 활동이 강·온 양파로 갈린 채 각각 별도의 행동을 보여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강경파에 의한 시민궐기대회가 시민 5만 명 참가 아래 열려 김대중석방·계엄철폐 등을 요구하는 결의를 하였고,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반시민들의 호응도가 더욱 줄어들자 폭도들이『계엄군은 못 들어온다』 『5일간만 견디면 된다』고 선동하면서 『대세가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시민들은 우리 시민군에 가담하여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자』고 충동하였다.
특히 계엄군이 진입, 진압하기전날인 26일에는 강경파 폭도들이 도청내의 지휘본부에 계엄군이 일부 차단지역에서 점차 압축해 들어가자 무장폭도들을 신속하게 기동 배치하는 조직적 지휘와 기동성까지 발휘하였으며 계엄군이 약속을 위반, 무력진주하려하니 시민들은 궐기 대항하자고 선동을 계속하여 이날 하오 3시께 5천여 명이 다시 궐기대회와 시위행진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9일간의 광주 폭동사태의 경위와 진상을 살펴 볼 때 비록 발단은 계엄군과 전남대생들의 충돌에서 일어났다고는 하나, 조직적이고 치밀한 배후조종과 교묘한 선동을 통하여 광주지역 시민들의 지역감정을 촉발·흥분시킴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군중심리의 폭발로 유도하여 사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 넣은 데에는 첫째, 북괴의 고책과 이에 협력하는 불순분자들의 책동 된 적이 있는바 전남해안으로 상륙 침투하여 광주일원에서 활동타가 서울로 잠입, 공작임무를 확산시키려다 23일 검거된 남파간첩 이창용의 그간 서답 신문에 의한 진술과 당국에 발송된 몇가지 징후가 일치, 실증되었으며, 실증되었으며 둘째,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학생소요사태를 배후 조종해온 김대중이 광주시의 전남대와 조선대내 추종학생(주로 복학생중심)들을 조정 선동하여 온 것이 소요사태의 발되었고 사태의 악화와 폭동 과정에서 광주시내 골수추종분자들이 단계적이며 조직적으로 이를 격화시킨 사실이 수사과정에서 계속 판명되고 있는 것이다.
다, 주요배후 주동분자와 활동=5월17일 24시를 기하여 계엄령의 전국확대가 선포된 직후, 4월 중순경부터 김대중을 면담하여 김대중 저「민족혼」「한신대·동국대 연설 집」을 전달받으면서 이른바 민주화 시위를 일으키도록 조종 받은 정동연(37세·전남대 화학4)등 복학생들은 전남대 총 학생회장 박관현을 사주하여 각 단과대학생 회장들과 약속된 사전계획에 따라 휴교령발동 익일인 5월18일 상오9시30분·학생2백여 명이 책가방 속에 돌을 넣어 위장하고 전남대정문에 모여 계엄군에게 투석전을 전개한 후 광주시중심으로 행동, 시민호위를 유도하였고,
조선대 김인원(법4)은 4월15일 동료 학생 19명과 함께 김대중을 면담하고, 광주에 내려온 후 복학생 양승희(정외2)등 4명을 통해 조선인 민주화투쟁위원회 대표 이석종(국문4)으로 하여금 민투 위원 12명과 함께 시위를 적극 전개토록 사주하여 5월 18일 전남대생 가두시위에 합류하였으며,
김대중측근으로서 10·16이후 6회에 걸쳐 상경, 접촉한바 있는 홍남순(변호사)은 조선대복학생 김운기(경영학2)에게 4월 하순「김대중사건 범행자리스트」라는 불순유인물 50여 매를 입수, 조선대교점에 살포케하는 등 학생시위를 조종하였고, 폭도들이 도청을 점거하자 5월 23일∼26일간 시민수습대책위원이라는 구실로 도청에 출입, 전신근 목사 등 강경파위원들과 함께 투쟁비 명목으로 1백만 원을 지원하면서『우리의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절대로 무기를 반납치 말라』 『5일만 더 투쟁하면 승리할 것이니 계속 투쟁하라』 『정치적 문제까지 요구하라』는 등 폭도들을 조종 격려하였다.
조선대생 김종배(27세·무역3)는 5월23일 전남도청에서 대학생이 폭도들을 총지휘해야 한다는 구실하에 5월21일부터 지휘중인 김원갑(25세·3수생)을 몰아내고 소위 투쟁위원장에 취임, 투쟁위원장 산하에 행정부위원장(허규정·조공대2) 외무부위원강(정간룡·31세· 보성 기업 영업과장) 기획부장(김영철· 33세· YWCA 신협) 상황실장 (박남선·26세·골재운반운전사) 기동타격대장 (윤석우·24세·자개공) 치안부장 (김준봉·21세· 회사윈)대변인 등 10개 부서장을 임명, 조직적인 장기투쟁전개를 획책하였다.
