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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남흉노가 후한에 귀부하고 선비는 처음으로 후한에 사신을 보냄

  • 국가
    선비(鮮卑)
한나라 초기에 [선비도 오환처럼] 역시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격파되어주 001
각주 001)
원문은 “漢初, 亦爲冒頓所破”인데, 『三國志』에서는 “鮮卑自爲冒頓所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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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요동의 새외로 달아나 숨어 있었는데, 오환과 서로 접하였으며, 아직 중국과 늘 왕래한 것은 아니었다.주 002
각주 002)
원문은 “與烏桓相接, 未常通中國焉.”인데, 『三國志』에서는 “不與餘國爭衡, 未有名通於漢, 而(由)自與烏丸相接.”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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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초기에 흉노가 강성하여 선비와 오환을 이끌고 북변을 노략질하였으며, 관리와 백성들을 살해하고 약탈하여 편안한 해가 없었다.주 003
각주 003)
『三國志』에서는 번역문과는 달리 광무제 초기에 北匈奴와 南匈奴가 서로 싸우다가 국력을 소모하여 약해졌고 鮮卑는 어부지리 격으로 강해졌다고 기록하였다(“至光武時, 南北單于更相攻伐, 匈奴損耗, 而鮮卑遂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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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무 21년(45)에 선비와 흉노는 요동[군]을 침입하였는데, 요동 태수 제융(祭肜) 주 004
각주 004)
祭肜(?~73): 前漢時代 潁川郡 穎陽縣 사람이며, 字는 次孫이다. 어려서 後漢 光武帝 초기에 黃門侍郞과 偃師長·襄賁令을 역임하였으며, 우수한 치적을 올려 秩 1等이 승격되고 縑 100필을 하사받기도 했다. 建武 17년(41)부터 永平 12년(69)까지 29년 동안 遼東太守로 재직하며 匈奴·鮮卑·烏桓·高句麗 등의 침입을 잘 방어하였고 赤山烏桓을 토벌하는 등 위엄이 서쪽으로 武威郡부터 동쪽으로 玄菟와 樂浪郡까지 퍼져 胡夷가 모두 內附하였다. 永平 12년에 太僕에 임명되었고 그 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100만 錢과 말 3필 등을 하사받았다. 永平 16년(73)에 南匈奴單于 左賢王 信과 함께 北匈奴를 토벌하기 위해 만여 騎를 이끌고 출병하였으나 성과 없이 돌아와서 하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공을 세우지 못함을 한스러워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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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들을 격파하여 거의 대부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 기사는 이미 제융의 열전(列傳)에 기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선비인들은] 두려워 떨었다.주 005
각주 005)
建武 21년 가을 鮮卑 萬餘 騎가 遼東郡을 침입하자 祭肜은 수천 인을 거느리고 鮮卑를 공격하여 3천여 인을 참하고 말 수천 필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後漢書』 卷20 「祭肜傳」: 744~745, “[建武]二十一年秋, 鮮卑萬餘騎寇遼東, 肜率數千人迎擊之, 自被甲陷陳, 虜大奔, 投水死者過半, 遂窮追出塞, 虜急, 皆棄兵祼身散走, 斬首三千餘級, 獲馬數千匹. 自是後鮮卑震怖, 畏肜不敢復闚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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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흉노의 선우[南單于]주 006
각주 006)
南單于: 南匈奴의 單于라는 뜻이다. 匈奴는 45년 전후 單于 계승분쟁 이후 南匈奴와 北匈奴로 분열되었고, 48년에 자립한 比가 50년에 아들을 後漢에 입시케 하여 복속하였다. 後漢은 항복한 南匈奴 8部 4~5만 인을 西河郡과 北地郡·朔方郡·五原郡·雲中郡·定襄郡·雁門郡·代郡 등지에 이주시켜 분산하여 배치하였다. 그리고 使匈奴中郞將을 두어 匈奴를 감독하게 하였다. 南匈奴의 單于는 매년 새해 첫날 朝賀하여 억만에 이르는 賞賜를 받았다(사와다 이사오, 2007: 194~198). 후에 單于의 권력이 약화되어 반란으로 자주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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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에 귀부하자 북로(北虜)주 007
각주 007)
北虜: 북쪽의 오랑캐라는 뜻인데, 北匈奴를 가리킨다. 後漢初 匈奴는 南匈奴와 北匈奴로 분열되었고 이 가운데 南匈奴가 後漢에 투항하여 後漢의 북변으로 이주하여 北匈奴를 막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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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고립되고 약해졌다. [건무] 25년(49)에 선비는 처음으로 역(驛)을 통하여 사신을 [후한에] 보냈다.주 008
각주 008)
