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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烏丸)의 풍습, 문화, 습속 및 한(漢)과 주변 종족과의 관계를 설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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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환(烏丸)
[배송지주] 『위서(魏書)주 001
각주 001)
『魏書』:魏晉時代 王沈이 紀傳體 형식으로 저술한 三國時代 魏나라에 관한 史書를 가리킨다. 이미 亡失되어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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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오환(烏丸)은 [본래]동호(東胡)였다.주 002
각주 002)
원문은 “東胡也”인데, 『後漢書』에서는 “本東胡也”라 하여 東胡 앞에 ‘本’字를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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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나라 초기에 흉노(匈奴)의 묵특[선우(單于)]가 그 나라를 멸망시키자 남은 무리들이 오환산(烏丸山) 주 003
각주 003)
烏丸山(烏桓山):대체로 지금의 중국 內蒙古自治區 阿魯科爾沁旗 북부의 大興安嶺山脈 남단으로 파악되고 있다(馬長壽, 1962:130~138 및 林幹, 198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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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모여들어 그곳]을 지키며 [살았기 때문에] 오환이라고 불렸다.주 004
각주 004)
최근 色音勿力吉은 烏丸이 匈奴單于의 長子가 임명되던 左賢王(左屠耆王)에 속했고, 몽골어로 長子를 아오간(Aogan) 혹은 아오한(Aohan)이라 칭한 것을 ‘烏丸’으로 음사했다고 추정하였다(色音勿力吉, 2007: 19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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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재주에 능하였고, 물과 풀을 따라 다니며 방목하였으며주 005
각주 005)
內蒙古 呼倫貝爾盟의 完工和扎賚諾爾의 무덤에서 발견된 양·말·소·개의 순장 풍습을 보면 당시에 이런 짐승을 가축으로 길렀음을 알 수 있다. 拓跋鮮卑의 경우 戞仙洞 부근에서 南遷한 후 목축이 주요 생산이 되었는데, 이는 北魏 초기까지 지속되었다(色音勿力吉, 2007: 19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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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한 장소에 살지 않고 궁려(穹廬)주 006
각주 006)
穹廬:匈奴 등 유목민들의 이동식 천막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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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거처로 삼았는데, 주 007
각주 007)
원문은 “以窮廬爲宅”인데, 『後漢書』에서는 “以窮廬爲舍”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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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궁려의] 동쪽에 [출입문을 만들어] 해를 향하도록 하였다.주 008
각주 008)
원문은 中華書局標點校勘本에서는 “皆東向. 日弋獵禽獸”라고 標點하였으나, 『後漢書』 구절과 비교해보면, “皆東向日. 弋獵禽獸”로 표점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저본의 표점을 수정하고, 번역도 이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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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새와 짐승을 사냥하고 털과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다.주 009
각주 009)
원문은 “以毛毳爲衣.”인데, 『後漢書』에서는 “食肉飲酪, 以毛毳爲衣.”라고 하여 “食肉飲酪”의 구절이 첨가되었다. 內蒙古自治區 戞仙洞에서 발견된 동물의 骨骼을 분석해보면 野豬와 野鹿, 野羊이 많았다. 拓跋鮮卑에 한정하여 말하면, 이들이 “大澤”으로 南遷하기 전 戞仙洞 일대에서 살았을 때는 목축보다 狩獵이 주요 생산수단이었다(色音勿力吉, 2007: 19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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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를 귀하게 여기고 늙은이를 천하게 업신여겼는데, 주 100
각주 100)
원문은 “貴少賤老”인데, 『後漢書』에서는 “貴少而賤老”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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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성품은 급하고 오만하였다.주 011
각주 011)
원문은 “其性悍驁”인데, 『後漢書』에서는 “其性悍塞”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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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나면 아버지와 형조차 죽이지만 결코 자기의 어머니는 해치지 않았다. 이는 어머니에게는 외가라는 배후세력이 있기 때문에 [어머니를 해치면 자신이 보복을 당하지만] 아버지와 형은 늘 같은 혈족 집단에 속하기 때문에 서로 보복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주 012
각주 012)
원문은 “父兄以己爲種, 無報復者故也.”인데, 『後漢書』에서는 이 구절이 없고 다만 의미가 비슷한 “父兄無相仇報故也”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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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하고 건실하며 능히 다툼과 소송을 조정하고 판결할 수 있는 사람을 늘 추대하여 대인(大人)으로 삼았다.주 013
각주 013)
원문은 “常推募勇健能理決鬪訟相侵犯者爲大人”인데, 『後漢書』에서는 “有勇健能理決鬥訟者, 推爲大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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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락(邑落)에 각각 소수(小帥)가 있었으며 대대로 세습하지는 않았다.주 014
각주 014)
원문은 “不世繼也”인데, 『後漢書』에서는 “無世業相繼”라고 기록하였고, “有勇健能理決鬥訟者, 推爲大人” 뒤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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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에서 수천 락(落)주 015
각주 015)
落:몽골의 게르처럼 유목민들의 이동식 천막(tent)를 지칭한다. 漢人들의 가구를 ‘戶’로 세는 것처럼 유목민들의 가구를 세는 단위는 ‘落’이다. 內田吟風은 烏桓의 유목민 1戶가 평균적으로 7인으로 구성되고 2戶 혹은 3戶의 穹廬群에 속한 20여 인이 1落을 구성하였다고 주장하였다(內田吟風, 1975: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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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나의 부(部)를 이루었다.주 016
각주 016)
학자들은 烏桓과 鮮卑의 사회가 “落→邑落→部”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金浩東, 199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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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이 불러 들여 말하는 것은 나무에 새겨 증표로 삼았고, 주 017
각주 017)
원문은 “大人有所召呼, 刻木爲信”인데, 『後漢書』에서는 “大人有所召呼, 則刻木爲信”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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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락에 전하여 행하게 하였으니, 주 018
각주 018)
원문은 “邑落傳行”인데, 『後漢書』에는 이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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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는 없었지만주 019
각주 019)
원문은 “無文字”인데, 『後漢書』에는 “雖無文字”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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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중(部衆)이 감히 법령을 어기거나 죄를 범하지 못하였다. 씨(氏)와 성(姓)은 일정하지 않았으며 굳세고 용감한 대인의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 대인 이하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각자 목축하며 생업을 영위하였으며주 101
각주 101)
원문은 “各自畜牧治産”인데, 『後漢書』에는 “各自畜牧營產”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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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적으로 일을 시키며 부려먹지 않았다.
그들이 장가들고 시집갈 때에 먼저 남녀가 사사로이 정을 통한 후, 여성을 빼앗아 달아나서주 021
각주 021)
원문은 “其嫁娶皆先私通, 略將女去”인데, 『後漢書』에는 “其嫁娶則先略女通情”이라 하였다. 문장은 다르지만 내용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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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이나 백일을 지낸 후에 중매인[媒人]을 통해 [처가집에] 말·소·양 등의 가축을 보냈는데 이를 결혼의 예(禮)로 삼았다.주 022
각주 022)
원문은 “然後遣媒人送馬牛羊以爲聘娶之禮”인데, 『後漢書』에는 “然後送牛馬羊畜, 以爲娉幣.”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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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는 아내를 따라 처가로 돌아가는데, 주 023
각주 023)
원문은 “壻隨妻歸”인데, 『後漢書』에는 “婿隨妻還家”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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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 사람들을 보면 존비(尊卑)의 구별이 없이주 024
각주 024)
원문은 “見妻家無尊卑”인데, 『後漢書』에는 ‘見’字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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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일어나 절하며 인사하였지만, 자기의 부모에게 절하지는 않았다.주 025
각주 025)
원문은 “而不自拜其父母”인데, 『後漢書』에는 ‘自’字가 없다. 馬長壽는 번역문의 구절을 母系社會(혹은 女系社會)의 유산이라고 보았다. 남편이 아내의 집에서 처가를 위해 僕役했기 때문에 처가 사람들에게는 나이에 상관없이 절하고 자신의 부모에게는 절하지 않았다고 보았다(馬長壽, 1962: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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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를 위해 2년 동안주 026
각주 026)
원문은 “爲妻家僕役二年”인데, 『後漢書』에는 “爲妻家僕役, 一二年閒”이라 하여 僕役의 기간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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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복처럼 일하였다. [그제서야] 처가에서는 후한 [재물과 함께] 딸을 보냈다. 거처와 재물은 모두 처가에서 나왔다.주 027
각주 027)
원문은 “居處財物, 一出妻家”인데, 『後漢書』에는 “居處財物一皆爲辦”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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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 사람들은 부인들의 계책을 따랐고, 전투할 때에만 [남성들이] 스스로 결정하였다.주 028
각주 028)
원문은 “故其俗從婦人計, 至戰鬬時, 乃自決之.”인데, 『後漢書』에는 “計謀從用婦人, 唯鬬戰之事乃自決之.”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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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대할 때 무릎을 세운 채 웅크리고 앉았다. [남자들은] 머리 깎는 것을 가볍고 편하게 여겼다.주 029
각주 029)
원문은 “悉髠頭以爲輕便”인데, 『後漢書』에는 ‘悉’字 대신 ‘以’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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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婦人]들은 결혼할 때 [그때까지] 기른 머리카락을 나누어 위로 끌어올려 쪽을 지었고 머리치장을 붙였으며주 102
각주 102)
원문은 “著口決”인데, 『後漢書』에서는 “著句決”이라 하여 ‘口’字 대신 ‘句’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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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 옥으로 장식하였다.주 031
각주 031)
현재까지 출토된 鮮卑의 步搖冠은 黃金으로 만들고 馬頭鹿角 혹은 牛頭鹿角 형태를 띠었다. 이 밖에 鹿頭로 된 步搖冠도 출토되었다. 冠의 가지에 金으로 만든 葉을 달았으며 머리를 흔들 때마다 葉片이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黃雪寅, 2002: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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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중국(中國)의 관보요(冠步搖)주 032
각주 032)
『後漢書』에서는 “簂步搖”라고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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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흡사했다.
아버지와 형이 죽으면, 후모(後母)주 033
각주 033)
後母:사전적으로는 아버지의 후실이라는 뜻인데, 문맥상 生母를 제외한 아버지의 처첩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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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처로 삼거나 형수를 취(娶)하였다. 만약 [대상자가] 형수를 취하지 않으면, 대상자의 아들이 친족의 차례에 따라 백모 혹은 숙모를 처로 삼았다.주 034
각주 034)
원문은 “父兄死, 妻後母執嫂, 若無執嫂者, 則其子以親之次妻伯叔焉”인데, 『後漢書』에서는 “其俗妻後母, 報寡㛐”이라고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馬長壽는 원문의 ‘執’字가 ‘報’字의 誤記라고 보았다. 漢律에서는 季父의 妻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報’라고 칭하였다. 또 幼子가 兄의 長妻와 성관계 맺는 것도 ‘報’라고 불렀다. 과부들이 氏族內 남성들과 재결합하는 것은 죽은 남편의 재산이 씨족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馬長壽, 1962: 118~119). 이러한 풍습을 收繼婚(levirate)라고 하는데 高句麗의 ‘兄死娶嫂’ 풍습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혈통의 단절을 막고 氏族의 단결을 유지하며 재산 유출을 막는 풍습이라고 한다(武沐, 2005: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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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혼한] 여자가 죽으면 죽은 지아비[의 무덤에 묻히게 하였다.]주 035
각주 035)
원문은 “死則歸其故夫”인데, 직역하면 “죽으면 여자의 죽은 옛 남편에게 돌아가게 한다.”이다. 이 직역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데, 죽은 옛 남편의 무덤에 묻히게 했다는 것이 자연스러워서 본문과 같이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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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새와 짐승이 새끼를 배거나 젖을 주는 것을 보고 사계절로 시간을 구별하였다.주 036
각주 036)
원문은 “俗識鳥獸孕乳, 時以四節, 耕種常用布谷鳴爲候”인데, 『後漢書』에는 “見鳥獸孕乳, 以別四節”이라고 간략하게 기록되었다. 『後漢書』의 경우 구절 가운데 “以別四節”에 ‘別’字가 있어서 의미가 명확한데 번역문에서는 그 기사에 따라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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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씨앗을 뿌릴 때에는 항상 뻐꾸기주 037
각주 037)
원문은 “布穀”으로 뻐꾸기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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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울음소리로써 시후(時候)로 삼았다. 토지는 기장[靑穄]주 038
각주 038)
원문은 “靑穄”인데, ‘穄’는 빛이 검은 메기장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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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동장(東牆)주 039
각주 039)
‘沙莑’이라고도 불리는 1년생 풀이다. 열매는 원형에 가깝고 扁平한데, (씨앗을) 먹을 수도 있고 짜서 기름을 만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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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재배하기에] 적합하였다.주 103
각주 103)
원문은 “地宜靑穄·東牆”인데, 『後漢書』에서는 “其土地宜穄及東牆”이라 하여 표현이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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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東牆)은 쑥[蓬草]과 흡사하지만, 그 열매는 해바라기의 씨[葵子]와 같은데, 주 041
각주 041)
원문은 “實如葵子”인데, 『後漢書』에서는 ‘葵’字 대신 ‘穄’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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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익었다.주 042
각주 042)
원문은 “至十月熟”인데, 『後漢書』에서는 “至十月而熟”이라 하여 ‘而’字가 첨가되었다. 1956년부터 고고학자들이 遼寧省 西豐縣의 西坌溝에서 발굴한 烏丸의 무덤에서 많은 농기구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烏丸과 鮮卑人이 일찍부터 농경에 종사했음을 입증한다. 이 농기구에는 漢字가 적혀있는데, 이는 烏丸과 鮮卑人들이 中原으로부터 농업을 배웠음을 뜻한다고 한다(色音勿力吉, 2007: 20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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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술[白酒]을 빚을 수 있었지만, 누룩 만드는 방법은 알지 못하였다. 곡식[米]은 늘 중국에 의지하였다.주 043
각주 043)
번역문과 달리 “중국에서 輸入되었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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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大人)은주 044
각주 044)
『後漢書』에서는 “大人” 대신 “男子”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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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히 활과 화살, 말안장, 굴레를 만들 수 있었고, 금(金)과 철(鐵)을 불에 달구어 두드려서 병기(兵器)를 만들었다.주 045
각주 045)
원문과 번역문에서는 大人이 각종 수공업 제품을 직접 만든 것처럼 기술했으나, 실제로는 大人이 烏丸과 鮮卑에 투항한 중국인들을 시켜 만들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金浩東, 1993: 131; 靑木和子, 1970: 70~71). 馬長壽는 번역문에서 언급한 물건들이 전쟁물자임에 주목하여 大人이 軍事手工業과 전쟁물자를 관리·감독한다고 보았다(馬長壽, 1962: 123). 1956년 遼寧省 西豐縣 西坌溝에서 발굴된 烏丸무덤의 유물들을 보면 烏丸과 鮮卑에서는 구리 주조기술이 冶鐵기술보다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銅鏃, 鐵鏃, 骨鏃, 石鏃의 순서로 출토수량의 증감을 보이는데, 이는 烏丸과 鮮卑人들이 청동기와 철기 문화를 받아들인 후 骨制와 石製 화살촉이 도태되었음을 보여준다(色音勿力吉, 2007: 20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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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능히 무두질한 가죽을 바느질하여 무늬를 그리거나 수놓을 수 있었고, 모직물[氈毼]주 046
각주 046)
원문은 “氊”:『後漢書』에는 “氀毼”로 되어 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모직물의 일종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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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짤 수 있었다.