이들 중 상황실장 박남관은 5월23일 도청으로 들어가 실권을 장악하고 기동타격대장윤석우와 함께 총기회수를 극력 반대, 폭도들에게 재무장을 지시하고 계엄군에게 응사 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도청내에 보관중인 막대한 양의 TNT와 수류탄을 폭발시켜 옥쇄한다는 방침 하에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극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5월26일 하오8시쯤 자칭 예비역대위라는 33세 가량의 성명 불상자는 광주 YWCA강당에서 도청 기동 타격대와는 별도로 폭도 50명으로 기동 타격대를 조직, 총기조작법과 사격술 훈련을 실시한 후 상황실장 박남인과 협조, 다량의 총기와 실탄을 지급하고, 10∼12명씩 4개조를 편성하여 도청을 중심으로 광주·무등 산장 입구·남광주 역전·광주 고교 앞 등에 배치, 계엄군에 대항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 중 계엄군에 의해 검거되었다.

<무력진압의 불가피성>
광주사태가 무장폭도들에 의해 무법천지 화 된 단계에서도 군은 끝까지 무익한 자극과 무고한 시민의 피해를 염려하여 최소한의 자위권 발동마저도 자제하였으며 비록 군인이 폭도에 잡혀 무참히 난자·학살되는 것을 보면서도 총 한방 쏘지 않고 사태의 악화방지에 주력하였다.
또한 계엄군이 시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유익하지 못하다는 판단 하에 21일 시 외곽 지역으로 철수하여 다만 봉쇄에 만전을 기하면서 시민자체의 수습노력을 지켜보는 최대한의 인내도 감수하였으며 21일 박충동 국무총리 서리의 담화와 25일 대통령각하의 현지특별담화 그리고 계엄사령관 담화를 통해 간곡하고도 절실하게 자제와 질서회복을 호소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사태는 악화 일로를 거듭하면서 시민자체의 수습노력이 하등의 실효를 거두지 못했을 뿐 아니라 폭도들은 시민 군을 자처하면서 무등산과 화순 방향 및 외곽 야산지대에 진지를 구축하여 장기「게릴라」전 태세를 갖추어가고 있었고 도청내의 거점에서는 엄청난 양의 TNT폭약을 장진하고 자폭태세를 갖추는 등 더 이상 폭도들의 기도를 방치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참화가 일어날 것이 예측도기에 이르렀다.
이에 계엄군은 26일 밤 시내에 은밀하게 폭도를 가장, 침투시켰던 요원과 매수했던 난동분자로 하여금 도청 내 폭약·폭발장치 신관을 뺏어 못쓰게 만들고 총기를 작동치 못하도록 공작하는 과점에서 폭도에 들켜 1명 피살, 1명 중상의 귀중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내 성공시켜 26일 새벽 군 병력을 투입한 기습진압작전에서 쌍방간에 콘 피해를 모면케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선량한 시민과 포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음을 확인한 후 효과적인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피해상황>
가, 인명 피해=이번 사태에서 발생된 인명피해는 민간인 1백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의 사망과 민간인 1백44명, 군인 1백9명, 경찰1백44명이 부상된 것으로 밝혀졌는바,
민간인사상자는 중화기로·무강한 폭도들이 방산 업체와 군경으로부터 탈취한 장갑차「트럭」「지프」앞세워 5·20∼5·22일 간 5차에 걸쳐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였을 때 방어중인 계엄군과의 교전으로 사망28, 부상70여명이 발생했고, 시내「버스」·군경차량 등을 마구 탈취한 폭도들이 시위를 선동하거나 무기탈취를 위해 이동 중 음주운전 및 과속으로 인한 전복·충돌 등의 교통사고들을 일으켜 32명의 사망자가 발생되었음이 검시결과 밝혀졌으며 탈취한 소총·수류탄 등 무기류 취급 미숙에 의한 15명의 자체 오발사고와 진압 차 투입된 계엄군에 대한 방어적 무력저항저지에 따른 17명의 학생.
그리고 폭도들간의 강·온 양파간 의사충돌에 따른 상호총격과 평소 원한에 의한 살인 자행 등에 의해 29명이 사망한 것으로 수사과정에서 일단 밝혀졌는바 수사진전에 마라 사망원인이 대체로 구분되리라 전망된다.
특히 군경의 사상피해가 의외로 2백79명에 달하고 있는 것은 사태 초기 시위군중들의 냉정을 기대하면서 부여된 최소한의 자위권마저 억제한 결과이다.
