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 호로고루 ( )

연천 호로고루
연천 호로고루
건축
유적
문화재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 사적.
이칭
이칭
자미성(紫微城), 미성(眉城), 이잔미성(二殘眉城)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2006년 01월 02일 지정)
소재지
경기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7-1번지 등
내용 요약

연천 호로고루는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이다. 2006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임진강 북안에 있는 현무암 대지 위에 구축되어 있는 삼각형 모양의 강안평지성이다. 200여 년간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역할을 했던 임진강 유역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호로고루의 성벽 축성에는 토성과 석성을 결합한 독특한 토목기술이 적용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토기와 기와류, 석기, 철기 등 위계가 높은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호로고루는 고구려 축성기술과 생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정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 사적.
개설

2006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임진강 북안에 있는 연천 호로고루는 현무암 대지 위에 구축되어 있는 삼각형 모양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2001년 이후 4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하여 견고하게 쌓은 성벽과 주1, 대형집수시설 및 각종 건물지가 조사되었으며, 연화문 와당치미를 포함한 많은 양의 기와, 토기, 철기유물 등이 출토되어 성곽의 구조와 함께 고구려 축성기술과 고구려의 생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호로고루는 6세기 중엽 이후 약 200여 년간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하천(國境河川) 역할을 했던 임진강 유역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에 있고, 상대적으로 위계가 높은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고구려 국경 방어사령부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입지 및 연혁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의 임진강을 호로하(瓠蘆河), 또는 표하(瓢河)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70년 (현종11)에 편찬된 『동국여지지』인데 ‘호로고루는 부의 동쪽 32리 호로탄 위에 있다. 그 동쪽은 적성현과의 경계이며 두 개의 루(壘)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석벽으로 인하여 견고하다. 전하기를 삼국시대 둔술처(屯戌處)라 한다’고 하였다.

임진강과 한탄강은 현무암대지를 침식하며 흘러 강의 양쪽에 높이 10m가 넘는 수직 주2를 형성하고 있다. 이 수직단애는 자연장애물이자 천혜의 요새를 구축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 주어 임진강과 한탄강은 6세기 중엽 이후 200여 년 동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하천 역할을 하여 왔다.

임진강 북안에는 주요 길목마다 고구려성이 구축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호로고루는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감조구간(減潮區間)이 상류에 위치하여 배를 타지 않고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에 접하여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호로하 부근에서 벌어진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나라의 전투기록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은 호로탄(瓠蘆灘)이라 하여 장단을 통해 개성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었으며, 호로고루에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장단군의 주3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호로고루는 1991년 문화재 연구소가 실시한 군사보호구역내의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통하여 고구려유적임이 알려지게 되었고, 2001년부터 토지주택박물관에 의한 4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내용

발굴조사 결과 성벽 축성에는 토성과 석성을 결합한 독특한 토목기술이 적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고토양층(古土壤層)인 지반을 평탄하게 조성하고 난 후 성벽 쌓을 구간을 1m 정도 높이로 판축해 쌓아올린 후 성벽의 중간부분도 판축으로 너비 6m, 높이 10m 정도 쌓고 판축면 위에 석축으로 체성벽(體城壁)을 쌓아올렸다. 체성벽 외면에는 암반에서부터 보축성벽을 쌓아 힘을 분산시키고, 보축성벽의 바깥에는 다시 일정한 높이까지 흙으로 다져 보축성벽을 보강하였다.

이러한 구조의 축성방법은 연천 당포성이나 연천 은대리성에서도 확인되며,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의 성벽구조와 평양 대성산성에서도 확인되는 고구려 토목기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토성의 장점과 석성의 장점을 결합한 이러한 축성기법은 아차산 3 · 4보루나 홍련봉 1 · 2보루, 시루봉보루, 용마봉 2보루, 무등리 2보루 등 산성에서도 확인된다. 발굴조사 결과 판축기법으로 뒷부분의 토축을 먼저 쌓고 두겹 정도의 석축을 덧붙여서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호로고루에 대한 최근의 조사에서는 보축성벽 안쪽에서 정연하게 쌓은 체성벽과 체성벽 안쪽에서 기둥홈이 있는 내성벽(內城壁)이 확인되었다. 대성산성과 당포성에서도 확인된 바 있는 기둥홈의 기능에 대하여 그동안 수압조절목적이라거나 무기 거치목적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으나 호로고루 발굴을 통하여 이러한 기둥홈은 석축성벽의 축성공정(築城工程)과 관련된 구조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즉 기저부 판축토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목주를 세우고 구획을 한 다음 그 안에 석재를 채움으로써 견고하고 효율적으로 성벽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로고루 내부의 토층상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화산폭발로 철원‧평강지역에서부터 흘러내린 용암이 기반암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 현무암 쇄설물과 함께 고토양층이 1∼3m 두께로 덮여 있다. 이 고토양층에서는 구석기 유물이 주로 발견되는데 지역에 따라 황색이나 초콜릿색을 띠기도 하며 비교적 균일하게 주4가 발달해 있다. 호로고루 내부의 각종 유구는 현무암반 위에 퇴적된 고토양층을 파거나 성토하여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시굴조사 결과 목책유구, 지상건물지, 대형집수시설, 우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목책은 동벽이 구축되기 전 이곳에 처음 방어시설을 구축했던 고구려군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목책이 조성될 당시에는 호로고루 내부가 지금처럼 평탄하지 않았으므로 자연지형을 따라 목책을 세웠으며 목책 내부에는 초병들의 숙소로 사용된 토광이 있다.

