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텍은 고구려 후손’ KBS 다큐의 진실

백철 기자
KBS 설날 특집 다큐멘터리 홍보 영상의 일부/유튜브 화면

KBS 설날 특집 다큐멘터리 홍보 영상의 일부/유튜브 화면

지난 설 연휴 기간 동안 KBS는 특집 다큐멘터리 <멕시코 한류 천년의 흔적을 찾아서>를 이틀간 방영했다. 이 다큐는 고대 멕시코의 아즈텍인이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며, 아즈텍인이 사용한 나와틀어와 한국어가 뜻이 통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한민족이 동떨어진 다른 민족과 친연관계에 있다는 가설은 재야사학(또는 유사역사학)의 대표적 소재다.

KBS에서 유사역사학의 주제를 가지고 역사 방송을 만든 것은 오랜만의 일이다. 과거 KBS의 역사프로그램인 <역사스페셜>의 경우 이따금 고대사의 유사역사학 주제를 다뤘다. <환단고기> 열풍의 실체나 신라왕족이 흉노족이었다는 설 등을 담았다. 하지만 <역사스페셜>의 뒤를 이은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유사역사학 주제가 자취를 감췄다. <역사저널 그날>은 대체로 고려, 조선시대를 소재로 했다. KBS에서 지난해부터 선보이고 있는 팩추얼 드라마 시리즈 <임진왜란 1592>와 <한국사기> 역시 정통 역사가들의 연구성과를 반영하고 있다.


손 교수 “인간생활 전 분야 일치한다”
이번 다큐멘터리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사람은 손성태 배재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다. 손 교수는 10년 전부터 언어학·민속학 학술지나 언론을 통해 ‘고구려-아즈텍 가설’을 주장해 왔다. 손 교수의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다.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이후 만주지역의 주류 민족은 고구려계에서 여진계로 교체됐다. 손 교수는 고구려 유민 중 상당수가 고구려 북방으로 이동해 최종적으로는 북아메리카 대륙 서부해안을 거쳐 멕시코에 정착해 아즈텍인이 됐을 것이라 본다. 손 교수는 문헌 증거, 언어, 문화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고구려-아즈텍 가설’이 증명된다고 설명했다. 손 교수는 중국의 사서 <양서>에 등장한 부상국(扶桑國)에 주목했다. 양서에는 499년 승려 혜심이 중국에서 2만 리 이상 동쪽에 위치한 부상국을 설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혜심에 따르면 부상은 을기라는 왕과 대대로(大對盧), 소대로(小對盧), 납돌사라는 귀인들이 다스리는 나라다. 부상의 위치가 지금의 멕시코 일대로 추정되며, 부상의 ‘대대로’라는 관직이 고구려에서도 왕 다음 가는 최고 관등의 지위라는 점이 고구려인과 아즈텍인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증거라는 게 손 교수의 설명이다. 손 교수는 “어쩌다 한두 가지가 우연히 같은 것이 아니라 언어, 민속문화를 포함해 인간생활 전 분야에서 한국인과 아즈텍인의 생활상은 일치한다”고 말했다.

손 교수의 주장에 대한 학계와 대중의 반응은 싸늘하다. 극히 드문 예외가 있다면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을 들 수 있다. 2014년 손 교수는 자신의 학설을 집대성한

<우리민족의 대이동>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후 손 교수는 자신의 책을 학계 곳곳에 보냈는데, 2014년 9월 15일 유 전 위원장이 손 교수에게 답장을 보냈다. 답장에서 유 전 위원장은 “저는 1960년대 하버드대에 재학할 당시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우리 민족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며 “손 교수님께서는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한민족-아메리칸 인디언 관련설을 입증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다큐 자체에도 손 교수의 주장에 신뢰성을 더하는 장치가 있다. 다큐가 손 교수의 가설을 설명하고 역사학자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다큐에서 그래픽으로 부상국과 고구려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가 등장한다. 박 교수는 “중국 여러 문헌에는 고구려의 최고 관등 벼슬을 대대로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원론적인 설명만 한다. 다큐멘터리 내레이터가 ‘멕시코 고대유적에 고리 문양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그들이 고리족의 후손이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설명을 한 다음엔 복기대 인하대 융합고고학과 교수가 등장한다. 복 교수 역시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사람들이 사방에 흩어져서 훗날 부여와 고구려를 세운다. 이들이 자체적으로 고리라고 불렀던 것 같다”고 말한다.

