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탄 등이 전부 바닥났고, 착용한 방석망도 손으로 대충 만들어 경찰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엉성했습니다. 그날 상황은 마치 적은 병력의 공수부대와 무수한 숫자의 시위대가 야간에 패싸움을 하는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금남로에는 시간이 늦어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건물들의 불은 전부 꺼진 상태였고 날씨도 맑은 날이 아니고 그믐 때 정도여서 달빛도 없고, 가로등마저 꺼진 상태였기 때문에 완전히 암흑 속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자고, 물 한 방울 먹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편집자 주> 이 문건은 5월18일 오후 광주에 투입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의 피의자 신문조서 요지다. 안부웅 대대장은 광주에 투입된 이래 계속 시위대에 쫓겨다니다 5월21일 도청 앞에서 포위돼 생사의 기로에 섰고, 시민과 총격전을 벌여야 했던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증언하고 있다.
  안부웅 대대장은 초기에는 “철수하는 31사단 병력에게 실탄을 얻었다”, “전남도청 앞에서 조준사격은 없었다”고 했다가 신문이 거듭되자 “62대대로부터 실탄을 얻었다”, “전남도청 앞 옥상 건물에 대원을 배치해 조준사격을 했다”, “상부 지시없이 중대장과 지역대장들에게 실탄을 분배했다”고 시인했다.
  안부웅 대대장은 “진압봉 하나만 가진 소수의 공수부대가 다수의 군중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가혹한 진압이 벌어졌다”면서 “공수대원의 진압도 강경했지만 광주 시민들의 공수대원 공격도 상당히 과격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광주 사건에 관한 한 군도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관련 내용을 상하 두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 투입된 제11공수 61대대는 시위대와 충돌했으며, 수십 만으로 불어난 시위대에 포위돼 집단발포 하는 등 광주사태의 최일선에 서 있었던 부대다. 사진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 중인 시민들(연합뉴스 제공).
1980년 5월 18일 광주에 투입된 제11공수 61대대는 시위대와 충돌했으며, 수십 만으로 불어난 시위대에 포위돼 집단발포 하는 등 광주사태의 최일선에 서 있었던 부대다. 사진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 중인 시민들(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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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웅 11공수 61대대장 피의자 신문조서(1회)

1995년 2월13일 국방부 검찰부 고등검찰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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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특전여단의 임무

  -1980년 당시 11특전여단의 주둔지는 어디였으며 작전지역은,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에 있었으며 작전지역은 강원도 전역이었습니다.”
  -11특전여단의 편제와 지휘체계, 그리고 지휘관의 인적사항을 진술하시오.
  “11특전여단장은 최웅 준장이었고 여단은 여단 본부와 3개 대대로 구성되었으며 61대대장은 제가, 62대대장은 이제원 중령, 63대대장은 조창구 중령이었습니다. 각 대대는 약 3백여 명으로 3개 지역대로 나뉘어져 1개지역대 당 약 1백 명 정도로 구성되었습니다. 제가 지휘하던 61대대의 1지역대장은 정태덕 소령, 2지역대장은 이종호 소령, 3지역대장은 석희엽 대위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대 산하에 3개 중대가 있었으며 각 중대 산하에는 3개 지대(장교 1명, 하사관 10명)가 있었습니다. 지휘체계는 육군총장-특전사령관-여단장-대대장-지역대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특전여단의 주요임무는 무엇인가요.
  “유사시 적 후방지역에 투입되어 게릴라전 및 저항세력을 규합하여 테러행위 등을 하는 것이 주임무이고 평시에는 충정작전 및 對 침투작전, 기타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평소 어떤 훈련을 하는가요.
  “평시에는 비정규전을 위주로 하는 훈련으로 적 후방지역에서 습격, 매목, 교란 행위 등을 하는 훈련을 합니다. 모든 작전은 팀 단위(중대급 또는 지대급)로 훈련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특전사 부대들은 연초에 외부로 나가 하는 훈련을 안 하기 때문에 주로 충정작전 훈련, 태권도 연마 등을 하며 주특기훈련도 합니다.”
  -충정작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마 유신 때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에서 특전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로 폭동진압 및 대(對)테러행위 등의 임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11특전여단에서는 1980년도에 충정훈련을 실시한 적이 있는가요.
  “예.”

계엄군에 대한 공격은 광주가 처음

  -그 당시 충정훈련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실시했는가요.
  “진압봉으로 대형을 갖추어 데모군중을 분리시켜 해산시키는 훈련을 하는데 설대, 횡대, 종대, 다이아몬드 대형 등이 있습니다. 설대 대형은 시위 군중을 향해 ‘ㅁ'형으로 정렬한 뒤 시위 군중을 향해 돌진,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는 대형이고, 횡대 대형은 도로가 넓을 때 일렬  횡대로 서서 시위 군중을 밀어붙이는 방법입니다. 종대 대형은 중대원들을 종대로 세워 진압병력을 두텁게 세운 뒤 시위 군중을 밀어붙이는 방법이고, 다이아몬드형은 사방에서 데모 군중이 올 때 데모대를 막기 위해 병력을 다이아몬드형으로 배치하여 시위 군중을 막아 내는 대형입니다. 가스탄 발사, 시위대를 체포하는 훈련도 합니다.”
  -시위 군중에 대한 체포임무는 어떻게 훈련했는가요.
  “주로 팀의 선임하사나 몇 명의 병력들이 시위 주동자들을 유심히 관찰을 하고 있다가 해산을 시키면서 동시에 체포하는 훈련을 합니다.”
  -특전사의 시위진압 형태는 시위 군중을 체포하는 것이 주목적인가요, 아니면 해산시키는 것이 주목적인가요.
  “해산을 주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일단 해산시키면 반드시 주동자는 체포하도록 훈련을 합니다.”
  -이미 조사받은 특전사 장교 출신 참고인 진술에 의하면 공수부대원들은 평소 시위진압훈련을 받을 때는 시위대 중에서 주모자들을 살펴 두었다가 시위대를 해산시킴과 동시에 주모자들을 끝까지 쫓아가 체포하는 훈련을 받아 왔다는데 사실인가요.
  “예.”
  -1980년 5월18일~19일 등 광주에서의 초기 시위진압 때 그때까지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과 달리 공수부대원들은 초기에 진압할 때부터 시위대들을 해산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골목까지 쫓아가 시위대들을 체포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5월18일 7공수여단 진압상황은 제가 알 수는 없지만, 5월19일 저희 대대병력이 작전명령에 의해 분산되어 약 10명도 못되는 병력들이 주요 지점에 분산 배치되었다가 시위대들에 의해 병력의 일부가 구타당해 피를 흘리고 하여 여단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62대대와 63대대가 지원을 나왔는데, 비록 같은 대대는 아니지만 피를 흘리고 다친 저희 대대 병사들을 본 6263대대 병력이 흥분하여 금남로에서 시위 진압 시에 쫓아가 체포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피의자는 경찰의 시위 진압방법과 군인의 시위 진압방법에는 그 진압강도에 있어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요.
  “경찰의 시위 진압형태에 대해 제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다 도저히 진압되지 않을 때 군이 출동하는 것이고, 또 국가 위기시에 군이 출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의 진압강도는 경찰보다는 세야 하는 것이 국가를 위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상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출동했는데 출동 계엄군에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고 했던 것은 아마 광주사태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당시 여단장이었던 최웅 의 진술에 의하면 1980년 2월18일경 특전여단을 비롯한 충정부대 및 후방 주요 군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하도록 지시가 내려왔으며, 그 지시를 받은 후 평소 1주일에 4시간 가량 하던 충정훈련을 하루에 평균 2시간 가량씩 일주일에 4~5일씩 하여 연간 계획표보다 2배 정도 훈련을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이라면 1980년도에 들어 특별히 충정훈련을 강화할 만한 이유가 있었는가요.
  “여단장님이 그렇게 기억을 하고 계시다면 그 진술이 맞을 것입니다. 아마 국가 정세가 불안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진압봉, 방석모도 없었다

  -고소고발인들 주장에 의하면 1980년에 충정훈련을 실시한 이유가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대중등 민주인사를 체포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등의 조치를 하는데 있어 발생할 수 있는 시위 등을 사전 예방하고 그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데요.
  “충정훈련은 평소 연간 훈련계획에 들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평소에 하지 않던 충정훈련을 1980년에 갑자기 실시했던 것은 아닙니다. 11공수 대대장들은 강원도에 있어 그런지 몰라도 그 당시 정치상황을 잘 몰랐고, 더욱이 김대중씨를 체포하려 한다는 등의 정치내용은 몰랐습니다. 그러한 낌새를 차릴 만한 정신교육이나 지시가 내려온 적도 없습니다. 저의 대대는 1980년 2월 말경에 팀스피리트 훈련을 했기 때문에 정치적인 감각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1980년 당시 진압봉은 어떤 재질이며 어떻게 준비했는가요.
  “진압봉은 사령부에서 제작하여 대대에 보급해 주어야 하는데 1980년 김포지역으로 출동하기 전에 대대에서 제작하라고 지시하여 개인별로 제작을 시켰더니 엉망이어서 오음리에 있는 제재소에서 대대 운영비로 제작했습니다.
  방석망도 없었는데 제작하라고 하여 처음에는 철사를 구부려서 방석망을 만들었으나 엉망이어서 수송부에서 제작했는데 개인당 1개씩도 보급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고소고발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군이 사전에 정치적으로 발생할지도 모를 소요사태를 대비하여 충정훈련을 계획적으로 실시했다면 준비를 신중히 했을 것인데 사전에 시위진압을 준비했다고 보기에는 엉성한 점이 많았습니다.”
  -충정훈련시 진압봉은 어떻게 사용하도록 훈련을 했나요.
  “폭동진압 교범대로 사용하도록 교육시켰습니다. 양손으로 잡고 앞으로 전진하거나 하며 시위대를 때릴 때는 다리 하반부를 때리되 절대 피를 흘리게는 하지 말라. 왜냐하면 시위대를 때려서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을 다른 시위대들이 보면 사태가 악화되고 시위진압이 어려워지니까 절대 피를 흘리게 하지 말라고 훈련시켰습니다.”
  -고소고발인들의 진술이나 피해자들이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공수부대원들이 지금 피의자가 진술한 바와 같이 진압봉을 사용지침에 맞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시위대를 잡아 머리 부위나 어깨부분을 마구 때려 부상을 심하게 입게 했으며, 또 넘어진 시위대를 군화발로 마구 밟아 피해를 더욱 크게 했다는데요.
  “저희 대대는 시위대와 충돌하여 때리고 군화발로 밟고 하는 상황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다가 해산을 종용하나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고 병사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고 해서 병사들이 다쳐 피를 흘리는 경우도 있었고, 또 다친 동료들을 보고 다른 공수부대원들도 상당히 흥분한 상태기 때문에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심하게 때리고 밟고 하는 상황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고소고발인들이나 청문회 증인들이 주장하는 이런 상황은 시위대 입장에서 주장하는 피해상황입니다. 계엄군 입장에서 보면 가만히 있는 시위대를 추격하여 때리거나 순순히 해산하는 시위대를 끝까지 쫓아가 때린 것이 아닙니다. 공수부대원들은 경계만 하며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하고 있는데 시위대가 먼저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니까 병사들이 흥분하여 때린 격입니다. 공수부대원들도 시위대들이 던지는 돌과 화염병에 무수히 부상을 입었습니다.”