이후 성내부에 대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시행하여 목책을 제거하고 성내부를 성토하여 평탄하게 조성한 후 지상건물을 조성하였다. 동벽은 이 지상건물을 구축할 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상건물의 전체규모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잔돌로 적심을 놓고 그 위에 초석을 올려 놓았으며, 지붕에는 기와를 얹었다. 성내부에는 난방과 취사를 위하여 ‘ך’자 형태의 주5시설이 구축되었다.

집수시설은 고토양층인 생토면을 3m 깊이로 파고 가로 세로 6m 정도의 규모로 석축을 하여 집수시설로 활용하였으나 이후 집수시설 바닥에 통나무를 깔고 두께 1m 정도로 잔가지나 갈대와 점토를 깔아 방수처리를 하고 온돌을 설치된 건물로 재활용하였다. 집수시설 옆에서는 우물이 있는데 암반까지 생토층을 파고 바닥에는 통나무로 결구하여 네모나게 받치고 그 위에 할석을 쌓아 올라간 구조인데 물이 솟아나는 샘이 아니기 때문에 지표수 등을 모아서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다양한 크기의 수혈유구와 건물지 유구가 발굴되었다.

호로고루에서는 토기와 기와류, 석기, 철기 등 다양한 고구려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기와이다. 고대사회에서 기와는 매우 귀한 건축자재였기 때문에 왕궁이나 사찰, 관아, 학교 등 공공건물에만 사용되었는데 기와가 이처럼 많이 출토된다는 것은 호로고루가 기능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기와는 대부분 붉은색이나 황갈색을 띠고 있으며, 표면에 노끈문이나 톱날문, 주6, 주7, 횡선문 등 다양한 문양이 찍혀 있고, 좁은 판자로 만든 와통을 사용하여 내면에 통쪽 모양의 모골흔이 요철을 이루며 찍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호로고루에서는 볼륨감이 있는 6엽의 연화문 와당과 와당을 부착했던 수키와가 여러 점 확인되었으며, 용마루끝을 장식했던 치미편도 수십점이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착고기와나 건물 바닥에 깔았던 주8 등이 발견되어 호로고루에는 수준 높은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와류 이외의 유물로는 남성용 소변기인 호자(虎子)를 비롯하여, ‘상고(相鼓)’라는 명문이 새겨진 고구려 악기, 가로손잡이가 달린 동이류와 접시, 시루, 저울추, 세 개의 다리가 달린 벼루도 출토되어 각종 문자가 새겨진 토기류와 함께 이곳에 주둔했던 고구려군의 문화수준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그 외에도 고구려 병사들의 식생활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각종 탄화곡물이 출토되었는데, 쌀과 좁쌀, 콩, 팥 등이 확인되었다. 육류로는 소․말․개․멧돼지․사슴․노루 등 다양한 동물의 뼈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최소한 6종 이상의 동물이 식용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특징

호로고루는 당포성과 은대리성과 함께 임진강 · 한탄강의 단애 위에 쌓은 삼각형 모양의 강안평지성이라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삼각형을 이루는 지형의 한쪽에만 지상성벽을 쌓아 성을 구축하였으며, 성내에는 각종 건물과 집수시설을 만들었다. 집수시설은 방형으로 굴착하여 석축을 쌓아서 마감하였는데 이후에는 부엽공법으로 방수처리를 하고 건물을 구축하는 특수한 구조가 확인된다. 성내에서 출토되는 기와는 국내의 고구려 유적 중 가장 다양하고 많은 양이 출토되었으며, 치미와 연화문 와당이 출토되어 호로고루의 위계(位階)가 상대적으로 매우 높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

호로고루는 독특한 고구려 축성기술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상성벽인 동벽을 구축함에 있어 성벽의 기저부와 중간부분은 판축을 하고, 성벽 내외부는 석축으로 마감하였는데 체성벽 내부에서 기둥홈이 있는 내벽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목주(木柱)를 활용하여 성벽 내부의 석축을 쌓은 후 체성벽을 덧붙여 쌓았으며, 체성벽 바깥쪽에는 보축성벽을 쌓은 후 보강토를 쌓은 복잡한 공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토성과 석성의 장점을 결합한 축성공법은 중국 집안의 국내성과 평양의 대성산성 및 남한의 고구려보루에서도 확인되는 고구려의 특징적인 축성공법이다. 기둥홈은 평양의 대성산성과 연천 당포성에서도 확인되었는데 호로고루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축성공법과 관련된 구조라는 것이 명확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1차 ․ 2차발굴조사보고서』(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7)
『고구려유적의 보고-경기도 』(경기도 박물관, 2005)
『연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0)
『연천 호로고루 정밀지표조사 보고서』(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1998)
『향토사료집』(연천문화원, 1995)
『경기도 연천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5)
『경기도 파주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4),
「군사보호구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경기도 연천군편」(김성범,『문화재』제25호, 1992),
주석
주1

말뚝 따위를 죽 잇따라 박아 만든 울타리. 또는 잇따라 박은 말뚝. 우리말샘

주2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 우리말샘

주3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우리말샘

주4

벽이 붕괴할 때 벽의 배면과 벽의 활동면에 쐐기 모양으로 쌓인 흙의 부분. 우리말샘

주5

화기(火氣)가 방 밑을 통과하여 방을 덥히는 장치. 우리나라 및 중국 동북부에서 발달하였다. 우리말샘

주6

문살을 바둑판처럼 가로세로가 일정한 간격으로 직각이 되게 짠 문. 우리말샘

주7

대각선이 대칭을 이루며 연속되어 만들어진 무늬. 우리말샘

주8

예전에 왕궁, 사찰, 왕릉 따위의 벽이나 바닥을 장식하는 데 쓰던 벽돌. 우리말샘

집필자
심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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