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한나라로 끌려간 흉노 태자 김일제

2020.12.14 06:00:00 16면

다시 쓰는 가야사⑥

◇흉노에게 공격당하는 한나라

 

 

중국에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는 곳이 있다. 하서(河西)라는 약칭으로도 불리는데 주랑(走廊)은 복도, 또는 회랑 등을 뜻한다. 중국 감숙성(甘肅省)은 성도(省都:성의 수도) 난주(蘭州)에서 돈황(燉煌)까지 서북쪽으로 좁고 길게 이어져 있는데 이 하서주랑 때문이다. 황하 서쪽 감숙성(甘肅省) 서북부의 기련산(祁連山)이 북쪽을 가로막고 있고, 합려산(合黎山)이 남쪽을 가로 막고 있는데, 난주에서 신강(新疆) 가까운 돈황까지 1천여 1천여 km의 긴 회랑이다. 하서주랑은 황하의 서쪽 지류가 흐르는 복도라는 뜻인데, 북쪽은 산맥 아니면 내몽골 몽케 텐그리(騰格里“Monke Tengri)사막이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청해성 주랑남산(走廊南山) 등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하서주랑을 통하지 않고는 서역(西域)으로 갈 수 없었다.

서기전 2세기 경 이 하서주랑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이 기락 김씨의 조상이라는 김일제(金日磾)의 부친 휴도왕(休屠王)이었다. 흉노는 황제인 선우(單于) 아래 좌현왕과 우현왕이 있었는데, 휴도왕은 우현왕이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쪘다는 뜻의 ‘천고마비(天高馬肥)’를 우리는 ‘독서의 계절 가을’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중국은 추고마비(秋高馬肥)라고 하는데, 가을이 되면 북방 기마민족 흉노가 살진 말을 타고 농경민족인 한족(漢族)이 농사지은 것을 가지러 온다는 뜻이다. 흉노를 비롯한 북방 기마민족에 대한 한족(漢族)들의 두려움은 컸다. 서기전 141년 16세로 즉위한 무제(武帝)는 흉노에게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치면서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흉노와 일대일로 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었다.

무제 때보다 조금 후대의 일이지만 흉노와 한나라 사이의 우열관계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중국의 역대 사대미녀 중 한명이라는 왕소군(王昭君)이야기다. 한 11대 원제(재위 서기전 48~서기전 33) 때의 후궁이었는데, 서기전 33년 흉노 선우(單于:황제) 호한야(呼韓邪)가 한나라와 국혼을 맺자고 요청했다. 원제는 후궁을 공주로 만들어 시집보내기로 결정하고 화공(畫工:화가) 모연수(毛延壽)가 그린 후궁들의 그림을 바치라고 명령했다. 다른 후궁들은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어서 예쁘게 그려달라고 했는데, 왕소군은 그러지 않아서 모연수가 미모를 깎아서 그렸다. 원제는 왕소군을 간택했는데, 실제 인물을 보자 절세 미녀여서 눈물을 머금고 흉노로 보내고 모연수를 참형에 처했다는 것이다.

 

◇한나라 최초의 흉노전 승리

 

 

무제는 흉노정벌의 꿈을 버리지 않았는데, 여기에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이라는 두 인물의 인생유전이 맞물리면서 역사를 만들게 된다. 서기전 130년(혹 129년) 흉노가 군사를 일으켜 북경 부근의 하북성 회래(懷來)현에 있던 상곡(上谷)까지 내려오자 무제는 위청(衛靑)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아 격퇴하게 했다. 위청은 원래 무제의 누이인 평양공주(平陽公主)의 말을 기르는 기노(騎奴)였고, 누이 위자부(衛子夫) 역시 평양공주 집안의 가녀(歌女)였다. 하루는 무제 유철(劉徹)이 평양공주 집을 방문했다가 위자부를 보고 반해서 궁중으로 데려가면서 위씨 집안의 가운(家運)이 바뀌기 시작한다. 무제는 위청이 활 잘 쏘고 말 잘 타는 것을 보고 수렵에 나설 때면 늘 수행하게 했다가 흉노가 남하하자 거기장군으로 삼아 격퇴하라고 명했다. 이때 무제는 군사를 넷으로 나누어 공격하게 했는데, 위청은 상곡에서 나가게 하고, 공손오(公孫敖)는 대군(代郡)에서 나가게 하고, 공손하(公孫賀)는 운중(雲中)에서 나가게 하고, 이광(李廣)은 안문(雁門)에서 나가게 해서 모두 네 명의 장군에게 각각 1만 명씩의 군사를 주어 흉노를 협격하게 했다. 이중 위청은 흉노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성지라는 용성(龍城)에서 벌어진 용성전투에서 흉노 700명을 포로로 잡는 승전을 거두었다. 다른 두 길로 갔던 군사는 패전했고, 한 군사는 아무런 공이 없이 돌아왔기 때문에 한나라의 승리라고도 볼 수 없지만 용성전투는 한나라가 시종열세였던 흉노와 싸워 이긴 최초의 전투였다. 무제는 이 승전에 크게 기뻐해서 위청을 관내후(關內侯)로 봉해주고 남편을 잃은 평양공주를 배필로 삼게 해 주었다. 예전에 모시던 여주인의 남편이 된 것이니 기막힌 인생역전이었다. 원삭(元朔) 원년(서기전 128년) 누이 위자부가 무제의 두 번째 황후가 되면서 위씨 가문의 위세는 절정에 달하는데, 이후에도 위청은 흉노전문가가 되어 계속 흉노정벌에 나섰다.

