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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송지주 : 선비의 기원과 단석괴(檀石槐) 등장 후의 역사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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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鮮卑)
[배송지주] 『위서(魏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비(鮮卑)주 001
각주 001)
鮮卑:북아시아의 유목민 집단이며, 東胡의 支派이다. 처음에 鮮卑山 부근에 모여 살아 ‘鮮卑’라고 명명되었다. 후에 呼倫池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다시 陰山 일대로 이동하여 다른 種族과 접촉하였다. 檀石槐가 鮮卑의 각 부족을 통합하였고, 옛날의 흉노에 필적하는 유목제국을 세웠다. 檀石槐 사후 분열되었으나, 軻比能이 다시 鮮卑 각 부족을 규합하였다. 三國 魏 靑龍 3년(235)에 軻比能이 魏의 자객에게 살해되어 鮮卑는 분열되었고, 후에 黃河 유역으로 이주하였다. 兩晉·南北朝時代에 慕容部가 前燕·後燕·西燕·南燕 등을, 乞伏部가 西秦을, 禿跋部가 南涼을, 拓跋部가 北魏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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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동호의 남은 무리들인데, 따로 선비산(鮮卑山) 주 002
각주 002)
鮮卑山:鮮卑人들이 이 산에 거처하여 ‘鮮卑’라는 명칭을 얻었다. 정확한 위치는 설이 분분한데, 혹자는 鮮卑가 이동함에 따라 鮮卑山의 명칭도 달라졌다고 한다. 일설에는 현재의 內蒙古 自治區 鄂倫春自治縣 阿里河鎭 서북의 戞仙洞에서 北魏 鮮卑石室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大興安嶺 북단을 가장 오래된 鮮卑山으로 주장하였다. 그리고 혹 현재의 內蒙古 自治區 科爾沁右翼中旗의 서쪽에 있었다고도 하는데, 현재 사람들은 이를 蒙格이라 부른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현재의 러시아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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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존하여 [살았기 때문에] 불려진 명칭이었다.주 003
각주 003)
원문은 “鮮卑亦東胡之餘也, 別保鮮卑山, 因號焉.”인데, 『後漢書』에서는 “鮮卑者, 亦東胡之支也, 別依鮮卑山, 故因號焉.”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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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언어와 습속은 오환과 같다. 선비의 땅은 동쪽으로 요수(遼水)와 접하고 서쪽으로 서성(西城)주 004
각주 004)
西城:일설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에 있던 于闐國의 수도인 西山城이라고 하나, 초기 鮮卑가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지배하지 못했으므로 于闐國으로 보기 어렵다. 현재 어떤 곳인지 未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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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다. 해마다 삼월에 큰 모임을 열어 물가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주 005
각주 005)
원문은 “常以季春大會, 作樂水上”인데, 『後漢書』에는 “以季春月大會於饒樂水上”이라고 하였다. 양자를 대조하면 원문의 “作樂水上”과 『後漢書』의 “饒樂水上”이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饒樂水’는 江 이름인데 비해 현재의 中華書局標點校勘本에서는 ‘作樂水’는 고유명사로 보지 않았다. 번역문은 이 교감과 표점에 따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後漢書』와 대조해보면 ‘作樂水’는 ‘饒樂水’의 誤記이거나 그대로 고유명사로 취급하여 “해마다 삼월에 作樂水(혹은 饒樂水) 가에서 큰 모임을 열어”로 번역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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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시집가고 [남자들은] 장가갔으며, [결혼하는 사람들은] 머리를 깎고 잔치에 참가하였다.주 006
각주 006)
원문은 “其地東接遼水, 西當西城. 常以季春大會, 作樂水上, 嫁女娶婦, 髡頭飲宴.”인데, 『後漢書』에서는 “唯婚姻先髡頭, 以季春月大會於饒樂水上, 飲讌畢, 然後配合.”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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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것과 다른 [선비의] 짐승들로는주 007
각주 007)
원문은 “其獸異於中國者”인데, 『後漢書』에서는 “又禽獸異於中國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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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野馬), 완양(羱羊), 주 008
각주 008)
羱羊:들양 혹은 들염소라고 한다. 야생 양의 일종이며 납작하고 둥근 뿔이 있다. 『後漢書』에서는 “原羊”이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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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우(端牛)주 009
각주 009)
端牛:『後漢書』에서는 “角端牛”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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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었다. 단우의 뿔로 활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각단(角端)주 485
각주 485)
角端:하루에 萬里를 가고 먼 곳의 말에 통한다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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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불렀다. 또 초(貂), 주 011
각주 011)
貂:담비 혹은 족제비과에 속하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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놜(豽), 주 012
각주 012)
豽:‘貀’로도 쓰는데, 이에 대한 견해가 분분하여 정확히 무엇이라고 밝히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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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鼲子)주 013
각주 013)
鼲子:잿빛의 쥐, 혹 밍크로 추정되는 털짐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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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었는데, 가죽과 털이 부드럽고 연했기 때문에 천하(天下)에서는 품질 좋은 갖옷으로 여겼다.
선비인들은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격파된 이후주 014
각주 014)
원문은 “鮮卑自爲冒頓所破”인데, 『後漢書』에서는 “漢初, 亦爲冒頓所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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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요동의 새외로 달아나 숨었으며 다른 나라들과 서로 우열을 다투지 않았으므로 이름이 한나라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환과 서로 인접하였다.주 015
각주 015)
원문은 “不與餘國爭衡, 未有名通於漢, 而(由)自與烏丸相接.”인데, 『後漢書』에서는 “與烏桓相接, 未常通中國焉.”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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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재위 초기에 남흉노의 선우[南單于]와 북흉노의 선우[北單子]가 서로 공격하여 흉노의 세력이 소모되어 [쇠약해졌고 반대로] 선비는 드디어 강성해졌다.
건무 30년(54)에 선비대인(鮮卑大人) 어구분(於仇賁)이 무리를 이끌고 궁궐을 방문하여 조공을 바치니, 주 016
각주 016)
원문은 “鮮卑大人於仇賁率種人詣闕朝貢”인데, 『後漢書』에서는 “鮮卑大人於仇賁·滿頭等率種人詣闕朝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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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광무제는] 어구분을 왕으로 봉하였다.주 017
각주 017)
원문은 “封於仇賁爲王”인데, 『後漢書』에서는 “帝封於仇賁爲王, 滿頭爲侯.”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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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년간(58~75)에 제융(祭肜)요동태수(遼東太守)가 되어 선비인들을 유혹하여 재물을 주어 배반한 오환 흠지분(欽志賁) 주 018
각주 018)
『後漢書』에서는 “欽志賁”을 “歆志賁”이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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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목을 베게 하였다.주 019
각주 019)
원문은 “永平中, 祭肜爲遼東太守, 誘賂鮮卑, 使斬叛烏丸欽志賁等首”인데, 『後漢書』에서는 “永平元年, 祭肜復賂偏何擊歆志賁, 破斬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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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돈황[군](燉煌郡) 주 486
각주 486)
燉煌郡:前漢 武帝 元鼎 6년(전111), 혹은 일설에는 元封 4~5년(전107~106)에 酒泉郡을 나누어서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燉煌縣(현재 甘肅省 敦煌縣 서남)이다. 관할구역은 현재 甘肅省 疏勒河 以南과 玉門關 以東의 지역이다. 後漢時代 涼州에 속하였다. 西秦 元康 5년(295)부터 北魏時代까지 전후 현재의 安西縣 以東과 以南의 땅이 晉昌郡·涼興郡·武興郡에 편입되었으며, 현재의 敦煌縣 南湖일대를 나누어 壽昌郡을 설치하였다. 燉煌은 ‘敦煌’으로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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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군](酒泉郡) 주 021
각주 021)
酒泉郡:前漢 元狩 2년(전121) 匈奴의 昆邪王이 항복한 후 설치되었다. 郡治所 城 아래에 泉이 있었는데, 泉의 맛이 술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治所는 祿福縣인데, 晉代 福祿縣으로 改稱되었고, 隋代 酒泉縣으로 바뀌었다. 관할구역은 현재 甘肅省 河西回廊 서부에 해당한다. 일설에 따르면 元鼎 2~3년 사이(전115~114), 혹은 元鼎 6년 酒泉郡이 처음 설치되었으며, 관할구역은 河西回廊 전체였다고 한다. 후에 武威郡과 酒泉郡을 분할하여 張掖郡과 敦煌郡을 설치하였는데, 관할구역은 현재 甘肅省 疏勒河 以東, 高合縣 以西의 지역이었다. 後漢時代 涼州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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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 있던 선비의 읍락(邑落) 대인들은 모두 요동[군](遼東郡)을 방문하여 상으로 준 물품(賞賜)를 받았다.주 022
각주 022)
원문은 “於是鮮卑自燉煌·酒泉以東邑落大人, 皆詣遼東受賞賜”인데, 『後漢書』에서는 “於是鮮卑大人皆來歸附, 並詣遼東受賞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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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靑州)서주(徐州)의 두 개 주에서 전(錢)을 지급하였는데, 해마다 2억 7천만 [전]을 [요동군으로 보내는 액수로] 규정하였다.
