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성립
by Silla on 2020-02-09
1943년 11월 27일 미국, 영국 그리고 중화민국의 정상은 카이로에 모여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한국에 대해 앞으로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것이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1945년 7월 26일에는 미국, 영국, 중화민국 그리고 소련의 정상은 포츠담에 모여 공동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였는데 여기에는 카이로 선언의 실행을 재확인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The terms of the Cairo Declaration shall be carried out ...)

1945년 8월 13일 일본 내각회의는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하고 이를 연합국 측에 전달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천황이 방송을 통해 이런 사실을 발표하였다. 이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건국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을 이끌던 여운형에게 행정권과 치안권을 넘겨주기로 하였다. 이에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전국으로 지부를 확대해 나갔다. 건국준비위원회는 9월 6일에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140여 개에 달하는 전국의 지부를 인민위원회로 전환시켰다. 인민위원회는 일본의 통치가 갑자기 무력화된 상황에서 민중들의 자치기구 역할을 하였다.
앞서 소련군은 이미 8월 11일에 한국에 들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있었는데 8월 25일에는 평양에도 들어왔다. 미국은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한국을 분할해서 점령하자는 제안을 하게 되는데 이 제안을 소련이 받아들여 9월 2일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미군은 9월 8일에 한국에 들어왔는데 다음날 서울에서 포고령을 선포하여 이남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비롯한 모든 자생조직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일본통치 시기의 관료, 경찰 그리고 군인들을 다시 채용하여 군정을 꾸려나갔다.

12월에는 미국, 영국 그리고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모여 2차대전의 전후처리를 논의하였는데, 한국에는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하고 이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의 구성에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3월과 이듬해 5월에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아무런 진전이 없자 10월에 해산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난항을 겪자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에 상정하였고 국제연합은 이듬해 3월 31일까지 국제연합의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거부로 UN한국임시위원단이 이북으로 들어가지 못하자 국제연합은 1948년 2월 26일 미국의 결의안을 가결시켜 같은 해 5월 10일까지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미군정 지역에서 총선거가 치러져 의회가 구성되었고 이 의회에서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마침내 대한민국(이후 한국) 정부가 만들어졌다.

소련군정 지역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그 해 3월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한 뒤 무상으로 분배하였고 8월에는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였다. 이어 1947년 2월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로 발전하였고 1948년 2월에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다.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고 난 직후인 1948년 8월 25일에 조선최고인민회의 총선거를 실시하여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후 조선)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