 

◇하늘에 제사 지내는 금인

 

 

서기전 121년의 흉노 공격에는 위청 누이의 아들 곽거병(霍去病)이 등장한다. 위청의 외할머니는 위온(衛媼)인데, 둘째 딸이 곽거병의 어머니 위소아(衛小兒)이고, 셋째 딸이 휘황후였으니 무제는 곽거병의 외삼촌이었다. 18세였던 곽거병은 800기를 이끌고 흉노의 천자인 선우(單于)의 백부와 숙부의 목을 베는 승전을 거두었다. 이 공으로 표기(驃騎)장군이 된 곽거병은 그 여세를 몰아 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하서주랑의 언지산 근처에서 흉노의 절란왕(折蘭王)과 노후왕(盧侯王)을 참하고 혼야왕자(渾邪王子) 등을 비롯한 9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한서》는 이때 곽거병이 아주 중요한 물건을 획득했음을 전하고 있다. 《한서》 ‘위청 곽거병 열전’과 ‘김일제 열전’은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금인(金人)을 거두었다〔收休屠祭天金人〕”고 말하고 있다. 이 금인(金人)은 김해 김씨, 경주 김씨를 포함해서 한국의 김(金)씨들이 성을 김(金)으로 삼은 이유를 암시하고 있다. 《한서》의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금인’에 대해 중국의 여러 학자들이 주석을 달았다. 여순(如淳)은 “금인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는 사람을 왕으로 삼는다”고 말하고 있고, 후한 때의 학자였던 장안(張晏)은 “불교도들이 금인(金人)에 제사 지낸다”라고 이때의 금인을 불교의 금으로 칠한 불상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흉노 황제 선우(單于)는 여러 왕들이 곽거병에게 패전하자 혼야왕(渾邪王)과 휴도왕을 소환해 패전의 책임을 물으려 했다. 《한서》 ‘위청 곽거병 열전’은 “혼야왕이 서방에 거주하면서 여러 차례 한나라에 패배하고, 수만 명을 표기장군의 군사에게 잃었기 때문에 불러서 혼야왕을 죽이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 혼사왕과 휴도왕은 선우의 문책을 두려워해서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모의했으나 중간에 휴도왕이 생각을 바꾸어 항복을 거부했다. 그러자 혼야왕은 휴도왕을 살해한 후 한나라에 항복했다. 이때 혼야왕은 수만 명을 데리고 항복했는데 한나라에서는 10만 명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장안(長安:서안)에 도착하자 크게 기뻐한 무제는 혼야왕에게 수십만의 거금을 주고 만호(萬戶)를 식읍으로 주고 탑음후(漯陰侯)로 봉해주었다.

 

◇말을 키우는 흉노 태자 김일제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는 부왕이 항복을 거부하다가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 알씨(閼氏), 동생 윤(倫)과 함께 한나라로 끌려갔다. 《한서》 ‘지리지’는 휴도왕의 영토를 무위군(武威郡)으로 편입시켰는데 10개현, 1만7천여 호, 7만 6천여 인구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나라 수도 장안으로 끌려간 김일제는 황문(黃門), 즉 황실의 말을 키우는 신세로 전락했는데, 이때 나이 열네 살이었다. 몇 년 후 무제는 후궁들과 함께 자신의 말을 사열했는데, 《한서》 ‘김일제 열전’은 이 사열식 장면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무제가 잔치를 하면서 말을 검열했다. 후궁들이 주위에 가득 모여 있었다. 김일제 등 수십 인이 자신이 기르던 말과 전각 아래를 지나면서 (후궁들을) 힐끗힐끗 쳐다보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오직 일제만이 감히 그러지 않았다. 일제는 키가 8척2촌이고 용모는 엄숙했으며, 말 또한 살지고 좋았다. 무제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본래의 정상을 갖추어 대답했다. 무제가 기이하게 여겨 즉일로 목욕시키고 의관을 주어 마감(馬監)으로 임명했다가, 곧 시중(侍中) 부마도위 광록대부(侍中附馬都衛 光祿大夫)로 옮기게 했다(《한서》 ‘김일제 열전’)」

 

휴도왕의 태자로서 한나라 궁중으로 끌려와 무제의 말을 키우는 신세로 전락한 김일제는 이렇게 인생역전의 끈을 잡았다.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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