화제(和帝) 주 023
각주 023)
和帝(79~105;재위 88~105):이름은 肇이며, 章帝의 아들이다. 章和 2년(88) 章帝 사후 즉위하였는데, 당시 10세에 불과하여 竇太后가 臨朝稱制하여 外戚 竇憲 등이 정치를 담당하였다. 永元 4년(92) 竇氏와 그 일당을 주살하고 親政을 시작하였다. 군대를 파견해 匈奴·羌·西域諸國을 정벌하였으며, 재해지역의 租賦를 감면하는 조서를 반포하기도 했다. 재위기간 중 西域都護 班超가 사람을 大秦(로마제국)에 파견하였는데 西海(페르시아만)에서 막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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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선비대도호(鮮卑大都護) 교위(校尉) 융말외는 부중을 이끌고 오환교위 임상(任尙)을 따라 종군하여 배반한 자를 공격하였으며, [이 공으로 선우대도호] 교위 융말외를 솔중왕으로 삼았다. 상제(殤帝) 연평(延平)년간(106) 선비는 또 동쪽으로 새내(塞內)로 침입하였고 어양태수(漁陽太守) 장현(張顯)을 살해하였다. 안제주 024
각주 024)
원문은 “安帝時”인데, 『後漢書』에서는 “安帝永初中(107~113)”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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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대인 연려양(燕荔陽)이 입조(入朝)하니주 025
각주 025)
원문은 “鮮卑大人燕荔陽入朝”인데, 『後漢書』에서는 “鮮卑大人燕荔陽詣闕朝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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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조정은 연려양에게] 선비왕(鮮卑王)의 인수와 말 세 마리가 끄는 붉은 수레를 하사하였고 오환교위가 거처하는 영(甯)주 026
각주 026)
寗: 漢代 上谷郡의 屬縣이다. 『後漢書』에서는 甯城이라고 표기되었다. 縣의 治所는 현재 河北省 萬全縣에 있었다. 後漢時代 上谷西部都尉의 治所가 있었으며, 한때 烏丸校尉의 治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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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머무르게 하였다.주 027
각주 027)
원문은 “止烏丸校尉所治甯下”인데, 『後漢書』에서는 “令止烏桓校尉所居甯城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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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호시(胡市)를 통하게 하였고, 남북 2부(部)의 질궁(質宮)을 축조하여주 028
각주 028)
원문은 “築南北兩部質宮”인데, 『後漢書』에서는 “因築南北兩部質館”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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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락 120부[에서 보낸] 인질을 받았다.주 029
각주 029)
원문은 “受邑落質者[百]二十部”인데, 『後漢書』에서는 “鮮卑邑落百二十部, 各遣入質.”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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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선비인들은 항복하기도 하고 반란하기도 했으며, 주 488
각주 488)
원문은 “是後或反或降”인데, 『後漢書』에서는 “是後或降或畔”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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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오환과 함께 서로 공격하기도 했다.주 031
각주 031)
원문은 “或與匈奴·烏丸相攻擊.”인데, 『後漢書』에서는 “與匈奴·烏桓更相攻擊.”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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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安帝) 말년에주 032
각주 032)
『後漢書』에 따르면 元初 5년(118)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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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의 보병과 기병[步騎] 2만 인을 징발하여 방어상 중요한 곳에 나누어 주둔케 하였다. 후에 선비 8~9천의 기병이 [대군(代郡)의 속현인] 마성[현](馬城縣) 주 033
각주 033)
馬城縣:代郡의 屬縣이다. 前漢時代에 설치하였고, 治所는 현재 河北省 懷安縣 서쪽이다. 代郡 東部都尉의 治所였다. 後漢末에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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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요새를 뚫고 쳐들어와서 장리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한나라는 도료장군(度遼將軍) 등준(鄧遵)과 중랑장(中郞將)주 034
각주 034)
中郞將: 秦漢時代 禁中의 警衛를 관장한 郎中令 휘하에 설치된 中郞을 관리하기 위해 五官署·左署·右署에 두어진 장관의 명칭이다. 秩은 比二千石이며 지위는 將軍의 아래이고 합쳐서 五官中郞將이라 칭했다. 虎賁郞에 설치한 中郞將은 虎賁中郞將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中郞將은 모두 皇帝의 侍衛를 통솔하여 좌우를 隨從하며 어떤 경우에는 禁軍을 통솔하였다. 後漢時代에는 五官中郞將 1인을 두었는데, 秩은 比二千石이었고 五官郞을 관장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五官中郞(比六百石), 五官侍郞(比四百石), 五官郎中(比三百石)을 두었다. 또 左中郞將·右中郞將·虎賁中郞將·羽林中郞將·使匈奴中郞將 등을 두었는데, 모두 光祿勳(前漢의 郎中令)에 속하였다. 後漢末에 東西南北의 四中郞將을 두었는데,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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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속(馬續)을 보내 장성(長城)을 나가서 선비[의 군대를] 추격케 하여 [선비의 군대를] 대파하였다.주 035
각주 035)
원문은 “後鮮卑八九千騎穿代郡及馬城塞入害長吏, 漢遣度遼將軍鄧遵·中郎將馬續出塞追破之.”인데, 『後漢書』에서는 “六年秋, 鮮卑入馬城塞, 殺長吏, 度遼將軍鄧遵發積射士三千人, 及中郎將馬續率南單于, 與遼西·右北平兵馬會, 出塞追擊鮮卑, 大破之, 獲生口及牛羊財物甚眾.”이라고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後漢書』의 이 기록에 따르면 이 사건은 元初 6년(119)에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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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대인 오륜(烏倫)기지건(其至鞬) 등 7천여 인이 등준의 [군영을] 찾아 와서 항복하니, 주 036
각주 036)
원문은 “鮮卑大人烏倫·其至鞬等七千餘人詣遵降.”인데, 『後漢書』에는 “永寧元年, 遼西鮮卑大人烏倫·其至鞬率眾詣鄧遵降, 奉貢獻.”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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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오륜을 왕으로, 기지건을 후로 봉하고주 037
각주 037)
『後漢書』에 따르면 이는 永寧元年(120)의 일이며, 이때 烏倫은 率衆王, 其至鞬은 率衆侯에 봉해졌다. 원문에서는 王과 侯 앞에 “率衆”이 생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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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 있는 비단주 038
각주 038)
원문은 “采帛”인데 ‘采’는 ‘綵’와 같은 뜻이다. 『後漢書』에서는 이를 “綵繒”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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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사하였다.주 039
각주 039)
원문은 “封烏倫爲王, 其至鞬爲侯, 賜采帛.”인데, 『後漢書』에는 “詔封烏倫爲率眾王, 其至鞬爲率眾侯, 賜綵繒各有差.”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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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준이 가버린 후주 489
각주 489)
원문은 “遵去後”인데, 『後漢書』에서는 “建光元年(121)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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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건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며주 041
각주 041)
원문은 “其至鞬復反”인데, 『後漢書』에서는 ‘反’字 대신 ‘畔’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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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교위를 마성(馬城)에서 포위하였다.주 042
각주 042)
원문은 “圍烏丸校尉於馬城”인데, 『後漢書』에서는 “寇居庸, 雲中太守成嚴擊之, 兵敗, 功曹楊穆以身捍嚴, 與俱戰歿. 鮮卑於是圍烏桓校尉徐常於馬城.”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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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료장군 경기유주자사(幽州刺史)주 043
각주 043)
『後漢書』에 따르면 당시 幽州刺史의 이름은 龐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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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구원병을 보내 선비군의 포위망을 풀었다.주 044
각주 044)
원문은 “度遼將軍耿夔及幽州刺史救解之.”인데, 『後漢書』에서는 “度遼將軍耿夔與幽州刺史龐參發廣陽·漁陽·涿郡甲卒, 分爲兩道救之;常夜得潛出, 與夔等并力並進, 攻賊圍, 解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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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건[의 무리는] 이미 강성하였으며, 활을 쏘는 군사가 수만 기나 되었다.주 045
각주 045)
원문은 “其至鞬遂盛, 控弦數萬騎.”인데, 『後漢書』에서는 “鮮卑既累殺郡守, 膽意轉盛, 控弦數萬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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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건의 무리는] 자주 새내로 들어왔으며, 주 046
각주 046)
원문은 “數道入塞”인데, 『後漢書』에는 이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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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군](五原郡)만백[현](曼栢縣) 주 047
각주 047)
曼栢縣:前漢時代에 설치되었다. 治所는 현재의 內蒙古自治區 準格爾旗 서북 漢代의 옛성터이다. 五原郡에 속하였다. 後漢 永平 8년(65)에 度遼營을 두어 南匈奴와 北匈奴의 交通을 막았다. 後漢末 廢置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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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진격하여 남흉노의 선우를 공격하여 좌욱건일축왕(左奧鞬日逐王)주 048
각주 048)
『後漢書』에서는 “左奧鞬日逐王”을 “薁鞬日逐王”이라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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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죽였다.주 049
각주 049)
원문은 “趣五原(寧貊)[曼栢], 攻匈奴南單于, 殺左奧鞬日逐王.”인데, 『後漢書』에서는 “二年冬, 其至鞬自將萬餘騎入東領候, 分爲數道, 攻南匈奴於曼柏, 薁鞬日逐王戰死, 殺千餘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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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제 때 다시 새내로 침입하여 대군태수(代郡太守)주 490
각주 490)
『後漢書』에 따르면 代郡太守의 이름은 李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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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살해하였다.주 051
각주 051)
원문은 “順帝時, 復入塞, 殺代郡太守.”인데, 『後漢書』에서는 “順帝永建元年秋, 鮮卑其至鞬寇代郡, 太守李超戰死.”라고 하였다. 『後漢書』에 따르면, 이 사건은 永建元年(126)에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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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는 여양영(黎陽營)의 병사들을 보내 중산[국](中山國) 주 052
각주 052)
