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계엄군 “내가 발포…40년간 죄책감” 유족에 첫 직접 사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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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03.17. 오후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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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압에 참여한 공수부대원 ㄱ씨가 16일 국립 5·18민주묘역 민주의 문 접견실에서 고 박병현씨 두 형제 등에게 큰절을 올리며 용서를 구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 제공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었던 공수부대원이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는 “16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민간인에 총검을 휘두른 계엄군과 유가족 간의 화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17일 밝혔다. 이 자리는 1980년 5·18 당시 계엄군이 자신의 행위를 고백하고 유족에 사과하겠다는 의사를 조사위에 전달해와 마련됐다.

조사위는 “계엄군들이 당시 진압작전을 증언한 경우는 많이 있었으나 가해자가 직접 발포해 가해한 사실을 인정하고 유족에게 사과 의사를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조사위에 따르면 가해자 ㄱ씨는 이날 국립 5·18민주묘지 민주의 문 접견실에서 희생자 고 박병현씨의 두 형제 등 유가족에게 큰 절을 올리며 “어떤 말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드려 죄송하다”고 말문을 연 뒤 “저의 사과가 또 다른 아픔을 줄 것 같아 망설였다”고 오열했다. ㄱ씨는 또 “지난 40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유가족을 이제라도 만나 용서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울먹였다.

이에 대해 박병현씨의 형 박종수(73)씨는 “늦게라도 사과해 주어 고맙다”며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겠다”고 받아들였다. 박씨는 “용기 있게 나서줘 참으로 다행이고 고맙다”며 “과거의 아픔을 다 잊어버리고 떳떳하게 마음 편히 살아달라”며 ㄱ씨를 안았다.

5·18 진압에 참여한 공수부대원 ㄱ씨(왼쪽)가 고 박병현씨의 형 종수씨를 안고 흐느끼고 있다. 가운데 이를 지켜보는 이는 김영훈 5·18 민주화운동유족회장. 5·18 민주화진상규명조사위 제공


5·18 진압에 참여한 공수부대원 ㄱ씨가 국립 5·18민주묘지 참배광장에서 참배하고 있다. 왼쪽부터 송선태 조사위 위원장, ㄱ씨, 고 박병현씨 두 형제.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 제공


고 박병현(당시 25)씨는 1980년 5월 23일 농사일을 돕기 위해 고향인 보성으로 가는 길에 광주시 남구 노대동 소재 ‘노대남제’ 저수지 부근을 지나다가 순찰 중이던 7공수여단 33대대 8지역대 소속의 ㄱ씨에게 사살됐다고 조사위는 밝혔다.

당시 상황에 대해 ㄱ씨는 “1개 중대 병력이 광주시 외곽을 차단하기 위해 정찰 등의 임무를 수행 중 소로길을 이용해 화순 방향으로 걸어가던 민간인 젊은 남자 2명이 저희(공수부대원)를 보고 도망해 ‘도망가면 쏜다’며 정지할 것을 명령했으나 겁에 질려 도주하던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사격했다”고 진술했다.

ㄱ씨가 5·18 당시 자신의 총격에 숨진 고 박병현씨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병현씨 형 종수씨, 송선태 위원장, ㄱ씨.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 제공


조사위는 “그동안 조사활동에서 ㄱ씨의 고백과 유사한 사례를 다수 확인했다”며 “향후 계엄군과 희생자 간 상호 의사가 있는 경우 이를 적극 주선해 사과와 용서를 통한 불행한 과거사 치유 및 국민통합에 기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날 사과와 용서의 자리에는 가해자 ㄱ씨와 희생자 고 박병현씨의 두 형제, 5·18 민주화운동 유족회 김영훈 회장, 조사위 송선태 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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