대검은 날이 무디기 때문에 사람 살 못 자른다

  -공수부대원들에게 평소 훈련을 시킬 때 대검은 어떻게 사용하도록 훈련을 시키는가요.
  “대검은 평상시 부대에서도 지역대별로 통합 보관합니다. 왜냐하면 공수부대원들의 성격이 약간 거친 성향이 있어 개인에게 대검을 휴대시키면 내무반 등에서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수부대는 적 지역에서 적을 제압하기 위해 대검을 사용하여 적을 찌른다든지 백병전에 대검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평소 대검 사용법을 집중적으로 연마하는 훈련을 따로 하지는 않습니다.”
  -일반 보병부대에도 평소 개인 기본 장비에 대검이 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최소한 보병군인들보다는 대검 사용법을 많이 훈련시킬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요. 즉 실탄이 떨어졌거나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지 않아야 할 상황에서 총기를 사용하지 않고 대검만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공수부대원들은 주특기가 있기 때문에 폭약을 가지고 훈련을 하는 사람, 투검을 하여 훈련을 하는 사람 등 자기 전문분야가 있습니다. 대검을 사용하는 훈련을 전 대원에게 공통적으로 특별히 많이 시키지는 않습니다.”
  -대검은 평소에 물건을 자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상태인가요.
  “군에서 사용하는 대검은 날이 서 있지 않고 무딘 상태입니다. 대검으로 물건을 자를 수는 없습니다. 광주사태 유언비어 중에 공수부대원들이 대검으로 여자 유방을 잘랐다고 하는데, 물리적으로 군의 대검으로 사람 살을 자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소고발인들은 광주시위 진압 시 공수부대원들이 대검으로 시위대들을 찔러 대검에 의해 피해를 본 시위대들이 많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피의자 생각은 어떤가요.
  “대검에 의해 피해를 본 것을 제가 목격한 바가 없어 판단하기 힘듭니다.”
  -1980년 5월에 광주에 투입되기 전 부대가 언제, 어디로, 무엇 때문에 이동했나요.
  “1980년 5월17일 새벽 주둔지에서 출발, 춘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김포 1공수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당시 출동장비는 어떤 것이었는가요.
  “개인장구로 M16, 군장, 방석모 등과 부대장비로 팀 단위 무전기, 가스 살포용 화염방사기 등을 가져갔습니다. 당시 계엄군으로 출동하면 대학을 점령하고 운동장에 주둔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둔 개념으로 장비를 가지고 다녔던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면 TV, 테니스 라켓 등 개인 사물도 전부 가져갔습니다.”

5월18일 15시 광주로 출동

  -충정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동할 때에는 실탄을 휴대하게 되어 있는가요.
  “예규상 대대가 이동하면 항상 실탄을 대대단위로 통합보관하여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어떤 출동이든 상관없이 실탄을 가지고 가는 것은 맞습니다. 군인이 출동할 때에 실탄을 버려두고 총만 가지고 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김포지역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한 적이 있는가요.
  “5월18일 0시로부터 1공수에서 동국대로 출동, 동국대에 주둔했습니다. 여단본부 전체가 이동해서 5월18일 12시경부터 주둔하려고 천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광주로 언제 출동을 했나요.
  “천막을 한참 치고 있는데 15시경에 단장으로부터 광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출동 당시 상황을 진술하시오.
  “여단장님으로부터 저의 대대인 61대대만 먼저 광주로 출동하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보급지원을 하던 인원, 즉 군수장교, 군의관 등은 제외하고 전투 병력만 먼저 차를 타고 성남비행장으로 갔습니다. 여단본부에서는 여단장님과 여단 작점참모가 같이 갔습니다.”
  -피의자의 소속부대를 그날 어떤 경로를 통해 광주로 이동했는가요.
  “성남비행장에서 송정리 비행장으로 비행기로 이동했습니다.”
  -여단 병력 중 피의자의 대대만 수송기로 광주로 출동한 것은 이례적인 경우로 보입니다. 다른 대대는 열차를 타고 오게 하면서 피의자 소속 대대만 비행기로 급히 광주로 이동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요.
  “비행기 안에서 여단장님이 ‘7여단 2개 대대가 광주에서 고전하고 있어 우리가 지원하 내려가는 것이다. 여단 본부는 열차로 내려올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광주 도착 후의 임무는 여단장님도 구체적으로 모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광주로 출동할 당시 실탄은 개인에게 지급되지 않았는가요.
  “개인에게는 지급되지 않았고 후속 부대가 가져오도록 조치했습니다.”
  -광주 도착 당시 상황을 진술하시오.
  “5월18일 오후 늦게, 그러니까 해가 어스름할 때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하여 버스에 분승한 뒤 조선대로 이동했습니다. 여단장님과 작전참모는 저희와 떨어졌습니다. 조선대에 들어가니 7여단 병력이 숙영준비를 했습니다. 도착한 뒤 병사들에게 밥을 먹여야 되는데 급히 출동하느라 취사도구를 가져오지 않아 7여단에 가서 우리 대대 취사를 할 수 없는지 알아 보니 7여단도 자기 병력들 밥만 할 수 있을 정도의 취사도구밖에 없었습니다. 저녁 밥도 못먹고 앉아 있는데 31사단 군수참모 최종회 중령이 와서 ‘너희들 밥은 먹었느냐’고 하여 ‘취사도구가 없어 밥을 먹지 못했다’라고 하니 최 중령이 깜짝 놀라 취사도구 구해주어 병사들 밥을 먹였습니다. 식사할 때가 저녁 11시경이었습니다.
  식사 후에 병사들을 취침시켰습니다. 저도 약간 잠을 잤는데 새벽 2~3시 사이, 그러니까 5월19일 새벽 2~3시 사이 여단 본대가 열차로 도착하여 조선대에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대가 이미 쳐 놓은 천막을 새로 오는 대대에 할당해 주었습니다. 여단본부는 조선대 학군단 사무실로 들어갔습니다. 주변정리를 한 다음 3~4시 어간에 여단 참모장이 저를 불러 가보았더니 31사단 작전참모가 지도판을 가지고 참모장과 이야기를 하다가 저를 보고 작전명령을 지시했습니다.”

공수부대를 분산배치

  -처음 받은 작전명령은 어떤 것인가요.
  “광주 시내에 7여단 33, 35대대가 지서나 파출소, 주요 목진지에 나가 있는데 이 지역을 인수하여 병력을 배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배치 지점이 너무 많아 제가 항의성으로 ‘어떻게 2개 대대 병력이 맡아야 될 지역을 1개 대대병력으로 배치하라고 하느냐, 또 집결보유 운영해야 하는 공수부대원들을 분산 배치시켜 무슨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고 이야기하니까 ‘작전명령이니 그대로 따르라’고 참모장이 지시하며 ‘61대대는 분산 배치되어 있지만 예비로 4개 대대가 있다. 그러니 여단 입장으로는 너희가 나가도 상관없다’라고 했습니다.”
  -예비로 4개 대대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아마 그 당시에 이미 7공수 33, 35대대가 11여단에 작전배속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61대대 말고도 33, 35, 62, 63대대가 더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31사단 작전참모가 와 있었기 때문에 11여단은 31사단에 작전배속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작전지시를 받고 어떻게 행동했는가요.
  “5월19일 새벽 4시경 작전지시를 받고 대대 숙영지로 내려와 병력을 기상시킨 뒤 지역대장들에게 임무를 주었습니다. 1지역대는 도청, 충장로, 금남로, 2지역대는 동부경찰서 담당 전 지역, 제3지역대는 서부경찰서 담당 전 지역을 담당지역으로 하여 파출소 및 주요 목전지엔 최소 3~4명 이상 팀을 이루어 배치하라고 지시했으며 1~2명이 배치되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광주에 처음 가서 지역이 생소했고, 또 새벽에 어두워 지역을 잘 분갈할 수 없었을텐데 어떻게 작전지역으로 병력들이 찾아 갔는가요.
  “일단 지역대장에게 경찰서를 찾아가 경찰 안내를 받으라고 했으며, 31사단에서 준 지도에 작전지역이 표시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저희 병력을 수송해 준 트럭 운전병들이 그 지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병력을 배치한 다음에는 어떻게 했나요.
  “지역대장들로부터 병력 전개 완료 보고를 받은 뒤 새벽 6시 정도에 여단에 보고했습니다. 그런 다음 제가 병력 배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대대참모 2명을 지프에 태운 뒤 각 지역으로 다니며 병력 배치를 확인했습니다. 아마 09시까지 다녔을 것입니다.”
  -배치 확인을 하고 다니는 도중 시위대와의 충돌은 확인하지 못했나요.
  “새벽이라 그런지 시위대와 충돌은 없었습니다. 배치된 병력들로부터는 ‘이상 무’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특이 상황은 없었습니다. 그 뒤 조선대로 복귀하여 잠시 정돈을 하면서 지내다 세면을 하려고 준비하는데 1지역대장으로부터 무전보고가 왔습니다. ‘충장로 파출소에 배치되어 있던 1개 지대가 시위대에 완전 포위되어 돌과 화염병으로 얻어맞고 있는 상황이다. 지원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1지역대장에게 침착하게 다시 한 번 확인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시위대에 포위돼 공수부대원 6~7명 부상

