衛滿朝鮮의 도읍지인 王險(『三國史記』『三國遺事』에는 ‘王儉’으로 表記)의 위치에 대하여『史記集解』에서는 ‘昌黎有險瀆縣也’라는 徐廣의 말을 인용하고,『史記索隱』에서는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라는 應劭의 注를 인용하고 있다. 한편『漢書』「地理志」 遼東郡條 險瀆의 註에는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日險瀆’이라는 應劭의 견해와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라는 臣瓚의 해석이 附記되어 있다.
王險城의 위치는 古朝鮮이나 衛滿朝鮮의 강역은 물론, 위만조선 멸망 후 그 지역에 설치된 漢四郡의 위치비정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인데, 이러한 주석 자료의 차이에 의해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高麗時代 이후 朝鮮後期 實學者들에 이르기까지 王險城의 위치는 現 平壤으로, 또 古朝鮮이나 漢四郡의 위치는 韓半島 北部로 이해되어 왔다. (丁若鏞,『與猶堂全書』「疆域考」 朝鮮考)
이에 대해 요동군의 속현인 險瀆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漢字語 표기인 儉瀆으로 이해하고 이를 王險城에 비정하여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계속하여 遼東에 있었다고 본 견해가 있는데, 리지린은 이러한 견해를 체계화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실제 現 蓋平 地方으로 그 위치를 比定하고 있다. (『고조선연구』pp.83~96) 그러나 王險城은 浿水 以東 秦故空地 以南에 있었던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이는『漢書』「地理志」의 樂浪郡 朝鮮縣이 분명하다. 따라서 요동군 험독현이 왕검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사기색은』에서 王險城의 주석에 응소의 주를 인용한 것과『史記集解』에서 徐廣의 말을 인용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근거하여 위만조선의 도읍을 遼東의 險瀆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한편, 古朝鮮의 移動說에 의하면 險瀆은 고조선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조선계 지명으로서, 고조선의 도읍은 遼東의 險瀆에서 평양의 험독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고조선의 초기 도읍지는 요동의 험독이 분명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대체로 遼河 以東 千山 以西의 어느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史記』의 王險城은 秦故空地 以南에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古朝鮮이 遼東의 險瀆에서 그 중심을 옮긴 이후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大同江 유역의 平壤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