병이 나면 쑥으로 뜸을 뜨는 것은 알고 있었고, 혹은 돌을 불로 데워 눌러서 몸을 덥게 하거나, 지면(地面)을 불로 데워서 그 위에 눕기도 하였으며, 혹은 통증이 있는 환부(患部)에 따라 칼로 혈맥(血脈)을 끊어서 피를 내기도 하였다. 또 하늘, 땅, 산, 강의 신(神)에게 기원하기도 하지만, 침(鍼)과 약(藥)은 없었다.주 047
각주 047)
번역문의 앞 단락과 이 단락의 원문은 “[그들은] 술[白酒]을 빚을 수 있었지만, …… 침(鍼)과 약(藥)은 없었다.”라는 구절과 유사한 내용이 『後漢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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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인들은] 전쟁하다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주 048
각주 048)
원문은 “貴兵死”인데, 『後漢書』에서는 ‘貴’字 앞에 ‘俗’字를 첨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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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시체를] 관에 넣고 염하였다.주 049
각주 049)
원문은 “斂屍有棺”인데, 『後漢書』에서는 ‘有’字 대신 ‘以’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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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막 죽었을 때] 처음에는 소리내어 울면서 슬퍼하였지만, 주 050
각주 050)
원문은 “始死則哭”인데, 『後漢書』에서는 “有哭泣之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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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지내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사자(死者)를 보낸다.주 051
각주 051)
원문은 “葬則歌舞相送”인데, 『後漢書』에서는 “至葬則歌舞相送”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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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찌게 기른 개 한 마리에게주 052
각주 052)
원문은 “肥養犬”인데, 『後漢書』에서는 ‘犬’字 앞에 ‘一’字를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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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를] 색깔 있는 끈으로 묶어서 끌게 하고주 053
각주 053)
원문은 “以采繩嬰牽”인데, 『後漢書』에서는 “以彩繩纓牽”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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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死者)가 타던 말과 옷가지, 살았을 때의 복식(服飾)을 취하여주 054
각주 054)
원문은 “幷取亡者所乘馬·衣物·生時服飾”인데, 『後漢書』에서는 “并取死者所乘馬衣物”이라 하여 그 표현이 조금 바뀌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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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태워서 장송(葬送)하는데, 개에게 의탁하여주 055
각주 055)
원문은 “特屬累犬”인데, 『後漢書』에서는 “言以屬累犬”이라 하여 ‘特’字 대신 ‘言以’ 2字를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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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의 신령(神靈)을 적산(赤山) 주 056
각주 056)
赤山:현재의 內蒙古自治區 巴林左旗의 북쪽에 있는 烏力吉木倫河의 발원지 烏蘭大垻(紅山의 뜻)이다. 『遼史』 「地理志」에 따르면 赤山은 慶州(현재의 巴林右旗 북쪽 白塔子古城) 부근에 있었다. 일설에는 烏丸의 赤山이 현재의 赤峰市에 있는 紅山(몽골어로 烏蘭哈達)이라고 하는데, 『後漢書』에 기록된 방위(赤山이 遼東의 서북쪽 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함)와 일치하지 않는다. 혹자는 烏丸이 南遷한 이후 현재의 赤峰市에 있는 紅山을 聖山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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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호송하게 한다고 말한다.주 057
각주 057)
원문은 “使護死者神靈歸乎赤山”인데, 『後漢書』에는 ‘乎’字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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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요동[군](遼東郡) 주 058
각주 058)
遼東郡:戰國 燕의 장수 秦開가 東胡를 격파한 후 설치하였다. 秦漢時代의 治所는 襄平縣(현재 遼寧省 遼陽市)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遼寧省 大凌河 동쪽 지역에 해당한다. 遼水의 동쪽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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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서북쪽 수천 리(里) 밖에 있었는데, 중국에서 사람들이 죽으면 혼신(魂神)주 059
각주 059)
魂神:다음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靈魂과 精神을 합한 말이고, 둘째는 죽은 이의 넋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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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산(泰山)주 060
각주 060)
泰山:현재 山東省 泰安市 북쪽에 있다. 五嶽의 하나로 東嶽이라고 한다. 역대 帝王들은 늘 이곳에 와서 封禪의 祭典을 열었다. 즉 漢武帝와 後漢 光武帝·章帝·安帝, 隋 文帝, 唐 高宗과 玄宗, 宋 眞宗이 泰山에서 封禪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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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것과주 061
각주 061)
『博物志』에서는 “泰山은 天帝의 孫이며, 사람들의 魂을 불러들이는 일을 관장한다. 東方은 萬物이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生命을 맡아 처리한다.”라고 설명하였다(『後漢書』 권90 「烏桓鮮卑列傳」 〈烏桓傳〉 李賢注:2980, “『博物志』:‘泰山’, 天帝孫也, 主召人魂.東方萬物始, 故知人生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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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주 062
각주 062)
원문은 “如中國人以死之魂神歸泰山也”인데, 『後漢書』에서는 “如中國人死者魂神歸岱山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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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날에 이르러 밤에 친척들과 옛 친구들이 모여서 둥글게 앉아서, 개와 말을 끌고 와서 관 주위를 지나가게 하였다. [이때에 개와 말이] 노래하면서 울면 고기를 던져주고, 두 사람을 시켜서 입으로 주문(呪文)을 암송하도록 하는데, [이것은] 죽은 자의 혼신(魂神)이 곧바로 [적산에] 이르게 하고, [혼신이] 험한 곳을 지나더라도 못된 귀신에게 차단되지 않고 보호를 받아 적산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후에 개와 말을 죽이고 옷가지를 태웠다.주 063
각주 063)
번역문 가운데 “장례식 날에 이르러 …… 이렇게 한 후에 개요 말을 죽이고 옷가지를 태웠다”라는 구절이 『後漢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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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鬼神)을 공경하였고, 천지(天地), 해, 달, 별, 산천(山川)에 제사지냈다. 또 죽은 대인(大人) 중에서 용건(勇健)하여 이름을 떨친 자에게도 역시 똑같이 소와 양을 바쳐서 제사지냈는데, 제사를 마치면 [소와 양] 모두 불에 태웠다.주 064
각주 064)
원문은 “亦同祠以牛羊, 祠畢皆燒之.”인데, 『後漢書』에는 “祠用牛羊, 畢皆燒之.”라 하여 글자 차이가 있다.
닫기
마시거나 먹을 때 반드시 먼저 제사를 지냈다.
[오환 사람들이] 약속한 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인의 말을 어기면 사형에 처하고주 065
각주 065)
원문은 “違大人言死”인데, 『後漢書』에는 “違大人言者, 罪至死”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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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을 그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였다.주 066
각주 066)
원문은 “盜不止死”인데, 『後漢書』에는 이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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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이가 살해되면주 067
각주 067)
원문은 “其相殘殺”인데, 『後漢書』에는 “若相賊殺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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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살자] 부락(部落)[의 성원들에게] 스스로 [가해자에게] 보복하도록 하였다.주 068
각주 068)
이처럼 개인 혹은 부락 성원들이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私刑을 同害刑 혹은 反映刑(talio 혹은 talion)이라 한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 조항 중 “눈에는 눈, 귀에는 귀”가 대표적이며, 로마의 12표법과 동아시아 여러 지역 및 중국에서도 보인다(仁井田陞, 1959: 317~320 및 373~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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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복이] 그치지 않으면 대인을 찾아가 심판을 받았는데, 주 069
각주 069)
원문은 “詣大人平之”인데, 『後漢書』에서는 ‘平’字 대신 ‘告’字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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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있는 자가 소와 양을 내어주어 죽음을 대속(代贖)하도록 명령하면 이에 [비로소 보복은] 그쳤다.주 070
각주 070)
이처럼 자신의 죄를 말·소·양 등 가축을 주어 대신 갚는 형태를 賠償刑이라고 하며 초원 유목민들 사이에 행해진 일종의 慣習法에 기초한 것이다(金浩東, 1993: 12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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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죽이면 죄를 묻지 않았다.주 071
각주 071)
원문은 “自殺其父兄無罪”인데, 『後漢書』에서는 “其自殺父兄則無罪”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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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하거나 반란을 일으켰다가 대인에게 체포된 자는 읍락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멀고먼 변방의 땅과 사막의 한가운데로 옮기고 내쫓았다.주 072
각주 072)
원문은 “皆逐使至雍狂地”인데, 『後漢書』에서는 “皆徙逐於雍狂之地”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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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에는 산은 없으나, 사막과 흐르는 물, 풀, 나무가 있었고 독사와 뱀이 많았으며.주 073
각주 073)
원문은 “地無山, 有沙漠·流水·草木, 多蝮虵”인데, 『後漢書』에는 “其土多蝮蛇”라고 간략히 기록하였고 오환인들이 사는 지역의 지형에 관한 서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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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丁令) 주 074
각주 074)
丁令:丁零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史書에 따라 丁靈, 釘靈이라고도 쓴다. 일설에는 ‘狄歷’이라고도 한다. 丁零은 康居의 북쪽에 있었고, 匈奴의 單于庭 接習水에서 7천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前漢時代에는 주로 현재 러시아의 바이칼호 이남의 지역에 분포하였다. 後漢時代에는 일부가 南遷하였다. 兩晉·南北朝時代에는 현재의 山西省과 河北省에 定州丁零과 中山丁零, 北至丁零 등이 있었다. 河南省과 甘肅省 등지에도 丁零이 모여 살았다. 漠北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丁零은 『晉書』에서 “敕勒”, 『隋書』에서 “鐵勒”이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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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서남쪽 및 오손(烏孫) 주 075
각주 075)
烏孫:중앙아시아의 種族, 혹은 나라 이름이다. 漢代부터 南北朝時代 초기까지 天山山脈의 일리 계곡, 이식 쿨 호수 근처, 시르다리야 상류 등지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다. 烏孫의 種族에 대해서는 사카, 투르크 등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이들의 혼혈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烏孫은 원래 河西回廊에서 月氏 등과 함께 거주하면서 그 지배를 받다가 匈奴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이주하여 일리 계곡과 이식 쿨 주변 지역 등으로 이주하였다. 이로 인해 세력화를 하면서 동쪽으로는 匈奴, 西北으로는 康居라는 유목민, 서쪽으로는 安息 등과 접하였다. 君長이 거주하는 곳을 赤穀城이라고 하였는데, 이식 쿨 근처에 있었다. 이들은 張騫의 여행 이후에 漢나라에 알려져 그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匈奴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존재했다(王明哲·王炳華, 198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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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동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궁핍하고 곤궁함에 처했다.주 076
각주 076)
원문은 “在丁令之西南, 烏孫之東北, 以窮困之.”인데, 『後漢書』에는 “在丁令西南, 烏孫東北焉.”이라 하여 “以窮困之”라는 구절이 생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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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의 선조가] 흉노에게 격파된 후주 077
각주 077)
원문은 “自其先匈奴所破之後”인데, 『後漢書』에서는 “烏桓自爲冒頓所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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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가 드디어 고립되고 약해졌기 때문에주 078
각주 078)
원문은 “人衆孤弱”인데, 『後漢書』에서는 “眾遂孤弱”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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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흉노에 복속(臣服)하였다.주 079
각주 079)
원문은 “爲匈奴臣服”인데, 『後漢書』에서는 “常臣伏匈奴”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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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 사람들은] 해마다 소·말·양[의 가죽]을 바쳤는데, 주 080
각주 080)
원문은 “常歲輸牛·馬·羊”인데, 『後漢書』에서는 “歲輸牛馬羊皮”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漢書』 「匈奴傳」에 따르면 前漢 말기에 匈奴가 烏丸에게 皮布稅를 강제로 징수한 예도 있다(金浩東, 1993: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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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쳐야 할] 날짜에 물자를 바치지 못하면 [흉노 사람들은] 오환 사람들의 처자를 빼앗았다.주 081
각주 081)
