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신선이 사는 세계, 낙랑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박산로(靑銅博山爐)

기원후 1세기경에 만들어진 평양 석암리 9호 무덤에서는 금(金), 은(銀), 청동(靑銅), 철(鐵), 칠(漆), 옥(玉)과 유리(琉璃) 등 당시 사람들이 다룰 수 있는 대부분의 재질로 만든 다양하고 화려한 부장품이 출토되었습니다. 큰 덧널[木槨] 안에 시신을 안치한 널무덤[木棺]을 오른쪽 아래에 놓고 그 주변에 용도나 재질별로 부장품을 놓아 무덤의 주인이 죽어서도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평양 석암리 9호 무덤 유물 출토 모습

평양 석암리 9호 무덤 유물 출토 모습

이 중에서 청동으로 만든 그릇은 덧널의 북쪽 벽 가까운 곳에 일렬로 놓여 있습니다. 고기를 담는 그릇인 정(鼎)과 술을 담는 그릇인 호(壺) 등 중국 상주시대(商周時代, 기원전 16세기~기원전 771년)부터 만들어진 청동 용기를 대표하는 기종뿐만 아니라 준(樽)과 종(鍾) 등 한(漢)나라 때(기원전 206년~기원후 220년) 새롭게 등장한 청동 용기까지 다양하게 부장되어 이 무덤의 주인이 상당히 높은 계층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청동 용기 가장 왼쪽에 놓여 있는 박산로(博山爐)입니다.

박산로는 제일 아래쪽의 받침대[承盤], 받침대와 향로를 이어 주는 기둥[爐柱], 그리고 제일 위쪽의 향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향로 부분은 튀어나온 지도리[樞軸]로 향로의 몸체[爐身]와 뚜껑을 연결해 쉽게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지도리 위의 뚜껑에는 여러 겹의 산봉우리들과 산 정상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산 아래에는 열쇠 구멍 모양과 둥근 모양의 구멍 9개가 있고, 산봉우리 뒤쪽으로도 얇고 긴 구멍 6개를 내어 산봉우리 사이로 안개처럼 향 연기가 올라갈 수 있도록 고안했습니다. 향로를 받치고 있는 기둥[爐柱]은 날개와 꼬리를 쭉 뻗고 고개를 곧추세운 봉황(鳳凰)의 형태로 만들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봉황 아래에는 이 모두를 받치고 있는 거북이와 바다를 상징하는 둥근 접시 모양의 받침[承盤]이 있습니다.

 청동박산로, 평양 석암리 9호 무덤, 낙랑(기원후 1세기), 높이 20.3cm, 본관4735

청동박산로, 평양 석암리 9호 무덤, 낙랑(기원후 1세기), 높이 20.3cm, 본관4735

박산로는 언제부터 만들어졌는가?

중국에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년~기원전 221년) 이전부터 향을 피우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때 사용하던 도구인 향로가 중국에서 만들어졌는지 서역(西域)에서 전래되었는지는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지만, 중국 전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향로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와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같은 중국 남부 지역에서 전국시대 또는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 초기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굽다리 접시 모양[豆形]을 한 토제 향로가 확인되었고, 한나라 때는 청동으로 만든 향로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한나라 때는 굽다리 접시 모양이나 새 모양[鳥形] 또는 정 모양[鼎形] 향로 등 다양한 향로가 만들어지지만, 그중에서도 산 모양의 뚜껑을 가진 ‘박산로(博山爐 또는 博山香爐)’가 가장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한나라 때는 이것을 향로(香爐)나 훈로(薰爐)라고 불렀는데, 이후 육조시대(六朝時代, 기원후 229년~589년)에 박산(博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산향로는 일반적으로 한나라 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그 기원은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출토된 박산향로 가운데 비교적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3점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한(漢) 무제(武帝, 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년)의 누이 양신공주(陽信公主)의 무덤으로 알려진 산시성[陝西省] 무릉(茂陵) 1호 무덤에서 출토된 도금은죽절훈로(鍍金銀竹節薰爐)입니다. 산 모양의 뚜껑 아랫부분에는 본래 황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무제 건원(建元) 4년(기원전 137년)에 만들었다가 이후 무제의 누이에게 하사한 것이라는 내용의 명문이 있습니다. 나머지 두 점은 무제의 이복형제인 중산국의 왕[中山王] 유승(劉勝)과 그의 부인인 두관(竇綰)의 무덤인 허베이성[河北省] 만성(滿城) 1호, 2호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유승은 기원전 113년, 두관은 기원전 102년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박산로가 만들어진 대략의 연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점은 산이나 기둥의 모양, 받침대의 형태 등이 다르지만 박산로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두 무제와 관련한 무덤이라는 점에서 박산로의 발생 또는 유행이 전한(前漢) 중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신선이 사는 세계, 박산(博山)