『後漢書』 卷20 「祭肜傳」에는 祭肜이 사신을 보내 먼저 재물의 이익을 미끼로 鮮卑를 유인하자 大都護 偏何가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였다(『後漢書』 卷20 「祭肜傳」: 745 “[祭]肜以三虜連和, 卒爲邊害, [建武]二十五年, 乃使招呼鮮卑, 示以財利. 其大都護偏何遣使奉獻, 願得歸化, 肜慰納賞賜, 稍復親附.”). 본문에서는 後漢이 먼저 사신을 보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三國志』에는 번역문에 있는 建武 21년과 25년 기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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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원문은 “漢初, 亦爲冒頓所破”인데, 『三國志』에서는 “鮮卑自爲冒頓所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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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원문은 “與烏桓相接, 未常通中國焉.”인데, 『三國志』에서는 “不與餘國爭衡, 未有名通於漢, 而(由)自與烏丸相接.”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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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三國志』에서는 번역문과는 달리 광무제 초기에 北匈奴와 南匈奴가 서로 싸우다가 국력을 소모하여 약해졌고 鮮卑는 어부지리 격으로 강해졌다고 기록하였다(“至光武時, 南北單于更相攻伐, 匈奴損耗, 而鮮卑遂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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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祭肜(?~73): 前漢時代 潁川郡 穎陽縣 사람이며, 字는 次孫이다. 어려서 後漢 光武帝 초기에 黃門侍郞과 偃師長·襄賁令을 역임하였으며, 우수한 치적을 올려 秩 1等이 승격되고 縑 100필을 하사받기도 했다. 建武 17년(41)부터 永平 12년(69)까지 29년 동안 遼東太守로 재직하며 匈奴·鮮卑·烏桓·高句麗 등의 침입을 잘 방어하였고 赤山烏桓을 토벌하는 등 위엄이 서쪽으로 武威郡부터 동쪽으로 玄菟와 樂浪郡까지 퍼져 胡夷가 모두 內附하였다. 永平 12년에 太僕에 임명되었고 그 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100만 錢과 말 3필 등을 하사받았다. 永平 16년(73)에 南匈奴單于 左賢王 信과 함께 北匈奴를 토벌하기 위해 만여 騎를 이끌고 출병하였으나 성과 없이 돌아와서 하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공을 세우지 못함을 한스러워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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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建武 21년 가을 鮮卑 萬餘 騎가 遼東郡을 침입하자 祭肜은 수천 인을 거느리고 鮮卑를 공격하여 3천여 인을 참하고 말 수천 필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後漢書』 卷20 「祭肜傳」: 744~745, “[建武]二十一年秋, 鮮卑萬餘騎寇遼東, 肜率數千人迎擊之, 自被甲陷陳, 虜大奔, 投水死者過半, 遂窮追出塞, 虜急, 皆棄兵祼身散走, 斬首三千餘級, 獲馬數千匹. 自是後鮮卑震怖, 畏肜不敢復闚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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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南單于: 南匈奴의 單于라는 뜻이다. 匈奴는 45년 전후 單于 계승분쟁 이후 南匈奴와 北匈奴로 분열되었고, 48년에 자립한 比가 50년에 아들을 後漢에 입시케 하여 복속하였다. 後漢은 항복한 南匈奴 8部 4~5만 인을 西河郡과 北地郡·朔方郡·五原郡·雲中郡·定襄郡·雁門郡·代郡 등지에 이주시켜 분산하여 배치하였다. 그리고 使匈奴中郞將을 두어 匈奴를 감독하게 하였다. 南匈奴의 單于는 매년 새해 첫날 朝賀하여 억만에 이르는 賞賜를 받았다(사와다 이사오, 2007: 194~198). 후에 單于의 권력이 약화되어 반란으로 자주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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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北虜: 북쪽의 오랑캐라는 뜻인데, 北匈奴를 가리킨다. 後漢初 匈奴는 南匈奴와 北匈奴로 분열되었고 이 가운데 南匈奴가 後漢에 투항하여 後漢의 북변으로 이주하여 北匈奴를 막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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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後漢書』 卷20 「祭肜傳」에는 祭肜이 사신을 보내 먼저 재물의 이익을 미끼로 鮮卑를 유인하자 大都護 偏何가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였다(『後漢書』 卷20 「祭肜傳」: 745 “[祭]肜以三虜連和, 卒爲邊害, [建武]二十五年, 乃使招呼鮮卑, 示以財利. 其大都護偏何遣使奉獻, 願得歸化, 肜慰納賞賜, 稍復親附.”). 본문에서는 後漢이 먼저 사신을 보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三國志』에는 번역문에 있는 建武 21년과 25년 기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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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묵특[선우], 광무제, 제융(祭肜), 제융
지명
한나라, 요동, 요동[군], 한나라,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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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흉노가 후한에 귀부하고 선비는 처음으로 후한에 사신을 보냄 자료번호 : jo.k_0003_012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