  -지역대장이 숨넘어가는 듯한 소리로 보고했다면 신속히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왜 침착하라고 지시했는가요.
  “시위대가 계엄군을 포위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확인을 지시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지역대장이 ‘지금 병사들이 엄청나게 당하고 있으니 대대장님이 빨리 나와서 확인을 해 보십시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지프에 작전장교 등을 태우고 금남로로 갔습니다.”
  -가 보니 상황이 어떻던가요.
  “차량 사이렌을 울리며 가보니 어느 은행 앞에 저희 1개팀 10여 명 정도가 2백여 명의 시위대 포위당해 그야말로 돌과 화염병으로 타작을 받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도망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이렌을 울리고 가니까 시위대들이 후속부대가 오는 줄 알고 사방으로 도망갔습니다. 시위대가 해산하고 난 뒤에 보니 최상규 하사는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는 얼굴을 돌로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6~7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고 하던가요.
  “시위대가 충장파출소를 습격했는데 충장파출소를 경계하던 저희 병력이 그것을 막지 못하고 금남로까지 쫓겨 다녔던 것입니다.”
  -특전사에서 작성한 ‘광주사태진압작전(총괄)에 의하면 ’△11여단 61대대 광주지역 지파출소 및 교차로 지역에 지대단위로 병력 배치(04시 7여단 임무 인수 : 31사단장 지시) △시위대 2백여 명 충장파출소에 배치된 8명을 포위하면서 화염병, 각목 등으로 파출소 기습 공격 △이에 계엄군 8명은 포위된 채 금남로로 밀려 나오며 전원 부상(화상, 창상, 골절)’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 기재내용이 지금 피의자가 진술한 충장파출소 상황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상황을 여단에 보고했는가요.
  “여단에 즉시 보고했습니다. 시위 군중들에게 포위당해 우리가 피해를 당했는데 후속부대가 없으면 재차 시위대의 공격이 예상되므로 증원을 해달라고 보고했습니다. 그 당시 시간이 5월19일 10시경이었습니다. 참모장이 알았다고 하며 ‘62, 63대대가 지금 무력시위 중이니 조금 후 그 2개 대대를 금남로로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조금 있다 보니 차량에 탑승한 62대대가 도착, 62대대장에게 충장로 쪽을 맡아 달라고 했으며 그 뒤 63대대가 도착, 금남로 일대에서 노동청 쪽으로 경계를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11여단 전투상보에 의하면 ‘5월19일 10시40분경 충장로 일대에 학생 2백여 명이 집결하여 경계근무 중인 계엄군에게 돌과 화염병을 투척, 이를 제지하자 소요군중들은 순식간에 2천명으로 증가되어 무력시위중인 62, 63대대가 현장에 증원되어 소요 진압’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그 당시 상황인가요.
  “예.”
  -62, 63대대에게 병력을 증원받은 뒤 어떤 상황이 있었는가요.
  “저희 병력은 원래 배치되었던 파출소 등 주요 목지역에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는 무전으로 저희 대대 지역대장에게 가급적이면 시위대와 충돌하지 말고 건물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62, 63대대가 금남로에 증원되고 난 뒤에는 61대대 병력은 금남로에는 배치되지 않았는가요.
  “예, 저의 대대병력은 원래 있던 장소에 그대로 있었고 금남로에는 62, 63대대 병력만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61대대 각 병력들이 배치되었던 곳은 어디인가요.
  “약 40여 군데 이상으로 도청과 각 지파출소 등으로 구체적 지명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62, 63대대가 금남로에 배치되어 있었나요.
  “점심식사 하기 위해 조선대로 복귀할 때까지 62, 63대대가 금남로에 배치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61대대는 점심 식사하러 복귀하지 않았나요.
  “14시경에 조선대로 복귀하여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시위가 한창 진행 중인데 어떻게 조선대로 복귀하여 점심식사를 했나요.
  “점심시간 때 즈음에는 금남로에 일부 시위대만 있었고 다른 특별한 상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광주 상황을 기술한 일부 자료에 의하면 ‘5월19일 오전의 시위에 대한 11여단의 보복은 5월18일 7공수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잔인했다. 시위 규모가 아직 작고 가담한 사람들이 몸놀림이 빠른 학생들이었던 만큼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시위를 구경하던 일반 시민들이었으며, 공수부대원들은 쓰러진 부상자들을 질질 끌고 가 양 손발을 잡고 트럭에 던져 올렸으며,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팬티만 입힌 채 연행하여, 이러한 유혈진압의 서슬에 눌려 19일 오전 시위는 정오 무렵 완전 해산되고 말았다’는데 사실인가요.
  “당시 시위대가 일반 시민들인지 학생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체포한 시위대는 도망가지 못하게 상의를 벗기고 하는 상황은 저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체포된 시위대 경찰에 인계

  -5월19일 오전에 체포한 시위대 숫자는 얼마나 되며 체포된 시위대는 어떻게 처리했는가요.
  “숫자는 잘 모르겠고 체포된 시위대는 전부 경찰에 인계했습니다.”
  -고소고발인들에 의하면 당시 공수부대 병력이 주변에 있던 무등고시학원에 들어가 수강 중이던 학원생들을 구타 후 체포했다는 데, 이때 투입된 이유 및 공부하던 학원생들을 체포한 경위는 무엇인가요.
  “무등고시학원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5월19일 시위 도중 11여단 담당 지역에서 피해를 입은 시위대가 평민당에 접수한 피해자 신고서에 의하면 ‘미도장 호텔 종업원이었던 김병렬, 김영대, 손병섭, 박필호 등은 5월19일 오전 10시경 미도장 호텔 안과 현관에서 난입해 들어온 공수대원에 진압봉과 군화발로 무수히 구타당하고 다시 금남로 노상으로 끌려 나가 구타당해 복부와 머리가 깨지고 호송차 내에서도 무수히 구타당했으며 부대에 가서도 다시 구타당했다. 오전 10시경 상무관 앞 노상에서 학생 4명을 태우고 유동 쪽으로 가던 택시기사 김동채(45, 남)는 자기가 태우고 가던 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에게 구타당하는 것을 항의했다가 개머리판으로 얼굴, 앞가슴, 허벅지 등을 무자비하게 구타당해 이빨 7개가 없어지고 전신 타박상을 입었다. 택시기사 김영만(27, 남)은 오전 11시40분경 호남동 태평극장과 현대극장 사이에서 차로 학생들을 도망가게끔 길을 막았다고 택시에서 강제로 끌려나와 곤봉, M16 개머리판 등으로 전신을 구타당하고 더 이상 운전을 못하게 만든다고 군화발로 손 등을 마구 짓밟혀 손가락을 못쓰게 되었다. 오전 10시경 매형을 문병하기 위해 친구와 같이 금남로를 걸어가던 이용찬(20, 남)은 공수대원에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구타당하고 옷을 벗긴 채 연행된 뒤 정신분열증을 일으켰다’고 신고 되어 있는데 이런 사실을 아는가요.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고소 고발인 및 당시 광주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인 주장하기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통을 으깨버리고, 등과 척추를 짓이겼으며, 심지어 군화발로 얼굴을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곤죽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피의자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병사들에게 교육을 시킬 때에 하반신을 때리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병사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구타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4시 조선대에서 점심식사

  -피의자가 직접 행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인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겠지만 당시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나요.
  “저의 대대로는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대대 병력들은 7~8명 정도씩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위대를 강하게 때렸다면 오히려 시위대에게 얻어 맞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체포하기 위해 골목까지 시위대를 추격한 것은 사실인가요.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이때 검찰관은 사진예술사에서 출판한 ‘광주, 그 날’(황종건 김녕만 사진집)과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출판한 ‘오월 광주’ 등을 보여주었다.
  -지금 피의자가 보고 있는 사진들을 보면 공수부대원들이 체포한 시위대를 집단 구타하고 있는 장면, 얼굴을 얻어맞아 피 흘리는 시민의 장면, 체포한 시위대의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힌 채 트럭에 태우는 장면 등이 있습니다. 이런 사진들을 볼 때 고소 고발인들이 주장하는 공수부대원들의 가혹한 진압행위가 사실이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들게끔 되어 있는데 피의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이 사진 중에서 당시 제가 목격한 장면은 없습니다. 당시 저는 체포된 시위대를 경찰에 넘겼는줄 알았는데 이 사진들을 보니 공수부대원들이 트럭에 체포된 시위대를 태우고 있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5월19일 14시경 조선대로 복귀, 점심식사 하러 간 뒤의 상황을 진술하시오.
  “지금 기억으로는 14시경 61대대도 조선대로 복귀, 병력들을 식사시켰으며 다친 병력은 여단본부로 후송시켰습니다. 식사 후 14시30분경에 여단장님이 헬기로 조선대에 오셔서 대대장들을 집합시켰습니다. 여단장이 ‘지금 금남로 한일은행 일대에 약 2천 명이 집결, 공공시설을 파괴하고 노상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는 등 난동을 피우고 있다. 그러니 4개 대대 전부 출동하여 이를 해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 뒤 여단 작전참모가 작전지역을 분배해 주었는데 우리 61대대는 광주일고에서 시작해 금남로를 따라 도청 쪽으로 폭동 진압대형을 유지하며 진입할 수 있도록 진출하라고 지시받아 차량을 타고 광주일고 부근으로 갔습니다.
  광주일고 부근에서 하차해 진압대형을 유지하며 도청으로 전진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금남로 어느 사거리에 이르러 도청 앞을 바라보니 시위대들이 거의 없고 오히려 좌측 시외버스터미널 쪽에 시위대가 잔뜩 몰려 있어 여단에 이 사실을 보고하니 ‘그러면 방향을 바꾸어 그 쪽으로 가서 시위대를 해산하라’고 하여 방향을 바꾸어 갔습니다.”
  -당시 금남로에서 11여단이 식사하기 위해 조선대로 철수한 뒤의 상황을 설명한 일부 자료에 의하면, ‘당시 11여단의 주력이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조선대로 철수하자 시민들이 그 공백을 틈타 다시 거리로 몰려 나왔다. 시민들은 그들이 직접 목격한 공수부대원들의 야만행위에 격분하여 이제는 학생들의 선도 없이도 스스로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는 금남로에 모여 경찰 경계 병력에게 돌을 던졌다. 연이틀 계속된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한줄도 보도하지 않는 방송의 무책임한 태도에 피가 솟구쳐 全日방송이 들어 있던 가톨릭센터 차고에서 취재차량 2대를 끌어내 불을 지른 다음 경찰의 저지선을 향해 밀어붙였다.
  이 차량은 경찰의 바리케이드에 부딪쳐 폭발했다. 이어 금남로 2가 제일성결교회 신축공사장에서 기름통을 끌어내 불을 붙인 후 경찰 바리케이드로 굴려 폭발시키고, 대형 화분과 공중전화 부스, 교통 철책을 끌어내 바리케이드를 쌓고 경찰과 대치했다. 후미에서는 부녀자들이 보도블록과 각목, 철근, 쇠파이프 등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모두 들고 나왔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피의자가 그러한 상황을 들은 적이 있는가요.
  “그런 상황을 들은 적은 없으며 잘 모르겠습니다.”

