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는 아마 깜짝 놀랐을거에요”

입력 2019.05.17 (15:36) 수정 2019.05.1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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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경찰 발표 '광주 선동 간첩 이창용 검거' 기사와 전날 검거된 '남파 간첩' 홍종수

"북한에서는 아마 '이창용' 발표가 나왔을 때 깜짝 놀랐을 거에요"

광주민주화운동이 피로 물들던 1980년 5월 24일, 경찰이 간첩 홍종수를 '광주 선동 남파 간첩 이창용'으로 날조해 발표합니다. 훗날 이 기자회견을 두고 간첩 홍종수가 털어놓은 이야기입니다.

'간첩 이창용'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도 광주민주화운동 '북한 배후설'을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이름입니다. 경찰의 이 발표 때문입니다.


하지만, 홍종수는 자신을 남파시킨 북한에서조차 당시 경찰 발표에 깜짝 놀랐을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전날 서울역에서 붙잡힌 홍종수는 윗옷에 보관했던 독침과 독약으로 자살을 시도하려다 실패하자 나중에는 혀를 깨물어 자해했습니다. 당시 기자회견 화면을 보면 홍종수의 입이 눈에 띄게 불룩해 보이는데 자해한 상처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하는 이유는 홍종수가 그 뒤로도 한 달 가까이 말을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섭니다.

KBS 탐사보도부가 입수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의 홍종수 진술기록(2008년)을 보면 당시 상황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얘기하라고 하는데 혀가 아파서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밥도 가져다주는데 안 먹게 되었죠. 그렇게 있었던 것이 약 보름 정도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당시까지는 전향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술 역시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체포 직후 이름을 묻길래 '이창용'이라는 가명만 손으로 써 줬을 뿐입니다."

진술은 고사하고 이렇게 기초적인 필답 진술조차 거부한 자신을 검거 바로 다음날 경찰이 '광주 선동간첩'으로 둔갑시켰다는 겁니다. 내용을 더 볼까요.

"'광주사태를 선동하라는 임무였다'라고 언론에 나왔는데 실제 제 임무는 그게 아니었잖아요. 제가 (평양)기지를 11일에 떠났는데 무슨 수로 18일 발생한 광주사태에 개입하였겠습니까? 남파공작원의 임무는 보통 1년~3개월 전에 부과됩니다. 그래야만 전술을 연구하고 구상할 것 아닙니까?"

요약하면 '남파간첩'은 맞지만, 당시 자신의 임무는 '광주선동'이 아니었다는 거죠.
그래서 발표 당시 이를 들은 북에서도 놀랐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사망한 홍종수의 이 말은 사실이었을까요.

'광주 간첩 이창용'은 날조

KBS 탐사보도부는 간첩 홍종수에 관한 검경 수사기록 3권 900여 쪽, 군이 작성한 정보 기록 10여 쪽을 39년 만에 단독 입수해 살펴봤습니다.

KBS 탐사보도부가 39년만에 단독 입수한 간첩 홍종수의 수사기록KBS 탐사보도부가 39년만에 단독 입수한 간첩 홍종수의 수사기록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방대한 수사기록 어디에도 광주나 광주 침투, 광주 선동에 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홍종수는 82년 8월 기소유예처분을 받을 때까지 자술서를 두 번 쓰고 경찰에서 세 차례, 검찰에서 다섯 차례 신문을 받습니다. 하지만 남파 목적을 '광주 침투'라고 발표한 경찰조차 이를 따져 묻지 않습니다. 검찰 역시 이 자료를 넘겨받고도 경찰에 재수사를 지휘하거나, 직접 물어보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지난 5월 14일 KBS ‘뉴스9’ 보도 화면지난 5월 14일 KBS ‘뉴스9’ 보도 화면

경찰이 송치한 수사보고서에는 홍종수의 4번째 침투(홍종수는 붙잡히기 전에도 3번이나 남파됐습니다)목적을 '서울 경기지역 노동계 침투'와 '연락이 끊어진 기존 남파 간첩 접선과 대동 복귀'로 썼습니다. 부차적 임무도 '정치 경제 제반 정보 수집' '군사 정보 수집'으로 돼 있습니다.

검거 하루 만에 홍종수를 '광주 선동 간첩'으로 발표했지만 스스로도 가능성조차 없는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1981년 육군 본부가 작성한 대공 정보문건도 경찰 수사기록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누가 '광주 간첩'으로 조작했나

그럼, 누가 이렇게 말도 안되는 날조 사건을 만들었을까요. 민주주의를 향한 광주민주화운동의 열망을 북한과 결부시키는 음모에 가담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KBS 탐사보도부는 수사기록을 토대로 당시 홍종수 사건을 담당한 경찰의 지휘.수사 라인을 확인했습니다. 남대문경찰서 황 모 경장이 검거한 홍종수는 당시 '부국상사'로 불렸던 옥인동 대공분실로 끌려갑니다. 당시 서울특별시 경찰국 정보 2과 소속입니다.