원문은 “輒虜其妻子”인데, 『後漢書』에서는 ‘虜’字 대신 ‘沒’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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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일연제선우(壹衍鞮單于) 주 082
각주 082)
壹衍鞮單于(재위 전85~전68): 匈奴의 11대 單于이다. 『漢書』에는 壺衍鞮單于로 표기되었다. 左谷蠡王이었다가 衛律과 顓渠單于의 음모로 狐鹿姑單于 사후 즉위하였다. 즉위 후 前漢과 공격을 주고 받았고 烏丸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후에 常惠와 烏孫의 연합군에 패하여 큰 타격을 받아 쇠퇴하였다. 그후 큰 눈에 내려 사람들과 가축이 얼어 죽었다. 이 틈을 타서 丁令이 북쪽에서, 烏丸이 동쪽에서, 烏孫이 서쪽에서 협공하지 크게 패하였다. 그의 재위 시기는 匈奴가 크게 쇠망하던 분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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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재위했던 시기에주 083
각주 083)
원문은 “至匈奴壹衍鞮單于時”인데, 『後漢書』에서는 “昭帝時”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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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은 강해졌는데, 주 084
각주 084)
원문은 “烏丸轉彊”인데, 『後漢書』에서는 ‘轉’字 대신 ‘漸’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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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선우의 무덤을 파내어주 085
각주 085)
원문은 “發掘匈奴單于冢”인데, 『後漢書』에서는 “乃發匈奴單于冢墓”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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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이전에] 묵특[선우](冒頓單于)에게 격파된 치욕을 갚으려고 하였다.주 086
각주 086)
원문은 “將以報冒頓所破之恥”인데, 『後漢書』에서는 “以報冒頓之怨”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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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제선우 주 087
각주 087)
『後漢書』에는 “壹衍鞮單于” 대신 “匈奴”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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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크게 노하여 2만 명의 기병(騎兵)을 징발하여 오환을 공격하였다.주 088
각주 088)
원문은 “發二萬騎以擊烏丸”인데, 『後漢書』에서는 “乃東擊破烏桓”이라고 하였다. 『漢書』 권94上 「匈奴傳」에 따르면 이 사건은 壹(壺)衍鞮單于가 즉위한 지 5년째인 전80년에 발생하였다(『漢書』 권94上 「匈奴傳」: 3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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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前漢)의] 대장군(大將軍)주 089
각주 089)
大將軍:武官名으로 戰國時代에 처음 보인다. 漢代에는 가장 높은 將軍의 칭호로,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漢武帝 때 大司馬와 領尙書事를 겸하여 中朝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後漢시대에는 大將軍이 三公의 위에 있었으며, 대부분 外戚이 임명되었다. 三國時代부터 南北朝時代까지 大臣이 執政하면 大將軍을 겸하였다. 품계는 正一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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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광(霍光) 주 090
각주 090)
霍光(?~전68):前漢시대 河東郡 平陽縣 사람이며 字는 子孟이다. 霍去病의 異母弟이다. 젊어서 郞이 되었으며, 후에 諸曹侍中, 奉車都尉 光祿大夫를 역임하였다. 20여 년간 궁정을 출입하면서 조심하고 근신하여 武帝의 신임을 얻었다. 武帝 사후 大司馬大將軍에 임명되고 博陸侯에 봉해졌으며, 金日磾·上官桀·桑弘羊과 함께 遺詔를 받아 昭帝를 보좌하였다. 후에 燕王 旦과 함께 모반했다는 죄명으로 上官桀 등을 제거하고 朝政을 혼자서 처리하였다. 昭帝 사후 昌邑王 劉賀를 皇帝로 옹립했다가 다시 폐하고 宣帝를 옹립하였다. 20년간 정권을 잡아 徭賦를 경감하고 與民休息정책을 취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점차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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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 소식을 듣고 도료장군(度遼將軍)주 091
각주 091)
度遼將軍:後漢時代 度遼營을 관장하는 將軍을 지칭한다. 원래 前漢 武帝 시기 范明友를 度遼將軍으로 임명하였고, 後漢 明帝初 南匈奴의 單于와 새로 항복한 자들을 지키고 관리하기 위해 두었으나 常設 관직은 아니었다. 安帝 元初元年(114)에 처음으로 常設하였다. 銀印靑綬이고 秩은 二千石이었다. 屬官인 長史와 司馬는 六百石이었다. 『東觀漢紀』에는 속관으로 司馬 2인을 두었다고 기록하였다(『後漢書』 「百官志」一 〈度遼將軍條〉:3565, “明帝初置度遼將軍,以衛南單于並新降有二心者,後數有不安,遂爲常守.”;上同 注引應劭『漢官儀』:3565, “度遼將軍,孝武皇帝初用范明友.明帝永平八年,行度遼將軍事;安帝元初元年,置真.銀印青綬,秩二千石.長史·司馬六百石.”). 주둔 지역은 五原郡 曼柏縣(현재 內蒙古自治區 東勝의 동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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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명우(范明友) 주 092
각주 092)
范明友:출신지역은 未詳이다. 校尉가 되어 반란을 일으킨 氐를 격파하였다. 후에 中郞將을 거쳐 霍光의 추천으로 將軍이 되어 烏丸을 공격하여 王을 생포하고 6, 200개의 수급을 얻었으며, 이 공으로 平陵侯에 봉해졌다. 후에 霍光과 함께 宣帝를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워 食邑의 戶數가 2, 900戶에 이르렀다. 本始 2년(전72)에 3萬騎를 이끌고 張掖郡에서 匈奴를 공격하기 위해 遠征에 나섰다. 후에 度遼將軍 未央衛尉와 光祿勳을 역임하였다. 후에 霍光의 아들 大將軍 霍禹, 霍光의 아내 郭顯, 郭雲, 鄧廣漢, 任勝, 趙平 등과 大逆을 모의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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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3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나가 흉노를 추격하게 하였다.주 093
각주 093)
원문은 “遣度遼將軍范明友將三萬騎出遼東追擊匈奴”인데, 『後漢書』에서는 “因遣度遼將軍范明友將二萬騎出遼東邀匈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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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범명우의 군대가 도착했을 무렵에주 094
각주 094)
원문은 “比明友兵至”인데, 『後漢書』에는 이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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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는 이미 [군대를] 이끌고 가버렸다.주 095
각주 095)
원문은 “匈奴已引去”인데, 『後漢書』에서는 “而虜已引去”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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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이 새로이 흉노 군대에게 공격을 당하자, 그들이 쇠퇴하고 피폐된 틈을 타서 [범명우는] 마침내 전진하여 오환을 격파하여주 096
각주 096)
원문은 “烏丸新被匈奴兵, 乘其衰弊, 遂進擊烏丸”인데, 『後漢書』에서는 “明友乘烏桓新敗, 遂進擊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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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천여 인을 참수하고, [오환의] 3인의 왕의 머리를 얻어서 귀환하였다.주 097
각주 097)
원문은 “獲三王首還”인데, 『後漢書』에서는 “獲其三王首而還”이라고 하였다. 『漢書』에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漢書』 권94上 「匈奴傳」: 3784, “漢復得匈奴降者, 言烏桓嘗發先單于, 匈奴怨之, 方發二萬騎擊烏桓. 大將軍霍光欲發兵邀擊之, 以問護軍都尉趙充國. 充國以爲‘烏桓間數犯塞, 今匈奴擊之, 於漢便. 又匈奴希寇盜, 北邊幸無事. 蠻夷自相攻擊, 而發兵要之, 招寇生事, 非計也.’ 光更問中郎將范明友, 明友言可擊. 於是拜明友爲度遼將軍, 將二萬騎出遼東. 匈奴聞漢兵至, 引去. 初, 光誠明友:‘兵不空出, 即後匈奴, 遂擊烏桓.’ 烏桓時新中匈奴兵, 明友既後匈奴, 因乘烏桓敝, 擊之, 斬首六千餘級, 獲三王首, 還, 封爲平陵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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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오환은] 자주 [한나라의] 변경 요새를 다시 침범했으나, 주 098
각주 098)
원문은 “後數復犯塞”인데, 『後漢書』에서는 “由是烏桓復寇幽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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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명우는 그때마다 그들을 정벌하여 격파하였다.주 099
각주 099)
원문은 “明友輒征破之”인데, 『後漢書』에서는 ‘征’字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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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王莽) 주 100
각주 100)
王莽(전45~23;재위 5~23):前漢시대 魏郡 元城縣 사람으로, 字는 巨君이다. 漢元帝의 皇后 王政君의 조카이다. 黃門郞·射聲校尉를 지냈고 成帝 永始元年(전16)에 新都侯에 봉해졌다. 騎都尉 光祿大夫 給事中이 되어 외척 淳于長을 탄핵하여 정직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綏和元年(전8)에 大司馬에 임명되었다가 哀帝 즉위 후 外戚 丁氏와 傅氏에 밀려 면직되었다. 이후 哀帝 사후 王政君이 太皇太后로서 臨朝稱制하자 다시 大司馬로 임명하여 平帝를 옹립할 것을 모의하여 安漢公에 제수되었다. 빈민 구제와 博士 증원 등으로 민심을 얻었다. 元始 5년(5)에 平帝 사후 孺子 嬰을 옹립한 후 周公의 예를 본떠 假皇帝라 자칭했다가 初始元年(8)에 자립하여 皇帝가 되고 國號를 ‘新’이라 칭하고, 年號를 始建國이라 하였다. 각종 개혁정책을 실시했으나 실패하였고, 대외정책에도 실패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地皇 4년(23)에 綠林軍이 長安을 점령하자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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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치세] 말기에 이르러, [오환은] 흉노와 함께 노략질을 하였다.주 101
각주 101)
원문 “至王莽末, 並與匈奴爲寇.”처럼 烏丸과 匈奴가 王莽 말기(新末)에 함께 변방을 침입했다는 기록이 『後漢書』에는 없다. 다만 “及王莽篡位, 欲擊匈奴, 興十二部軍, 使東域將嚴尤領烏桓·丁令兵屯代郡, 皆質其妻子於郡縣. 烏桓不便水土, 懼久屯不休, 數求謁去. 莽不肯遣, 遂自亡畔, 還爲抄盜, 而諸郡盡殺其質, 由是結怨於莽. 匈奴因誘其豪帥以爲吏, 餘者皆羈縻屬之.”라 하여, 新 말기에 烏丸이 王莽에게 등을 돌리고 匈奴에게 복속하였음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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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光武帝) 주 102
각주 102)
光武帝(전6~57;재위 25~57):南陽郡 蔡陽縣(오늘날 湖北省 棗陽縣 서남) 사람이다. 이름은 秀, 字는 文叔이다. 형 劉縯과 함께 綠林軍에 가담하였고, 劉玄(更始帝)이 稱帝한 후 太常 偏將軍이 되었다. 更始元年(23)에 王鳳의 군대와 함께 昆陽에서 승리하여 王莽軍의 주력을 격파하였다. 劉縯이 권력투쟁에서 피살된 후 스스로를 감추어 更始帝의 신임을 얻었다. 후에 河北에 파견되어 관리들과 豪族들의 지지를 획득하고 王郞 등을 진압하였다. 蕭王으로 봉해진 후 更始帝와 단절하고 25년 鄗(현재 河北省 柏鄕縣 북쪽)에서 稱帝하여 年號를 建武라 하였다. 즉위 초 賦稅와 요역을 감면하고 吏員을 줄였으며, 奴婢를 석방하고 수리시설을 확충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功臣들을 죽이지 않고 爵位와 祿을 후히 주는 대신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外戚과 宦官의 정치 관여를 금지하였다. 400여 縣을 없애고 內郡의 지방군대를 없앴으며 郡都尉를 폐지하여 지방의 병권을 약화시켰고, 중앙이 직접 통할하는 군대를 확대하였다. 廟號는 世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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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천하를 평정하자, 복파장군(伏波將軍)주 103
각주 103)
伏波將軍:양한시대 임시로 설치했던 장군의 칭호이다. 前漢 武帝 元鼎 5년(전112)에 南越을 토벌하는 路博德이 伏波將軍에 임명되었고, 後漢時代 馬援도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 후에 상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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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원(馬援) 주 104
각주 104)
馬援(?~?):前漢시대 扶風郡 茂陵縣 사람이다. 齊詩를 배우다가 능통하지 못하자 공부를 그만두고 목축에 전념하였다. 王莽시기에 新成大尹이 되었다가 후에 벼슬을 버리고 涼州로 달아났다. 후에 군벌 隗囂의 부하로 있다가 사신으로 光武帝에게 파견되었을 때 後漢에 항복하였다. 후에 涼州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隴西太守에 임명되어 여러 차례 羌人들을 물리쳤다. 交趾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伏波將軍으로 임명되어 반란을 토벌하였고 新息侯에 봉해졌다. 후에 匈奴와 蠻夷의 공격에도 참전하였다. 후에 南蠻을 토벌하러 갔다가 죄를 지어 체포되었다. 永平初 그녀의 딸이 皇后가 되자 建武년간의 功臣으로 인정되어 雲臺에 초상화가 걸리는 영예를 누렸고 建初 3년 五官中郞將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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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3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오원관(五原關) 주 105
각주 105)
五原關:代郡에 있는 關이다. 『後漢書』에서는 “五阮關”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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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변경지대로 나가서 그들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도 못하고 군마(軍馬) 1천여 필만 죽였다.주 106
각주 106)
원문은 “光武定天下, 遣伏波將軍馬援將三千騎, 從五原關出塞征之, 無利, 而殺馬千餘匹.”인데, 『後漢書』에서는 “建武二十一年, 遣伏波將軍馬援將三千騎出五阮關掩擊之. 烏桓逆知, 悉相率逃走, 追斬百級而還. 烏桓復尾擊援後, 援遂晨夜奔歸, 比入塞, 馬死者千餘匹.”이라고 자세히 기록하였다. 『後漢書』의 기록을 통해 이 사건이 建武 21년(45)에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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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이 마침내 강성해져서 흉노를 약탈하고 공격하니, 흉노가 1천 리나 떨어진 곳으로 [본거지를] 옮기니 막남(漠南)주 107
각주 107)
漠南:‘사막의 남쪽’이란 뜻이고, 여기에서의 사막은 고비사막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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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은 사람이 없어서 텅 비게 되었다.주 108
각주 108)
원문은 “烏丸遂盛, 鈔擊匈奴, 匈奴轉徙千里, 漠南地空.”인데, 『後漢書』에서는 “二十二年, 匈奴國亂, 烏桓乘弱擊破之, 匈奴轉北徙數千里, 漠南地空, 帝乃以幣帛賂烏桓.”이라고 하였다. 『後漢書』의 기록에서 烏丸의 漠南 점유가 建武 22년(46)의 일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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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무(建武) 25년(49)에 오환의 대인(大人)인 학단(郝旦) 등이 9천여 인의 무리를 거느리고 궁궐을 방문하자, 후(侯) 혹은 왕(王)에 책봉된 거수(渠帥)주 109
각주 109)
渠帥:氏族 또는 部落 등 古代와 中世에 일정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의 首長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이다. 史書에서는 渠帥와 大人이 동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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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80여 인이었고, 그들에게 [후한의] 새내(塞內)에 거주하도록 하였는데, 요동속국(遼東屬國), 주 110