나,물적피해
군용물자=기간 중 폭도들에 의해 피탈 된 무기는 군·경·에비군용중기관총·경기관총·자동소총·M16·M1·「카빈」소총·권총 등 총 5천4백1정에 달하고 있고 5월30일 현재 이중 약 80%가 회수되었으며 탄약 수는 소총탄 28만9천5백43발, 수류탄5백52개,TNT 3천6백 상자를 탈취 당하였고 현재 약70%를 회수했으며, 군용은 「트럭」장갑차 등 3백18대의 각 종 군용차량을 군·방산 업체로부터 탈취, 폭동에 사용 하였는 바 이들 중 대부분은 파괴되어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민간 및 공공재산피해=이번 사태로 야기된 민간 및 공공재산피해액은 현재까지 총2백60억 원 상당으로 추정되며 금후 정밀조사를 함에 따라 더 늘어날 것 이 예상되고 있는바, 공공재산은 광주세무서 등 8개 건물 소실, 도청 등 13개 건물 일부 파손, 차량 68대 소실 및 파손, 기타 장비 비품 6백50여 점 소실 등이며 민간 재산은 MBC방송국 등 건물8동 소실, 광주「가톨릭 센타」 등 43동 파괴, 민간군용 3백81대, 유종 3천여「드럼」, 방송시설 파괴 등이며, 특히 산업체인 아세아 자동차는▲군수차량3백14대▲민수차량82대▲기타18대 등 도합 4백14대의 각종 차량을 피탈 당하는 등 피해를 보았다.

<검거 자 현황 및 처리방향>
가, 검거 자 현황=5월18일 광주일원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한 이후 동사사태와 관련하여 계엄당국이 현지에서 총1천7백40명을 검거 조사하여 1천10명을 기 훈방하였고 5월27일 이후 검거된 5백25명을 포함하여 현재조사중인자는 총7백30명인바, 이들을 거주지별로 보면 전남6백86명, 서울26명, 여타지역이 18명으로서 서울 등 외지에서 투입된 흔적이 있으며,
연령은 20세이하 3백15명, 20대 3백10명, 30대 77명, 40대 이상 28명으로 대부분 6·25를 체험치 못한 연령층이고
직업별로 보면 고교 및 대학생 1백53명(재수생24명 포함), 무직1백26명, 공원83명, 노동79명, 운전사 55명, 농업과 상업이 각각 47명, 점원 44명, 회사원 37명, 기타 59명으로 판명되었다.
나, 금후 처리방향=이번 광주사태에 대한수사를 진행중인 계엄당국은,
선량한 시민·학생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총기·탄약·TNT·장갑차 등·인명을 대량 살상할 수 있는 무기를 대량 탈취, 시민 군을 자처하면서 이를 폭동에 직접 사용했다는 사실과,
계엄군의 투입저지를 위한 장애물 설치방법의 교묘성, 도청투쟁위원회 상황실에 계엄군의 동정이 시시각각 파악 전달된 사실 그리고 즉각 폭도들의 행동방향 등이 제시되는 등 조직적인 배후 조종세의 존재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일부 연행자 가택수색결과 불은 유인물이 발견되는 한편 지하신문이 발간되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사태 악화를 촉진하는 유언비어가 신속 적절하게 날조 유포되었고 이탈하는 선량한 일반시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책동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폭도들의 만행을 계엄군에 전가하고, 상당수의 좌익수가 수용되어있는 교도소를 5차에 걸쳐 공격했을 뿐 아니라 교도소인근에 기관총을 설치, 계속 발사하면서 수용자들을 자극하여 소내 폭동을 유도했던 점등을 예의 분석 배후를 철저히 규명할 계획이며, 조사진행에 따라 주동자·극렬적 악질행위자·살인범 등 범법자들을 엄격히 선별하여 계엄군법회의에 회부, 엄중 처단할 계획이며 일시적인 단순시위가담자나 부화 전동자 등 범법행위가 경미한 자에 대하여는 과감히 석방함으로서 선량한 시민으로 생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 방침이다.

<당부 드리는 말씀>
광주 사태는 그 발단과 동기가 무엇이었고 시비 곡직이 여하했든 간에 다시는 이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여서는 아니 되며 더욱이 지역감정에 연유된 힐항 현상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군이 이번 사태의 와중에서 현지시민들과의 융화에 다소 문제점이 있었으며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중임을 알려드리고 심심한 유감의 뜻을 다시 한 번 표하면서 국민여러분께서는 이번 광주사태의 귀중한 교훈을 반성과 자제의 계기로 삼아 난국극복에 정진하시기를 당부 드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