中山國:원래 前漢 高祖가 설치한 郡이었으며, 治所는 盧奴縣(현재의 河北省 定州市에 해당)이었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河北省 狼牙山 以南과 保定·安國 以西, 唐縣·新樂 以東, 滹沱河 以北에 해당한다. 景帝 시기에 郡을 國으로 바꿔 아들 劉勝을 中山王으로 봉하였다. 후에 五胡十六國時代에 慕容垂가 이곳을 수도로 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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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시켰고, 변경의 군병(郡兵)들을 장성 곁(塞下)에 주둔시켰으며, 다섯 영(營)의 노수(弩帥)를 파견하여 전술과 사격을 가르치게 하였다. 남흉노 선우는 보병과 기병 만여 인을 이끌고 한나라의 군대를 도와 선비의 군대를 공격하여 물리쳤다.주 053
각주 053)
원문은 “漢遣黎陽營兵屯中山, 緣邊郡兵屯塞下, 調五營弩帥令教戰射, 南單于將步騎萬餘人助漢擊卻之.”인데, 『後漢書』에서는 “明年春, 中郎將張國遣從事將南單于兵步騎萬餘人出塞, 擊破之, 獲其資重二千餘種.”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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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오환교위 경엽이 솔중왕을 이끌고 선비를 공격하니 참수하고 포획한 것이 많았다. 이때 선비 3만여 락이 요동[군]으로 와서 항복하였다.주 054
각주 054)
원문은 “後烏丸校尉耿曄將率衆王出塞擊鮮卑, 多斬首虜, 於是鮮卑三萬餘落, 詣遼東降.”인데, 『後漢書』에서는 “時遼東鮮卑六千餘騎亦寇遼東玄菟, 烏桓校尉耿曄發緣邊諸郡兵及烏桓率眾王出塞擊之, 斬首數百級, 大獲其生口牛馬什物, 鮮卑乃率種眾三萬人詣遼東乞降.”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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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와 북선우(北單于)가 도망간 후 남은 무리[餘種] 십여만 락이 요동[군]으로 와서 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는데, 모두 스스로를 선비병(鮮卑兵)이라 불렀다.주 055
각주 055)
『後漢書』에 따르면 匈奴 집단이 ‘鮮卑’를 자칭한 것은 和帝 永元년간(89~105)의 일이다. 또 원문에서는 “鮮卑兵”이라고 스스로 불렀다고 하였는데, 『後漢書』에서는 그냥 “鮮卑”를 자칭했다고 한다. 이 구절은 유목민들의 種族과 정체성 문제를 해명하는 데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유목민들은 본래 단일 種族이 아니라 혈연이 다른 집단들이 모인 혼성집단이었으며, 유목 부족들을 통합한 집단의 명칭을 따서 부족연합체의 명칭으로 삼았다. 이 부족연합체가 붕괴하면 복속된 부족들은 이를 이탈하여 다른 집단에 속하였다. 이때 이 집단의 명칭은 새로 속한 집단의 이름에 따르게 된다. 즉 匈奴에 복속했던 부족도 鮮卑에 속하게 되면 자신의 정체성을 匈奴가 아닌 鮮卑로 본 것이다. 金浩東은 중국사서에 보이는 여러 유목집단 혹은 유목국가들이 種族的(ethnic)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political)인 속성을 지녔다고 보았으며, 번역문의 내용이 대표적인 예라고 지적하였다(金浩東, 1993: 125~126 및 125~126의 주) 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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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록후(投鹿侯)가 예전에 흉노의 군대에 3년 동안 종군하는 동안 그의 아내는 집에 있었는데,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주 056
각주 056)
원문은 “投鹿侯從匈奴軍三年, 其妻在家, 有子.”인데, 『後漢書』에서는 “其父投鹿侯, 初從匈奴軍三年, 其妻在家生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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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록후가 돌아와 괴이하게 생각해서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아내는 “일찍이 낮에 길을 가다가 천둥 치는 소리를 듣고 하늘을 우러러 보니 번개주 057
각주 057)
원문은 “電”인데, 『後漢書』에서는 “雹”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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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자기 입 안에 들어와 삼키니 임신되어 버렸으며 열달이 지나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 아이는 반드시 기이함이 있으니 길러야 합니다.”주 058
각주 058)
원문은 “且長之”인데, 『後漢書』에서는 “且宜長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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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하였다. 투록후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다.주 059
각주 059)
원문은 “投鹿侯固不信”인데, 『後漢書』에서는 “投鹿侯不聽, 遂棄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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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이에 친정에 말하여 아기를 거두어 기르게 하였으며, 주 491
각주 491)
원문은 “妻乃語家, 令收養焉”인데, 『後漢書』에서는 “妻私語家令收養焉”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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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을 단석괴(檀石槐)라고 불렀다.주 061
각주 061)
원문은 “號檀石槐”인데, 『後漢書』에서는 ‘號’ 대신 ‘名’字를 사용하였다. 檀石槐의 출생 기록은 神異性을 강조하는 感生說話의 하나이며, 번개와 우박 등 두려운 자연현상을 그의 출생과 결부시켜 軍神的 存在로 부각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보인다고 한다. 金浩東은 이 기록을 大人에서 君主로의 移行을 방증하는 자료로 보았다(金浩東, 1993: 13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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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괴는 자라서 용감하고 건장하였으며 지략(智略)이 무리들 가운데 뛰어났다.주 062
각주 062)
원문은 “長大勇健, 智略絕衆.”인데, 『後漢書』에서는 “年十四五, 勇健有智略.”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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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세의 나이[에 불과했을] 때, 다른 부의 대인 복분읍(卜賁邑) 주 063
각주 063)
『後漢書』에서는 大人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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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의 외가에서 키우는 소와 양을 훔쳐가자주 064
각주 064)
원문은 “鈔取”인데, 『後漢書』에서는 “抄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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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괴는 말에 채찍질하여 달려가서 그 대인을 따라잡아 공격하니주 065
각주 065)
원문은 “檀石槐策騎追擊”인데, 『後漢書』에서는 “檀石槐單騎追擊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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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이 놀라 단석괴를 향해] 앞으로 나오는 자가 없었으니 [단석괴는 그제서야] 잃어버린 가축들을 데리고 돌아왔다.주 066
각주 066)
원문은 “悉還得所亡”인데, 『後漢書』에서는 “悉還得所亡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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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말미암아 부락[의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단석괴는] 법금(法禁)을 실시하고주 067
각주 067)
원문은 “施法禁”인데, 『後漢書』에서는 ‘乃’字를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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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을 바르게 판결하여 감히 [법금을] 범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드디어 [부락의 사람들이] 그를 대인으로 추대하였다. 단석괴는 대인이 된 후에 거처[庭]주 068
각주 068)
원문은 “庭”인데, 이는 ‘單于庭’ 혹은 ‘可汗庭’이라 일컫는 유목군주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정주국가의 수도와 같다.(『史記索隱』에 의하면, ‘庭’은 흉노에서 都城처럼 머무르는 곳을 지칭한다. 또 單于에게는 성곽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을 도읍이라 칭할지 몰랐다. 穹盧 앞의 땅이 庭과 같았기 때문에 ‘庭’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鮮卑人들을 우두머리를 單于나 可汗이 아닌 大人이라 칭했으므로 ‘大人庭’이라 칭해야 하지만, 현재 ‘大人庭’으로 표기한 글이 없기 때문에 번역문에는 단순하게 ‘거처’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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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류[현](高柳縣) 북쪽에서 300여 리 떨어진 탄한산(彈汗山) 주 069
각주 069)
彈汗山:현재 河北省 尙義縣 남쪽에 있는 大靑山을 지칭한다. 檀石槐의 거점이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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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구수(啜仇水) 주 492
각주 492)
『後漢書』에는 “啜仇水”를 “歠仇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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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니, 주 071
각주 071)
원문은 “檀石槐既立, 乃爲庭於高柳北三百餘里彈汗山啜仇水上”인데, 『後漢書』에서는 “檀石槐乃立庭於彈汗山歠仇水上”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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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대인들이 모두 그에게 귀속하였다. 남쪽으로 한나라의 북변 지역을 약탈하였고, 주 072
각주 072)
원문은 “東西部大人皆歸焉. 兵馬甚盛, 南鈔漢邊.”인데, 『後漢書』에서는 “兵馬甚盛, 東西部大人皆歸焉. 因南抄緣邊.”이라고 하였다. 구절은 비슷하나 각 구절의 배열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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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정령(丁令) 주 073
각주 073)
『後漢書』에서는 “丁令”을 “丁零”으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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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막았으며, 동쪽으로 부여(夫餘)를 물리치고 서쪽으로 오손을 공격하여 흉노의 옛 땅을 모두 점유하였으니, [선비의 영역은] 동서로 1만 2천여 리, 주 074
각주 074)
『後漢書』에는 1만 4천여 리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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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으로 7천여 리에 달하였고 산천과 수택(水澤), 염지(鹽池)를 망라하여 영토가 넓었다.주 075
각주 075)
원문은 “罔羅山川·水澤·鹽池甚廣”인데, 『後漢書』에서는 “網羅山川水澤鹽池”라고 하여 원문의 ‘罔’字 대신 ‘網’字를 사용하였고, 원문의 ‘甚廣’ 2字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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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단석괴[의 부상을] 걱정하여 환제(桓帝) 주 076
각주 076)
桓帝(132~167;146~167):이름은 劉志이며, 章帝의 증손이다.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蠡吾侯가 되었다. 本初元年(146) 質帝 사후 梁太后와 大將軍 梁冀의 옹립으로 15세의 나이로 帝位에 올랐다. 재위기간 梁太后가 臨朝稱制하고 梁冀가 전횡하여 朝政은 혼란하고 민생이 불안하였다. 延熹 2년(159) 宦官 單超 등과 함께 모의하여 梁氏를 멸하고 單超 등 환관을 縣侯로 봉하여, 이후 권력이 宦官에게 돌아갔다. 大臣 陳蕃과 李膺 등이 太學生과 연합하여 宦官의 정치 관여에 반대하여 朋黨으로 지목되었다. 이에 조서를 내려 黨人을 체포하고 종신 禁錮시켰다. 이를 黨錮의 禍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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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흉노중랑장 장환(張奐)을 보내 단석괴를 정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주 077
각주 077)