각주 110)
遼東屬國:후한 安帝의 치세(106~125)에 遼東郡과 遼西郡의 일부 지역을 따로 떼어내어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치소는 昌黎縣으로 지금의 遼寧省 義縣에 해당하고 幽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후한 말기에 폐지되었다가, 三國 魏 正始 5年(244)에 다시 설치하였다. 그 얼마 후에 昌黎郡으로 改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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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군](遼西郡), 주 111
각주 111)
遼西郡:戰國 燕의 장수 秦開가 東胡를 격파한 후 설치되었다. 秦漢時代의 治所는 陽樂縣(현재 遼寧省 義縣 서쪽)에 있었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河北省 遷西·樂亭 등 縣 동쪽과 長城 以南, 遼寧省 松嶺山 以東, 大凌河 以西의 지역에 해당된다. 遼水의 서쪽에 위치하여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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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북평[군](右北平郡), 주 112
각주 112)
右北平郡:戰國時代 燕이 설치하였다. 秦代의 治所는 無終縣(지금 天津市 薊縣)이었다. 前漢시대 治所를 平剛縣(지금 遼寧省 凌源市 서남)으로 옮겼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河北省 承德, 天津市 薊縣 이동(長成 남부 灤河 유역과 그 이동은 제외), 六股河 이남 지역이다. 後漢시대에는 治所를 土峎縣(지금의 河北省 豊潤縣 동남)으로 옮겼다. 후에 점차 영역이 축소되어 長城 이남으로 경계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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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양[군](漁陽郡), 주 113
각주 113)
漁陽郡:戰國時代 燕이 설치하였다. 秦漢時代에는 漁陽縣(현재 北京市 密雲縣 서남)이 治所였다. 前漢時代의 관할구역은 현재 河北省 灤河 상류 以南과 薊運河 以西, 天津市 海河 以北, 北京市 懷柔·通縣 以東의 지역에 해당하였다. 西晉時代 廢置되어 燕國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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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군](廣陽郡), 주 114
각주 114)
廣陽郡:秦始皇 21년(전226)에 燕을 멸한 후 설치하였다. 치소는 薊縣(현재 北京城 서북쪽)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와 大興縣, 天津市 靜海縣, 河北省 廊坊·固安·永淸·覇州·淶水·涿州·定興·易縣·新城·雄縣 등 市와 縣 지역에 해당하였다. 前漢初 燕國으로 改稱했다가 元鳳元年(전80)에 다시 廣陽郡으로 改稱하였다. 이때의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와 大興縣, 河北省 廊坊·文安·固安·覇州 등 市縣 지역이었다. 本始元年(전73)에 廣陽國으로 바뀌었다. 後漢初 廢置되어 上谷郡에 병합되었다. 永元 8년(96)에 다시 廣陽郡으로 독립하였다. 三國 魏 太和 6년(232)에 또 燕國으로 改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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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곡[군](上谷郡), 주 115
각주 115)
上谷郡:戰國時代 燕이 설치하였다. 秦代에는 治所가 沮陽縣(지금의 河北省 懷來縣 동남 20리 떨어진 廳水庫 남안에 있는 古城)에 있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河北省 張家口市, 小五臺山 이동, 赤城縣, 北京市 延慶縣 이서, 長城과 昌平縣 이북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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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代郡), 주 116
각주 116)
代郡:戰國時代 趙가 설치하였다. 秦과 前漢 때의 治所는 代縣(지금 河北省 蔚縣 서남)이었다. 前漢시대 관할 구역은 지금 河北省 懷安·蔚縣 이서, 山西省 陽高·渾源 이동에 있는 장성 안팎의 땅과 함께 장성 밖에 있는 東洋河 유역이었다. 後漢時代에 高柳縣(지금 陽高縣 서남)으로 治所를 옮겼다가 西晉時代 말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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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문[군](鴈門郡), 주 117
각주 117)
鴈門郡:雁門郡이라고도 표기하였다. 戰國時代 趙의 武靈王이 설치하였다. 秦漢時代 治所는 善無縣(현재의 山西省 右玉縣 남쪽)이다. 관할구역은 山西省 河曲·五寨·靈武 등의 縣 以北, 恒山 以西, 內蒙古自治區 黃旗海·岱海 以南의 지역이다. 後漢時代에는 治所를 陰館縣(지금의 山西省 朔州市 東南 夏關城)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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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군](太原郡), 주 118
각주 118)
太原郡:戰國 秦의 莊襄王 4년(전246)에 설치되었다. 治所는 晉陽(지금의 太原市 서남쪽)이었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山西省 五臺山과 管涔山 이남, 霍山 이북이다. 前漢시대 이후에 축소되어 文帝시대에는 國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郡이 되었다. 三國 魏 黃初元年(220)에 또 太原國으로 바뀌었고, 北魏시기에 다시 太原郡으로 바뀌었는데, 당시 관할구역은 현재의 山西省 太原市와 介休縣 사이의 汾水 중류 지역이었다. 後漢時代부터 北周시기까지 幷州의 治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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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방[군](朔方郡), 주 119
각주 119)
朔方郡:前漢 武帝 元朔 2년(전127)에 車騎將軍 衛靑이 흉노를 격파하여 오르도스지방을 제압한 후에 그곳에 五原郡과 함께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治所는 朔方縣으로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오르도스 이북(황하 이북)의 五原市 서쪽의 杭錦旗 북쪽이었다. 후한시대에는 치소를 臨戎縣, 즉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磴口縣(寧夏의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황하 서부 유역에 위치) 북쪽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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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군의 경계 지역 곳곳에 [그들을] 두루 안치하였다. [오환인들에게] 동족[種人]을 불러오도록 하여, 그들에게 옷가지와 음식물을 주었고, 교위(校尉)를 설치하여 그들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그들은] 마침내 한(漢)나라를 위하여 정찰(偵察)하면서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對備)하였고, [아울러] 흉노와 선비를 공격하기도 하였다.주 120
각주 120)
원문은 “建武二十五年, 烏丸大人郝旦等九千餘人率衆詣闕, 封其渠帥爲侯王者八十餘人, 使居塞內, 布列遼東屬國·遼西·右北平·漁陽·廣陽·上谷·代郡·雁門·太原·朔方諸郡界, 招來種人, 給其衣食, 置校尉以領護之, 遂爲漢偵備, 擊匈奴·鮮卑.”인데, 『後漢書』에서는 “二十五年, 遼西烏桓大人郝旦等九百二十二人率眾向化, 詣闕朝貢, 獻奴婢牛馬及弓虎豹貂皮.”라고 간략히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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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명제(明帝)] 영평(永平)년간(58~75)에 이르러서 어양오환(漁陽烏丸)의 대인(大人)인 흠지분(欽志賁) 주 121
각주 121)
『後漢書』에는 “欽”이 “歆”으로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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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 일족(種人)을 거느리고 [후한을] 배반하고, 선비가 다시 침입하면서 해를 입히므로 요동태수(遼東太守) 주 122
각주 122)
太守:郡의 장관을 지칭한다. 春秋時代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원래는 武職이었으며 邊郡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다가 후에 점차 지방장관이 되었다. 秦은 郡을 지방최고행정구역으로 삼고 郡마다 守를 두어 郡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郡守라 불렸다. 前漢 景帝시기 郡守를 太守로 改稱하였다. 漢代에는 太守를 明府라 존칭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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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융(祭肜) 주 123
각주 123)
祭肜(?~73):후한시대 潁川郡 穎陽縣 사람이며, 字는 次孫이다. 어려서 後漢 光武帝 초기에 黃門侍郞과 偃師長·襄賁令을 역임하였으며, 우수한 치적을 올려 秩 1等이 승격되고 縑 100필을 하사받기도 했다. 建武 17년(41)부터 永平 12년(69)까지 29년 동안 遼東太守로 재직하며 匈奴·鮮卑·烏丸·高句麗 등의 침입을 방어하였고 赤山烏桓을 토벌하는 등 위엄이 서쪽으로 武威郡부터 동쪽으로 玄菟와 樂浪郡까지 퍼져 胡夷가 모두 內附하였다. 永平 12년에 太僕에 임명되었고 그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錢 100만과 말 3필 등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永平 16년(73)에 南匈奴單于 左賢王 信과 함께 北匈奴를 토벌하기 위해 만여 騎를 이끌고 출병하였으나 성과 없이 돌아와서 하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공을 세우지 못함을 한스러워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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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모집하여 [흠]지분을 죽이고, 마침내 그 무리들을 격파하였다.주 124
각주 124)
『後漢書』 「祭肜傳」에 따르면 永平元年(58)의 일이다. 偏何가 赤山烏桓을 격파하여 그 魁帥를 참한 후 그 머리를 가지고 祭肜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後漢書』 卷20 「祭肜傳」:745, “永平元年,偏何擊破赤山,斬其魁帥,持首詣肜,塞外震讋.”). 그러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이 부분의 원문은 “至永平中, 漁陽烏丸大人欽志賁帥種人叛, 鮮卑還爲寇害, 遼東太守祭肜募殺志賁, 遂破其衆.”인데, 『後漢書』에서는 “及明·章·和三世, 皆保塞無事.”라고 하여 明帝·章帝·和帝 시기에 변방에 사건이 없었다고 보았으나, 원문의 사건이 발생한 永平元年은 明帝가 즉위한 지 2년째인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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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安帝) 주 125
각주 125)
安帝(94~125;재위 106~125):이름은 祜이며, 章帝의 손자이고 淸河王 劉慶의 아들이다. 延平元年(106) 殤帝가 죽자 鄧太后와 車騎將軍 鄧騭이 皇帝로 옹립하였다. 建光元年(121) 鄧太后 사후 親政하여 宦官 李閏 등과 함께 鄧騭의 宗族을 멸하기로 모의하여 성공하였다. 이때부터 宦官을 총애하기 시작하였다. 廟號는 恭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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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 이르러, 어양오환(漁陽烏丸)과 우북평오환(右北平烏丸), 안문오환(雁門烏丸)의 솔중왕(率衆王)주 126
각주 126)
率衆王:帥衆王이라고도 쓴다. 漢代 이후 烏丸·鮮卑·羌 등 여러 異民族의 首領들에게 수여한 封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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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無何)가 다시 선비 및 흉노와 연합하여 대군(代郡)상곡[군](上谷郡), 탁군(涿郡), 주 127
각주 127)
涿郡:前漢 元狩 6년(전117)에 廣陽郡 서남지역을 분리하여 설치하였다. 涿水의 ‘涿’字를 따서 郡名으로 삼았다. 治所는 涿縣(현재의 涿州市)이었다. 元鳳末부터 元延末까지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 房山縣, 河北省 涿州·淶水·定興·容城·安新·蠡縣·博野·安國·淸苑·覇州·肅寧·河間·任丘·永淸·遼陽·安平 등 市·縣과 定州市 동부 지역에 해당하였다. 綏和元年(전8)에 서남 지역을 中山國에 편입시켜 관할구역이 축소되었다. 後漢時代에는 幽州에 속하였다. 三國 魏 黃初 7년(226)에 范陽郡으로 改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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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군]을 침입하여 노략질하고 약탈하였다. 이에 [후한 조정은] 대사농(大司農)주 128
각주 128)
大司農:漢代 조세와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 혹은 이 부서의 장관을 지칭한다. 漢武帝 太初元年(전104) 大農令을 大司農으로 改稱했는데, 大農이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新莽 때 羲和·納言으로 고쳤다가 後漢 때 다시 大司農의 명칭을 회복하였다. 秩은 中二千石이며 九卿의 지위에 있다. 전국의 租賦와 財政收支를 담당하며, 官府의 농업과 수공업 경영을 관리하였다. 예컨대 官府의 개간과 官營鹽鐵의 생산, 화물의 운송과 물가의 통제 등을 관리하였다. 속관으로 太倉·均田·平準·都內·籍田 5令丞과 斡官·鐵市 2長丞이 있다. 또 郡國諸倉農監과 都水 15官長·丞도 관할하였다. 武帝 때 搜粟都尉를 설치했지만, 늘 설치한 것은 아니었다. 後漢時代에는 기구가 대폭 줄어들어 丞과 部丞이 각각 1인이었고, 속관도 太倉·平準·導官 3令丞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없앴으며, 지방의 鹽鐵官은 郡縣에 속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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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희(何熙)를 행거기장군(行車騎將軍)주 129
각주 129)
行軍騎將軍:후한시대의 車騎將軍은 大將軍 등과 동격으로서 官秩이나 印綬가 三公과 같았다.(臧雲浦, 1997:69~70) ‘行’은 임시적 혹은 대리로 맡은 관직명 앞에 붙인다. 또 본관보다 낮은 관직을 겸할 때 이 관명 앞에 ‘行’자를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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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고, 좌우(左右) 우림(羽林)주 130
각주 130)
羽林:九卿의 하나인 光祿勳 소속의 친위부대였다. 羽林中郞將의 통솔을 받으면서 天子의 宿衛를 담당하였다. 從軍 戰死者의 子弟들과 西北 6郡의 良家의 子弟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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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오영(五營)주 131
각주 131)
五營:‘五校’라고 하며, 長水·步兵·射聲·胡騎·車騎의 5校尉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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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에 있는 7군(郡)과 여양영(黎陽營)주 132
각주 132)
黎陽營:‘黎陽 虎牙營’을 줄인 말이고, 후한시대에 처음 설치되었다. 幽州와 幷州의 精兵을 관장하였고, 黎陽에 주둔하고 있었다. 中謁者가 감독하였다. 임무는 후한의 동방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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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병사, 합계 2만 명을 발동하여 적을 공격하도록 하였다.주 133
각주 133)
원문은 “至安帝時, 漁陽·右北平·雁門烏丸率衆王無何等復與鮮卑·匈奴合, 鈔略代郡·上谷·涿郡·五原, 乃以大司農何熙行車騎將軍, 左右羽林五營士, 發緣邊七郡黎陽營兵合二萬人擊之.”인데, 『後漢書』에서는 “安帝永初三年夏, 漁陽烏桓與右北平胡千餘寇代郡·上谷. 秋, 鴈門烏桓率眾王無何(允), 與鮮卑大人丘倫等, 及南匈奴骨都侯, 合七千騎寇五原, 與太守戰於九原高渠谷, 漢兵大敗, 殺郡長吏. 乃遣車騎將軍何熙·度遼將軍梁慬等擊, 大破之.”라 하여 永初 3년(109)에 발생한 사건임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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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가 [후한에] 항복하면서, 선비와 오환도 각각 새외(塞外)로 돌아갔다.주 134
각주 134)
원문은 “匈奴降, 鮮卑·烏丸各還塞外.”인데, 『後漢書』에서는 “無何乞降, 鮮卑走還塞外.”라고 간략히 기록하였으며 匈奴의 降附는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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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오환은 점차 다시 [후한과] 친하게 지내게 되어 귀부하였는데, [후한은] 오환의 대인(大人)인 융말외(戎末廆)를 도위(都尉)주 135