‘남파간첩’ 홍종수를 ‘광주 선동 간첩 이창용’으로 날조한 당시 경찰의 지휘. 수사 라인‘남파간첩’ 홍종수를 ‘광주 선동 간첩 이창용’으로 날조한 당시 경찰의 지휘. 수사 라인

1980년 5월 23일 홍종수 사건을 담당한 실무자는 강 모 경사, 신 모 순경으로 확인됩니다. 그 윗선을 따라가면 정보2과장, 제2 담당관, 더 올라가면 염보현 당시 서울시 경찰국장에 이릅니다. 염보현 씨가 기자회견을 통해 문제의 '광주 간첩' 날조 사건을 발표한 장본인입니다. 당시 경찰총수는 손달용 치안본부장이었습니다.

‘광주 간첩’ 사건을 날조, 발표한 염보현 당시 서울특별시 경찰국장‘광주 간첩’ 사건을 날조, 발표한 염보현 당시 서울특별시 경찰국장

염 씨는 이 기자회견을 하고 이틀 뒤 치안본부장 자리를 차지합니다. 서울시 경찰국장으로 부임한 지 넉 달 만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넉 달 뒤 경기도지사로, 1983년엔 서울시장으로 부임하면서 5공 정권 내내 이른바 '꽃길'만 걸으며 승승장구합니다. 홍조근정훈장, 녹조근정훈장도 받습니다.

수소문 끝에 서울 서초구에 살고 있는 염 씨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염 씨는 수차례 인터뷰 요청에도 취재진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이뤄진 전화 통화에서 염씨는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39년 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불순세력이 개입한 폭동'으로 규정하고, 끊임없이 왜곡하고, 폄훼하고, 날조한 핵심 책임자들의 나이는 이제 90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날조와 조작의 진실을 남김없이 밝히고, 책임을 묻고, 사과를 받을 수 있는 날도 그리 많이 남은 것 같지 않습니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날조된 역사는 3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도구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KBS 탐사보도부는 경찰에 '광주 간첩 이창용' 날조 사건에 대한 입장을 물었지만 "특정 시점에 근무했던 소속 경찰관 인사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며 "사건 관련 기록이 없어 사실관계 확인이 어렵기 때문에 경찰청의 공식 입장을 밝히기 곤란하다"고 뒤늦게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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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17 15:36:48
    • 수정2019-05-17 15:38:27
    취재K
   1980년 5월 경찰 발표 '광주 선동 간첩 이창용 검거' 기사와 전날 검거된 '남파 간첩' 홍종수

"북한에서는 아마 '이창용' 발표가 나왔을 때 깜짝 놀랐을 거에요"

광주민주화운동이 피로 물들던 1980년 5월 24일, 경찰이 간첩 홍종수를 '광주 선동 남파 간첩 이창용'으로 날조해 발표합니다. 훗날 이 기자회견을 두고 간첩 홍종수가 털어놓은 이야기입니다.

'간첩 이창용'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도 광주민주화운동 '북한 배후설'을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이름입니다. 경찰의 이 발표 때문입니다.


하지만, 홍종수는 자신을 남파시킨 북한에서조차 당시 경찰 발표에 깜짝 놀랐을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전날 서울역에서 붙잡힌 홍종수는 윗옷에 보관했던 독침과 독약으로 자살을 시도하려다 실패하자 나중에는 혀를 깨물어 자해했습니다. 당시 기자회견 화면을 보면 홍종수의 입이 눈에 띄게 불룩해 보이는데 자해한 상처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하는 이유는 홍종수가 그 뒤로도 한 달 가까이 말을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섭니다.

KBS 탐사보도부가 입수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의 홍종수 진술기록(2008년)을 보면 당시 상황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얘기하라고 하는데 혀가 아파서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밥도 가져다주는데 안 먹게 되었죠. 그렇게 있었던 것이 약 보름 정도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당시까지는 전향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술 역시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체포 직후 이름을 묻길래 '이창용'이라는 가명만 손으로 써 줬을 뿐입니다."

진술은 고사하고 이렇게 기초적인 필답 진술조차 거부한 자신을 검거 바로 다음날 경찰이 '광주 선동간첩'으로 둔갑시켰다는 겁니다. 내용을 더 볼까요.

