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량 (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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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7~923
 

노란색이 후량.
노란색이 후량.
수도카이펑
정치
정치체제군주제
황제주전충 (907년 ~ 912년)
주우규 (912년 ~ 913년)
주우정 (913 ~ 923)
역사
 • 성립907년
 • 멸망923년
인문
공용어중국어

후량(後梁, 907년 ~ 923년)은 오대십국 시대 오대(五代)의 첫 번째 왕조이다. 당나라 말기 혼란한 정세속에 당나라 조정을 장악한 군벌 주전충이 907년 당나라 애제(소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이것을 당나라의 멸망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선양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멸망은 아니며 거란족이 당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다. 이후 후당(後唐)을 건국한 돌궐인들에 의해 애제는 사로잡혀 죽었다. 수도는 카이펑(開封)이다. 남북조 시대 괴뢰정권인 후량이나 남조 양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주량(朱梁)이라 부르기도 했다. 돌궐인이 일으킨 후당에 의해 멸망하였다.

역사[편집]

주전충은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을 평정한 인물로 당나라로부터 '전충'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는 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가 되어 변주(지금의 하남 카이펑 부근)를 다스리게 되었고, 변주가 당나라 말기 최대의 번진이 되어 양왕(梁王)에 봉해지게 되었다. 904년 윤4월 장안(長安)에 있던 소종을 낙양으로 데려와 8월 살해하고 13세 된 이축을 제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애제이다.

907년 6월 1일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나라를 건국하였다. 국호는 대량(大梁), 건원개평이라 하였다. 후량의 지배 영역은 중원의 5개 왕조 중 가장 작아 지금의 하남성, 산동성 지역과 섬서, 호북의 대부분, 하북, 영하, 산서, 강소, 안휘성 등의 일부를 다스렸다.

진왕(晋王) 돌궐족 이극용 등 당나라 말기 지방에서 자립한 군벌(절도사)들은 후량의 선양을 인정하지 않고, 각지에서 자립했기 때문에 오대십국의 분열시대가 찾아왔다. 돌궐인 이극용은 주전충을 계속 공격하였다. 다음해 이극용이 죽고, 그의 아들 이존욱이 진왕이 되어 반격에 나서자 주전충은 퇴각하였다. 사실상 당나라는 멸망한 상태였지만 거란족이 금나라를 건국하여 당나라 멸망에 종지부를 찍는다.

910년 후량의 공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왕 이존욱이 구원하러 나섰기에 911년 초 백향(柏鄉;지금의 하북에 속함)에서 진군과 후량군이 격전을 벌였다. 하루 동안 벌어진 격전에서 후량은 대패하였고, 진군은 150여리나 추격하였다. 주전충은 이에 놀라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낙양에서 방어진을 구축했다. 백향 전투에서 후량의 주력군이 큰 피해를 입었고, 이 때문에 후량의 세력은 쇠퇴하였다.

태조 주전충은 912년 병석에서 양자 박왕 주우문을 후계자로 세웠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친아들 영왕 주우규에 의해 살해당했다. 제위에 오른 주우규는 인망을 얻지 못해 동생 균왕 주우정에게 살해당하고 제위를 빼앗겼다.

915년 봄 이존욱과 싸워 태행 황택령, 덕주, 연주에서 후량군은 연패했다. 다음해 봄 왕단(王檀)이 3만을 이끌고 태원을 공격했으나 수비군에게 격퇴당했다. 918년 8월 돌궐족 이존욱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자 후량군은 이를 맞아 싸웠다. 12월 하순 호류파(胡柳陂 ;지금의 복양 서남쪽)에서 양군은 격돌하여 혈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진군의 명장 주덕위가 후량군 기병대장 왕언장에게 패해 전사했다. 위기에 빠진 진군을 구한 것은 진군 장수 이사소, 왕건급이 이끄는 기병으로 후량의 보병을 격파해 후량은 대패하여 3만에 가까운 사상자가 생겼다. 하지만 진군도 다수의 사상자가 생겨 후량과 진군의 전투는 일단 소강상태에 빠졌다. 921년 진주를 포위한 진군을 후량군이 공격해 격파하여 진군은 약 2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923년 진왕 돌궐족 이존욱은 4월말 이사원에게 5000 기병을 주고 후량을 기습했다. 후량은 왕언장을 총사령관으로 단의를 부사령관으로 한 10만의 정병을 이끌고 후당을 공격했다. 장종 돌궐족 이존욱 또한 직접 군을 이끌고 양유에서 격전을 벌여 후량군을 격파했다. 한족 왕언장은 사로잡혀 중도현에서 참수되었다. 923년 11월 19일 돌궐군은 후량의 카이펑을 함락시키고 주우정과 당나라 애제(소선제)를 사로잡았다. 이후 돌궐인 이존욱은 돌궐인들을 시켜 당나라 이세민의 후손들로 알려진 자들은 모두 사로잡아 이세민의 여손들은 기생으로 삼고 남손들은 소작 노비로 삼았다. 그리고 그 노비들을 카이펑을 함락시킨 돌궐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923년 11월 이렇게 당나라 이씨는 후손이 끊기게 되었다. 이렇게 후량은 멸망하게 되었다. 주우정은 자손들이 돌궐족들의 노비가 된 것에 충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이로써 당나라와 후량의 황제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고 후량은 3대 16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멸망하였다.

역대 황제[편집]

후량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연호 재위 기간 능호
- 양 숙조
(梁肅祖)
(양 태조 추숭)
선원황제
(宣元皇帝)
주암(朱黯) - - 흥극릉(興極陵)
- 양 경조
(梁敬祖)
(양 태조 추숭)
광헌황제
(光獻皇帝)
주무림(朱茂琳) - - 영안릉(永安陵)
- 양 헌조
(梁憲祖)
(양 태조 추숭)
소무황제
(昭武皇帝)
주신(朱信) - - 광천릉(光天陵)
- 양 열조
(梁烈祖)
(양 태조 추숭)
문목황제
(文穆皇帝)
주성(朱誠) - - 함녕릉(咸寧陵)
제1대 양 태조
(梁太祖)
신무원성효황제
(神武元聖孝皇帝)
주황(朱晃)
<주전충(朱全忠)>
개평(開平) 907년 ~ 911년
건화(乾化) 911년 ~ 912년
907년 ~ 912년 선릉(宣陵)
제2대 - -
<영왕(郢王)>
주우규(朱友珪) 봉력(鳳曆) 913년 912년 ~ 913년 -
제3대 - 말황제
(末皇帝)
주전(朱瑱)
<주우정(朱友貞)>
건화(乾化) 913년 ~ 915년
정명(貞明) 915년 ~ 921년
용덕(龍德) 921년 ~ 923년
913년 ~ 923년 -

재상[편집]

후량의 재상 직함은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약칭 동평장사(同平章事))였다.

숭정사[편집]

후량은 당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그때까지 환관이 맡아왔던 추밀사(樞密使)를 관료 중 한 사람이 맡게 하고, 추밀원을 숭정원(崇政院)으로, 추밀사를 숭정사(崇政使)로 개칭하였다. 이 숭정사는 후량 태조 주전충의 모사 경상 (907년 ~ 912년)과 이진 (912년 ~ 923년) 두 사람만이 역임하였다. 후량이 후당에게 멸망한 이후, 숭정원은 추밀원으로, 숭정사는 추밀사로 각각 명칭이 회복되었다.

유명 인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