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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우리민족 원류.지류를 찾아 .12] 신라이야기(11)

2003-04-01 00:00

무제에게투후의 봉작을 받은 김일제에게는 상(賞)과 건(建)의 두 아들 이 있었는데, 이들은 무제의 뒤를 이은 소제(昭帝)와 나이도 비슷했고, 함 께 기거할 정도로 친했다. 따라서 소제가 즉위하자 김상(金賞)은 봉거도위( 奉車都衛)가 되고, 동생 건은 부마도위(附馬都衛)가 된 것은 당연했다. 김일 제가 사망하자 장남인 상이 투후를 계승했는데 그의 부인은 곽광장군의 딸이었다. 곽광이 모반의 조짐을 보이자 김상은 상서를 올려 부인과 이혼했는데, 기원전 71년 곽광의 부인이 황후를 암살하는 모역 사건이 발생 했으나 이런 예방 조치 때문에 김상은 연좌되지 않았다. 김상이 아들이 없 자, 원제(元帝:BC 49∼33)는 일제의 차남 건의 손자 당(當)을 투후로 봉해 일제의 뒤를 잇게 했다. 이들 투후 김씨들이 크게 주목받는 이유는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新) 을 세운 왕망(王莽:BC 45∼AD 23)과의 관계 때문이다. 왕망은 서기 8년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워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가 서기 23년 유수( 劉秀:후한 광무제)에게 멸망하는데, 이를 기점으로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 로 나눈다. ‘한서-김일제전’은 “김당의 어머니는 남인데, 곧 망의 어머니이다〔當 母南 卽莽母〕”라는 주목할 만한 기사가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김당과 왕망은 동복형제가 된다. 이 때문에 왕망의 성이 김씨라는 주장이 있게 된 다. 그런데 ‘한서’ 권 98 ‘원후전(元后傳)’은 “효원황후(원제의 비)는 왕망의 고모이다〔孝元皇后 莽姑也〕”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가야사’를 쓴 문정창씨는 ‘한서’의 편저자 반고(班固)가 왕망과 효원황후가 흉노의 후 예임을 감추기 위해 두 사람의 출자(出自)와 그 계보를 달리 꾸며 놓았다 고 주장했다. 김씨인 효원황후의 성을 왕씨로 꾸몄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 부분에서 ‘한서’는 서로 다른 기록들이 혼재해 있다. ‘원후전’에서는 왕망의 고모라고 기록했지만 ‘왕망전’에서는 왕망을 “효원황후의 동생이 다”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효원황후나 왕망이나 대단히 중요한 인물인데 이런 인물들의 관계를 ‘고모’와 ‘누이’로 달리 적는 것은 아무래도 정 상은 아니다. 그래서 ‘한서’의 기록을 따르면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과 동복형제도 되고,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 으로 당의 이모부도 될 수 있다. 그만큼 ‘한서’는 왕망의 진실을 밝히기 를 두려워하는 셈이다. 원제가 재위 16년 만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은 아들 성제(成帝:BC 33 ∼7) 때부터 효원황후는 황제 이상의 실권을 쥐게 되었다. 황후는 자신의 친정 형제 5명을 한꺼번에 장군 겸 후(侯)로 봉하게 했는데, 이에 대해 ‘한서’는 “고조(高祖:태조 유방)는 공이 없는 신하는 후로 봉하지 않겠다 고 약속했는데, 지금 태후의 여러 동생들은 대개 공이 없었으나 후가 되었 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왕망의 부친 만(曼)은 일찍 죽음으로써 후가 되지 못했으나 왕망은 큰 아버지 대장군 왕봉(王鳳)이 병에 걸렸을 때 극진히 간호해 그의 천거로 황문랑(黃門郞) 교위(校尉)에 올랐다. 왕망은 한번 자리에 오르자 곧 두각을 나타냈다. 왕망은 성제 때인 기원전 8년 대사마(大司馬)에 오르면서 권력 장악에 한발 더 다가섰는데, 성제의 뒤를 이은 애제(哀帝)가 불과 6년 만에 사망하고, 그 뒤를 9세에 불과한 평제(平帝)가 잇자 섭정 효원황후는 왕망에게 서정을 맡겼다. 왕망은 본격적으로 야심을 드러내어 평제 재위 3년(AD 3) 11세의 평제 를 자신의 딸과 국혼시켰고, 2년 후에는 이 성제를 살해하고 9대 황제였던 선제(宣帝)의 현손인 2세의 영을 황태자로 삼고 스스로 섭황제(攝黃帝) 가 되었다. 그는 명목뿐인 한나라 황실을 멸망시키고 서기 8년 스스로 ‘ 신제국(新帝國)’을 세웠다. 왕망이 황제가 되자 김일제의 후손들이 더욱 현달하게 된 것은 당연 했다. 왕망이 제국을 창업할 수 있었던 것도 김씨들의 후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신제국을 세운 왕망은 대대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첫째로 왕망은 “ 제후가 된 유씨(劉氏)들은 한나라가 망했으므로 함께 없어져야 한다”며 제 후제도를 폐지했다. 그는 또한 토지국유제를 실시하고 일체의 매매를 금지시키는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과거에는 유씨 정통론에 입각해 왕망의 모든 행위를 찬탈로 봤으나 근래 중국 학계에서 왕망의 이런 토지개혁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 유씨를 적으로 돌린 왕망의 성급한 조치는 곧 유씨들의 격렬한 반발을 받게 되었다. 