젊음을 유지하며 오래도록 사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꿈꿔 왔던 이상입니다. 전국시대 후기 이전의 사람들은 살아생전 지상(地上)에서 장생(長生)하기를 원했지만, 전국시대 후기에는 신선(神仙)이 되어 지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영생(永生)을 누리기를 바라는 새로운 불사不死의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또한 진(秦, 기원전 221년~206년) 시황제(始皇帝)의 잔혹한 법치주의적 통치를 경험했던 서한(西漢, 기원전 202~기원후 8) 초기의 사람들 사이에는 노자(老子)의 무위철학(無爲哲學)에 기초한 황로도가사상(黃老道家思想)이 널리 퍼지기도 했습니다.
무제는 불사(不死)를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 황제였습니다. 불사약을 구하고자 곳곳으로 사람을 보냈고, 신선을 불러들이기 위해 방사(方士)들에게 관직까지 주었습니다. 또한 동중서(董仲舒)의 사상을 받아들였는데, 이 사상의 특징은 “하늘이 사람에게 천명을 부여하는 절대적인 존재이지만, 사람 역시 하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는 ‘본성이 유사한 것들은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동류상동(同類相動)’ 사상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생각이 확대되어 신선을 감응시키기 위해 신선 세계[仙界]를 본뜬 모형을 많이 제작하게 되는데, 신선이 거주하는 신성한 산을 표현한 박산향로 역시 이러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산로, 주변 지역으로 퍼지다

이처럼 한나라 때 신선설(神仙說)이 크게 유행하면서 중국 전역뿐만 아니라 무제가 영토를 확장하며 한(漢)에 편입되었던 변방인 광시성[廣西省], 랴오닝성[遼寧省], 산시성[山西省] 그리고 한반도의 낙랑군(樂浪郡)에서도 박산로가 발굴되었습니다. 낙랑군에서는 석암리 9호 무덤을 비롯해 석암리 219호 무덤, 정백동 88호 무덤에서 청동박산로가, 남정리 53호 무덤에서는 도제(陶製) 박산로가 출토되었습니다.

 청동박산로, 평양 석암리 219호 무덤, 낙랑(기원전 1세기), 높이 16cm, M297

청동박산로, 평양 석암리 219호 무덤, 낙랑(기원전 1세기), 높이 16cm, M297

석암리 9호 무덤에서 출토된 박산로의 특징

석암리 9호 무덤에서 출토된 박산로는 산이나 구멍의 형태를 간략하게 표현했지만 산 사이로 피어오르는 향은 상서로운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향로를 받치는 기둥의 봉황은 원래 하늘의 사자(使者)로 승선할 때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새입니다. 이 봉황은 박산향로의 산이 하늘의 세계임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한대(漢代)에 많이 사용되던 요소입니다. 또한 거북은 『초사(楚辭)』 「천문(天問)」과 『열자(列子)』, 『회남자(淮南子)』 「지형훈(地形訓)」 등에서 전하는 전설 속에서 무너진 하늘을 받치거나 바다 위에 흔들리며 떠 있는 신산(神山)을 받치는 존재로 묘사되는 존재입니다.

 석암리 9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박산로의 세부 모습7

석암리 9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박산로의 세부 모습

중원(中原) 지역에서 출토되는 박산향로는 다리 부분에 용(龍)무늬를 투조하거나 금, 은을 상감해 매우 화려하게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평양 석암리 9호 무덤에서 나온 박산로 같이 봉황과 거북이 산을 받친 형태는 허베이성이나 산시성 등 중원의 변방에서 주로 확인된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실제로 산시성 숴현[朔縣]에서 석암리 9호 무덤에서 나온 것과 거의 유사한 박산로가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1972년 내몽골(內蒙古)의 아먼치르거 아로시등묘(阿門其日格 阿魯柴登) 흉노(匈奴) 무덤에서는 독수리 모양의 금관 장식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석암리 9호 무덤에서 나온 박산로의 계보를 찾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아로시등묘 흉노 무덤은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1세기경에 만들어진 석암리 9호 무덤과는 시간 차이가 커서 직접적인 관련성을 살펴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목을 세운 채 두 발을 바닥에 딛고 양 날개를 편 독수리의 전체적인 모습이나 날개의 깃털 모양 등이 석암리 9호 무덤에서 출토된 박산로의 봉황과 매우 닮아, 한나라 때의 청동박산로가 다양한 배경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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