5월19일 오후 시외버스터미널 앞 상황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의 상황을 진술하시오.
  “저희들이 그곳으로 가니 시위대가 저희들을 보고 사방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시위대를 추격하면 병력이 분산되기 때문에 추격은 하지 않고 시외버스터미널 로터리 부근에 원형으로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그 곳에서 경계를 계속했는데 간헐적으로 7~8명 정도의 시위대가 돌을 던지는 등 충돌이 있었지만 큰 충돌은 없어 저녁때까지 계속 있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약 2백m 정도 되는 지점에서 차량에 불이 나는 것이 목격되어 1개 지역대 병력을 제가 데리고 가보니 경북 번호판을 단 타이탄 트럭 1대가 불타고 있었으며 운전사로 보이는 사람이 구타당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운전수는 경찰에 인계하여 후송시키고 다시 로터리로 복귀했습니다. 저녁식사 때가 되었는데 비가 부슬부슬 오는 상황이었습니다. 노상에서 비를 맞으며 밥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터미널 근처에서 병력들에게 비를 피해 식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광주상황을 정리한 일부 자료에 의하면 ‘5월19일 오후 4시40분경 대인동 공용터미널 앞에 모여 있던 시민 학생 1천 명과 일부 다른 지역 시위대가 합세해 가드레일과 공중전화부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지금까지의 시위 중 가장 강력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은 터미널 앞에서 61대대 병력과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고, 부근 광주소방서 앞쪽에서도 7여단 35대대에 완강하게 저항했다. 시민들은 도로상에 쌓인 바리케이드 50m 앞까지 다가온 공수부대와 투석전을 벌였다.
  61대대는 장갑차를 시위대에 돌진시키고 백병전을 치르다 7시30분경에야 겨우 이곳의 시위를 진압했으며, 시민들은 많은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이 전투에서 공수부대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계속된 시위진압에 피로해진 공수부대 병력들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단순한 학생시위가 아니라 엄청난 민중봉기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공수부대원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상황과 비교할 때 피의자의 의견은 어떠한가요.
  “저의 대대에는 장갑차가 배치된 적이 없으며, 저희 61대대에서는 이런 상황은 없었습니다.”

착검한 적 없었다

  -11여단 전투상보에 의하면 이 시간의 상황으로 ‘16시45분경 해산된 군중이 시외버스터미널에 재차 집결, 여단은 시외버스터미널에 61대대, 한일은행 앞에 62대대, 광주고교 앞 63대대, 광주소방서 앞에 35대대를 배치하여 소요군중 제압’, ‘과격시위자를 체포(3백여 명)하고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자 군중은 공용버스터미널로 이동(3천여 명), 추격 및 진압 작전 시 시위대는 공용버스터미널에 이르는 주요도로와 건물을 검거, 계엄군에 화염병과 돌을 던짐’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육본 상황일지와 31사단 전투상보에도 당시 시외버스터미널에 2천여 명의 시위대와 충돌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천여 명의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했다면 상당한 충돌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요.
  “전투상보와 육본 상황일지에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기재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기억으로는 5월19일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서 그렇게 과격한 시위상황은 없었습니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시위를 진압하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착검한 상태였나요.
  “저의 대대는 착검한 적이 없습니다. 5월19일이면 저의 대대로서는 진압 초기인데 초기부터 착검하고 진압할 리가 있겠습니까.”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이 평민당에 신고한 ‘피해자 신고서’를 살펴보면, 김인윤(21남)은 5월19일, 공용터미널 앞에서 착검한 공수에 쫓겨 터미널 안으로 피신했는데 공수가 유리창을 부수며 쫓아 들어와 칼로 얼굴을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후두부를 구타했으며 이때 칼에 많은 사상자가 났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진압봉으로 얼굴 등을 구타당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 당시 보고받은 적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참고인으로 조사받은 피의자 소속대대 장교의 진술에 의하면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시위 진압 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의 얼굴을 때려 피를 흘리게 하는 등 과잉진압이 있었다고 진술했는데요.
  “제가 목격한 적도 없고 보고받은 적도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서 시위진압을 할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심리상태는 어떤 상태였나요. 피의자의 지휘에 잘 따르는 상황이었나요, 아니면 지휘통솔이 용이하지 않을 정도로 흥분되어 있었던 상황인가요.
  “5월19일 저의 병사들의 심리상태가 흥분되었던 상황이었다고 판단하지는 않으며 전반적으로 저의 지휘에 병사들이 잘 따랐습니다. 그러나 대대병력이 2백여 명 이상이 되다보니 병사 개개인들의 시위진압 방법이 과잉이었는지 여부는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역대장들이 과잉진압이 있었다고 보고한 적은 없었습니다.
  -특전사 ‘광주사태진압작전(총괄)’에 의하면 ‘22시경 광주역 로터리 부근에서 시위대가 화물자동차(경남 소속, 플라스틱 제품 적재)를 탈취 방화(운전사 부상, 계엄군에 의해 후송)’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 당시의 상황인가요.
  “경남 소속인지 경북 소속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당시 상황이 맞습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노숙

  -시외버스터미널에는 언제까지 주둔했나요.
  “그 곳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나니까 62대대인지 63대대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1개 대대와 35대대 병력이 터미널로 집결했습니다. 그 당시 터미널 건물 문이 잠겨 있어 저희 대대가 건물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날 저녁은 별다른 상황 없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노숙하며 지냈습니다. 거의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5월20일 02시경에 여단장이 대대장들을 소집하여 제가 조선대로 들어갔습니다.”
  -5월20일 02시경 조선대에 소집되어 들어갔을 때 여단장이 어떤 지시를 하던가요.
  “여단장이 직접 지시하시기를 ‘광주 동부지역은 11여단이 맡고, 서부지역은 3여단이 맡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여단 작전지역이 축소된다. 도청을 포함한 동부지역에서 우리가 임무를 수행하면 된다. 가급적 과격한 진압은 하지 말고 선무작전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심키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3공수가 증원되었는 줄 이 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 뒤에 구체적인 작전지침을 받았나요.
  “여단장의 지시를 받은 뒤 참모장과 작전참모로부터 세부적인 작전지역을 다시 배분 받았습니다. 우리 61대대가 배분받은 지역은 금남로 상업은행 부근이라고 지시받아 다시 터미널로 복귀해 병력을 이끌고 새벽에 지시받은 지점에 배치시켰습니다.”

차량시위대 금남로로 몰려와
 
  -5월20일 상황을 진술하시오.
  “그날 오전에는 별다른 충돌상황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1개 내지 2개팀을 주요 목지점에 배치해 놓았는데 12시경 되니까 시위대가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가 계엄군을 습격하는 방법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시위대 중 40~50대 정도의 사람 2~3명이 계엄군에게 먼저 말을 걸어 봅니다. ‘고향이 어디냐, 어느 부대냐, 언제 내려왔느냐’라고 물으나 저희 병력은 답변하지 않고 ‘해산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삽시간에 1백여 명 이상의 시위대가 집결했습니다. 시위대가 집결하면 앞에서 말을 걸던 사람이 군중 속으로 빠지면서 ‘우우’하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면 군중들도 따라하다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순식간에 2~3백 명이 모여 들어 같이 돌을 던지곤 해 할 수 없이 그 곳에서 우리 대대는 처음으로 최루탄을 사용해 진압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저희 대대 작전지역 여러 곳에서 일어났으며, 순식간에 금남로 전체에 수많은 군중들이 집결했습니다. 여단에 즉각 상황보고를 하니 여단에서는 도청을 사수하고 선무작전을 통해 시위 군중을 해산하라고 막연하게 지시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금남로에는 1개 지역대밖에 없었는데 시위 군중은 계속 불어나 도청 쪽으로 진출하려고 해 할 수 없이 노동청 쪽 등에 배치되어 있던 대대병력을 금남로 쪽으로 끌어들여 시위 군중을 막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시위 군중이 많아져 도저히 우리 대대병력으로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때마침 62대대도 시위 군중에 밀려 금남로로 들어와 우리 대대와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62대대장과 협의하기를 도청에서 금남로를 바라보았을 때에 금남로 중앙선을 기준으로 우측을 61대대, 충장로 쪽 좌측을 62대대가 맡기로 협의하고 병력배치를 했습니다.”
  (이때 검찰관은 특전사 전투상보상의 당시 도청 앞 병력 배치도를 보여주었다.)
  -이 전투상보에는 도청에서 금남로를 바라보았을 때 61대대가 충장로 쪽인 좌측에 배치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사실과 다른가요.
  “예, 61대대와 62대대의 위치가 바뀌어 그려져 있습니다.”
  -특전사 ‘광주사태진압작전(총괄)’에 의하면 ‘16시경 대치중인 계엄군(61대대) 배치선 1m 전방까지 40대 남자가 접근하여 협박(내용 : 네놈들이 있던 강원도 오음리 지역의 군인 가족을 몰살키 위해 시민을 현지로 보냈다) 한 후 군중 속으로 뛰어 들며 선동, 시위대 전진 투석, 계엄군 주동자 체포하려다 3명 부상’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피의자가 지금 진술한 상황인가요.
  “예, 그 당시 그런 식으로 시위를 선동했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고소고발인들의 주장 및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조비오 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5월20일 10시20분경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30여명의 남녀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알몸으로 갖가지 기합을 당하고 있었으며 조금이라도 동작이 느린 사람은 사정없이 진압봉으로 구타해, 이를 가톨릭센터 건물에서 지켜보던 조비오 신부가 ‘M16이 있다면 쏘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증언했는데요.
  “저는 그런 사실을 보고받은 적이 없습니다.”

