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맥이 아니라 오환이다
by Silla on 2021-06-25
맥이 49년 정월에 右北平, 漁陽, 上谷 그리고 太原을 침략하자 遼東太守 祭肜이 불러 항복시켰다는 후한서의 기록은 이상한 점이 많다. (1) 이들 지역은 고구려가 침략하기 힘든 지역이고 (2) 이들 지역은 오환의 침략이 잦았던 지역이며 (3) 삼국지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오환의 일이 맥인의 일로 잘못 기록되었을 수도 있고 오환, 제융 그리고 맥인의 역사가 혼동되어 발생한 착각일 수도 있다.

(1) 고구려가 침략하기 힘든 지역이다.
당시 요동은 제융이 태수로 있으면서 45년에 있었던 선비와 흉노의 침공을 격파하여 거의 대부분 죽이거나 사로잡아 선비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결국 선비는 49년에 처음으로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이후부터는 흉노를 공격하고 요동으로부터 보상을 받기 시작했다.
고구려에서 右北平, 漁陽, 上谷 그리고 太原을 침공하려면 그러한 요동을 피해 남쪽 바다나 북쪽 초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다보다는 초원이 쉬워보이나 그 초원은 선비의 영역이었다.
마침 선비와 뜻이 맞아 그들의 협력을 얻어 초원을 지난다해도 이들 지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환의 협력도 얻어야 했을 것이다. 오환은 46년에 흉노를 크게 격파한 뒤 초원의 패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이렇게 해서 右北平, 漁陽 그리고 上谷에 다다랐다 해도 이번에는 太原이 문제다. 대륙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고구려를 둘러싼 정세도 고구려에 유리하지 않았다.
서쪽에는 요동군이 건재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낙랑군이 부활하고 있었다. 44년에는 한국 염사 사람들이 낙랑에 귀부하였고 47년에는 고구려 잠지락 사람들이 낙랑으로 귀순하였다.
요컨대, 고구려는 이 당시 중국을 침공할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2) 오환의 침략이 잦았던 지역이다.
일찌기 무제(-0141~-0087)가 흉노의 동쪽 지역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오환을 上谷, 漁陽, 右北平, 요서, 요동 등 5군의 새외로 옮긴 뒤 한나라를 위해 흉노의 동정을 정탐하도록 한 바 있다.
오환은 한나라의 변경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아침에 천막을 출발하면 저녁에 성곽에 도달할 수 있었다.
25년 이후 오환은 흉노와 연합하여 대, 上谷, 漁陽, 右北平 그리고 요서를 자주 침략하였고 45년에는 오원관을 나와 쳐들어온 한나라 군대를 대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46년에 흉노를 격파했을 때는 한나라로부터 보상을 받았고 49년에는 대인이 이끄는 무리가 한나라에 귀순하여 요동속국, 요서, 右北平, 漁陽, 광양, 上谷, 대군, 안문, 太原 그리고 삭방의 경계 지역에 배치되었다.

(3) 삼국지에 이러한 기록이 없다.
삼국지(289)와 후한서(445)의 기록은 대부분 서로 대응하는데, 이 기록은 후한서에만 있고 삼국지에 대응하는 기록이 없다.

이 기록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1)과 (2)에 의해 오환의 일이 맥인의 일로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이다.
만약 오환의 일이었다면 이 해에 있었던 오환의 귀순과 연결하여 ᐥ오환이 右北平, 漁陽, 上谷 그리고 太原을 침략하자 遼東太守 祭肜이 회유하여 귀순하게 하고 요동속국, 요서, 右北平, 漁陽, 광양, 上谷, 대군, 안문, 太原 그리고 삭방의 경계 지역에 배치하여 흉노와 선비를 막는 일을 맡겼다.ᐥ는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요동에서 멀리 떨어진 右北平, 漁陽, 上谷 그리고 太原의 일을 왜 요동태수가 개입했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요동태수 제융은 45년에 선비와 흉노의 요동 침공을 격파한 실력자이고 58~75년에는 선비를 회유하여 흉노와 오환을 치게 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49년에 있었던 오환의 침공에 대해서도 개입하는 것이 크게 어색하지 않다.

둘째는 (3)에 주목한 것으로 이 기록이 착각에 의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오환이 이들 지역을 침략한 역사, 제융이 선비를 회유하여 흉노와 오환을 치게 한 역사 그리고 왕망때 맥인이 변경을 침략한 역사가 혼동되어 착각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역사 기록에는 그러한 사례가 가끔 있다.
수서(636)에는 신라의 왕이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는 삼국지(289)에 백제의 전신인 마한이 신라의 전신인 진한의 왕을 세웠다는 이야기와 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바다로 도망가 마한을 차지하고 한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섞인 결과다.
맥이 49년에 右北平, 漁陽, 上谷 그리고 太原을 침략하자 遼東太守 祭肜이 불러 항복시켰다는 후한서의 기록도 같은 사례라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