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948년 12월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이 철수하였다. 그리고 1949년 6월에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도 500여 명의 군사 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였다. 그해 12월 중국에서는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쫓겨나고 중국대륙이 공산화되는 일이 있었다. 이런 정세에 대응하여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0년 1월 알류산, 일본, 오키나와 그리고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방어선은 한국, 대만 그리고 월남을 제외한 것이어서 미국이 이들 지역에 대한 방어를 포기한 듯한 인상을 풍겼다. 이런 국제정세는 한국 내에서 잇달아 발생하는 민중봉기와 더불어 한반도 공산화의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였다.
또 조선은 1949년 7월 중국 팔로군에 소속되어 있던 한국인 1만여 명을 넘겨받아 인민군으로 편입시키고 1950년 4월에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1만 4천여 명의 한국인을 인민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소련으로부터는 우수한 성능의 무기를 많이 지원받았다. 반면 한국은 대통령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자주 외치는 바람에 미국이 그를 제어하기 위해 무기의 제공을 꺼리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조선의 수상 김일성과 외무상 박헌영은 1950년 4월에 소련을 방문하고 5월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두 나라로부터 전쟁에 대한 승인을 받고 6월 25일 남침을 시작하였다. 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5일에는 오산에서 미군을 격파하였으며 7월 20일 대전, 7월 24일 목포, 7월 31일 진주 그리고 8월 11일 포항을 함락시키는 등 파죽지세로 내려왔다.
한편, 전쟁이 난 날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인민군의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7월 1일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발의한 “국제연합군 사령부의 설치와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결의안도 가결하였다.
미국은 6월 30일 대통령의 해외파병권에 의거하여 참전을 결정하였는데,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을 7월 1일 부산에 상륙시켜 전장으로 보냈으나 오산 전투를 비롯해서 연패를 거듭했다. 한국은 7월 17일에 작전지휘권을 미군에 넘겼고 미군은 8월 3일 포항-왜관-마산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어 계속해서 미군이 투입되었는데,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조선의 군사시설에 대한 엄청난 폭격을 가하는 한편 9월 15일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28일에는 서울을 함락시켰다. 10월 1일 38도선을 넘은 국제연합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였고 26일에는 일부가 압록강에까지 도달하였다.
국제연합군이 38도선을 넘을 무렵부터 중국은 조선에 대한 지원군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11월에 들어와 마침내 전쟁에 뛰어들었다. 중국군의 우세한 전력에 밀린 국제연합군은 11월 28일에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어 12월 4일 평양, 12월 24일 흥남, 이듬해 1월 4일 서울, 1월 7일 수원의 순서로 물러났다.
3월 15일 국제연합군이 서울을 되찾았지만 이후 전선은 큰 변동이 없이 고정되어 가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7월부터 미국과 중국 그리고 조선 사이에 휴전협상이 시작되어 2년여 후인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서명은 국제연합군의 클라크, 조선인민군의 김일성 그리고 중국인민지원군의 팽덕회가 했는데, 한국은 휴전을 반대했기 때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 전쟁은 국군과 인민군의 싸움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내 48만 미군과 75만 중국군이 참여하는 국제전으로 바뀌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국군이 15만, 인민군이 30만, 미군이 4만 그리고 중국군이 14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민간인 사망자는 한국이 37만, 조선이 41만여 명이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은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시켰다. 조선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 1956년 3월 박헌영을 처형하고 남로당 출신을 대거 숙청하였다.
앞서 1949년 6월 5일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사상개조를 위해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되었는데 1950년 초에는 가입자 수가 30만여 명에 달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들이 인민군에 협조할 것을 두려워한 육군특무대와 헌병이 이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여기에는 경찰과 정치폭력단까지 가담하였는데 국군의 퇴로와 인민군에 점령되지 않은 영남 지방에서 특히 심하였다. 확인된 사망자는 5천여 명이고 최소 20만여 명에 달한다는 의견도 있다. 국제적인 비난이 일자 중단되었으며 국민보도연맹도 전쟁 중에 없어졌다.
중국군이 참전할 즈음인 1950년 12월에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국민방위군을 모집하였는데 그 수가 50만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예산을 중간에서 착복하는 바람에 이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식량과 의복 그리고 잠자리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 서울에서 경남까지 걸어서 이동하는 도중에 9만여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문제가 불거지자 1951년 4월에 국민방위군은 해체되었고 8월에는 김윤근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비롯한 관련자 5명이 처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