“선무작전으로 해산시키라”고 지시

  -병력배치를 한 다음에는 상황이 어떠했나요.
  “여단에서 지시받은 대로 선무작전을 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시위 군중은 해산하지 않고 오히려 금남로 지하상가 공사장에 있던 돌을 공수부대에게 던지고 화염병도 던져 그때부터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돌 화염병과 최루탄을 투척하는 상호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19시경이 되자 최루탄도 다 떨어지고 날도 어두워지고 해서 약간 소강상태였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와서 ‘지금 무등경기장에 차량 1백여 대가 집결, 금남로를 향해 오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여단에 보고하니 여단에서는 ‘선무작전으로 해산시키라’고만 하고 더 이상 지원도 해 주지 않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차량들이 강습돌파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어 도로상에 장애물을 설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물마다 셔터가 내려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장애물로 사용할 만한 물건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주위를 자세히 보니 화단이 있어 이를 도로에 옮겨놓도록 지시했습니다. 나무로 만든 줄 알았던 그 화단이 시멘트로 만들었는지 너무 무거워 병사들이 겨우 3개 정도를 도로상에 설치했을 즈음에 금남로 끝부분에서 차량들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번쩍번쩍하며 도청을 향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노동청 앞 쪽에서 경찰병력이 시위대 차량에 의해 4명이 압사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금남로에서 도청 쪽으로 밀려 들어오는 차량들을 보니 분명히 저희 병력을 향해 밀고 들어올 것 같아 병력을 인도 쪽으로 비키게 했습니다. 저희 뒤에는 경찰병력도 횡대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이 인도로 비키니까 도로상에는 경찰병력들만 횡대로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경찰병력들은 당황해서 저희들에게 시위차량을 막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지급받은 최루탄 2개씩을 전부 소비한 상태였습니다. 경찰은 최루탄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게 최루탄 달라고 했으나 처음에는 없다고 하다가 ‘그러면 우리는 막을 수 없다’고 하자 그때야 최루탄 한 박스를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최루탄을 대대원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경찰 쪽에 배치되어 있던 페퍼포그 차량을 앞으로 전진 배치시켰습니다.”
  -시위대의 상황이 상상을 초월하여 여단에 어떤 조치를 취해줄 것을 계속 보고했는데 어째서 여단에서는 막연히 선무작전으로 해산시키라고만 지시하던가요.
  “그 이유는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저희 병력들은 시위 군중에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무전기로만 여단과 교신했기 때문에 어떤 이유 때문에 그런 지시를 여단에서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장에 있던 지휘관으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여단 지휘부에서는 도청 앞의 급박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특전사 ‘광주사태진압작전(총괄)'에 의하면 5월20일 작전상황으로 ’광주계엄분소에서 작전지침 하달:시위 군중과 일체의 충돌 회피, 선무활동 강화’라고 기재되어 있는데요. 선무활동으로만 시위진압을 하라는 것이 계엄분소의 지시 때문이었나요.
  “당시 저는 이러한 작전지침이 내려 온 줄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작전지침이 내려오더라도 통상 여단 지휘부로 내려오지 대대장에게는 직접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당시의 상황이 과연 선무활동만으로 시위해산이 가능한 상황이었나요.
  “선무활동만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경찰병력이 시위대 버스에 의해 4명이 압사당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지금 저희들을 향해 오고 있는 시위대 차량이 우리를 깔아뭉갤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병력들에게 퍼져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선무활동으로 도저히 해산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피의자는 어떻게 그 상황을 모면할 생각이었나요.
  “도로상에 화분대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큰 차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빠져 들어오는 작은 차는 경찰 페퍼포그 차량으로 진압할 생각이었습니다.”
  -당시에 장갑차가 배속되어 있지는 않았나요.
  “5월20일 저녁 차량시위 때는 배속된 APC(장갑차)는 없었습니다. 만약 있었다면 APC로 막을 생각을 했겠지요.”

간신히 차량 시위대 저지

  -당시 상황을 계속 진술하시오.
  “페퍼포그 차량을 도로상에 설치한 화분대 사이에 설치하고 있으니까 버스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화분대를 향해 돌진해 오다 장애물을 발견하고 주춤거린 뒤 핸들을 꺽어 중장로 방향인 62대대 쪽 가로수를 받고 정지했습니다. 62대대 병력이 정지한 버스에 최루탄을 투척해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약 10여명 정도의 시위대들을 체포했습니다. 그 버스가 도로를 가로 질러 정지했기 때문에 그 뒤에 따라 오던 다른 차량들이 그 버스에 막혀 더 이상 앞으로 진행하지 못하게 되자 자연히 그 버스가 바리케이트 역할을 해 뒤에 따라 오던 택시, 대한통운 트럭 등도 전부 정지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막히로 얽혀 뒤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니 시위대는 전부 차에서 내려 도망갔습니다. 그때 그 정지 차량을 장애물 내지 엄폐물로 삼아 다시 정렬을 정비했는데, 조금 있다 보니 시위대가 다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몰려들었습니다. 우리 병력은 정지한 차량을 엄폐물로 삼아 시위대를 진압했습니다.
  21시 정도가 되니 소강상태였습니다. 뒤편에 있던 차량과 택시들은 전부 다 빠지고 큰 차량만 남아 있었습니다. 차량을 다시 가져가는 것에 대해서는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5월20일 21시경 이후의 상황을 진술하시오.
  “21시경이 지나자 시위대가 앰프를 단 차량으로 도로상을 돌아다니며 최초로 시위대의 선무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애끓는 듯한 소리로 시민들을 자극하는 방송을 했습니다. 목소리와 억양이 마치 이북에서 대남 방송하는 여자들의 억양과 같아 계엄군 입장에서 보면 전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시민들이 들으면 분노를 느끼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내용은 ‘지금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고 왔다.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야 되겠느냐, 금남로로 전부 모여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방송이 있은 다음부터 시위양상이 격렬해졌습니다.”
  -당시에 시위대들의 무장상태는 어떠했던가요.
  “몽둥이, 쇠파이프, 갈고리, 도끼 등 흉기가 될 만한 것은 전부 다 들고 있었으며 시위상태도 이전과 약간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다는 것인가요.
  “전에는 저희 병력들이 시위대를 향해 돌진하면 잡히지 않기 위해 멀리 도망을 갔습니다. 이번에는 멀리 도망가지 않고 저희 병력들이 돌진하면 잠시 도망갔다가 전진한 병력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올 때면 다시 나타나 원위치로 돌아오는 저희 병력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져 일단 전진한 병력들이 원위치로 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62대대장과 의논하여 서로 원위치로 돌아올 때 보호해 주는 축차진입 및 후퇴를 계속했습니다.”
  -시위대를 어느 정도 체포했나요.
  “우리가 시위대로부터 계속 당하기 때문에 체포할 엄두도 못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시위대에게 안 밀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골목 근처에서는 저희 병력이 수적으로 우세한 시위대로부터 많이 얻어맞은 상황이어서 골목길 쪽으로는 병력들이 서로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당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진압병력 공포에 떨어

  -그러면 그 당시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서로 과잉하여 때리고 하는 상황이었는가요.
  “5월20일 금남로 상황은 계엄군이 시위대를 때렸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 병력이 시위대로부터 구타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병력들이 완전히 의기상실하고 공포감에 눌린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돌이 날아오는 상황에서 할 수 없이 병력들을 향해 ‘대대장과 너희들이 여기서 죽는다. 이 자리를 물러날 수 없다. 죽을 각오를 하고 이 자리를 지키자’라고 병사들을 격려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다음날 새벽 3시정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1여단 전투상보에 의하면 ‘폭도들은 도끼, 쇠파이프, 농기구, 칼, 화염병 등으로 무장했으며 각지에서 계엄군을 공격하여 19시부터 익일 03시까지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의 상황인가요.
  “예, 밤새도록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특전사 ‘광주사태진압작전(총괄)’에 의하면 ‘금남로를 담당하던 61대대가 매복특공조를 편성하여 도로변의 화분대를 이용, 차량 저지를 위한 장애물 형성, 최초 진입하는 버스를 기습, 유리창을 파괴하자 버스는 가로수와 충돌(탑승자 8명 체포, 경찰에 인계). 운전사에게 가담 이유를 문의한 결과 폭도들이 위협, 강제동원임을 확인, 이 때부터 차량 장애물 지대가 형성됨. 기타 후속 차량 80여 대가 장애물에 의해 정차되는 순간 가스탄 투척 후 차량열쇠 회수 및 경찰에 인계’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의 상황인가요.
  “당시 대대 정보장교 장주혁 대위가 몰려오는 시위차량을 보고 자신이 막아보겠다고 하며 자신의 장구를 전부 푼 뒤 진압봉 하나만 들고 돌진하는 버스가 주춤거리를 사이 버스 운전석 쪽의 유리창을 진압봉으로 때려 그것을 피하려고 핸들을 꺾은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정차한 것입니다. 당시 진압장비가 전혀 없는 저희들로서는 이런 방법으로 시위대를 막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익일 03시까지 시위대와 충돌하면서 최루탄 등 진압장비는 충분했나요.
  “최초 차량들이 진입할 때 경찰로부터 얻은 최루탄은 순식간에 다 소비하고 오직 진압봉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경찰병력 도주하다