『後漢書」에 따르면 이는 延熹 9년(166)에 발생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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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다시 사자를 보내 인수를 지니고 가서 단석괴를 왕으로 봉하여 단석괴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단석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북변을 침입하고 노략질함이 더욱 심해졌다.주 078
각주 078)
원문은 “漢患之, 桓帝時使匈奴中郎將張奐征之, 不克. 乃更遣使者齎印綬, 即封檀石槐爲王, 欲與和親. 檀石槐拒不肯受, 寇鈔滋甚.”인데, 『後漢書』에서는 “朝廷積患之, 而不能制, 遂遣使持印綬封檀石槐爲王, 欲與和親. 檀石槐不肯受, 而寇抄滋甚.”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後漢書』에는 원문 앞에 “永壽二年秋, 檀石槐遂將三四千騎寇雲中. 延熹元年, 鮮卑寇北邊. 冬, 使匈奴中郎將張奐率南單于出塞擊之, 斬首二百級. 二年, 復入鴈門, 殺數百人, 大抄掠而去. 六年夏, 千餘騎寇遼東屬國. 九年夏, 遂分騎數萬人入緣邊九郡, 並殺掠吏人, 於是復遣張奐擊之, 鮮卑乃出塞去.”라는 기사가 있다. 檀石槐가 後漢과 和親하면 後漢으로부터 막대한 재물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거부하고 약탈에 몰두한 것은 그가 평화보다 전쟁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和親을 하면 그의 권력기반에 큰 손실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라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획득하면 大人이 이를 재분배하여 권력을 강화할 수 있지만, 약탈은 참여자 모두에게 물자 획득의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했기 때문에 檀石槐 휘하의 鮮卑人들은 화친보다 약탈을 선호했다고 한다. 檀石槐는 이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和親대신 약탈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金浩東, 1993: 132). 바필드는 鮮卑가 “약탈-화친-약탈”의 유기적인 강온 양면책을 구사하며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물자를 획득하는 정책을 구사함과 동시에 화친보다 약탈에 의존했던 이유를 鮮卑의 느슨한 정치적 결합 때문으로 보았다. 부족의 독자성이 강했던 鮮卑의 각 집단들의 견제로 大人이 재화의 재분배 과정을 독점할 수 없었다(Barfield, 1989: 8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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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괴는] 스스로 [선비의 땅]을 중부(中部)·동부(東部)·서부(西部) 3부(部)로 나누었다.주 079
각주 079)
원문은 “乃分其地爲中東西三部”인데, 『後漢書』에서는 “乃自分其地爲三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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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북평[군]부터 동쪽으로 요동[군]에 이르며, 부여 및 예맥(濊貊)과 인접하는 지역을 동부로 삼았는데, 20여 읍(邑)이 있었으며, [동부의] 대인에는 미가(彌加), 궐기(厥機), 소리(素利), 괴두(槐頭) 주 493
각주 493)
Thomas J. Burfield, Perilous Frontier: Nomadic Empires and China, Cambridge: Bosil Blackwell, 1989(馬長壽, 1962: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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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었다.주 081
각주 081)
원문은 “從右北平以東至遼, (遼)[東]接夫餘·[濊]貊爲東部, 二十餘邑, 其大人曰彌加·闕機·素利·槐頭.”인데, 『後漢書』에서는 “從右北平以東至遼東, 接夫餘·濊貊二十餘邑爲東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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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북평[군]부터 서쪽으로 상곡[군]에 이르는 지역을 중부로 삼았는데, 10여 읍이 있었고 가최(柯最), 궐거(闕居), 모용(慕容) 주 082
각주 082)
慕容: 馬長壽는 慕容이 五胡十六國時代 前燕·後燕·西燕·南燕을 세운 慕容部의 선조라고 보았다. 慕容氏는 大人의 이름인 慕容을 따서 氏族 혹은 部族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한다(馬長壽, 1962: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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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라 불리는 대인들]이 대수(大帥)였다.주 083
각주 083)
원문은 “從右北平以西至上谷爲中部, 十餘邑, 其大人曰柯最·闕居·慕容等, 爲大帥.”인데, 『後漢書』에서는 “從右北平以西至上谷十餘邑爲中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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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곡[군]의 서쪽에서 돈황[군](燉煌郡)오손에 이르는 지역을 서부로 삼았는데, 20여 읍이 있었고, 치건락라(置鞬落羅), 주 084
각주 084)
置鞬落羅: 馬長壽는 置鞬落羅가 한 사람이 아니라 置鞬과 落羅 두 사람으로 보았다(馬長壽, 1962: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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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률추연(日律推演), 주 085
각주 085)
日律推演: 馬長壽는 日律推演을 日律과 推演 두 사람으로 분리하였다(馬長壽, 1962: 184). 胡三省은 『資治通鑑』의 注에서 中部大人의 한 사람인 推寅을 拓跋部의 先祖인 毛의 5世孫인 推寅可汗(宣帝)라고 추정하면서도 曹魏 元帝 景元 2년(261)에 拓跋氏의 始祖인 力微가 아들 沙漠汗을 入貢시킨 기사에서 力微와 推寅이 9代 차이가 나기 때문에 世代 수치의 불일치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馬長壽는 推寅이 力微의 祖父인 獻帝 鄰이라고 보았다. 이 경우 推寅은 拓跋部의 선조이다(馬長壽, 1962: 18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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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유(宴荔游) 주 086
각주 086)
宴荔游: 馬長壽는 宴荔游가 『後漢書』에 보이는 燕荔陽과 동일인이라고 추정하였다. 燕荔陽은 後漢 安帝 營平년간(107~113)에 귀부하여 王으로 봉해지고 印綬와 車駕를 하사받았으며 桓帝시기(147~167)까지 살았다고 한다(馬長壽, 1962: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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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이라 불리는 대인들]이 대수(大帥)가 되었다.주 087
각주 087)
원문은 “從上谷以西至燉煌, 西接烏孫爲西部, 二十餘邑, 其大人曰置鞬落羅·日律推演·宴荔游等, 皆爲大帥”인데, 『後漢書』에서는 “從上谷以西至敦煌·烏孫二十餘邑爲西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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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모두 단석괴에 제어되고 속하였다.주 088
각주 088)
원문은 “而制屬檀石槐.”인데, 『後漢書』에서는 “各置大人主領之, 皆屬檀石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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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제 때 이르러 단석괴유주병주(幷州) 2주를 크게 약탈하였다. 변경의 제군(諸郡)은 [선비의 침입과 노략의] 해독을 입지 않는 해가 없었다.주 089
각주 089)
원문은 “至靈帝時, 大鈔略幽·并二州. 緣邊諸郡, 無歲不被其毒.”인데, 『後漢書』에서는 “靈帝立, 幽·并·涼三州緣邊諸郡無歲不被鮮卑寇抄, 殺略不可勝數.”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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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평(熹平) 6년(177)에 [영제는]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주 494
각주 494)
護烏丸校尉:前漢 武帝의 치세(전139~전87)에 처음으로 烏丸人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으나 그 후 폐지되었다. 後漢시대에 光武帝 建武 25年(49)에 다시 上谷郡 寧城縣에 護烏桓校尉를 설치하여 烏丸 관련 업무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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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육(夏育)과 파선비중랑장(破鮮卑中郞將) 전안(田晏), 흉노중랑장(匈奴中郞將) 장민(臧旻)을 보내 남흉노의 선우와 함께 안문새(鴈門塞)를 나가 세 갈래 길로 함께 진격하여 2천여 리를 빠르게 진군하여 선비를 정벌하게 하였다.주 091
각주 091)
원문은 “(嘉)[熹]平六年, 遣護烏丸校尉夏育, 破鮮卑中郎將田晏, 匈奴中郎將臧旻與南單于出鴈門塞, 三道並進, 徑二千餘里征之.”인데, 『後漢書』에서는 “遂遣夏育出高柳, 田晏出雲中, 匈奴中郎將臧旻率南單于出鴈門, 各將萬騎, 三道出塞二千餘里.”라고 하였다. 『後漢書』에는 원문 앞에 “熹平三年冬, 鮮卑入北地, 太守夏育率休著屠各追擊破之. 遷育爲護烏桓校尉. 五年, 鮮卑寇幽州. 六年夏, 鮮卑寇三邊. 秋, 夏育上言:「鮮卑寇邊, 自春以來, 三十餘發, 請徵幽州諸郡兵出塞擊之, 一冬二春, 必能禽滅.」 朝廷未許. 先是護羌校尉田晏坐事論刑被原, 欲立功自效, 乃請中常侍王甫求得爲將, 甫因此議遣兵與育并力討賊. 帝乃拜晏爲破鮮卑中郎將. 大臣多有不同, 乃召百官議朝堂.”이라는 문장과 蔡邕이 鮮卑 遠征을 중지할 것을 간언한 上表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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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괴가 부중을 이끌고 역습하니 장민 등이 패하여 달아났는데, 돌아온 병마(兵馬)는 열 가운데 하나뿐이었다.주 092
각주 092)
원문은 “檀石槐帥部衆逆擊, 旻等敗走, 兵馬還者什一而己.”인데, 『後漢書』에서는 “檀石槐命三部大人各帥眾逆戰, 育等大敗, 喪其節傳輜重, 各將數十騎奔還, 死者十七八.”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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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무리는 나날이 많아져서주 093
각주 093)
원문은 “鮮卑衆日多”인데, 『後漢書』에서는 “鮮卑衆” 대신 “種眾”이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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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과 목축, 사냥으로 족히 식량을 조달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주 094
각주 094)
護雅夫는 선비로 투항한 漢人들의 증가가 檀石槐시대 鮮卑의 인구증가의 주 요인이라고 보았다(護雅夫, 1997: 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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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단석괴는 순시하며 돌아다니다가 오후진수(烏侯秦水) 주 095
각주 095)
烏侯秦水:현재의 內蒙古自治區 遼河 상류의 남쪽 지류인 老哈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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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이르렀는데, 오후진수는 면적이 수백 리에 이르고 물이 깨끗하고 맑았으나 흐르지 않았고, 물 속에 물고기가 있으나 능히 잡지 못하였다.주 096
각주 096)
원문은 “後檀石槐乃案行烏侯秦水, 廣袤數百里, 渟不流, 中有魚而不能得.”인데, 『後漢書』에서는 “檀石槐乃自徇行, 見烏侯秦水廣從數百里, 水停不流, 其中有魚, 不能得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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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괴는] 한인(汗人)주 097
각주 097)
『後漢書』에는 “汗人”을 “倭人”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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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물고기를 그물로 잡는 데 능하다는 정보를 이전에 들었다. 이때 단석괴는 동쪽으로 한국(汗國) 주 098
각주 098)
『後漢書』에는 “汗國”을 “倭人國”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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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공격하여 천여 가(家)를 생포하여 오후진수의 물가로 옮겨 두고 한인들에게 물고기를 잡도록 명하여 양식을 조달하게 하였다.주 099
각주 099)
원문은 “聞汗人善捕魚, 於是檀石槐東擊汗國, 得千餘家, 徙置烏侯秦水上, 使捕魚以助糧.”인데, 『後漢書』에서는 “聞倭人善網捕, 於是東擊倭人國, 得千餘家, 徙置秦水上, 令捕魚以助糧食.”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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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후진수의 물가에는 한인 수백 호가 여전히 남아 있다.주 495
