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국(倭國)은 백제 ∙ 신라의 동남에 있는데 바다 가운데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해 살며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은 낮음
왜국
주 001
각주 001)
은 백제와 신라의 동남에 있는데,주 002수륙(水陸)으로 3,000리이며, 큰 바다 가운데서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산다. 위나라 때 통역을 써서 중국과 교통하는 것이 30여 나라였는데,주 003모두 자(子)라고 칭하였다.주 004오랑캐(夷人)들은 이수(里數)를 알지 못하여, [거리를] 오로지 날수로 헤아린다. 그 나라의 경계는, 동서로 5개월을 가고 남북으로는 3개월을 가면, 각각 바다에 이른다. 그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도읍이] 야마퇴(邪摩堆)
주 005에 있는데, 곧 『위지(魏志)』주 006가 말하는 야마대(邪馬臺)
주 007倭國: 고대 일본열도에 있던 나라의 이름. 원래 倭는 唐代(618∼907) 이전에 중국에서 일본열도 및 그 주민들을 일컬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漢書』(권28하 「地理志」 하 〈燕地條〉: 1658∼1659)에는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이라 기재되어 있고, 이 기사에 唐의 顔師古는 “『魏略』 云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이라고 注記하였다. 『三國志』에서는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이라고 하였고, 『後漢書』에서는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嶋爲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三國時代까지는 일본열도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倭를 사용하였고 그 내부의 개별 소국을 가리킬 때는 倭奴國과 같은 방식으로 표기하였다. 그런데 南北朝時代에 이르면 倭國·倭國王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宋은 425년에 倭王 珍을 安東將軍 倭國王으로 책봉하였다(『宋書』 「倭國傳」).
각주 007)
이다. 또한 [『위지』에서] 말하기를, “낙랑군 경계 및 대방군
주 008邪馬臺: 3세기 전반 일본열도에 있었던 伊都國 등의 여러 소국들을 통솔하였던 나라. 여왕 卑彌呼가 주재하였던 나라이며 大和政權의 前身으로 보고 있다. 이 나라가 九州에 있다고 보는 주장도 日向이나 大隅 지역에 해당된다는 설과 薩摩나 豊前 지역이라고 하는 설로 나뉜다. 大和說에서도 瀨戶內海航行說과 東海(日本海)航行說이 있다(末松保和, 1962: 23∼43 및 石原道博, 2005: 41∼42, 55). 그리고 『後漢書』에서는 “그 大倭王은 邪馬臺國에 거주하고 있다. 樂浪郡治에서 그 나라는 12,000里 떨어져 있고, 그 나라의 서북방에 있는 拘邪韓國에서는 7,000여 리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각주 008)
에서 떨어지기를 모두 1만 2000리로, 회계
주 009의 동쪽에 있으며, 담이
주 100와 서로 가깝다. 풍속이 모두 문신을 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태백(太伯)의 후예라고 한다.”고 하였다. 대방에서 왜국에 이르는 거리를 헤아리면, 바다를 따라 물길로 가서 조선국
주 011帶方郡: 2세기 말경부터 遼東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펴고 있던 公孫氏가 公孫康의 치세인 204년경에 樂浪郡 屯有縣(지금의 북한 黃州) 이남의 옛 辰番郡의 땅에 설치한 郡이다. 2세기 초부터 고구려가 점차 강성해지고, 그 중엽에는 한강 이남 지역에서 三韓이 강성해지면서 樂浪郡이 그 지배력에 한계를 보이자, 이 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이후 樂浪郡과 帶方郡에 대한 지배권이 曹魏 明帝 景 初 연간(237∼239)인 公孫淵의 치세에 魏에 돌아갔고, 다시 그것을 계승한 西晉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高句麗와 百濟가 세력을 신장하면서 계속 樂浪郡과 帶方郡에 압박을 가하자, 2郡의 세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 美川王(재위 300∼330)에 의해 먼저 313년에는 樂浪郡이 소멸되었고, 그 이듬해인 314년에는 帶方郡이 역시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었다. 이에 漢 武帝가 기원전 108년에 古朝鮮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中國의 郡縣은 422년만에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三國志』 권30 「東夷傳」: 830).