  -당시 경찰병력들은 어떤 시위진압을 했나요.
  “경찰은 저희들에게 최루탄을 넘겨 준 다음 저희들이 밤을 새워 시위대와 충돌할 때엔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단적으로 정리하면 어떤 상황이었나요.
  “최루탄 등이 전부 바닥났고, 착용한 방석망도 손으로 대충 만들어 경찰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엉성했습니다. 그날 상황은 마치 적은 병력의 공수부대와 무수한 숫자의 시위대가 야간에 패싸움을 하는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금남로에는 시간이 늦어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건물들의 불은 전부 꺼진 상태였고 날씨도 맑은 날이 아니고 그믐 때 정도여서 달빛도 없고, 가로등마저 꺼진 상태였기 때문에 완전히 암흑 속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자고, 물 한 방울 먹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5월20일 경의 광주 시내 전 상황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공수부대원들이 최루탄이 부족하여 전부 소비한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최루탄 보급이 되지 않았는가요.
  “처음 충돌할 때 개인당 최루탄 2발씩 지급받았으며 그날 밤 약 7~8회 밀고 밀리는 상횡이 계속되다 보니 최루탄은 금방 동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들이 시위 군중에게 포위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단 입장에서는 최루탄을 보급해 주려해도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여단본부도 시위대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자기들 공격 막느라고 경황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단에 철수를 건의하거나 실탄을 지급해 달라고 건의한 적이 없는가요.
  “무전으로 여단과 교신할 만한 정신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고해 보았자 계속 선무활동만 하라는 지시만 내려와 더 이상 건의하지도 않았습니다.”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 전투상보에 의하면 5월20일 20시경 시위 군중의 숫자가 계림동 3만, 도청 2만, 전대병원(전남대병원) 앞 1만, 공용터미널 1만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상황과 비교할 때 어떤가요.
  “어마어마한 숫자였습니다. 골목골목마다 시위대로 꽉 찼고, 건물 옥상은 전부 시위대가 점거하여 도로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돌진하는 저희 병력에게 건물 옥상에서 무수히 돌을 던졌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기 부족할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만약 그 당시 지휘관이나 병사들이 겁을 조금이라도 먹고 물러섰다면 그 자리에서 시위대에게 전부 밟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이 5월21일 03시까지 계속된 뒤에는 어땠나요.
  “5월21일 03시경 정도되니까 선동방송을 하던 시위대 차량이 시위대를 향해 ‘조선대로 가자’고 선동했습니다. 그리고는 금남로에서 시위대가 차츰 없어져 제가 여단에 무전으로 ‘지금 시위대가 조선대쪽으로 가는 것 같으니 대비하라’고 보고했습니다. 금남로에서 시위대가 차츰 없어져 소강상태가 계속됐습니다.”
  -5월21일 오전 상황을 진술하시오.
  “5월21일 08시경 시위대가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금남로에 완전히 꽉 찰 정도로 운집하여 저희 병력 약 10m 전방까지 진출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어떻게 진압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시위대로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는 않고 우리 앞 10m 전방까지 전진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병력들에게 ‘눈도 돌리지 말고 서 있으라’고 지시해 병력들은 부동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돌, 화염병, 쇠파이프 등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09시경 정도 되니 어제 선동방송을 하던 여자가 시위 군중 사이를 헤치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리어카를 끌고 앞으로 나왔는데, 나오면서 ‘죽은 사람이 내동생인데 계엄군이 죽였다. 살인마 계엄군을 쫓아내야 한다’는 취지로 선동을 했습니다. 군중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호응한 뒤 칼, 도끼 등을 든 사람들이 시위대의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병력 바로 앞에까지 와서 도끼로 병사들의 철모를 툭툭 치면서 ‘이 새끼를 이걸로 골을 빠개?’ 그리고 가위, 칼 등을 눈앞에 대고 ‘이걸로 눈을 쑤셔버려?’ 등의 위협을 해 우리 병사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병력들은 꿈쩍도 않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하던 여자가 대화를 하자고 제의하여 62대대장이 앞으로 나가 여자와 대화를 조금 하고 있으니까 갑자기 군중 속에서 62대대장을 향해 돌이 날아와 62대대장이 대화를 하다 말고 들어와 대화가 중단되었습니다. 여자가 방송을 통해 ‘남자가 칼을 뺐으면 무라도 잘라야지’라고 하며 다시 나오라고 했으나 62대대장이 안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63대대장과 35대대장도 우리 지역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63대대장 보고 ‘당신이 말을 잘 하니까 당신이 나가서 이야기 한번 해 보라’고 하자 ‘35대대장과 나는 경상도 사투를 쓰니가 안 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제가 나가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밀려오는 시위대들을 왜 해산시키지 않고 대화에 응할 생각을 했던가요.
  “그날 오전에는 시위대가 먼저 돌과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고, 또 시위대의 숫자가 엄청나 충돌이 있었다가는 저희 병력들이 전부 맞아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병사들도 상당히 불안해 했기 때문에 충돌할 때까지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대화에 응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도청을 사수하라”

  -계속 상황을 진술하시오.
  “대화를 해보니 시위대가 요구하는 내용이 3가지 있었습니다. ‘계엄군은 즉각 철수하라, 체포해 간 사람들을 즉각 석방하라, 계엄군은 폭력을 쓰지 말라’고 요구하여 잠시 기다리게 한 뒤 대대장들과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를 의논한 뒤 ‘우리는 전방 지휘관이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인이기 때문에 도청을 사수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상 우리 마음대로 철수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들이 요구했던 사항을 상급부대에 보고하겠다. 둘째, 체포한 사람들은 모두 경찰에 인계했기 때문에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 시위대는 없다. 셋째, 우리 계엄군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 국민으로 구성된 군인이다. 우리가 쓸데없이 폭력을 쓰겠느냐, 지금 봐라, 당신들이 폭력을 쓰지 않으니까 우리도 폭력을 쓰지 않고 있지 않느냐’고 답변했습니다. 우리의 답변을 듣고 도지사와의 대화를 요구해 여단에 보고하니 ‘답변을 잘했다’고 하며 도지사와 연락해 만나게 하라고 해 35대대장으로 하여금 도지사에게 안내토록 했습니다.
  여자와 남자 3~4명 정도가 시위대 대표로 나와 35대대장의 안내로 도청에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광주시장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우리 쪽으로 오더니 62대대장에게 시위대와 대화를 요청하며 시위대를 향해 앞에 서 있는 택시 지붕 위로 올라가 ‘광주시장입니다’라고 이야기한 뒤 ‘광주시 만세’라고 하자 시위대가 함성을 지르며 시장을 에워싸고 시위대 쪽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조금 있으니 경찰 헬기 한 대가 도청에서 이륙하더니 도청 상공을 선회하면서 ‘나는 전남도지사다. 지금 계엄 회의 차 전교사로 가는데 오늘 낮 12시까지 계엄군을 철수시키겠다. 시민들은 모두 해산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3회에 걸쳐 방송한 뒤 전교사 쪽으로 갔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여단에 무전으로 우리의 철수여부에 대해 문의하니 약간 시간이 경과된 뒤에 무전으로 연락오기를 ‘철수계획이 없으니 도청을 사수하라. 그리고 계속 선무활동을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이 12시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도지사가 철수시키겠다던 12시를 기다리면서 시계를 자주 보았기 때문에 시간을 기억할 수가 있었습니다. 12시가 되니까 운집한 시위대가 ‘왜 12시가 되었는데도 물러가지 않느냐’며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단에 다시 한번 확인을 했더니 ‘지금 계엄회의가 계속되고 있으니 아직 알 수 없다’고 회신이 와서 제가 시위대에게 ‘지금 계엄회의가 계속 중이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시위대가 웅성웅성해져 살펴보니 시위대 뒤편에서 장갑차와 시위대가 가득찬 5t 군용트럭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몰고 저희 병력 앞으로 나와 장갑차와 트럭 등을 저희 병력을 향해 횡으로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병력들과 시위대 차량이 마주 보고 있게 된 것이지요.”

장갑차에 깔려 공수부대원 1명 사망

  -당시 계엄군은 어떤 차량들이 도청 앞에 있었는가요.
  “61대대와 62대대가 시위대 쪽으로 제일 전면에 나가 있었습니다. 저희 대대에는 장갑차가 배속되지 않아 전면에 병력들만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앞에 시위대의 장갑차와 군용트럭에 탄 시위대가 보였는데 시위대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보니 총을 가진 시위대가 군데군데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병력의 뒤에는 62대대 뒤에 장갑차가 1대 있었고, 그 장갑차 뒤에 63대대 1개 지역대 병력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위대가 몰고 나온 장갑차는 신형 장갑차로서 바퀴가 궤도로 되어 있지 않고 고무타이어로 된 것이 맞는가요.
  “예.”
  -당시 계엄군이 몰고 나온 장갑차는 궤도가 있는 장갑차였는가요.
  “예.”
  -12시 넘어서의 상황을 진술하시오.
  “13시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와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피의자의 청문회 때 진술에 의하면 13시가 되기 전에 시위대가 “10분전, 5분전”하는 소리를 외치다 13시경이 되니까 돌진해 들어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청문회 당시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당시 장갑차에 깔려 죽은 계엄군은 시위대 장갑차에 깔려 죽은 것이 아니라 계엄군 장갑차가 돌진하는 시위대를 보고 후진하다 그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고 하는데 피의자의 생각은 어떤가요. 왜냐하면 당시 시위대 장갑차는 바퀴가 고무타이어였는데 계엄군 장갑차는 궤도였기 때문에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은 것은 계엄군 장갑차가 후진하다 깔려 죽은 것이라고 하는데요.
  “당시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은 것은 저의 대대상황이 아니라 약간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는 순간 시위대 쪽에서 총을 쏘는 것을 피의자가 직접 보았나요.
  “저의 대대는 당시 도청을 향해 시위대를 등지고 도망가는 상황이어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시위대 쪽에서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계엄군이 돌진하는 시위대의 장갑차를 보고 발포한 것은 아닌가요. 시위대가 발포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나요, 아니면 그 총소리가 M16 총소리가 아니라 카빈 총소리라는 것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었나요.
  “제가 목격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카빈 총소리인지 여부를 확인했던 것도 아닙니다.”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 된다’