각주 495)
원문은 “至于今, 烏侯秦水上有汗人數百戶.”인데, 『後漢書』에는 이 기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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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괴는 나이 45세에 죽었고, 주 101
각주 101)
원문은 “檀石槐年四十五死”인데, 『後漢書』에서는 “光和中, 檀石槐死, 時年四十五”라고 하였다. 『後漢書』에 따르면 檀石槐가 죽은 시기는 靈帝 光和年間(178~183) 사이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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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화련(和連)이 대를 이어 [대인으로] 즉위하였다. 화련은 재주와 힘이 아버지[인 단석괴]에 미치지 못하였을 뿐더러, 탐욕스럽고 음탕하였으며, 주 102
각주 102)
원문은 “而貪淫”인데, 『後漢書』에서는 “性貪淫”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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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과 법의 판결이 공평하지 못하자 등을 돌린 무리들이 반(半)이나 되었다.주 103
각주 103)
원문은 “眾叛者半”인데, 『後漢書』에서는 ‘叛’字 대신 ‘畔’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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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제(靈帝) 말년에 여러 차례 침략하고 노략질하여 북지[군](北地郡) 주 104
각주 104)
北地郡:戰國時代 秦이 설치하였다. 治所는 義渠縣(지금의 甘肅省 西峰市 동쪽)에 있었다. 前漢時代에는 治所를 馬領縣(지금 甘肅省 慶陽縣 서북)으로 이전하였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甘肅省 環江, 馬蓮河 유역과 寧夏回族自治區 賀蘭山, 靑銅峽, 山水河 동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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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공격하였는데, 쇠뇌를 잘 쏘는 북지군의 서인(庶人)이 쇠뇌를 쏘아 화련을 맞추니 화련은 바로 즉사하였다.주 105
각주 105)
원문은 “靈帝末年數爲寇鈔, 攻北地, 北地庶人善弩射者射中和連, 和連即死.”인데, 『後漢書』에서는 “後出攻北地, 廉人善弩射者射中和連, 即死.”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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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련의 아들 건만(騫曼)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주 106
각주 106)
원문은 “其子騫曼小”인데, 『後漢書』에서는 ‘小’字 대신 ‘年小’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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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아들 괴두(魁頭)가 대신 대인이 되었다.주 107
각주 107)
원문은 “兄子魁頭代立”인데, 『後漢書』에서는 ‘代立’을 ‘立’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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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두가 대인이 된 후, 건만이 자라 어른이 되어 괴두와 나라를 다투게 되자주 108
각주 108)
원문은 “魁頭既立後, 騫曼長大”인데, 『後漢書』에서는 “後騫曼長大”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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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들은 떨어져 나가 흩어져 버렸다. 괴두가 죽고 아우인 보도근이 대신 즉위하였다.주 109
각주 109)
원문은 “弟步度根立”인데, 『後漢書』에서는 ‘代立’을 ‘立’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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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괴가 죽은 이후에 여러 대인들은 대대로 대인의 자리를 세습하게 되었다.주 496
각주 496)
『後漢書』의 원문에는 “諸大人遂世相襲”에 ‘相’과 ‘襲’ 사이에 ‘傳’字가 첨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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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鮮卑:북아시아의 유목민 집단이며, 東胡의 支派이다. 처음에 鮮卑山 부근에 모여 살아 ‘鮮卑’라고 명명되었다. 후에 呼倫池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다시 陰山 일대로 이동하여 다른 種族과 접촉하였다. 檀石槐가 鮮卑의 각 부족을 통합하였고, 옛날의 흉노에 필적하는 유목제국을 세웠다. 檀石槐 사후 분열되었으나, 軻比能이 다시 鮮卑 각 부족을 규합하였다. 三國 魏 靑龍 3년(235)에 軻比能이 魏의 자객에게 살해되어 鮮卑는 분열되었고, 후에 黃河 유역으로 이주하였다. 兩晉·南北朝時代에 慕容部가 前燕·後燕·西燕·南燕 등을, 乞伏部가 西秦을, 禿跋部가 南涼을, 拓跋部가 北魏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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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鮮卑山:鮮卑人들이 이 산에 거처하여 ‘鮮卑’라는 명칭을 얻었다. 정확한 위치는 설이 분분한데, 혹자는 鮮卑가 이동함에 따라 鮮卑山의 명칭도 달라졌다고 한다. 일설에는 현재의 內蒙古 自治區 鄂倫春自治縣 阿里河鎭 서북의 戞仙洞에서 北魏 鮮卑石室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大興安嶺 북단을 가장 오래된 鮮卑山으로 주장하였다. 그리고 혹 현재의 內蒙古 自治區 科爾沁右翼中旗의 서쪽에 있었다고도 하는데, 현재 사람들은 이를 蒙格이라 부른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현재의 러시아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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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원문은 “鮮卑亦東胡之餘也, 別保鮮卑山, 因號焉.”인데, 『後漢書』에서는 “鮮卑者, 亦東胡之支也, 別依鮮卑山, 故因號焉.”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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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西城:일설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에 있던 于闐國의 수도인 西山城이라고 하나, 초기 鮮卑가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지배하지 못했으므로 于闐國으로 보기 어렵다. 현재 어떤 곳인지 未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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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원문은 “常以季春大會, 作樂水上”인데, 『後漢書』에는 “以季春月大會於饒樂水上”이라고 하였다. 양자를 대조하면 원문의 “作樂水上”과 『後漢書』의 “饒樂水上”이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饒樂水’는 江 이름인데 비해 현재의 中華書局標點校勘本에서는 ‘作樂水’는 고유명사로 보지 않았다. 번역문은 이 교감과 표점에 따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後漢書』와 대조해보면 ‘作樂水’는 ‘饒樂水’의 誤記이거나 그대로 고유명사로 취급하여 “해마다 삼월에 作樂水(혹은 饒樂水) 가에서 큰 모임을 열어”로 번역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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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원문은 “其地東接遼水, 西當西城. 常以季春大會, 作樂水上, 嫁女娶婦, 髡頭飲宴.”인데, 『後漢書』에서는 “唯婚姻先髡頭, 以季春月大會於饒樂水上, 飲讌畢, 然後配合.”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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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원문은 “其獸異於中國者”인데, 『後漢書』에서는 “又禽獸異於中國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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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羱羊:들양 혹은 들염소라고 한다. 야생 양의 일종이며 납작하고 둥근 뿔이 있다. 『後漢書』에서는 “原羊”이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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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端牛:『後漢書』에서는 “角端牛”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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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5)
    角端:하루에 萬里를 가고 먼 곳의 말에 통한다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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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貂:담비 혹은 족제비과에 속하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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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豽:‘貀’로도 쓰는데, 이에 대한 견해가 분분하여 정확히 무엇이라고 밝히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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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鼲子:잿빛의 쥐, 혹 밍크로 추정되는 털짐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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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원문은 “鮮卑自爲冒頓所破”인데, 『後漢書』에서는 “漢初, 亦爲冒頓所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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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원문은 “不與餘國爭衡, 未有名通於漢, 而(由)自與烏丸相接.”인데, 『後漢書』에서는 “與烏桓相接, 未常通中國焉.”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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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원문은 “鮮卑大人於仇賁率種人詣闕朝貢”인데, 『後漢書』에서는 “鮮卑大人於仇賁·滿頭等率種人詣闕朝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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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원문은 “封於仇賁爲王”인데, 『後漢書』에서는 “帝封於仇賁爲王, 滿頭爲侯.”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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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後漢書』에서는 “欽志賁”을 “歆志賁”이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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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원문은 “永平中, 祭肜爲遼東太守, 誘賂鮮卑, 使斬叛烏丸欽志賁等首”인데, 『後漢書』에서는 “永平元年, 祭肜復賂偏何擊歆志賁, 破斬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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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6)