각주 011)
을 거쳐 남쪽 혹은 동쪽으로 7,000여 리를 가서, 비로소 바다를 건넌다.주 012朝鮮國: 원래 고조선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는 한반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三國志』에서 사용되었던 三韓이란 용어 대신에 朝鮮國을 사용한 것은 『三國志』·『梁書』 등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三國志』에서는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라고 하였고, 『梁書』에 의하면, “東夷之國, 朝鮮爲大, 得箕子之化, 其器物猶有禮樂云. 魏時, 朝鮮以東馬韓, 辰韓之屬, 世通中國.”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때 朝鮮은 국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朝鮮國이라고 하여 국가인 것처럼 쓴 것은 『北史』의 두찬으로 보인다.
각주 012)
또한 남으로 1,000여 리를 가서 바다를 건너는데, 넓이가 1,000여 리이며, 한해(瀚海)
주 013라고 하며, 일지국(一支國)
주 014에 이른다. 다시 바다를 1,000여 리 건너면 말로국(末盧國)
주 015이라고 한다. 다시 동남으로 육지로 500리를 가면, 이도국(伊都國)
주 016帶方에서 倭國에 이르는 일정은 『三國志』의 내용을 간략하게 쓴 『梁書』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梁書』에서는 韓國→7,000리→渡海(瀚海, 폭 1,000리)→一支國→渡海 1,000리→末盧國→육로 500리→伊都國→100리→奴國→100리→不彌國→수로 20일→投馬國→수로 10일 육로 1개월→邪馬臺國(倭王所居)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北史』는 조선(국)→7,000리→도해(1,000리)→도해(폭 1,000리, 瀚海)→一支國→도해(1,000리)→末盧國→육로 500리→伊都國→100리→奴國→100리→不彌國→수로 20일→投馬國→수로 10일, 육로 1개월→邪馬臺國(倭王所都)으로 기록하였다. 『梁書』의 韓國을 朝鮮國이라고 하였고, 一支國에 이르는데 1,000리가 되는 바다를 두 번 건너야 한다고 한 점에서 차이가 난다. 『梁書』가 對馬國에 이르는 1,000리를 생략하고 있는데 대하여, 『北史』는 對馬國은 생략하였으면서도 바다를 건너는 일정 자체는 『三國志』를 따른 데서 생긴 차이로 보인다.
각주 016)
에 이른다. 다시 동남으로 100리를 가면, 노국(奴國)
주 017伊都國: 이전의 怡土郡(이토군)으로, 지금은 系島郡(이토시마군)의 深江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伊都(이토)는 伊斗, 伊蘇, 伊覩라고 쓰기도 한다(末松保和, 1962: 23∼43 및 石原道博, 1985: 40∼41). 1974·1975년에 系島郡 前原町 三雲 南小路에서 조사된 옹관묘에서는 前漢時代 銅鏡 22면, 비취곡옥 1개, 유리곡옥 12개, 유리제 목걸이 등이 발굴되었다. 인접한 옹관묘에서도 전한 동경 35면이 출토되어, 彌生時代와 古墳時代를 통틀어 가장 많은 동경이 발굴된 무덤이 되었다. 墓壙의 규모도 긴 변 5.2m, 짧은 변 4.2m로 彌生時代 분묘 최대 규모이다. 묘역 역시 폭 24m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옹관묘들이야말로 이도국의 국왕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森浩一, 1985: 202∼207).