  -당시 상황을 계속 진술하시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하고 나간 뒤 저의 대대 정보장교인 장두혁 대위로부터 62대대 이창호 대위가 얼굴에 약간 스칠 정도로 총알을 맞아 비틀비틀 하길래 자기가 부축해 주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 뒤 도망을 가 분수대에 도착한 후 전부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4개 대대병력이 서로 뒤섞인 상태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시위대도 더 이상 분수대 쪽으로 돌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약간 소강상태였습니다. 대대장들이 분수대 옆 상무관 쪽에 모여 철수할 것인지 여부에 대해 토론을 했는데 62대대장이 ‘명령도 없는데 우리가 임의로 철수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 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뚜렷한 결론없이 도청을 계속 사수한다는 생각으로 자기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조금 있으니 여단으로부터 무전이 왔습니다. 참모장이 지시하기를 ‘20사단과 교대할 예정이니 헬기장을 확보하라’는 말을 하여 제가 ‘상무관 앞과 도청 옥상은 헬기가 착륙할 수 있다. 염려 말고 교대 병력을 보내 달라’고 한 뒤 교신을 끝냈습니다.”
  -당시 시위대가 장갑차를 몰고 들어오면서 동시에 계엄군을 향해 발포했다면 이러한 중대한 일을 여단에 보고했나요.
  “그 일을 여단에 보고했는지 여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여단에 실탄을 지급해 달라고 무전으로 건의하지 않았는가요.
  “5월20일 밤 격렬한 시위상황에 참모장과 교신할 때 참모장이 당시 시위상황을 모른 채 계속 선무작전으로 진압하라고 지시하니까 제가 화가 나서 참모장에게 ‘실탄이라도 보내든지 하라’고 쏘아붙인 적은 있지만, 5월21일 도청 앞에서 제가 여단과 교신하면서 실탄을 지급해 달라고 건의한 적은 없습니다.”
  -이미 조사받은 최웅 , 이제원, 조창구 등은 피의자가 도청 앞 분수대에서 여단에 실탄을 달라고 건의했다고 진술하는데 피의자의 생각은 어떤가요.
  “저는 분명히 여단에 실탄을 달라고 5월21일 낮에 건의한 적이 없습니다.”
  -참모장과 헬기 착륙 여부에 대한 교신이 끝난 뒤 상황을 설명하시오.
  “교신이 끝난 뒤 조금 있으니 UH-1H 헬기가 상무관 앞에 착륙하길래 제가 벌써 교대병력이 왔나 하고 살펴보니 상무관 앞 쪽에서 일반 보병부대 전투복을 입은 병사들이 헬기 쪽으로 뛰어 가서 탑승을 했습니다. 제가 주위 병사들을 보고 ‘저 병력은 뭐지?’ 하는 동안 헬기는 이륙했는데, ‘그 병력은 31사단 병력인데 MBC 방송국을 경계했던 병력이랍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혼자 생각하기를 ‘배속 받은 병력은 나 몰라라 하고 제 자식만 챙기는 놈들’이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대대장님! 병사들이 31사단 병사들로부터 실탄을 얻은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제가 ‘그러면 안 되는데, 병사들이 실탄을 가지면 안 되고 최소한 중대장급 이상이 휴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병사들이 진짜 실탄을 얻었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당시 저도 너무 피곤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제가 병사들이 실탄을 얻었는지, 그리고 병사들에게 배분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 실책입니다.
  당시는 병사들이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실탄을 얻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31사단 병력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쉬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갑자기 총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야’하고 일어나서보니까 분수대 옆 충장로 쪽으로 시위대 버스 1대가 저희 병력을 덮쳤습니다. 당시 저희 병력들은 쉬느라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버스가 달려드니까 누군가가 버스를 향해 사격을 한 것입니다. 버스는 사격을 받고 분수대에 부딪친 뒤 방향을 바꿔 충장로 쪽으로 가다 담을 들이받고 정지했습니다.
  이때 관광호텔 쪽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동시에 계엄군을 향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차를 향해 공수부대원들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사격을 하니까 시위대 차량이 주춤하더니 다시 뒤로 물러났습니다. 제가 ‘큰일 났구나’ 생각하며 뛰어 다니면서 사격 중지를 외쳤습니다. 사격 중지를 외쳐도 동시에 사격 중지가 되지 않아 제가 병사들 속을 뛰어 다니며 발길로 걷어차면서 사격 중지를 외쳤습니다.
  사격을 중단시킨 뒤 병력을 집합시켜 상무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62대대장은 충장로 방향에 있는 농협 공판장 쪽으로 들어가면서 62대대에 배속된 장갑차 소대장에게 시위대의 장갑차가 들어오면 막으라고 지시한 뒤 장갑차 1대만 남겨 놓은 채 도청 앞에서 주변으로 전부 피신했습니다. 이제 도청 앞 광장에는 계엄군이 거의 없게 된 것입니다.”

실탄지급 지시는 없었다

  -당시 도청 앞 공수부대 병력들에게 지급된 실탄이 조선대에 통합 보관되었던 11여단의 실탄이 지급되었던 것은 아닌가요.
  “저희 여단 실탄이 지급되었던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만약 여단에서 저희들에게 실탄을 지급했다면 여단에서 최소한 대대장에게 무전으로 실탄 지급 사실을 사전 연락했을텐데 그런 무전연락을 받은 적이 없고, 또 다른 대대장들로부터도 그런 사실을 들은바 없었습니다. 만약 저희들이 모르는 사이 여단으로부터 실탄이 지급되었다면 저희들이 통합 보관하던 실탄이 병사 개인당 60발씩이니까 아마 대대 당 1만8천 발 정도 지급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숫자의 실탄이 지급되었다면 병사들이 사격을 엄청나게 해 피해가 막심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여단에서 지급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63대대장이었던 조창구의 진술에 의하면 ‘31사단 병력이 가지고 있던 실탄인지 알 수 없으나 63대대 작전장교 차정환 대위가 61대대장으로부터 실탄을 수령해 와 저에게 보고하기를 실탄을 장교들에게만 약 10발씩 지급했다고 보고했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사실인가요.
  “제가 실탄을 차정환 대위에게 지급한 적은 없습니다. 61대대장인 제가 왜 다른 대대작전장교를 불러 실탄을 지급하겠습니까. 63대대장의 진술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63대대 작전장교 차정환 대위는 효천역 앞 오인사격 때 전사했습니다. 차정환 대위로부터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당시 피의자 소속 대대에서 근무했던 한 장교의 진술에 의하면 ‘도청 분수대 주변 광장에 헬기가 한번 왔다 갔으며, 곧 대대본부장에서 중대장들을 오라고 하여 가 보니 중대장들에게 실탄을 분배해 준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대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전장교로부터 중대장 1인당 10발 정도 실탄을 지급받았다’고 진술했습니다. 또 다른 장교에 의하면 ‘당일 10시30분경 대대본부에서 중대장들을 오라고 하여 중대장들이 뒤에 갔다 왔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 때 중대장들이 대대장 앞에서 1인당 10발 정도 실탄을 받아 왔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요.
  “만약 제가 실탄을 나누어 주려면 지역대장을 불러 실탄을 지급하지 왜 중대장을 불러서 지급을 하겠습니까. 특전사는 지휘계통이 대대장-지역대장-중대장 순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제가 중대장들에게 실탄을 나누어 주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10시30분경에 실탄을 지급했다는 것은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병사들에게 실탄을 지급하라고 지시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1988년 당시 광주청문회에서 피의자는 장석화 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 내용 중 장의원이 ‘증인이 실탄을 분배했지요?’라고 물으니 ‘했습니다’라고 증언했는데, 왜 지금은 실탄을 분배하지 않았다고 진술하는가요.
  “청문회 때 실탄을 분배했다는 이야기는 반드시 중대장 이상 장교들이 휴대해야 한다라는 뜻에서의 분배입니다.”

31사단으로부터 실탄 얻어

  -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인 김영택씨 진술에 의하면 ‘도청 3층 복도에서 장형태 전남도지사와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데, 오전 10시10분경 분수대 앞에서 공수부대 병력에게 실탄이 분배되고 있었다. 시위대 장갑차가 공수부대 저지선을 향해 돌진한 시간은 오후 1시가 조금 못된 상황이었고, 공수부대가 총격을 가했다는 시위차량이 돌진한 것은 그 바로 뒤인 12시58분경이었다. 그 직후인 정각 오후 1시 갑자기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집단 발포가 시작되었다’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10시경이면 저희 대대는 관광호텔 앞에서 시위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시간입니다. 당시 분수대 앞에는 63대대와 35대대가 있었으며, 오후 1시에 애국가가 흘러 나왔다는 것은 절대 들은 일이 없습니다. 그 시각은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하여 들어올 시각이기 때문에 설령 애국가가 나왔다 해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도청 건물에서 애국가가 흘러 나왔다면 도청 건물 안에서는 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 시위대의 방송차량에서 흘러 나왔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경황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 차량 엔진소리와 장갑차 경적 소리가 상당히 크게 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피의자는 당시 도청 앞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에게 어떤 경로를 통해 실탄이 지급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첫째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이 공수부대원들에게 주고 갔든지, 아니면 공수부대원들이 31사단 병력에게 빼앗았던지 해서 31사단으로부터 실탄을 얻었을 가능성, 둘째 그 당시 626335대대 중 어느 대대가 실탄을 가지고 도청 앞에 출동해 있었던지 하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31사단으로부터 실탄을 얻었다면 당시에 철수한 31사단 병력이 약 7~8명 정도, 그러니까 1개 분대 병력 정도밖에 안됩니다. 실탄을 많이 휴대하고 있었을까요.
  “분대 병력이기 때문에 실탄 지급이 얼마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장들이 중대당 10발 정도씩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1개 대대 당 약 1백 발 정도로, 4개 대대 전부 합쳐봐야 4백 발 정도입니다. 만약 31사단 병력 7~8명이 개인당 60발씩만 갖고 있더라도 그 정도는 됩니다. 그러나 31사단 병력이 휴대하고 있던 실탄을 전부 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넘겨주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도청 앞에 배치되어 있던 다른 대대가 당시 실탄을 휴대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나요.
  “예, 당시 실탄은 여단 통합 보관이 아니라 대대단위 통합 보관이었기 때문에 당시 다른 대대들이 실탄을 휴대하고 도청 앞에 배치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실탄 가진 병사들 사격통제 못해