각주 135)
원문은 戎末廆를 都尉로 삼았다고 하였으나, 『後漢書』에서는 그 관직을 “親漢都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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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임명하였다.
순제(順帝) 주 136
각주 136)
順帝(115~144;재위 125~144):이름은 保이며, 安帝의 아들이다. 永寧元年(120)에 太子가 되었다가 延光 3년(124)에 濟陰王으로 폐위되었다. 다음해 安帝가 죽자 宦官 江京 등이 北鄕侯 劉懿를 옹립하였으나 곧 죽었다. 宦官 孫程 등이 江京을 죽이고 濟陰王을 皇帝로 옹립하여 孫程 등 19인은 宦官으로써 列侯에 봉해졌다. 外戚 梁商과 梁冀가 大將軍이 되어 朝政은 宦官과 外戚이 조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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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 이르러, 융말외가 왕후(王侯)인 돌귀(咄歸)거연(去延) 등을 거느리고 오환교위(烏丸校尉)인 경엽(耿曄)을 따라서 변경의 요새를 나가서 선비(鮮卑)를 공격하여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들은] 돌아가서 모두 솔중왕(率衆王)에 배수(拜授)되었고, 비단을 하사받았다.주 137
각주 137)
원문은 “至順帝時, 戎末廆率將王侯咄歸·去延等從烏丸校尉耿曄出塞擊鮮卑有功, 還皆拜爲率衆王, 賜束帛.”인데, 『後漢書』에서는 “順帝陽嘉四年冬, 烏桓寇雲中, 遮截道上商賈車牛千餘兩, 度遼將軍耿曄率二千餘人追擊, 不利, 又戰於沙南, 斬首五百級. 烏桓遂圍曄於蘭池城, 於是發積射士二千人, 度遼營千人, 配上郡屯, 以討烏桓, 烏桓乃退.”라고 하였다. 후자에 따르면 이 기사는 陽嘉 4년(135)에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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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魏書』:魏晉時代 王沈이 紀傳體 형식으로 저술한 三國時代 魏나라에 관한 史書를 가리킨다. 이미 亡失되어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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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원문은 “東胡也”인데, 『後漢書』에서는 “本東胡也”라 하여 東胡 앞에 ‘本’字를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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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烏丸山(烏桓山):대체로 지금의 중국 內蒙古自治區 阿魯科爾沁旗 북부의 大興安嶺山脈 남단으로 파악되고 있다(馬長壽, 1962:130~138 및 林幹, 198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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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최근 色音勿力吉은 烏丸이 匈奴單于의 長子가 임명되던 左賢王(左屠耆王)에 속했고, 몽골어로 長子를 아오간(Aogan) 혹은 아오한(Aohan)이라 칭한 것을 ‘烏丸’으로 음사했다고 추정하였다(色音勿力吉, 2007: 19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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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內蒙古 呼倫貝爾盟의 完工和扎賚諾爾의 무덤에서 발견된 양·말·소·개의 순장 풍습을 보면 당시에 이런 짐승을 가축으로 길렀음을 알 수 있다. 拓跋鮮卑의 경우 戞仙洞 부근에서 南遷한 후 목축이 주요 생산이 되었는데, 이는 北魏 초기까지 지속되었다(色音勿力吉, 2007: 19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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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穹廬:匈奴 등 유목민들의 이동식 천막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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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원문은 “以窮廬爲宅”인데, 『後漢書』에서는 “以窮廬爲舍”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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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원문은 中華書局標點校勘本에서는 “皆東向. 日弋獵禽獸”라고 標點하였으나, 『後漢書』 구절과 비교해보면, “皆東向日. 弋獵禽獸”로 표점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저본의 표점을 수정하고, 번역도 이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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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원문은 “以毛毳爲衣.”인데, 『後漢書』에서는 “食肉飲酪, 以毛毳爲衣.”라고 하여 “食肉飲酪”의 구절이 첨가되었다. 內蒙古自治區 戞仙洞에서 발견된 동물의 骨骼을 분석해보면 野豬와 野鹿, 野羊이 많았다. 拓跋鮮卑에 한정하여 말하면, 이들이 “大澤”으로 南遷하기 전 戞仙洞 일대에서 살았을 때는 목축보다 狩獵이 주요 생산수단이었다(色音勿力吉, 2007: 19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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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0)
    원문은 “貴少賤老”인데, 『後漢書』에서는 “貴少而賤老”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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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원문은 “其性悍驁”인데, 『後漢書』에서는 “其性悍塞”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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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원문은 “父兄以己爲種, 無報復者故也.”인데, 『後漢書』에서는 이 구절이 없고 다만 의미가 비슷한 “父兄無相仇報故也”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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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원문은 “常推募勇健能理決鬪訟相侵犯者爲大人”인데, 『後漢書』에서는 “有勇健能理決鬥訟者, 推爲大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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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원문은 “不世繼也”인데, 『後漢書』에서는 “無世業相繼”라고 기록하였고, “有勇健能理決鬥訟者, 推爲大人” 뒤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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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落:몽골의 게르처럼 유목민들의 이동식 천막(tent)를 지칭한다. 漢人들의 가구를 ‘戶’로 세는 것처럼 유목민들의 가구를 세는 단위는 ‘落’이다. 內田吟風은 烏桓의 유목민 1戶가 평균적으로 7인으로 구성되고 2戶 혹은 3戶의 穹廬群에 속한 20여 인이 1落을 구성하였다고 주장하였다(內田吟風, 1975: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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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학자들은 烏桓과 鮮卑의 사회가 “落→邑落→部”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金浩東, 199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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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원문은 “大人有所召呼, 刻木爲信”인데, 『後漢書』에서는 “大人有所召呼, 則刻木爲信”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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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원문은 “邑落傳行”인데, 『後漢書』에는 이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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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원문은 “無文字”인데, 『後漢書』에는 “雖無文字”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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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1)
    원문은 “各自畜牧治産”인데, 『後漢書』에는 “各自畜牧營產”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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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원문은 “其嫁娶皆先私通, 略將女去”인데, 『後漢書』에는 “其嫁娶則先略女通情”이라 하였다. 문장은 다르지만 내용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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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원문은 “然後遣媒人送馬牛羊以爲聘娶之禮”인데, 『後漢書』에는 “然後送牛馬羊畜, 以爲娉幣.”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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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원문은 “壻隨妻歸”인데, 『後漢書』에는 “婿隨妻還家”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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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원문은 “見妻家無尊卑”인데, 『後漢書』에는 ‘見’字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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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원문은 “而不自拜其父母”인데, 『後漢書』에는 ‘自’字가 없다. 馬長壽는 번역문의 구절을 母系社會(혹은 女系社會)의 유산이라고 보았다. 남편이 아내의 집에서 처가를 위해 僕役했기 때문에 처가 사람들에게는 나이에 상관없이 절하고 자신의 부모에게는 절하지 않았다고 보았다(馬長壽, 1962: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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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원문은 “爲妻家僕役二年”인데, 『後漢書』에는 “爲妻家僕役, 一二年閒”이라 하여 僕役의 기간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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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원문은 “居處財物, 一出妻家”인데, 『後漢書』에는 “居處財物一皆爲辦”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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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8)
    원문은 “故其俗從婦人計, 至戰鬬時, 乃自決之.”인데, 『後漢書』에는 “計謀從用婦人, 唯鬬戰之事乃自決之.”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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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9)
    원문은 “悉髠頭以爲輕便”인데, 『後漢書』에는 ‘悉’字 대신 ‘以’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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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2)
    원문은 “著口決”인데, 『後漢書』에서는 “著句決”이라 하여 ‘口’字 대신 ‘句’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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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1)
    현재까지 출토된 鮮卑의 步搖冠은 黃金으로 만들고 馬頭鹿角 혹은 牛頭鹿角 형태를 띠었다. 이 밖에 鹿頭로 된 步搖冠도 출토되었다. 冠의 가지에 金으로 만든 葉을 달았으며 머리를 흔들 때마다 葉片이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黃雪寅, 2002: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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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2)
    『後漢書』에서는 “簂步搖”라고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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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3)
    後母:사전적으로는 아버지의 후실이라는 뜻인데, 문맥상 生母를 제외한 아버지의 처첩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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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4)
    원문은 “父兄死, 妻後母執嫂, 若無執嫂者, 則其子以親之次妻伯叔焉”인데, 『後漢書』에서는 “其俗妻後母, 報寡㛐”이라고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馬長壽는 원문의 ‘執’字가 ‘報’字의 誤記라고 보았다. 漢律에서는 季父의 妻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報’라고 칭하였다. 또 幼子가 兄의 長妻와 성관계 맺는 것도 ‘報’라고 불렀다. 과부들이 氏族內 남성들과 재결합하는 것은 죽은 남편의 재산이 씨족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馬長壽, 1962: 118~119). 이러한 풍습을 收繼婚(levirate)라고 하는데 高句麗의 ‘兄死娶嫂’ 풍습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혈통의 단절을 막고 氏族의 단결을 유지하며 재산 유출을 막는 풍습이라고 한다(武沐, 2005: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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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5)
    원문은 “死則歸其故夫”인데, 직역하면 “죽으면 여자의 죽은 옛 남편에게 돌아가게 한다.”이다. 이 직역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데, 죽은 옛 남편의 무덤에 묻히게 했다는 것이 자연스러워서 본문과 같이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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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6)
    원문은 “俗識鳥獸孕乳, 時以四節, 耕種常用布谷鳴爲候”인데, 『後漢書』에는 “見鳥獸孕乳, 以別四節”이라고 간략하게 기록되었다. 『後漢書』의 경우 구절 가운데 “以別四節”에 ‘別’字가 있어서 의미가 명확한데 번역문에서는 그 기사에 따라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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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7)
    원문은 “布穀”으로 뻐꾸기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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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8)
    원문은 “靑穄”인데, ‘穄’는 빛이 검은 메기장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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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9)
    ‘沙莑’이라고도 불리는 1년생 풀이다. 열매는 원형에 가깝고 扁平한데, (씨앗을) 먹을 수도 있고 짜서 기름을 만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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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3)