역사학자들의 출연은 손 교수의 주장에 신뢰도를 더해줬다. 기성 사학계에서도 손 교수의 연구성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인상도 줬다. 하지만 다큐에 출연한 학자들은 자신이 손 교수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처럼 오해를 사고 있다며 억울해했다. 특히 제작진은 인터뷰에 응한 학자들에게 프로그램의 취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박 교수는 “인터뷰를 할 때 멕시코 이야기도 전혀 없었고, 부상국과 고구려를 연결시킬 것이라면 내 인터뷰를 방송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마음대로 편집, 방송했다. 괜히 내가 손 교수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꼴이 된 것 같아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복 교수 역시 “1월 중순 인터뷰 할 당시 다큐의 정확한 취지나 멕시코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제작진은 설날 특집으로 편성할 역사 프로그램 때문에 민족이동 관련한 인터뷰를 해달라고만 말했다”고 전했다. KBS 다큐 제작진은 시간이 없어서 잘못이 발생했으며 다큐에 출연한 교수들에게는 전화를 드려 사과 표시도 했다고 밝혔다. 다큐 제작진 관계자는 “지난 4년간 멕시코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전역의 인디언 이야기를 담은 4부작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1월 10일 정도 설날 휴일에 2회분으로 편성한다는 말을 듣고 일정에 쫓겨가며 편집을 하다 보니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사료적 근거 없고 황당한 논리에 입각”
이번 일을 계기로 공영 다큐멘터리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견도 있었다. 고려대 박 교수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연구할 수 있지만, 그걸 공영방송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학문의 자유는 있지만 그것을 공영방송에서 특집 다큐멘터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학계의 검토와 자문이 필요하다”며 “방송 프로그램의 정확한 제목과 취지를 말하지 않고 간단한 질문에 답변만 해주면 된다고 하면서 인터뷰를 해간 뒤 마음대로 편집해서 쓰는 건 양심이 없는 행동이다. 공영방송 PD가 억지스러운 가설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인터뷰를 편집해서 사용해도 되는 건가”라고 말했다.

손 교수도 방송이나 인터넷이 아니 역시 자신의 주장에 대해 ‘학계의 검토와 자문’을 받길 원했다. 그는 “내 주장을 공개적으로 검증해달라고 한국고대사학회에 글을 올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학회에 논문도 제출했지만 학회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손 교수의 ‘고구려-아즈텍 가설’은 주로 환단고기 등 유사역사학을 믿는 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그는 “저도 ‘신라가 사실은 양자강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분들이 주로 저를 지지한다는 걸 안다. 저도 그 때문에 곤란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오히려 멕시코 학자들은 고대 한국과 고대 멕시코가 만난다는 말에 많은 흥미를 가졌다. 멕시코 등 아메리카 대륙의 학자들과 공동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동북아역사재단 같은 국책연구소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다큐에 담긴 ‘고구려-아즈텍 가설’에 대해 역사학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박대재 교수는 “사료적 근거가 없고 황당한 논리에 입각한 가설이다. 고구려와 아즈텍은 시기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거리가 너무 멀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중국 문헌에 나오는 ‘맥이’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메히코’(멕시코)가 됐다는 다큐의 묘사에 대해 “만약 KBS에서 멕시코를 맥이와 관련시킬 수 있냐고 질문했다면 맥이는 ‘맥’의 오기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라는 설명을 추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복기대 교수는 “손성태 교수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수많은 유적 중에 몇 가지를 예로 들면서 사실상 결과를 정해놓고 하는 귀납적인 연구방법은 옳은 방법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큐에서는 아즈텍 유적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고리 모양이 고대 멕시코(아즈텍)과 한민족(고리족)이 동족임을 강화해주는 증거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복 교수는 “고리 모양을 쉽게 말하면 끝이 둥그런 모양인데,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문명권에서도 끝이 둥그런 무늬가 발견된다”고 말했다. KBS 다큐 제작팀 관계자는 “시청자가 보기엔 비판적인 내용이 없으니까 일방적으로 손 교수의 말을 지지하는 것처럼 비쳤을 수 있다. “올해 봄이나 여름에 나오는 3·4부에서는 여러 비판적인 의견을 적극 수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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