    燉煌郡:前漢 武帝 元鼎 6년(전111), 혹은 일설에는 元封 4~5년(전107~106)에 酒泉郡을 나누어서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燉煌縣(현재 甘肅省 敦煌縣 서남)이다. 관할구역은 현재 甘肅省 疏勒河 以南과 玉門關 以東의 지역이다. 後漢時代 涼州에 속하였다. 西秦 元康 5년(295)부터 北魏時代까지 전후 현재의 安西縣 以東과 以南의 땅이 晉昌郡·涼興郡·武興郡에 편입되었으며, 현재의 敦煌縣 南湖일대를 나누어 壽昌郡을 설치하였다. 燉煌은 ‘敦煌’으로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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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酒泉郡:前漢 元狩 2년(전121) 匈奴의 昆邪王이 항복한 후 설치되었다. 郡治所 城 아래에 泉이 있었는데, 泉의 맛이 술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治所는 祿福縣인데, 晉代 福祿縣으로 改稱되었고, 隋代 酒泉縣으로 바뀌었다. 관할구역은 현재 甘肅省 河西回廊 서부에 해당한다. 일설에 따르면 元鼎 2~3년 사이(전115~114), 혹은 元鼎 6년 酒泉郡이 처음 설치되었으며, 관할구역은 河西回廊 전체였다고 한다. 후에 武威郡과 酒泉郡을 분할하여 張掖郡과 敦煌郡을 설치하였는데, 관할구역은 현재 甘肅省 疏勒河 以東, 高合縣 以西의 지역이었다. 後漢時代 涼州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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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원문은 “於是鮮卑自燉煌·酒泉以東邑落大人, 皆詣遼東受賞賜”인데, 『後漢書』에서는 “於是鮮卑大人皆來歸附, 並詣遼東受賞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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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和帝(79~105;재위 88~105):이름은 肇이며, 章帝의 아들이다. 章和 2년(88) 章帝 사후 즉위하였는데, 당시 10세에 불과하여 竇太后가 臨朝稱制하여 外戚 竇憲 등이 정치를 담당하였다. 永元 4년(92) 竇氏와 그 일당을 주살하고 親政을 시작하였다. 군대를 파견해 匈奴·羌·西域諸國을 정벌하였으며, 재해지역의 租賦를 감면하는 조서를 반포하기도 했다. 재위기간 중 西域都護 班超가 사람을 大秦(로마제국)에 파견하였는데 西海(페르시아만)에서 막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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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원문은 “安帝時”인데, 『後漢書』에서는 “安帝永初中(107~113)”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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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원문은 “鮮卑大人燕荔陽入朝”인데, 『後漢書』에서는 “鮮卑大人燕荔陽詣闕朝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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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寗: 漢代 上谷郡의 屬縣이다. 『後漢書』에서는 甯城이라고 표기되었다. 縣의 治所는 현재 河北省 萬全縣에 있었다. 後漢時代 上谷西部都尉의 治所가 있었으며, 한때 烏丸校尉의 治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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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원문은 “止烏丸校尉所治甯下”인데, 『後漢書』에서는 “令止烏桓校尉所居甯城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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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8)
    원문은 “築南北兩部質宮”인데, 『後漢書』에서는 “因築南北兩部質館”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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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9)
    원문은 “受邑落質者[百]二十部”인데, 『後漢書』에서는 “鮮卑邑落百二十部, 各遣入質.”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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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8)
    원문은 “是後或反或降”인데, 『後漢書』에서는 “是後或降或畔”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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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1)
    원문은 “或與匈奴·烏丸相攻擊.”인데, 『後漢書』에서는 “與匈奴·烏桓更相攻擊.”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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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2)
    『後漢書』에 따르면 元初 5년(118)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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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3)
    馬城縣:代郡의 屬縣이다. 前漢時代에 설치하였고, 治所는 현재 河北省 懷安縣 서쪽이다. 代郡 東部都尉의 治所였다. 後漢末에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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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4)
    中郞將: 秦漢時代 禁中의 警衛를 관장한 郎中令 휘하에 설치된 中郞을 관리하기 위해 五官署·左署·右署에 두어진 장관의 명칭이다. 秩은 比二千石이며 지위는 將軍의 아래이고 합쳐서 五官中郞將이라 칭했다. 虎賁郞에 설치한 中郞將은 虎賁中郞將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中郞將은 모두 皇帝의 侍衛를 통솔하여 좌우를 隨從하며 어떤 경우에는 禁軍을 통솔하였다. 後漢時代에는 五官中郞將 1인을 두었는데, 秩은 比二千石이었고 五官郞을 관장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五官中郞(比六百石), 五官侍郞(比四百石), 五官郎中(比三百石)을 두었다. 또 左中郞將·右中郞將·虎賁中郞將·羽林中郞將·使匈奴中郞將 등을 두었는데, 모두 光祿勳(前漢의 郎中令)에 속하였다. 後漢末에 東西南北의 四中郞將을 두었는데,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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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5)
    원문은 “後鮮卑八九千騎穿代郡及馬城塞入害長吏, 漢遣度遼將軍鄧遵·中郎將馬續出塞追破之.”인데, 『後漢書』에서는 “六年秋, 鮮卑入馬城塞, 殺長吏, 度遼將軍鄧遵發積射士三千人, 及中郎將馬續率南單于, 與遼西·右北平兵馬會, 出塞追擊鮮卑, 大破之, 獲生口及牛羊財物甚眾.”이라고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後漢書』의 이 기록에 따르면 이 사건은 元初 6년(119)에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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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6)
    원문은 “鮮卑大人烏倫·其至鞬等七千餘人詣遵降.”인데, 『後漢書』에는 “永寧元年, 遼西鮮卑大人烏倫·其至鞬率眾詣鄧遵降, 奉貢獻.”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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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7)
    『後漢書』에 따르면 이는 永寧元年(120)의 일이며, 이때 烏倫은 率衆王, 其至鞬은 率衆侯에 봉해졌다. 원문에서는 王과 侯 앞에 “率衆”이 생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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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8)
    원문은 “采帛”인데 ‘采’는 ‘綵’와 같은 뜻이다. 『後漢書』에서는 이를 “綵繒”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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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9)
    원문은 “封烏倫爲王, 其至鞬爲侯, 賜采帛.”인데, 『後漢書』에는 “詔封烏倫爲率眾王, 其至鞬爲率眾侯, 賜綵繒各有差.”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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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9)
    원문은 “遵去後”인데, 『後漢書』에서는 “建光元年(121)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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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1)
    원문은 “其至鞬復反”인데, 『後漢書』에서는 ‘反’字 대신 ‘畔’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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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2)
    원문은 “圍烏丸校尉於馬城”인데, 『後漢書』에서는 “寇居庸, 雲中太守成嚴擊之, 兵敗, 功曹楊穆以身捍嚴, 與俱戰歿. 鮮卑於是圍烏桓校尉徐常於馬城.”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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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3)
    『後漢書』에 따르면 당시 幽州刺史의 이름은 龐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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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4)
    원문은 “度遼將軍耿夔及幽州刺史救解之.”인데, 『後漢書』에서는 “度遼將軍耿夔與幽州刺史龐參發廣陽·漁陽·涿郡甲卒, 分爲兩道救之;常夜得潛出, 與夔等并力並進, 攻賊圍, 解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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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5)
    원문은 “其至鞬遂盛, 控弦數萬騎.”인데, 『後漢書』에서는 “鮮卑既累殺郡守, 膽意轉盛, 控弦數萬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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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6)
    원문은 “數道入塞”인데, 『後漢書』에는 이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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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7)
    曼栢縣:前漢時代에 설치되었다. 治所는 현재의 內蒙古自治區 準格爾旗 서북 漢代의 옛성터이다. 五原郡에 속하였다. 後漢 永平 8년(65)에 度遼營을 두어 南匈奴와 北匈奴의 交通을 막았다. 後漢末 廢置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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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8)
    『後漢書』에서는 “左奧鞬日逐王”을 “薁鞬日逐王”이라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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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9)
    원문은 “趣五原(寧貊)[曼栢], 攻匈奴南單于, 殺左奧鞬日逐王.”인데, 『後漢書』에서는 “二年冬, 其至鞬自將萬餘騎入東領候, 分爲數道, 攻南匈奴於曼柏, 薁鞬日逐王戰死, 殺千餘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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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90)
    『後漢書』에 따르면 代郡太守의 이름은 李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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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1)
    원문은 “順帝時, 復入塞, 殺代郡太守.”인데, 『後漢書』에서는 “順帝永建元年秋, 鮮卑其至鞬寇代郡, 太守李超戰死.”라고 하였다. 『後漢書』에 따르면, 이 사건은 永建元年(126)에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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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2)
    中山國:원래 前漢 高祖가 설치한 郡이었으며, 治所는 盧奴縣(현재의 河北省 定州市에 해당)이었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河北省 狼牙山 以南과 保定·安國 以西, 唐縣·新樂 以東, 滹沱河 以北에 해당한다. 景帝 시기에 郡을 國으로 바꿔 아들 劉勝을 中山王으로 봉하였다. 후에 五胡十六國時代에 慕容垂가 이곳을 수도로 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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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3)
    원문은 “漢遣黎陽營兵屯中山, 緣邊郡兵屯塞下, 調五營弩帥令教戰射, 南單于將步騎萬餘人助漢擊卻之.”인데, 『後漢書』에서는 “明年春, 中郎將張國遣從事將南單于兵步騎萬餘人出塞, 擊破之, 獲其資重二千餘種.”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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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4)