    원문은 “地宜靑穄·東牆”인데, 『後漢書』에서는 “其土地宜穄及東牆”이라 하여 표현이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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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1)
    원문은 “實如葵子”인데, 『後漢書』에서는 ‘葵’字 대신 ‘穄’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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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2)
    원문은 “至十月熟”인데, 『後漢書』에서는 “至十月而熟”이라 하여 ‘而’字가 첨가되었다. 1956년부터 고고학자들이 遼寧省 西豐縣의 西坌溝에서 발굴한 烏丸의 무덤에서 많은 농기구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烏丸과 鮮卑人이 일찍부터 농경에 종사했음을 입증한다. 이 농기구에는 漢字가 적혀있는데, 이는 烏丸과 鮮卑人들이 中原으로부터 농업을 배웠음을 뜻한다고 한다(色音勿力吉, 2007: 20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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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3)
    번역문과 달리 “중국에서 輸入되었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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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4)
    『後漢書』에서는 “大人” 대신 “男子”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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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5)
    원문과 번역문에서는 大人이 각종 수공업 제품을 직접 만든 것처럼 기술했으나, 실제로는 大人이 烏丸과 鮮卑에 투항한 중국인들을 시켜 만들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金浩東, 1993: 131; 靑木和子, 1970: 70~71). 馬長壽는 번역문에서 언급한 물건들이 전쟁물자임에 주목하여 大人이 軍事手工業과 전쟁물자를 관리·감독한다고 보았다(馬長壽, 1962: 123). 1956년 遼寧省 西豐縣 西坌溝에서 발굴된 烏丸무덤의 유물들을 보면 烏丸과 鮮卑에서는 구리 주조기술이 冶鐵기술보다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銅鏃, 鐵鏃, 骨鏃, 石鏃의 순서로 출토수량의 증감을 보이는데, 이는 烏丸과 鮮卑人들이 청동기와 철기 문화를 받아들인 후 骨制와 石製 화살촉이 도태되었음을 보여준다(色音勿力吉, 2007: 20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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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6)
    원문은 “氊”:『後漢書』에는 “氀毼”로 되어 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모직물의 일종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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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7)
    번역문의 앞 단락과 이 단락의 원문은 “[그들은] 술[白酒]을 빚을 수 있었지만, …… 침(鍼)과 약(藥)은 없었다.”라는 구절과 유사한 내용이 『後漢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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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8)
    원문은 “貴兵死”인데, 『後漢書』에서는 ‘貴’字 앞에 ‘俗’字를 첨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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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9)
    원문은 “斂屍有棺”인데, 『後漢書』에서는 ‘有’字 대신 ‘以’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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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0)
    원문은 “始死則哭”인데, 『後漢書』에서는 “有哭泣之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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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1)
    원문은 “葬則歌舞相送”인데, 『後漢書』에서는 “至葬則歌舞相送”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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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2)
    원문은 “肥養犬”인데, 『後漢書』에서는 ‘犬’字 앞에 ‘一’字를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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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3)
    원문은 “以采繩嬰牽”인데, 『後漢書』에서는 “以彩繩纓牽”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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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4)
    원문은 “幷取亡者所乘馬·衣物·生時服飾”인데, 『後漢書』에서는 “并取死者所乘馬衣物”이라 하여 그 표현이 조금 바뀌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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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5)
    원문은 “特屬累犬”인데, 『後漢書』에서는 “言以屬累犬”이라 하여 ‘特’字 대신 ‘言以’ 2字를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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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6)
    赤山:현재의 內蒙古自治區 巴林左旗의 북쪽에 있는 烏力吉木倫河의 발원지 烏蘭大垻(紅山의 뜻)이다. 『遼史』 「地理志」에 따르면 赤山은 慶州(현재의 巴林右旗 북쪽 白塔子古城) 부근에 있었다. 일설에는 烏丸의 赤山이 현재의 赤峰市에 있는 紅山(몽골어로 烏蘭哈達)이라고 하는데, 『後漢書』에 기록된 방위(赤山이 遼東의 서북쪽 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함)와 일치하지 않는다. 혹자는 烏丸이 南遷한 이후 현재의 赤峰市에 있는 紅山을 聖山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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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7)
    원문은 “使護死者神靈歸乎赤山”인데, 『後漢書』에는 ‘乎’字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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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8)
    遼東郡:戰國 燕의 장수 秦開가 東胡를 격파한 후 설치하였다. 秦漢時代의 治所는 襄平縣(현재 遼寧省 遼陽市)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遼寧省 大凌河 동쪽 지역에 해당한다. 遼水의 동쪽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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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9)
    魂神:다음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靈魂과 精神을 합한 말이고, 둘째는 죽은 이의 넋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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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0)
    泰山:현재 山東省 泰安市 북쪽에 있다. 五嶽의 하나로 東嶽이라고 한다. 역대 帝王들은 늘 이곳에 와서 封禪의 祭典을 열었다. 즉 漢武帝와 後漢 光武帝·章帝·安帝, 隋 文帝, 唐 高宗과 玄宗, 宋 眞宗이 泰山에서 封禪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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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1)
    『博物志』에서는 “泰山은 天帝의 孫이며, 사람들의 魂을 불러들이는 일을 관장한다. 東方은 萬物이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生命을 맡아 처리한다.”라고 설명하였다(『後漢書』 권90 「烏桓鮮卑列傳」 〈烏桓傳〉 李賢注:2980, “『博物志』:‘泰山’, 天帝孫也, 主召人魂.東方萬物始, 故知人生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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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2)
    원문은 “如中國人以死之魂神歸泰山也”인데, 『後漢書』에서는 “如中國人死者魂神歸岱山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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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3)
    번역문 가운데 “장례식 날에 이르러 …… 이렇게 한 후에 개요 말을 죽이고 옷가지를 태웠다”라는 구절이 『後漢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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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4)
    원문은 “亦同祠以牛羊, 祠畢皆燒之.”인데, 『後漢書』에는 “祠用牛羊, 畢皆燒之.”라 하여 글자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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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5)
    원문은 “違大人言死”인데, 『後漢書』에는 “違大人言者, 罪至死”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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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6)
    원문은 “盜不止死”인데, 『後漢書』에는 이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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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7)
    원문은 “其相殘殺”인데, 『後漢書』에는 “若相賊殺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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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8)
    이처럼 개인 혹은 부락 성원들이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私刑을 同害刑 혹은 反映刑(talio 혹은 talion)이라 한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 조항 중 “눈에는 눈, 귀에는 귀”가 대표적이며, 로마의 12표법과 동아시아 여러 지역 및 중국에서도 보인다(仁井田陞, 1959: 317~320 및 373~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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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9)
    원문은 “詣大人平之”인데, 『後漢書』에서는 ‘平’字 대신 ‘告’字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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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0)
    이처럼 자신의 죄를 말·소·양 등 가축을 주어 대신 갚는 형태를 賠償刑이라고 하며 초원 유목민들 사이에 행해진 일종의 慣習法에 기초한 것이다(金浩東, 1993: 12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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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1)
    원문은 “自殺其父兄無罪”인데, 『後漢書』에서는 “其自殺父兄則無罪”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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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2)
    원문은 “皆逐使至雍狂地”인데, 『後漢書』에서는 “皆徙逐於雍狂之地”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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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3)
    원문은 “地無山, 有沙漠·流水·草木, 多蝮虵”인데, 『後漢書』에는 “其土多蝮蛇”라고 간략히 기록하였고 오환인들이 사는 지역의 지형에 관한 서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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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4)
    丁令:丁零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史書에 따라 丁靈, 釘靈이라고도 쓴다. 일설에는 ‘狄歷’이라고도 한다. 丁零은 康居의 북쪽에 있었고, 匈奴의 單于庭 接習水에서 7천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前漢時代에는 주로 현재 러시아의 바이칼호 이남의 지역에 분포하였다. 後漢時代에는 일부가 南遷하였다. 兩晉·南北朝時代에는 현재의 山西省과 河北省에 定州丁零과 中山丁零, 北至丁零 등이 있었다. 河南省과 甘肅省 등지에도 丁零이 모여 살았다. 漠北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丁零은 『晉書』에서 “敕勒”, 『隋書』에서 “鐵勒”이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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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5)
    烏孫:중앙아시아의 種族, 혹은 나라 이름이다. 漢代부터 南北朝時代 초기까지 天山山脈의 일리 계곡, 이식 쿨 호수 근처, 시르다리야 상류 등지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다. 烏孫의 種族에 대해서는 사카, 투르크 등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이들의 혼혈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烏孫은 원래 河西回廊에서 月氏 등과 함께 거주하면서 그 지배를 받다가 匈奴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이주하여 일리 계곡과 이식 쿨 주변 지역 등으로 이주하였다. 이로 인해 세력화를 하면서 동쪽으로는 匈奴, 西北으로는 康居라는 유목민, 서쪽으로는 安息 등과 접하였다. 君長이 거주하는 곳을 赤穀城이라고 하였는데, 이식 쿨 근처에 있었다. 이들은 張騫의 여행 이후에 漢나라에 알려져 그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匈奴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존재했다(王明哲·王炳華, 198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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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6)
    원문은 “在丁令之西南, 烏孫之東北, 以窮困之.”인데, 『後漢書』에는 “在丁令西南, 烏孫東北焉.”이라 하여 “以窮困之”라는 구절이 생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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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7)
    원문은 “自其先匈奴所破之後”인데, 『後漢書』에서는 “烏桓自爲冒頓所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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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8)
    원문은 “人衆孤弱”인데, 『後漢書』에서는 “眾遂孤弱”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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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9)
    원문은 “爲匈奴臣服”인데, 『後漢書』에서는 “常臣伏匈奴”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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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0)