"'광주사태를 선동하라는 임무였다'라고 언론에 나왔는데 실제 제 임무는 그게 아니었잖아요. 제가 (평양)기지를 11일에 떠났는데 무슨 수로 18일 발생한 광주사태에 개입하였겠습니까? 남파공작원의 임무는 보통 1년~3개월 전에 부과됩니다. 그래야만 전술을 연구하고 구상할 것 아닙니까?"

요약하면 '남파간첩'은 맞지만, 당시 자신의 임무는 '광주선동'이 아니었다는 거죠.
그래서 발표 당시 이를 들은 북에서도 놀랐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사망한 홍종수의 이 말은 사실이었을까요.

'광주 간첩 이창용'은 날조

KBS 탐사보도부는 간첩 홍종수에 관한 검경 수사기록 3권 900여 쪽, 군이 작성한 정보 기록 10여 쪽을 39년 만에 단독 입수해 살펴봤습니다.

KBS 탐사보도부가 39년만에 단독 입수한 간첩 홍종수의 수사기록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방대한 수사기록 어디에도 광주나 광주 침투, 광주 선동에 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홍종수는 82년 8월 기소유예처분을 받을 때까지 자술서를 두 번 쓰고 경찰에서 세 차례, 검찰에서 다섯 차례 신문을 받습니다. 하지만 남파 목적을 '광주 침투'라고 발표한 경찰조차 이를 따져 묻지 않습니다. 검찰 역시 이 자료를 넘겨받고도 경찰에 재수사를 지휘하거나, 직접 물어보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지난 5월 14일 KBS ‘뉴스9’ 보도 화면
경찰이 송치한 수사보고서에는 홍종수의 4번째 침투(홍종수는 붙잡히기 전에도 3번이나 남파됐습니다)목적을 '서울 경기지역 노동계 침투'와 '연락이 끊어진 기존 남파 간첩 접선과 대동 복귀'로 썼습니다. 부차적 임무도 '정치 경제 제반 정보 수집' '군사 정보 수집'으로 돼 있습니다.

검거 하루 만에 홍종수를 '광주 선동 간첩'으로 발표했지만 스스로도 가능성조차 없는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1981년 육군 본부가 작성한 대공 정보문건도 경찰 수사기록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누가 '광주 간첩'으로 조작했나

그럼, 누가 이렇게 말도 안되는 날조 사건을 만들었을까요. 민주주의를 향한 광주민주화운동의 열망을 북한과 결부시키는 음모에 가담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KBS 탐사보도부는 수사기록을 토대로 당시 홍종수 사건을 담당한 경찰의 지휘.수사 라인을 확인했습니다. 남대문경찰서 황 모 경장이 검거한 홍종수는 당시 '부국상사'로 불렸던 옥인동 대공분실로 끌려갑니다. 당시 서울특별시 경찰국 정보 2과 소속입니다.

‘남파간첩’ 홍종수를 ‘광주 선동 간첩 이창용’으로 날조한 당시 경찰의 지휘. 수사 라인
1980년 5월 23일 홍종수 사건을 담당한 실무자는 강 모 경사, 신 모 순경으로 확인됩니다. 그 윗선을 따라가면 정보2과장, 제2 담당관, 더 올라가면 염보현 당시 서울시 경찰국장에 이릅니다. 염보현 씨가 기자회견을 통해 문제의 '광주 간첩' 날조 사건을 발표한 장본인입니다. 당시 경찰총수는 손달용 치안본부장이었습니다.

‘광주 간첩’ 사건을 날조, 발표한 염보현 당시 서울특별시 경찰국장
염 씨는 이 기자회견을 하고 이틀 뒤 치안본부장 자리를 차지합니다. 서울시 경찰국장으로 부임한 지 넉 달 만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넉 달 뒤 경기도지사로, 1983년엔 서울시장으로 부임하면서 5공 정권 내내 이른바 '꽃길'만 걸으며 승승장구합니다. 홍조근정훈장, 녹조근정훈장도 받습니다.

수소문 끝에 서울 서초구에 살고 있는 염 씨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염 씨는 수차례 인터뷰 요청에도 취재진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이뤄진 전화 통화에서 염씨는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39년 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불순세력이 개입한 폭동'으로 규정하고, 끊임없이 왜곡하고, 폄훼하고, 날조한 핵심 책임자들의 나이는 이제 90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날조와 조작의 진실을 남김없이 밝히고, 책임을 묻고, 사과를 받을 수 있는 날도 그리 많이 남은 것 같지 않습니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날조된 역사는 3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도구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KBS 탐사보도부는 경찰에 '광주 간첩 이창용' 날조 사건에 대한 입장을 물었지만 "특정 시점에 근무했던 소속 경찰관 인사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며 "사건 관련 기록이 없어 사실관계 확인이 어렵기 때문에 경찰청의 공식 입장을 밝히기 곤란하다"고 뒤늦게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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