각주 017)
에 이른다. 다시 동쪽으로 100리를 가면, 불미국(不彌國)
주 018에 이른다. 다시 남쪽으로 물길로 20일을 가면, 투마국(投馬國)
주 019에 이른다. 다시 남쪽으로 물길로 10일, 육로로 1개월을 가면, 야마대국(邪馬臺國)에 이르는데, 곧 왜왕이 도읍한 곳이다.奴國: 『後漢書』의 奴國으로서, 이전의 儺縣 및 那津으로 지금의 福岡縣 博多 부근이다(石原道博, 1985: 40∼41). 1784년에 北九州 博多灣 志賀島에서 발견된 金印 ‘漢委奴國王’의 나라이다. 이 奴國은 甕棺, 箱式石棺, 돌멘 등이 발견되는 北九州 연안에 있는 諸國 聯盟體의 盟主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後漢書』 「倭傳」에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師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光武帝] 中元 2년(57)에 倭의 奴國이 貢物을 바치고 朝賀하였는데, 使人은 大夫를 자칭하였다. [노국은] 倭國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이다. 光武帝는 奴國의 사자에게 印綬를 하사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福岡平野 남쪽에 위치한 春日市 岡本의 통칭 須玖岡本 유적에서는 역시 전한경 30면 전후, 동검, 동모, 동과, 유리제 곡옥, 유리제 관옥 등이 수습되어, 三雲 南小路 무덤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다만 이 유적은 三雲 유적에 비하여 대·중·소형의 거울이 함께 나왔으며, 무기가 많은 특징을 보인다. 須玖岡本 유적 역시 奴國의 국왕묘급으로 생각된다(森浩一, 1985: 207∼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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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倭國: 고대 일본열도에 있던 나라의 이름. 원래 倭는 唐代(618∼907) 이전에 중국에서 일본열도 및 그 주민들을 일컬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漢書』(권28하 「地理志」 하 〈燕地條〉: 1658∼1659)에는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이라 기재되어 있고, 이 기사에 唐의 顔師古는 “『魏略』 云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이라고 注記하였다. 『三國志』에서는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이라고 하였고, 『後漢書』에서는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嶋爲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三國時代까지는 일본열도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倭를 사용하였고 그 내부의 개별 소국을 가리킬 때는 倭奴國과 같은 방식으로 표기하였다. 그런데 南北朝時代에 이르면 倭國·倭國王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宋은 425년에 倭王 珍을 安東將軍 倭國王으로 책봉하였다(『宋書』 「倭國傳」).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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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邪馬臺: 3세기 전반 일본열도에 있었던 伊都國 등의 여러 소국들을 통솔하였던 나라. 여왕 卑彌呼가 주재하였던 나라이며 大和政權의 前身으로 보고 있다. 이 나라가 九州에 있다고 보는 주장도 日向이나 大隅 지역에 해당된다는 설과 薩摩나 豊前 지역이라고 하는 설로 나뉜다. 大和說에서도 瀨戶內海航行說과 東海(日本海)航行說이 있다(末松保和, 1962: 23∼43 및 石原道博, 2005: 41∼42, 55). 그리고 『後漢書』에서는 “그 大倭王은 邪馬臺國에 거주하고 있다. 樂浪郡治에서 그 나라는 12,000里 떨어져 있고, 그 나라의 서북방에 있는 拘邪韓國에서는 7,000여 리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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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帶方郡: 2세기 말경부터 遼東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펴고 있던 公孫氏가 公孫康의 치세인 204년경에 樂浪郡 屯有縣(지금의 북한 黃州) 이남의 옛 辰番郡의 땅에 설치한 郡이다. 2세기 초부터 고구려가 점차 강성해지고, 그 중엽에는 한강 이남 지역에서 三韓이 강성해지면서 樂浪郡이 그 지배력에 한계를 보이자, 이 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이후 樂浪郡과 帶方郡에 대한 지배권이 曹魏 明帝 景 初 연간(237∼239)인 公孫淵의 치세에 魏에 돌아갔고, 다시 그것을 계승한 西晉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高句麗와 百濟가 세력을 신장하면서 계속 樂浪郡과 帶方郡에 압박을 가하자, 2郡의 세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 美川王(재위 300∼330)에 의해 먼저 313년에는 樂浪郡이 소멸되었고, 그 이듬해인 314년에는 帶方郡이 역시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었다. 이에 漢 武帝가 기원전 108년에 古朝鮮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中國의 郡縣은 422년만에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三國志』 권30 「東夷傳」: 830).