    원문은 “常歲輸牛·馬·羊”인데, 『後漢書』에서는 “歲輸牛馬羊皮”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漢書』 「匈奴傳」에 따르면 前漢 말기에 匈奴가 烏丸에게 皮布稅를 강제로 징수한 예도 있다(金浩東, 1993: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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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1)
    원문은 “輒虜其妻子”인데, 『後漢書』에서는 ‘虜’字 대신 ‘沒’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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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2)
    壹衍鞮單于(재위 전85~전68): 匈奴의 11대 單于이다. 『漢書』에는 壺衍鞮單于로 표기되었다. 左谷蠡王이었다가 衛律과 顓渠單于의 음모로 狐鹿姑單于 사후 즉위하였다. 즉위 후 前漢과 공격을 주고 받았고 烏丸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후에 常惠와 烏孫의 연합군에 패하여 큰 타격을 받아 쇠퇴하였다. 그후 큰 눈에 내려 사람들과 가축이 얼어 죽었다. 이 틈을 타서 丁令이 북쪽에서, 烏丸이 동쪽에서, 烏孫이 서쪽에서 협공하지 크게 패하였다. 그의 재위 시기는 匈奴가 크게 쇠망하던 분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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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3)
    원문은 “至匈奴壹衍鞮單于時”인데, 『後漢書』에서는 “昭帝時”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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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4)
    원문은 “烏丸轉彊”인데, 『後漢書』에서는 ‘轉’字 대신 ‘漸’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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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5)
    원문은 “發掘匈奴單于冢”인데, 『後漢書』에서는 “乃發匈奴單于冢墓”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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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6)
    원문은 “將以報冒頓所破之恥”인데, 『後漢書』에서는 “以報冒頓之怨”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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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7)
    『後漢書』에는 “壹衍鞮單于” 대신 “匈奴”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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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8)
    원문은 “發二萬騎以擊烏丸”인데, 『後漢書』에서는 “乃東擊破烏桓”이라고 하였다. 『漢書』 권94上 「匈奴傳」에 따르면 이 사건은 壹(壺)衍鞮單于가 즉위한 지 5년째인 전80년에 발생하였다(『漢書』 권94上 「匈奴傳」: 3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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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89)
    大將軍:武官名으로 戰國時代에 처음 보인다. 漢代에는 가장 높은 將軍의 칭호로,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漢武帝 때 大司馬와 領尙書事를 겸하여 中朝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後漢시대에는 大將軍이 三公의 위에 있었으며, 대부분 外戚이 임명되었다. 三國時代부터 南北朝時代까지 大臣이 執政하면 大將軍을 겸하였다. 품계는 正一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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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0)
    霍光(?~전68):前漢시대 河東郡 平陽縣 사람이며 字는 子孟이다. 霍去病의 異母弟이다. 젊어서 郞이 되었으며, 후에 諸曹侍中, 奉車都尉 光祿大夫를 역임하였다. 20여 년간 궁정을 출입하면서 조심하고 근신하여 武帝의 신임을 얻었다. 武帝 사후 大司馬大將軍에 임명되고 博陸侯에 봉해졌으며, 金日磾·上官桀·桑弘羊과 함께 遺詔를 받아 昭帝를 보좌하였다. 후에 燕王 旦과 함께 모반했다는 죄명으로 上官桀 등을 제거하고 朝政을 혼자서 처리하였다. 昭帝 사후 昌邑王 劉賀를 皇帝로 옹립했다가 다시 폐하고 宣帝를 옹립하였다. 20년간 정권을 잡아 徭賦를 경감하고 與民休息정책을 취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점차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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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1)
    度遼將軍:後漢時代 度遼營을 관장하는 將軍을 지칭한다. 원래 前漢 武帝 시기 范明友를 度遼將軍으로 임명하였고, 後漢 明帝初 南匈奴의 單于와 새로 항복한 자들을 지키고 관리하기 위해 두었으나 常設 관직은 아니었다. 安帝 元初元年(114)에 처음으로 常設하였다. 銀印靑綬이고 秩은 二千石이었다. 屬官인 長史와 司馬는 六百石이었다. 『東觀漢紀』에는 속관으로 司馬 2인을 두었다고 기록하였다(『後漢書』 「百官志」一 〈度遼將軍條〉:3565, “明帝初置度遼將軍,以衛南單于並新降有二心者,後數有不安,遂爲常守.”;上同 注引應劭『漢官儀』:3565, “度遼將軍,孝武皇帝初用范明友.明帝永平八年,行度遼將軍事;安帝元初元年,置真.銀印青綬,秩二千石.長史·司馬六百石.”). 주둔 지역은 五原郡 曼柏縣(현재 內蒙古自治區 東勝의 동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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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2)
    范明友:출신지역은 未詳이다. 校尉가 되어 반란을 일으킨 氐를 격파하였다. 후에 中郞將을 거쳐 霍光의 추천으로 將軍이 되어 烏丸을 공격하여 王을 생포하고 6, 200개의 수급을 얻었으며, 이 공으로 平陵侯에 봉해졌다. 후에 霍光과 함께 宣帝를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워 食邑의 戶數가 2, 900戶에 이르렀다. 本始 2년(전72)에 3萬騎를 이끌고 張掖郡에서 匈奴를 공격하기 위해 遠征에 나섰다. 후에 度遼將軍 未央衛尉와 光祿勳을 역임하였다. 후에 霍光의 아들 大將軍 霍禹, 霍光의 아내 郭顯, 郭雲, 鄧廣漢, 任勝, 趙平 등과 大逆을 모의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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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3)
    원문은 “遣度遼將軍范明友將三萬騎出遼東追擊匈奴”인데, 『後漢書』에서는 “因遣度遼將軍范明友將二萬騎出遼東邀匈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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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4)
    원문은 “比明友兵至”인데, 『後漢書』에는 이 구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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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5)
    원문은 “匈奴已引去”인데, 『後漢書』에서는 “而虜已引去”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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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6)
    원문은 “烏丸新被匈奴兵, 乘其衰弊, 遂進擊烏丸”인데, 『後漢書』에서는 “明友乘烏桓新敗, 遂進擊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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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7)
    원문은 “獲三王首還”인데, 『後漢書』에서는 “獲其三王首而還”이라고 하였다. 『漢書』에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漢書』 권94上 「匈奴傳」: 3784, “漢復得匈奴降者, 言烏桓嘗發先單于, 匈奴怨之, 方發二萬騎擊烏桓. 大將軍霍光欲發兵邀擊之, 以問護軍都尉趙充國. 充國以爲‘烏桓間數犯塞, 今匈奴擊之, 於漢便. 又匈奴希寇盜, 北邊幸無事. 蠻夷自相攻擊, 而發兵要之, 招寇生事, 非計也.’ 光更問中郎將范明友, 明友言可擊. 於是拜明友爲度遼將軍, 將二萬騎出遼東. 匈奴聞漢兵至, 引去. 初, 光誠明友:‘兵不空出, 即後匈奴, 遂擊烏桓.’ 烏桓時新中匈奴兵, 明友既後匈奴, 因乘烏桓敝, 擊之, 斬首六千餘級, 獲三王首, 還, 封爲平陵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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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8)
    원문은 “後數復犯塞”인데, 『後漢書』에서는 “由是烏桓復寇幽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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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99)
    원문은 “明友輒征破之”인데, 『後漢書』에서는 ‘征’字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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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0)
    王莽(전45~23;재위 5~23):前漢시대 魏郡 元城縣 사람으로, 字는 巨君이다. 漢元帝의 皇后 王政君의 조카이다. 黃門郞·射聲校尉를 지냈고 成帝 永始元年(전16)에 新都侯에 봉해졌다. 騎都尉 光祿大夫 給事中이 되어 외척 淳于長을 탄핵하여 정직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綏和元年(전8)에 大司馬에 임명되었다가 哀帝 즉위 후 外戚 丁氏와 傅氏에 밀려 면직되었다. 이후 哀帝 사후 王政君이 太皇太后로서 臨朝稱制하자 다시 大司馬로 임명하여 平帝를 옹립할 것을 모의하여 安漢公에 제수되었다. 빈민 구제와 博士 증원 등으로 민심을 얻었다. 元始 5년(5)에 平帝 사후 孺子 嬰을 옹립한 후 周公의 예를 본떠 假皇帝라 자칭했다가 初始元年(8)에 자립하여 皇帝가 되고 國號를 ‘新’이라 칭하고, 年號를 始建國이라 하였다. 각종 개혁정책을 실시했으나 실패하였고, 대외정책에도 실패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地皇 4년(23)에 綠林軍이 長安을 점령하자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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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1)
    원문 “至王莽末, 並與匈奴爲寇.”처럼 烏丸과 匈奴가 王莽 말기(新末)에 함께 변방을 침입했다는 기록이 『後漢書』에는 없다. 다만 “及王莽篡位, 欲擊匈奴, 興十二部軍, 使東域將嚴尤領烏桓·丁令兵屯代郡, 皆質其妻子於郡縣. 烏桓不便水土, 懼久屯不休, 數求謁去. 莽不肯遣, 遂自亡畔, 還爲抄盜, 而諸郡盡殺其質, 由是結怨於莽. 匈奴因誘其豪帥以爲吏, 餘者皆羈縻屬之.”라 하여, 新 말기에 烏丸이 王莽에게 등을 돌리고 匈奴에게 복속하였음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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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2)
    光武帝(전6~57;재위 25~57):南陽郡 蔡陽縣(오늘날 湖北省 棗陽縣 서남) 사람이다. 이름은 秀, 字는 文叔이다. 형 劉縯과 함께 綠林軍에 가담하였고, 劉玄(更始帝)이 稱帝한 후 太常 偏將軍이 되었다. 更始元年(23)에 王鳳의 군대와 함께 昆陽에서 승리하여 王莽軍의 주력을 격파하였다. 劉縯이 권력투쟁에서 피살된 후 스스로를 감추어 更始帝의 신임을 얻었다. 후에 河北에 파견되어 관리들과 豪族들의 지지를 획득하고 王郞 등을 진압하였다. 蕭王으로 봉해진 후 更始帝와 단절하고 25년 鄗(현재 河北省 柏鄕縣 북쪽)에서 稱帝하여 年號를 建武라 하였다. 즉위 초 賦稅와 요역을 감면하고 吏員을 줄였으며, 奴婢를 석방하고 수리시설을 확충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功臣들을 죽이지 않고 爵位와 祿을 후히 주는 대신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外戚과 宦官의 정치 관여를 금지하였다. 400여 縣을 없애고 內郡의 지방군대를 없앴으며 郡都尉를 폐지하여 지방의 병권을 약화시켰고, 중앙이 직접 통할하는 군대를 확대하였다. 廟號는 世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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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3)
    伏波將軍:양한시대 임시로 설치했던 장군의 칭호이다. 前漢 武帝 元鼎 5년(전112)에 南越을 토벌하는 路博德이 伏波將軍에 임명되었고, 後漢時代 馬援도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 후에 상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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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4)
    馬援(?~?):前漢시대 扶風郡 茂陵縣 사람이다. 齊詩를 배우다가 능통하지 못하자 공부를 그만두고 목축에 전념하였다. 王莽시기에 新成大尹이 되었다가 후에 벼슬을 버리고 涼州로 달아났다. 후에 군벌 隗囂의 부하로 있다가 사신으로 光武帝에게 파견되었을 때 後漢에 항복하였다. 후에 涼州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隴西太守에 임명되어 여러 차례 羌人들을 물리쳤다. 交趾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伏波將軍으로 임명되어 반란을 토벌하였고 新息侯에 봉해졌다. 후에 匈奴와 蠻夷의 공격에도 참전하였다. 후에 南蠻을 토벌하러 갔다가 죄를 지어 체포되었다. 永平初 그녀의 딸이 皇后가 되자 建武년간의 功臣으로 인정되어 雲臺에 초상화가 걸리는 영예를 누렸고 建初 3년 五官中郞將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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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5)
    五原關:代郡에 있는 關이다. 『後漢書』에서는 “五阮關”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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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6)
    원문은 “光武定天下, 遣伏波將軍馬援將三千騎, 從五原關出塞征之, 無利, 而殺馬千餘匹.”인데, 『後漢書』에서는 “建武二十一年, 遣伏波將軍馬援將三千騎出五阮關掩擊之. 烏桓逆知, 悉相率逃走, 追斬百級而還. 烏桓復尾擊援後, 援遂晨夜奔歸, 比入塞, 馬死者千餘匹.”이라고 자세히 기록하였다. 『後漢書』의 기록을 통해 이 사건이 建武 21년(45)에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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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7)
    漠南:‘사막의 남쪽’이란 뜻이고, 여기에서의 사막은 고비사막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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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8)
    원문은 “烏丸遂盛, 鈔擊匈奴, 匈奴轉徙千里, 漠南地空.”인데, 『後漢書』에서는 “二十二年, 匈奴國亂, 烏桓乘弱擊破之, 匈奴轉北徙數千里, 漠南地空, 帝乃以幣帛賂烏桓.”이라고 하였다. 『後漢書』의 기록에서 烏丸의 漠南 점유가 建武 22년(46)의 일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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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9)
    渠帥:氏族 또는 部落 등 古代와 中世에 일정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의 首長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이다. 史書에서는 渠帥와 大人이 동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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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0)
    遼東屬國:후한 安帝의 치세(106~125)에 遼東郡과 遼西郡의 일부 지역을 따로 떼어내어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치소는 昌黎縣으로 지금의 遼寧省 義縣에 해당하고 幽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후한 말기에 폐지되었다가, 三國 魏 正始 5年(244)에 다시 설치하였다. 그 얼마 후에 昌黎郡으로 改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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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1)
    遼西郡:戰國 燕의 장수 秦開가 東胡를 격파한 후 설치되었다. 秦漢時代의 治所는 陽樂縣(현재 遼寧省 義縣 서쪽)에 있었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河北省 遷西·樂亭 등 縣 동쪽과 長城 以南, 遼寧省 松嶺山 以東, 大凌河 以西의 지역에 해당된다. 遼水의 서쪽에 위치하여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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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2)
