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흉노가 후한에 귀부하고 선비는 처음으로 후한에 사신을 보냄
한나라 초기에 [선비도 오환처럼] 역시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격파되어주 001멀리 요동의 새외로 달아나 숨어 있었는데, 오환과 서로 접하였으며, 아직 중국과 늘 왕래한 것은 아니었다.주 002
광무제 초기에 흉노가 강성하여 선비와 오환을 이끌고 북변을 노략질하였으며, 관리와 백성들을 살해하고 약탈하여 편안한 해가 없었다.주 003
건무 21년(45)에 선비와 흉노는 요동[군]을 침입하였는데, 요동 태수 제융(祭肜) 주 004
건무 21년(45)에 선비와 흉노는 요동[군]을 침입하였는데, 요동 태수 제융(祭肜) 주 004
각주 004)
이 그들을 격파하여 거의 대부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 기사는 이미 제융의 열전(列傳)에 기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선비인들은] 두려워 떨었다.주 005남흉노의 선우[南單于]주 006祭肜(?~73): 前漢時代 潁川郡 穎陽縣 사람이며, 字는 次孫이다. 어려서 後漢 光武帝 초기에 黃門侍郞과 偃師長·襄賁令을 역임하였으며, 우수한 치적을 올려 秩 1等이 승격되고 縑 100필을 하사받기도 했다. 建武 17년(41)부터 永平 12년(69)까지 29년 동안 遼東太守로 재직하며 匈奴·鮮卑·烏桓·高句麗 등의 침입을 잘 방어하였고 赤山烏桓을 토벌하는 등 위엄이 서쪽으로 武威郡부터 동쪽으로 玄菟와 樂浪郡까지 퍼져 胡夷가 모두 內附하였다. 永平 12년에 太僕에 임명되었고 그 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100만 錢과 말 3필 등을 하사받았다. 永平 16년(73)에 南匈奴單于 左賢王 信과 함께 北匈奴를 토벌하기 위해 만여 騎를 이끌고 출병하였으나 성과 없이 돌아와서 하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공을 세우지 못함을 한스러워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각주 006)
가 한나라에 귀부하자 북로(北虜)주 007는 고립되고 약해졌다. [건무] 25년(49)에 선비는 처음으로 역(驛)을 통하여 사신을 [후한에] 보냈다.주 008
南單于: 南匈奴의 單于라는 뜻이다. 匈奴는 45년 전후 單于 계승분쟁 이후 南匈奴와 北匈奴로 분열되었고, 48년에 자립한 比가 50년에 아들을 後漢에 입시케 하여 복속하였다. 後漢은 항복한 南匈奴 8部 4~5만 인을 西河郡과 北地郡·朔方郡·五原郡·雲中郡·定襄郡·雁門郡·代郡 등지에 이주시켜 분산하여 배치하였다. 그리고 使匈奴中郞將을 두어 匈奴를 감독하게 하였다. 南匈奴의 單于는 매년 새해 첫날 朝賀하여 억만에 이르는 賞賜를 받았다(사와다 이사오, 2007: 194~198). 후에 單于의 권력이 약화되어 반란으로 자주 피살되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祭肜(?~73): 前漢時代 潁川郡 穎陽縣 사람이며, 字는 次孫이다. 어려서 後漢 光武帝 초기에 黃門侍郞과 偃師長·襄賁令을 역임하였으며, 우수한 치적을 올려 秩 1等이 승격되고 縑 100필을 하사받기도 했다. 建武 17년(41)부터 永平 12년(69)까지 29년 동안 遼東太守로 재직하며 匈奴·鮮卑·烏桓·高句麗 등의 침입을 잘 방어하였고 赤山烏桓을 토벌하는 등 위엄이 서쪽으로 武威郡부터 동쪽으로 玄菟와 樂浪郡까지 퍼져 胡夷가 모두 內附하였다. 永平 12년에 太僕에 임명되었고 그 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100만 錢과 말 3필 등을 하사받았다. 永平 16년(73)에 南匈奴單于 左賢王 信과 함께 北匈奴를 토벌하기 위해 만여 騎를 이끌고 출병하였으나 성과 없이 돌아와서 하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공을 세우지 못함을 한스러워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색인어
- 이름
- 묵특[선우], 광무제, 제융(祭肜), 제융
- 지명
- 한나라, 요동, 요동[군], 한나라, 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