유씨들은 유현(劉玄)을 천자로 추대해 왕망에게 저항했으나 장안을 공격하던 유현은 적미군(赤眉軍)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유현을 추대했던 유수(劉秀:후한 광무제)가 그 뒤를 이어 기세를 떨쳤고, 이에 놀란 왕망의 시종 공손취(公孫就)가 서기 23년 9월 왕망의 목을 베어 유수에게 바침으로써 신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유씨가 다시 나라를 되찾았으니 왕망과 그 지지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보복이 자행되었을 것임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신 왕조가 무너지자 왕망 정권을 떠받들던 김씨 세력들은 중요한 보복 대상이 되었다. 일부는 후한에 맞서 싸웠을 것이고, 일부는 신 왕조 멸망과 함께 체포되어 죽었 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장안을 떠나 도주했을 것이다. 그 증거의 하나가 왕망 때 사용했던 오수전(五銖錢)과 화천(貨泉)이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그리고 평양 등 한반도의 서북부와 한반도 남단 김해 및 제주도, 그리고 일본 규슈 일 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출토되는 오수전은 왕망의 신 왕조를 지지했던 세력들이 정치보복을 피해 이주한 흔적이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 다. 그리고 화천은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된다. 문정창은 ‘가야사’에서 서기 42년 김해에 나타난 금관가야의 개국 시 조 김수로왕이 장안을 떠나 도주한 세력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또한 문정창 은 ‘삼국사기’ 석탈해 9년(AD 65)조에 처음 등장하는 김알지도 김일제의 후손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다시 태종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 비문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문무왕비는 조선 정조 때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당시 문인이었던 홍양호(洪 良浩)의 ‘이계집(耳溪集)’에 의하면 조선 정조 20년(1796) 때 경주 지방 사람이 발견했다고 한다. 그 후 이 비는 그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 탁 본 네 장이 청나라의 유희해(劉喜海)에게 들어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에 실렸다. 그는 네 장의 탁본을 각각 제1·2·3·4석으로 호칭했는데, 이 는 그가 4개의 비편(碑片)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비편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1796년에 발견되었던 비신의 하부 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유희해가 제1석과 제4석이라고 주장한 것 은 비의 상부 앞면과 뒷면이고, 제2석과 제3석 비의 하부 앞면과 뒷면에 해당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문 앞면의 5행과 6행이 중요한데, 현재 남아있는 이 비문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5행)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 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 □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 하였다. (6행) …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 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를 개창하여 옥란(玉蘭)을 대하니,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뉴(石紐)를 보고 금여(金輿)에 앉아 … 하는 것 같았다.’ 이 구절에서 ‘투후지윤’이란 말과 함께 성한왕(星漢王)이 누구인지 주 목된다. 김당(金當)이 이었던 김일제의 투후 지위는 당의 아들 김성(金星)이 잇게 된다.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투후의 지위를 이었던 성(星)이 바로 이 비문의 성한왕이고, 그가 바로 서기 65년 ‘삼국사기’에 등장한 김알지라 는 견해가 주목된다.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바로 성한왕, 즉 김일 제의 5세손인 김성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대동강유역서 발견 '화천'

192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발굴한 대동강 유역의 제1호 고분에서 출토된 화천은 왕망 때 주조된 청동제 화폐이다. 왕망 때 주조된 화천이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것은 김씨 세력의 이주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는 ‘삼국사기’ 고구려 대무신왕 27년(서기 44)에 후한 광무제가 평양 지역을 공격해 일시 점령하는 기록에 주목하기도 하는데, 이때 유입된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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