    右北平郡:戰國時代 燕이 설치하였다. 秦代의 治所는 無終縣(지금 天津市 薊縣)이었다. 前漢시대 治所를 平剛縣(지금 遼寧省 凌源市 서남)으로 옮겼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河北省 承德, 天津市 薊縣 이동(長成 남부 灤河 유역과 그 이동은 제외), 六股河 이남 지역이다. 後漢시대에는 治所를 土峎縣(지금의 河北省 豊潤縣 동남)으로 옮겼다. 후에 점차 영역이 축소되어 長城 이남으로 경계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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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3)
    漁陽郡:戰國時代 燕이 설치하였다. 秦漢時代에는 漁陽縣(현재 北京市 密雲縣 서남)이 治所였다. 前漢時代의 관할구역은 현재 河北省 灤河 상류 以南과 薊運河 以西, 天津市 海河 以北, 北京市 懷柔·通縣 以東의 지역에 해당하였다. 西晉時代 廢置되어 燕國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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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4)
    廣陽郡:秦始皇 21년(전226)에 燕을 멸한 후 설치하였다. 치소는 薊縣(현재 北京城 서북쪽)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와 大興縣, 天津市 靜海縣, 河北省 廊坊·固安·永淸·覇州·淶水·涿州·定興·易縣·新城·雄縣 등 市와 縣 지역에 해당하였다. 前漢初 燕國으로 改稱했다가 元鳳元年(전80)에 다시 廣陽郡으로 改稱하였다. 이때의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와 大興縣, 河北省 廊坊·文安·固安·覇州 등 市縣 지역이었다. 本始元年(전73)에 廣陽國으로 바뀌었다. 後漢初 廢置되어 上谷郡에 병합되었다. 永元 8년(96)에 다시 廣陽郡으로 독립하였다. 三國 魏 太和 6년(232)에 또 燕國으로 改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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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5)
    上谷郡:戰國時代 燕이 설치하였다. 秦代에는 治所가 沮陽縣(지금의 河北省 懷來縣 동남 20리 떨어진 廳水庫 남안에 있는 古城)에 있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河北省 張家口市, 小五臺山 이동, 赤城縣, 北京市 延慶縣 이서, 長城과 昌平縣 이북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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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6)
    代郡:戰國時代 趙가 설치하였다. 秦과 前漢 때의 治所는 代縣(지금 河北省 蔚縣 서남)이었다. 前漢시대 관할 구역은 지금 河北省 懷安·蔚縣 이서, 山西省 陽高·渾源 이동에 있는 장성 안팎의 땅과 함께 장성 밖에 있는 東洋河 유역이었다. 後漢時代에 高柳縣(지금 陽高縣 서남)으로 治所를 옮겼다가 西晉時代 말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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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7)
    鴈門郡:雁門郡이라고도 표기하였다. 戰國時代 趙의 武靈王이 설치하였다. 秦漢時代 治所는 善無縣(현재의 山西省 右玉縣 남쪽)이다. 관할구역은 山西省 河曲·五寨·靈武 등의 縣 以北, 恒山 以西, 內蒙古自治區 黃旗海·岱海 以南의 지역이다. 後漢時代에는 治所를 陰館縣(지금의 山西省 朔州市 東南 夏關城)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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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8)
    太原郡:戰國 秦의 莊襄王 4년(전246)에 설치되었다. 治所는 晉陽(지금의 太原市 서남쪽)이었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山西省 五臺山과 管涔山 이남, 霍山 이북이다. 前漢시대 이후에 축소되어 文帝시대에는 國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郡이 되었다. 三國 魏 黃初元年(220)에 또 太原國으로 바뀌었고, 北魏시기에 다시 太原郡으로 바뀌었는데, 당시 관할구역은 현재의 山西省 太原市와 介休縣 사이의 汾水 중류 지역이었다. 後漢時代부터 北周시기까지 幷州의 治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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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9)
    朔方郡:前漢 武帝 元朔 2년(전127)에 車騎將軍 衛靑이 흉노를 격파하여 오르도스지방을 제압한 후에 그곳에 五原郡과 함께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治所는 朔方縣으로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오르도스 이북(황하 이북)의 五原市 서쪽의 杭錦旗 북쪽이었다. 후한시대에는 치소를 臨戎縣, 즉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磴口縣(寧夏의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황하 서부 유역에 위치) 북쪽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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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0)
    원문은 “建武二十五年, 烏丸大人郝旦等九千餘人率衆詣闕, 封其渠帥爲侯王者八十餘人, 使居塞內, 布列遼東屬國·遼西·右北平·漁陽·廣陽·上谷·代郡·雁門·太原·朔方諸郡界, 招來種人, 給其衣食, 置校尉以領護之, 遂爲漢偵備, 擊匈奴·鮮卑.”인데, 『後漢書』에서는 “二十五年, 遼西烏桓大人郝旦等九百二十二人率眾向化, 詣闕朝貢, 獻奴婢牛馬及弓虎豹貂皮.”라고 간략히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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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1)
    『後漢書』에는 “欽”이 “歆”으로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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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2)
    太守:郡의 장관을 지칭한다. 春秋時代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원래는 武職이었으며 邊郡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다가 후에 점차 지방장관이 되었다. 秦은 郡을 지방최고행정구역으로 삼고 郡마다 守를 두어 郡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郡守라 불렸다. 前漢 景帝시기 郡守를 太守로 改稱하였다. 漢代에는 太守를 明府라 존칭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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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3)
    祭肜(?~73):후한시대 潁川郡 穎陽縣 사람이며, 字는 次孫이다. 어려서 後漢 光武帝 초기에 黃門侍郞과 偃師長·襄賁令을 역임하였으며, 우수한 치적을 올려 秩 1等이 승격되고 縑 100필을 하사받기도 했다. 建武 17년(41)부터 永平 12년(69)까지 29년 동안 遼東太守로 재직하며 匈奴·鮮卑·烏丸·高句麗 등의 침입을 방어하였고 赤山烏桓을 토벌하는 등 위엄이 서쪽으로 武威郡부터 동쪽으로 玄菟와 樂浪郡까지 퍼져 胡夷가 모두 內附하였다. 永平 12년에 太僕에 임명되었고 그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錢 100만과 말 3필 등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永平 16년(73)에 南匈奴單于 左賢王 信과 함께 北匈奴를 토벌하기 위해 만여 騎를 이끌고 출병하였으나 성과 없이 돌아와서 하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공을 세우지 못함을 한스러워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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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4)
    『後漢書』 「祭肜傳」에 따르면 永平元年(58)의 일이다. 偏何가 赤山烏桓을 격파하여 그 魁帥를 참한 후 그 머리를 가지고 祭肜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後漢書』 卷20 「祭肜傳」:745, “永平元年,偏何擊破赤山,斬其魁帥,持首詣肜,塞外震讋.”). 그러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이 부분의 원문은 “至永平中, 漁陽烏丸大人欽志賁帥種人叛, 鮮卑還爲寇害, 遼東太守祭肜募殺志賁, 遂破其衆.”인데, 『後漢書』에서는 “及明·章·和三世, 皆保塞無事.”라고 하여 明帝·章帝·和帝 시기에 변방에 사건이 없었다고 보았으나, 원문의 사건이 발생한 永平元年은 明帝가 즉위한 지 2년째인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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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5)
    安帝(94~125;재위 106~125):이름은 祜이며, 章帝의 손자이고 淸河王 劉慶의 아들이다. 延平元年(106) 殤帝가 죽자 鄧太后와 車騎將軍 鄧騭이 皇帝로 옹립하였다. 建光元年(121) 鄧太后 사후 親政하여 宦官 李閏 등과 함께 鄧騭의 宗族을 멸하기로 모의하여 성공하였다. 이때부터 宦官을 총애하기 시작하였다. 廟號는 恭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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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6)
    率衆王:帥衆王이라고도 쓴다. 漢代 이후 烏丸·鮮卑·羌 등 여러 異民族의 首領들에게 수여한 封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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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7)
    涿郡:前漢 元狩 6년(전117)에 廣陽郡 서남지역을 분리하여 설치하였다. 涿水의 ‘涿’字를 따서 郡名으로 삼았다. 治所는 涿縣(현재의 涿州市)이었다. 元鳳末부터 元延末까지 관할구역은 현재의 北京市 房山縣, 河北省 涿州·淶水·定興·容城·安新·蠡縣·博野·安國·淸苑·覇州·肅寧·河間·任丘·永淸·遼陽·安平 등 市·縣과 定州市 동부 지역에 해당하였다. 綏和元年(전8)에 서남 지역을 中山國에 편입시켜 관할구역이 축소되었다. 後漢時代에는 幽州에 속하였다. 三國 魏 黃初 7년(226)에 范陽郡으로 改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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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8)
    大司農:漢代 조세와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 혹은 이 부서의 장관을 지칭한다. 漢武帝 太初元年(전104) 大農令을 大司農으로 改稱했는데, 大農이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新莽 때 羲和·納言으로 고쳤다가 後漢 때 다시 大司農의 명칭을 회복하였다. 秩은 中二千石이며 九卿의 지위에 있다. 전국의 租賦와 財政收支를 담당하며, 官府의 농업과 수공업 경영을 관리하였다. 예컨대 官府의 개간과 官營鹽鐵의 생산, 화물의 운송과 물가의 통제 등을 관리하였다. 속관으로 太倉·均田·平準·都內·籍田 5令丞과 斡官·鐵市 2長丞이 있다. 또 郡國諸倉農監과 都水 15官長·丞도 관할하였다. 武帝 때 搜粟都尉를 설치했지만, 늘 설치한 것은 아니었다. 後漢時代에는 기구가 대폭 줄어들어 丞과 部丞이 각각 1인이었고, 속관도 太倉·平準·導官 3令丞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없앴으며, 지방의 鹽鐵官은 郡縣에 속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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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9)
    行軍騎將軍:후한시대의 車騎將軍은 大將軍 등과 동격으로서 官秩이나 印綬가 三公과 같았다.(臧雲浦, 1997:69~70) ‘行’은 임시적 혹은 대리로 맡은 관직명 앞에 붙인다. 또 본관보다 낮은 관직을 겸할 때 이 관명 앞에 ‘行’자를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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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30)
    羽林:九卿의 하나인 光祿勳 소속의 친위부대였다. 羽林中郞將의 통솔을 받으면서 天子의 宿衛를 담당하였다. 從軍 戰死者의 子弟들과 西北 6郡의 良家의 子弟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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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31)
    五營:‘五校’라고 하며, 長水·步兵·射聲·胡騎·車騎의 5校尉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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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32)
    黎陽營:‘黎陽 虎牙營’을 줄인 말이고, 후한시대에 처음 설치되었다. 幽州와 幷州의 精兵을 관장하였고, 黎陽에 주둔하고 있었다. 中謁者가 감독하였다. 임무는 후한의 동방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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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33)
    원문은 “至安帝時, 漁陽·右北平·雁門烏丸率衆王無何等復與鮮卑·匈奴合, 鈔略代郡·上谷·涿郡·五原, 乃以大司農何熙行車騎將軍, 左右羽林五營士, 發緣邊七郡黎陽營兵合二萬人擊之.”인데, 『後漢書』에서는 “安帝永初三年夏, 漁陽烏桓與右北平胡千餘寇代郡·上谷. 秋, 鴈門烏桓率眾王無何(允), 與鮮卑大人丘倫等, 及南匈奴骨都侯, 合七千騎寇五原, 與太守戰於九原高渠谷, 漢兵大敗, 殺郡長吏. 乃遣車騎將軍何熙·度遼將軍梁慬等擊, 大破之.”라 하여 永初 3년(109)에 발생한 사건임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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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34)
    원문은 “匈奴降, 鮮卑·烏丸各還塞外.”인데, 『後漢書』에서는 “無何乞降, 鮮卑走還塞外.”라고 간략히 기록하였으며 匈奴의 降附는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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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35)
    원문은 戎末廆를 都尉로 삼았다고 하였으나, 『後漢書』에서는 그 관직을 “親漢都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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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36)
    順帝(115~144;재위 125~144):이름은 保이며, 安帝의 아들이다. 永寧元年(120)에 太子가 되었다가 延光 3년(124)에 濟陰王으로 폐위되었다. 다음해 安帝가 죽자 宦官 江京 등이 北鄕侯 劉懿를 옹립하였으나 곧 죽었다. 宦官 孫程 등이 江京을 죽이고 濟陰王을 皇帝로 옹립하여 孫程 등 19인은 宦官으로써 列侯에 봉해졌다. 外戚 梁商과 梁冀가 大將軍이 되어 朝政은 宦官과 外戚이 조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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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37)
    원문은 “至順帝時, 戎末廆率將王侯咄歸·去延等從烏丸校尉耿曄出塞擊鮮卑有功, 還皆拜爲率衆王, 賜束帛.”인데, 『後漢書』에서는 “順帝陽嘉四年冬, 烏桓寇雲中, 遮截道上商賈車牛千餘兩, 度遼將軍耿曄率二千餘人追擊, 不利, 又戰於沙南, 斬首五百級. 烏桓遂圍曄於蘭池城, 於是發積射士二千人, 度遼營千人, 配上郡屯, 以討烏桓, 烏桓乃退.”라고 하였다. 후자에 따르면 이 기사는 陽嘉 4년(135)에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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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배송지, 묵특[선우(單于)], 일연제선우(壹衍鞮單于), 묵특[선우](冒頓單于), 일연제선우, 곽광(霍光), 범명우(范明友), 범명우, 범명우, 범명우, 왕망(王莽), 광무제(光武帝), 마원(馬援), 학단(郝旦), 명제(明帝), 흠지분(欽志賁), 제융(祭肜), [흠]지분, 안제(安帝), 무하(無何), 하희(何熙), 융말외(戎末廆), 순제(順帝), 융말외, 돌귀(咄歸), 거연(去延), 경엽(耿曄)
지명
한(漢)나라, 오환산(烏丸山), 적산(赤山), 적산, 요동[군](遼東郡), 적산, 적산, 정령(丁令), 오손(烏孫), 전한(前漢), 요동(遼東), 한나라, 오원관(五原關), 후한, 요동속국(遼東屬國), 요서[군](遼西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어양[군](漁陽郡), 광양[군](廣陽郡), 상곡[군](上谷郡), 대군(代郡), 안문[군](鴈門郡), 태원[군](太原郡), 삭방[군](朔方郡), 한(漢)나라, 후한, 어양, 후한, 요동태수(遼東太守), 어양, 우북평, 안문, 대군(代郡), 상곡[군](上谷郡), 탁군(涿郡), 오원[군], 후한, 후한, 후한, 후한
서명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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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烏丸)의 풍습, 문화, 습속 및 한(漢)과 주변 종족과의 관계를 설명함 자료번호 : jo.k_0004_003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