- 각주 009)
- 각주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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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1)
朝鮮國: 원래 고조선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는 한반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三國志』에서 사용되었던 三韓이란 용어 대신에 朝鮮國을 사용한 것은 『三國志』·『梁書』 등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三國志』에서는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라고 하였고, 『梁書』에 의하면, “東夷之國, 朝鮮爲大, 得箕子之化, 其器物猶有禮樂云. 魏時, 朝鮮以東馬韓, 辰韓之屬, 世通中國.”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때 朝鮮은 국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朝鮮國이라고 하여 국가인 것처럼 쓴 것은 『北史』의 두찬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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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2)
帶方에서 倭國에 이르는 일정은 『三國志』의 내용을 간략하게 쓴 『梁書』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梁書』에서는 韓國→7,000리→渡海(瀚海, 폭 1,000리)→一支國→渡海 1,000리→末盧國→육로 500리→伊都國→100리→奴國→100리→不彌國→수로 20일→投馬國→수로 10일 육로 1개월→邪馬臺國(倭王所居)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北史』는 조선(국)→7,000리→도해(1,000리)→도해(폭 1,000리, 瀚海)→一支國→도해(1,000리)→末盧國→육로 500리→伊都國→100리→奴國→100리→不彌國→수로 20일→投馬國→수로 10일, 육로 1개월→邪馬臺國(倭王所都)으로 기록하였다. 『梁書』의 韓國을 朝鮮國이라고 하였고, 一支國에 이르는데 1,000리가 되는 바다를 두 번 건너야 한다고 한 점에서 차이가 난다. 『梁書』가 對馬國에 이르는 1,000리를 생략하고 있는데 대하여, 『北史』는 對馬國은 생략하였으면서도 바다를 건너는 일정 자체는 『三國志』를 따른 데서 생긴 차이로 보인다.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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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6)
伊都國: 이전의 怡土郡(이토군)으로, 지금은 系島郡(이토시마군)의 深江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伊都(이토)는 伊斗, 伊蘇, 伊覩라고 쓰기도 한다(末松保和, 1962: 23∼43 및 石原道博, 1985: 40∼41). 1974·1975년에 系島郡 前原町 三雲 南小路에서 조사된 옹관묘에서는 前漢時代 銅鏡 22면, 비취곡옥 1개, 유리곡옥 12개, 유리제 목걸이 등이 발굴되었다. 인접한 옹관묘에서도 전한 동경 35면이 출토되어, 彌生時代와 古墳時代를 통틀어 가장 많은 동경이 발굴된 무덤이 되었다. 墓壙의 규모도 긴 변 5.2m, 짧은 변 4.2m로 彌生時代 분묘 최대 규모이다. 묘역 역시 폭 24m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옹관묘들이야말로 이도국의 국왕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森浩一, 1985: 20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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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7)
奴國: 『後漢書』의 奴國으로서, 이전의 儺縣 및 那津으로 지금의 福岡縣 博多 부근이다(石原道博, 1985: 40∼41). 1784년에 北九州 博多灣 志賀島에서 발견된 金印 ‘漢委奴國王’의 나라이다. 이 奴國은 甕棺, 箱式石棺, 돌멘 등이 발견되는 北九州 연안에 있는 諸國 聯盟體의 盟主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後漢書』 「倭傳」에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師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光武帝] 中元 2년(57)에 倭의 奴國이 貢物을 바치고 朝賀하였는데, 使人은 大夫를 자칭하였다. [노국은] 倭國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이다. 光武帝는 奴國의 사자에게 印綬를 하사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福岡平野 남쪽에 위치한 春日市 岡本의 통칭 須玖岡本 유적에서는 역시 전한경 30면 전후, 동검, 동모, 동과, 유리제 곡옥, 유리제 관옥 등이 수습되어, 三雲 南小路 무덤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다만 이 유적은 三雲 유적에 비하여 대·중·소형의 거울이 함께 나왔으며, 무기가 많은 특징을 보인다. 須玖岡本 유적 역시 奴國의 국왕묘급으로 생각된다(森浩一, 1985: 207∼208).
- 각주 018)
- 각주 019)
색인어
- 이름
- 태백(太伯)
- 지명
- 왜국, 백제, 신라, 위나라, 중국, 야마퇴(邪摩堆), 야마대(邪馬臺), 낙랑군, 대방군, 회계, 담이, 대방, 왜국, 조선국, 한해(瀚海), 일지국(一支國), 말로국(末盧國), 이도국(伊都國), 노국(奴國), 불미국(不彌國), 투마국(投馬國), 야마대국(邪馬臺國)
- 서명
- 위지(魏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