    원문은 “後烏丸校尉耿曄將率衆王出塞擊鮮卑, 多斬首虜, 於是鮮卑三萬餘落, 詣遼東降.”인데, 『後漢書』에서는 “時遼東鮮卑六千餘騎亦寇遼東玄菟, 烏桓校尉耿曄發緣邊諸郡兵及烏桓率眾王出塞擊之, 斬首數百級, 大獲其生口牛馬什物, 鮮卑乃率種眾三萬人詣遼東乞降.”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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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5)
    『後漢書』에 따르면 匈奴 집단이 ‘鮮卑’를 자칭한 것은 和帝 永元년간(89~105)의 일이다. 또 원문에서는 “鮮卑兵”이라고 스스로 불렀다고 하였는데, 『後漢書』에서는 그냥 “鮮卑”를 자칭했다고 한다. 이 구절은 유목민들의 種族과 정체성 문제를 해명하는 데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유목민들은 본래 단일 種族이 아니라 혈연이 다른 집단들이 모인 혼성집단이었으며, 유목 부족들을 통합한 집단의 명칭을 따서 부족연합체의 명칭으로 삼았다. 이 부족연합체가 붕괴하면 복속된 부족들은 이를 이탈하여 다른 집단에 속하였다. 이때 이 집단의 명칭은 새로 속한 집단의 이름에 따르게 된다. 즉 匈奴에 복속했던 부족도 鮮卑에 속하게 되면 자신의 정체성을 匈奴가 아닌 鮮卑로 본 것이다. 金浩東은 중국사서에 보이는 여러 유목집단 혹은 유목국가들이 種族的(ethnic)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political)인 속성을 지녔다고 보았으며, 번역문의 내용이 대표적인 예라고 지적하였다(金浩東, 1993: 125~126 및 125~126의 주) 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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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6)
    원문은 “投鹿侯從匈奴軍三年, 其妻在家, 有子.”인데, 『後漢書』에서는 “其父投鹿侯, 初從匈奴軍三年, 其妻在家生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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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7)
    원문은 “電”인데, 『後漢書』에서는 “雹”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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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8)
    원문은 “且長之”인데, 『後漢書』에서는 “且宜長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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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9)
    원문은 “投鹿侯固不信”인데, 『後漢書』에서는 “投鹿侯不聽, 遂棄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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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91)
    원문은 “妻乃語家, 令收養焉”인데, 『後漢書』에서는 “妻私語家令收養焉”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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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1)
    원문은 “號檀石槐”인데, 『後漢書』에서는 ‘號’ 대신 ‘名’字를 사용하였다. 檀石槐의 출생 기록은 神異性을 강조하는 感生說話의 하나이며, 번개와 우박 등 두려운 자연현상을 그의 출생과 결부시켜 軍神的 存在로 부각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보인다고 한다. 金浩東은 이 기록을 大人에서 君主로의 移行을 방증하는 자료로 보았다(金浩東, 1993: 13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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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2)
    원문은 “長大勇健, 智略絕衆.”인데, 『後漢書』에서는 “年十四五, 勇健有智略.”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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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3)
    『後漢書』에서는 大人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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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4)
    원문은 “鈔取”인데, 『後漢書』에서는 “抄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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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5)
    원문은 “檀石槐策騎追擊”인데, 『後漢書』에서는 “檀石槐單騎追擊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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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6)
    원문은 “悉還得所亡”인데, 『後漢書』에서는 “悉還得所亡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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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7)
    원문은 “施法禁”인데, 『後漢書』에서는 ‘乃’字를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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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8)
    원문은 “庭”인데, 이는 ‘單于庭’ 혹은 ‘可汗庭’이라 일컫는 유목군주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정주국가의 수도와 같다.(『史記索隱』에 의하면, ‘庭’은 흉노에서 都城처럼 머무르는 곳을 지칭한다. 또 單于에게는 성곽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을 도읍이라 칭할지 몰랐다. 穹盧 앞의 땅이 庭과 같았기 때문에 ‘庭’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鮮卑人들을 우두머리를 單于나 可汗이 아닌 大人이라 칭했으므로 ‘大人庭’이라 칭해야 하지만, 현재 ‘大人庭’으로 표기한 글이 없기 때문에 번역문에는 단순하게 ‘거처’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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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9)
    彈汗山:현재 河北省 尙義縣 남쪽에 있는 大靑山을 지칭한다. 檀石槐의 거점이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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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92)
    『後漢書』에는 “啜仇水”를 “歠仇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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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1)
    원문은 “檀石槐既立, 乃爲庭於高柳北三百餘里彈汗山啜仇水上”인데, 『後漢書』에서는 “檀石槐乃立庭於彈汗山歠仇水上”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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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2)
    원문은 “東西部大人皆歸焉. 兵馬甚盛, 南鈔漢邊.”인데, 『後漢書』에서는 “兵馬甚盛, 東西部大人皆歸焉. 因南抄緣邊.”이라고 하였다. 구절은 비슷하나 각 구절의 배열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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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3)
    『後漢書』에서는 “丁令”을 “丁零”으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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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4)
    『後漢書』에는 1만 4천여 리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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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5)
    원문은 “罔羅山川·水澤·鹽池甚廣”인데, 『後漢書』에서는 “網羅山川水澤鹽池”라고 하여 원문의 ‘罔’字 대신 ‘網’字를 사용하였고, 원문의 ‘甚廣’ 2字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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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6)
    桓帝(132~167;146~167):이름은 劉志이며, 章帝의 증손이다.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蠡吾侯가 되었다. 本初元年(146) 質帝 사후 梁太后와 大將軍 梁冀의 옹립으로 15세의 나이로 帝位에 올랐다. 재위기간 梁太后가 臨朝稱制하고 梁冀가 전횡하여 朝政은 혼란하고 민생이 불안하였다. 延熹 2년(159) 宦官 單超 등과 함께 모의하여 梁氏를 멸하고 單超 등 환관을 縣侯로 봉하여, 이후 권력이 宦官에게 돌아갔다. 大臣 陳蕃과 李膺 등이 太學生과 연합하여 宦官의 정치 관여에 반대하여 朋黨으로 지목되었다. 이에 조서를 내려 黨人을 체포하고 종신 禁錮시켰다. 이를 黨錮의 禍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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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7)
    『後漢書」에 따르면 이는 延熹 9년(166)에 발생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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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8)
    원문은 “漢患之, 桓帝時使匈奴中郎將張奐征之, 不克. 乃更遣使者齎印綬, 即封檀石槐爲王, 欲與和親. 檀石槐拒不肯受, 寇鈔滋甚.”인데, 『後漢書』에서는 “朝廷積患之, 而不能制, 遂遣使持印綬封檀石槐爲王, 欲與和親. 檀石槐不肯受, 而寇抄滋甚.”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後漢書』에는 원문 앞에 “永壽二年秋, 檀石槐遂將三四千騎寇雲中. 延熹元年, 鮮卑寇北邊. 冬, 使匈奴中郎將張奐率南單于出塞擊之, 斬首二百級. 二年, 復入鴈門, 殺數百人, 大抄掠而去. 六年夏, 千餘騎寇遼東屬國. 九年夏, 遂分騎數萬人入緣邊九郡, 並殺掠吏人, 於是復遣張奐擊之, 鮮卑乃出塞去.”라는 기사가 있다. 檀石槐가 後漢과 和親하면 後漢으로부터 막대한 재물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거부하고 약탈에 몰두한 것은 그가 평화보다 전쟁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和親을 하면 그의 권력기반에 큰 손실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라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획득하면 大人이 이를 재분배하여 권력을 강화할 수 있지만, 약탈은 참여자 모두에게 물자 획득의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했기 때문에 檀石槐 휘하의 鮮卑人들은 화친보다 약탈을 선호했다고 한다. 檀石槐는 이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和親대신 약탈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金浩東, 1993: 132). 바필드는 鮮卑가 “약탈-화친-약탈”의 유기적인 강온 양면책을 구사하며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물자를 획득하는 정책을 구사함과 동시에 화친보다 약탈에 의존했던 이유를 鮮卑의 느슨한 정치적 결합 때문으로 보았다. 부족의 독자성이 강했던 鮮卑의 각 집단들의 견제로 大人이 재화의 재분배 과정을 독점할 수 없었다(Barfield, 1989: 8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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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9)
    원문은 “乃分其地爲中東西三部”인데, 『後漢書』에서는 “乃自分其地爲三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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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93)
    Thomas J. Burfield, Perilous Frontier: Nomadic Empires and China, Cambridge: Bosil Blackwell, 1989(馬長壽, 1962: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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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1)
    원문은 “從右北平以東至遼, (遼)[東]接夫餘·[濊]貊爲東部, 二十餘邑, 其大人曰彌加·闕機·素利·槐頭.”인데, 『後漢書』에서는 “從右北平以東至遼東, 接夫餘·濊貊二十餘邑爲東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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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2)
