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봉기
by Silla on 2020-02-20
해방 직후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가 대세였다.
사람들 사이에는 일조시대에 쌓은 부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고 모두 빼앗아 고루 나눠주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고 정치 세력도 사회주의 성향의 사람들이 재빨리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며 앞서나갔다. 또 한국을 둘러싼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경쟁을 경험했던 한국인들은 일본이 패하고 중국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이제 한국을 장악할 나라는 소련 밖에 없으며 그 소련의 이념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미군보다 한 달 먼저 한국에 들어오면서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또 해방 이듬해에 이북에서 실시된 토지의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는 이남 민중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앞서 일조시대때 해체되었던 조선공산당은 1945년 9월 11일 서울에서 재건되었다. 같은 해 10월 평양에서 북조선분국도 만들어졌는데 북조선분국은 1946년 6월에 북조선공산당으로 독립한 뒤 같은 해 8월 조선신민당과 통합하여 북조선로동당이 된다. 조선공산당도 11월에 조선신민당 및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이 되었다. 북조선로동당과 남조선노동당은 1949년 6월에 비밀리에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되었다.

해방 직후 한국 민중의 삶은 일조시대보다 더 궁핍하였다.
이는 만주와 일본에서 귀환하는 사람들로 인해 인구는 급증하였으나 일본의 자본과 기술자가 철수하고 분단으로 인해 생산체계가 끊어지면서 생산은 오히려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쌀값까지 폭등하였는데, 미군정은 1946년 1월에 미곡수집령을 발표하여 잉여 쌀을 거둬들이려 하였으나 수집 가격이 생산비보다 낮아 징수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자 경찰을 동원하여 강제로 징수하기도 했는데, 미군정의 경찰은 일조시대의 경찰이 그대로 이어진 터라 민중들의 큰 반감을 샀다.
1946년 5월 콜레라가 유행하여 경상북도에서만 4천 여 명이 사망하자 미군정은 전염을 막기 위해 대구를 봉쇄하였다. 이 봉쇄로 인해 식량부족이 극심해져 굶어죽는 사람까지 나오게 되자 민중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10월 1일 대구시청 앞에서 기아대책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는데 경찰이 발포하여 2명이 사망하자 마침내 봉기의 불길이 붙었다. 10월 2일 미군정은 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진입시켰지만 봉기는 대구 주변지역으로 번져 나갔다. 경찰만으로 감당이 되지 않자 족청, 백의사, 서북청년회 등 정치폭력단까지 봉기의 진압에 가담하였다. 그 해 말까지 이어진 이 봉기에는 200여 만 명이 참여하였고 공식 발표에 의하면 공무원 63명과 일반인 73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1947년 3월 1일 제주에서 열린 삼일운동 기념집회에서 경찰과 군중이 충돌하여 6명의 시민이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이에 항의하는 파업이 번져나갔는데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하였다.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보내어 이를 탄압하였는데 이것이 민중들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 남로당은 여기에 이남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까지 더하여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공격하였다. 이에 미군정은 조선경비대를 동원하여 진압하게 하였으나 5월 10일의 총선거는 제주에서 치러지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다시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봉기가 진정되어 5월 10일에 재선거가 치러졌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개방되면서 제주인민봉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 봉기로 인한 사망자는 군인이 152명, 경찰이 228명이고 민간인은 14,000여 명이 죽은 것으로 신고되었다.
앞서 미군정은 1946년 1월에 일본군 장교 출신을 중심으로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는데 6월에는 조선경비대로 개칭하였다. 경비대는 규모를 계속 확장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남로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이 들어왔다.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경비대 소속 군인 2,000여명은 제주인민봉기의 진압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며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순천을 점령하고 곡성까지 진출하였으나 진압군이 투입되자 10월 27일 경에는 대부분 소탕되고 일부는 산악지대로 도피하여 빨치산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비대 내의 남로당을 척결하는 숙군작업이 벌어졌고 11월 20일에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