  -그러면 당시 실탄이 어떤 경로로 생겼는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실탄이 지급된 뒤 돌진하는 시위차량을 향해 사격 명령을 내렸는가요.
  “사격명령을 내린 적은 절대 없습니다. 순전히 급박한 상황에서 부대원들이 조건반사적인 사격, 그러니까 돌진하는 시위대의 차량에 압사 당할지도 모른다는 심한 공포감으로 인해 실탄을 삽입하여 발사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당시 실탄을 가진 병사들을 사격통제하지 못한 점은 인정하는가요.
  “예, 하지만 저의 대대뿐만 아니라 다른 대대도 전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5월21일 10시30분경 도청 뒤에서 실탄을 지급받은 3개 소대 가량의 병력이 맨 앞쪽 병력과 교대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 시각에는 63대대와 35대대가 도청 분수대 쪽에 있었고 31사단 병력이 철수한 것은 13시가 넘어서입니다. 만약 10시30분경에 실탄이 분배되었다면 분수대 앞에 있던 6335대대가 실탄을 휴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밖에 안됩니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12시경 러닝셔츠만 입고 한 손에 태극기를 든 청년이 탄 장갑차가 도청을 향해 질주했는데 도청 쪽에서 공수부대원의 조준사격에 의해 총을 맞은 그 청년은 목이 뒤로 젖혀진 채 장갑차는 동구청 쪽으로 되돌아 왔다는 데 사실인가요.
  “그 시각에는 도지사의 헬기 방송으로 인해 시위대는 공수부대가 12시경에 철수할 것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태극기를 든 청년이 탄 장갑차가 도청을 향해 질주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만약 도청을 향해 질주하는 장갑차를 향해 공수부대원들이 사격을 했다면 13시까지 시위대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당시 61연대장이 탄 헬기가 도청 부근으로 왔다가 시위대로부터 총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목격한 적이 있는가요.
  “저는 목격하지 못했으며 나중에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상무관 안으로 들어 간 뒤의 상황을 진술하시오.
  “저의 병력은 체육관 안 마루에 주저 앉아 휴식을 취했습니다. 16시경 쯤 조선대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여단으로부터 받아 다른 대대장들과 의논한 뒤 저의 대대가 앞장서고 62, 35, 63대대 순으로 철수하자고 결정했습니다. 상무관 앞에서 노동청 쪽으로 나가려고 하니 도로상에 불탄 차량들이 있어 APC로 불탄 차량을 밀어내고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철수 도중에 보니까 도청 주변 도경이 있는 곳에서 땅에 TNT를 묻은 뒤 폭발시키는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도청에서 조선대로 가기까지는 별 상황 없이 철수했습니다.”
  -당시 시위대가 철수하는 공수부대를 향해 건물 등에서 발포하지 않았는가요.
  “61대대가 선두에 서서 상무관에서 나와 바로 상무관 옆길로 갔습니다. 도청 앞으로 다시 가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시위대들이 총을 쏘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조준사격 없었다

  -당시 도청의 11여단은 APC로 도로를 왕복하면서 캐리버 50을 무차별 난사해 퇴로를 확보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저의 대대는 바로 선두에서 철수해서 그런지 그런 상황은 없었습니다.”
  -조선대로 철수한 뒤의 상황을 진술하시오.
  “조선대에 해지기 전이니까 약 17시경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병사들을 식사시킨 뒤 병사들에게 실탄을 휴대시키라는 지시를 여단 작점참모로부터 정식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조선대에 통합 보관되어 있던 실탄을 병사들에게 기본 휴대량인 60발씩 분배했습니다.
  철수는 63대대, 여단본부, 62대대, 61대대 순으로 했는데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각 대대는 도보로 조선대 뒷산을 거쳐 주답마을로 갔습니다. 주답마을로 철수하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으며 조선대 주변 건물에서 시위대가 저희들을 향해 사격을 했습니다. 응사하려 했으나 보이지 않아 응사하지 않고 우리 위치를 노출하지 않은 채 산을 넘어 주답마을로 갔습니다. 1개 여단 병력이 야간에 이동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려 우리는 소태동을 지나 대로로 야간행군을 했습니다. 주답마을에는 5월22일 새벽 해 뜨기 전에 도착해 병사들을 취침시켰습니다.”
  -5월22일 주답마을에서의 상황을 진술하시오.
  “5월22일 10시경 여단장님이 헬기로 주답마을에 오셨습니다. 그 당시 주답마을에 도착한 대대가 61대대밖에 없어 저희 대대가 화순방면 도로를 봉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대대 중 3지역대와 1지역대를 소태동 뒷산에 광주 시내 쪽을 향해 배치하고, 2지역대 중 2분의 1일 대대본부와 같이 소태동 뒷산 아래 배치시켰습니다. 2지역대중 2분의 1은 62대대를 따라 갔는데 5월22일 오후에야 도착했습니다.”
  -5월23일 상황을 진술하시오.
  “5월23일 08시경 시위대가 탄 버스를 총격살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는데 그 사건은 62대대 상황이어서 그런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여단으로부터 62대대가 가매장하는 데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은 것은 기억이 납니다.”

보병학교 교도대와 오인사격

  -5월24일 상황을 진술하시오.
  “5월24일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한 후 10시경 20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철수할 준비를 하라고 여단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출발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20사단 병력이 저희 지역으로 와서 그 차량을 이용해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철수 순서를 여단 작전장교가 구두로 전달했는데 1제대로 63대대, 여단본부대, 제2제대로 61대대와 62대대가 출발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철수 준비를 시키고 있는데 63대대장이 와서 ‘형님이 앞장서십시오’라고 이야기해 제가 ‘작전명령으로 여단에서 63대대가 먼저 가라고 지시했는데 왜 내가 먼저 가느냐, 63대대가 먼저 출발하면 우리 대대병력을 빼내 우리도 출발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63대대의 차정환 대위가 대대 병력을 트럭에 태워 63대대장 쪽으로 오니 대대장이 차 대위 보고 화를 내어 제가 ‘구두 명령도 명령이니 작전명령대로 움직이자’고 해 63대대가 먼저 출발했습니다. 여단본부까지 합해 1개 제대 30대가 먼저 출발하고 다음 트럭 15대를 저의 대대가 받아 62대대와 같이 출발했습니다. 지프를 타고 언덕을 넘어가니까 앞서 가던 제1제대 방향에서 계속 조총 소리가 났습니다.
  잠시 후 ‘꽝’하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연기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63대대장을 무전으로 호출했더니 응답이 없었고 63대대 후미까지 접근해 보니 63대대 앞 쪽에서 사격이 있었습니다. 제가 사격중지를 지시하며 63대대 앞쪽으로 가는 도중에 여단장으로부터 무전이 와 ‘63대대 무슨 일이야’고 하여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 쪽으로 가는 도중입니다’라고 답변한 뒤 63대대 앞 쪽으로 가보니 장갑차가 부서져 있었고 심한 총격전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보병부대 병력들이 도보를 봉쇄하고 있어서 ‘너희들 뭐야’라고 했더니 보병학교 교도대라고 했습니다.
  조금 있다 여단장님이 헬기로 오셨습니다. 장갑차 안을 보니 63대대장이 부상당해 있었습니다. 부상자들을 헬기로 후송하고 주변 정리를 한 뒤 나머지 여단 병력을 이끌고 송정리 비행장으로 갔습니다.”
  -그 당시 효천역 쪽으로 가는 도중 양쪽 마을을 향해 공수부대원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저희 대대는 당시 이동 대열 후미에서 제2제대로 출발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여 사격이 이루어졌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당시 총격 사건이 발생한 뒤 공수부대원들이 주변 마을에 들어가 시위대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 청년들을 끌어내 사살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그 당시 부서진 장갑차 앞에서 여단장님과 사태 수습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알지 못합니다. 마을을 수색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도 없습니다.”
  -송정리 비행장에는 언제 도착했나요.
  “어둑어둑할 때쯤 도착해 격납고에 들어가 숙영을 했습니다. 그 날부터 5월25일까지 특별한 상 황없이 지냈습니다. 5월26일 특공작전을 한다고 여단장이 저와 62대대장을 불렀습니다. 도청은 61대대장이 들어가고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은 62대대장이 들어가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격납고 돌아와 준비하고 있는데 조금 있다 다시 지시가 내려와 ‘도청은 안들어간다. 관광호텔과 전일빌딩이 여단의 목표다. 1개 중대를 출동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고 저의 대대에서는 제2지역대 중대장인 최영준 대위와 각 지역대에서 똑똑한 1개 지대를 차출하여 3개 지대 1개 중대를 새로 편성했습니다.”
  -특공작전 상황을 진술하시오.
  “새로 1개 중대를 편성해 준비하고 있으니까 버스가 와서 그 중대를 태워 어디론가 갔습니다. 그리고는 특공작전이 있는 5월27일에도 저는 계속 송정리 비행장에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최영준 대위가 특공작전이 끝난 후 보고하지 않았나요.
  “최영준 대위가 보고하기를 ‘관광호텔과 전일빌딩보다 YWCA가 더 시위대 저항이 강하여 그곳에 들어가다 우리 병사 2명이 총격을 입었다. 전과도 상당히 많았다’고 보고했는데 구체적인 숫자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특공작전이 끝난 뒤의 상황을 진술하시오.
  “송정리 비행장에 있다가 하루 정도 후 기차로 서울 경희대학교로 복귀하여 광주에서의 상황은 끝났습니다.”
  -더 이상 유리한 증거나 진술할 내용이 있나요.
  “저희들은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뿐입니다. 광주사태를 생각해 볼 때 5월21일 도청 앞에서의 상황을 상급부대나 더 높은 사람들이 정확히 판단하고 공수부대를 일찍 철수시켰다면 도청 앞 집단 발포와 같은 불행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진압행위가 과도했다고 이야기하나 당시 시위대의 공수부대원들에 대한 공격도 상당히 과도했고, 오히려 시위대가 먼저 공수부대원들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집단구타를 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진압했다기보다는 쌍방간의 몸싸움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래서 공수부대원들의 과잉진압을 주장하는 것은 시위대의 시위행태를 모르고 하는 일방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시민들도 피해자이지만 저는 군이 더 큰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불행한 사태였다고 생각합니다.”(하에서 계속)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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