    慕容: 馬長壽는 慕容이 五胡十六國時代 前燕·後燕·西燕·南燕을 세운 慕容部의 선조라고 보았다. 慕容氏는 大人의 이름인 慕容을 따서 氏族 혹은 部族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한다(馬長壽, 1962: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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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3)
    원문은 “從右北平以西至上谷爲中部, 十餘邑, 其大人曰柯最·闕居·慕容等, 爲大帥.”인데, 『後漢書』에서는 “從右北平以西至上谷十餘邑爲中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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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4)
    置鞬落羅: 馬長壽는 置鞬落羅가 한 사람이 아니라 置鞬과 落羅 두 사람으로 보았다(馬長壽, 1962: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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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5)
    日律推演: 馬長壽는 日律推演을 日律과 推演 두 사람으로 분리하였다(馬長壽, 1962: 184). 胡三省은 『資治通鑑』의 注에서 中部大人의 한 사람인 推寅을 拓跋部의 先祖인 毛의 5世孫인 推寅可汗(宣帝)라고 추정하면서도 曹魏 元帝 景元 2년(261)에 拓跋氏의 始祖인 力微가 아들 沙漠汗을 入貢시킨 기사에서 力微와 推寅이 9代 차이가 나기 때문에 世代 수치의 불일치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馬長壽는 推寅이 力微의 祖父인 獻帝 鄰이라고 보았다. 이 경우 推寅은 拓跋部의 선조이다(馬長壽, 1962: 18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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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6)
    宴荔游: 馬長壽는 宴荔游가 『後漢書』에 보이는 燕荔陽과 동일인이라고 추정하였다. 燕荔陽은 後漢 安帝 營平년간(107~113)에 귀부하여 王으로 봉해지고 印綬와 車駕를 하사받았으며 桓帝시기(147~167)까지 살았다고 한다(馬長壽, 1962: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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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7)
    원문은 “從上谷以西至燉煌, 西接烏孫爲西部, 二十餘邑, 其大人曰置鞬落羅·日律推演·宴荔游等, 皆爲大帥”인데, 『後漢書』에서는 “從上谷以西至敦煌·烏孫二十餘邑爲西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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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8)
    원문은 “而制屬檀石槐.”인데, 『後漢書』에서는 “各置大人主領之, 皆屬檀石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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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9)
    원문은 “至靈帝時, 大鈔略幽·并二州. 緣邊諸郡, 無歲不被其毒.”인데, 『後漢書』에서는 “靈帝立, 幽·并·涼三州緣邊諸郡無歲不被鮮卑寇抄, 殺略不可勝數.”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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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94)
    護烏丸校尉:前漢 武帝의 치세(전139~전87)에 처음으로 烏丸人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으나 그 후 폐지되었다. 後漢시대에 光武帝 建武 25年(49)에 다시 上谷郡 寧城縣에 護烏桓校尉를 설치하여 烏丸 관련 업무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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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1)
    원문은 “(嘉)[熹]平六年, 遣護烏丸校尉夏育, 破鮮卑中郎將田晏, 匈奴中郎將臧旻與南單于出鴈門塞, 三道並進, 徑二千餘里征之.”인데, 『後漢書』에서는 “遂遣夏育出高柳, 田晏出雲中, 匈奴中郎將臧旻率南單于出鴈門, 各將萬騎, 三道出塞二千餘里.”라고 하였다. 『後漢書』에는 원문 앞에 “熹平三年冬, 鮮卑入北地, 太守夏育率休著屠各追擊破之. 遷育爲護烏桓校尉. 五年, 鮮卑寇幽州. 六年夏, 鮮卑寇三邊. 秋, 夏育上言:「鮮卑寇邊, 自春以來, 三十餘發, 請徵幽州諸郡兵出塞擊之, 一冬二春, 必能禽滅.」 朝廷未許. 先是護羌校尉田晏坐事論刑被原, 欲立功自效, 乃請中常侍王甫求得爲將, 甫因此議遣兵與育并力討賊. 帝乃拜晏爲破鮮卑中郎將. 大臣多有不同, 乃召百官議朝堂.”이라는 문장과 蔡邕이 鮮卑 遠征을 중지할 것을 간언한 上表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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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2)
    원문은 “檀石槐帥部衆逆擊, 旻等敗走, 兵馬還者什一而己.”인데, 『後漢書』에서는 “檀石槐命三部大人各帥眾逆戰, 育等大敗, 喪其節傳輜重, 各將數十騎奔還, 死者十七八.”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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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3)
    원문은 “鮮卑衆日多”인데, 『後漢書』에서는 “鮮卑衆” 대신 “種眾”이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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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4)
    護雅夫는 선비로 투항한 漢人들의 증가가 檀石槐시대 鮮卑의 인구증가의 주 요인이라고 보았다(護雅夫, 1997: 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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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5)
    烏侯秦水:현재의 內蒙古自治區 遼河 상류의 남쪽 지류인 老哈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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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6)
    원문은 “後檀石槐乃案行烏侯秦水, 廣袤數百里, 渟不流, 中有魚而不能得.”인데, 『後漢書』에서는 “檀石槐乃自徇行, 見烏侯秦水廣從數百里, 水停不流, 其中有魚, 不能得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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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7)
    『後漢書』에는 “汗人”을 “倭人”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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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8)
    『後漢書』에는 “汗國”을 “倭人國”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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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9)
    원문은 “聞汗人善捕魚, 於是檀石槐東擊汗國, 得千餘家, 徙置烏侯秦水上, 使捕魚以助糧.”인데, 『後漢書』에서는 “聞倭人善網捕, 於是東擊倭人國, 得千餘家, 徙置秦水上, 令捕魚以助糧食.”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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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95)
    원문은 “至于今, 烏侯秦水上有汗人數百戶.”인데, 『後漢書』에는 이 기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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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1)
    원문은 “檀石槐年四十五死”인데, 『後漢書』에서는 “光和中, 檀石槐死, 時年四十五”라고 하였다. 『後漢書』에 따르면 檀石槐가 죽은 시기는 靈帝 光和年間(178~183) 사이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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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2)
    원문은 “而貪淫”인데, 『後漢書』에서는 “性貪淫”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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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3)
    원문은 “眾叛者半”인데, 『後漢書』에서는 ‘叛’字 대신 ‘畔’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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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4)
    北地郡:戰國時代 秦이 설치하였다. 治所는 義渠縣(지금의 甘肅省 西峰市 동쪽)에 있었다. 前漢時代에는 治所를 馬領縣(지금 甘肅省 慶陽縣 서북)으로 이전하였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甘肅省 環江, 馬蓮河 유역과 寧夏回族自治區 賀蘭山, 靑銅峽, 山水河 동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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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5)
    원문은 “靈帝末年數爲寇鈔, 攻北地, 北地庶人善弩射者射中和連, 和連即死.”인데, 『後漢書』에서는 “後出攻北地, 廉人善弩射者射中和連, 即死.”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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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6)
    원문은 “其子騫曼小”인데, 『後漢書』에서는 ‘小’字 대신 ‘年小’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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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7)
    원문은 “兄子魁頭代立”인데, 『後漢書』에서는 ‘代立’을 ‘立’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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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8)
    원문은 “魁頭既立後, 騫曼長大”인데, 『後漢書』에서는 “後騫曼長大”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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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9)
    원문은 “弟步度根立”인데, 『後漢書』에서는 ‘代立’을 ‘立’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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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96)
    『後漢書』의 원문에는 “諸大人遂世相襲”에 ‘相’과 ‘襲’ 사이에 ‘傳’字가 첨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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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배송지, 묵특[선우], 광무제, 어구분(於仇賁), 광무제, 어구분, 제융(祭肜), 흠지분(欽志賁), 화제(和帝), 융말외, 임상(任尙), 융말외, 상제(殤帝), 장현(張顯), 안제, 연려양(燕荔陽), 연려양, 안제(安帝), 등준(鄧遵), 마속(馬續), 오륜(烏倫), 기지건(其至鞬), 등준, 오륜, 기지건, 등준, 기지건, 경기, 기지건, 기지건, 순제, 경엽, 투록후(投鹿侯), 투록후, 투록후, 단석괴(檀石槐),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환제(桓帝), 장환(張奐),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미가(彌加), 궐기(厥機), 소리(素利), 괴두(槐頭), 가최(柯最), 궐거(闕居), 모용(慕容), 치건락라(置鞬落羅), 일률추연(日律推演), 연려유(宴荔游), 단석괴, 영제, 단석괴, 영제, 하육(夏育), 전안(田晏), 장민(臧旻), 단석괴, 장민,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단석괴, 화련(和連), 화련, 단석괴, 영제(靈帝), 화련, 화련, 화련, 건만(騫曼), 괴두(魁頭), 괴두, 건만, 괴두, 괴두, 보도근, 단석괴
지명
선비산(鮮卑山), 요수(遼水), 요동, 한나라, 요동, 돈황[군](燉煌郡), 주천[군](酒泉郡), 요동[군](遼東郡), 청주(靑州), 서주(徐州), 요동군, 어양, 한나라, 대군(代郡), 마성[현](馬城縣), 한나라, 마성(馬城), 유주, 오원[군](五原郡), 만백[현](曼栢縣), 대군, 한나라, 중산[국](中山國), 한나라, 요동[군], 요동[군], 복분읍(卜賁邑), 고류[현](高柳縣), 탄한산(彈汗山), 철구수(啜仇水), 한나라, 정령(丁令), 부여(夫餘), 오손, 한나라, 우북평[군], 요동[군], 부여, 우북평[군], 상곡[군], 상곡[군], 돈황[군](燉煌郡), 오손, 유주, 병주(幷州), 오후진수(烏侯秦水), 오후진수, 한국(汗國), 오후진수, 오후진수, 북지[군](北地郡), 북지군
서명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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