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한국 전근대사회의 최하층 신분인 천민.

전근대사회에서 신분제는 크게 귀족 ·양인 ·천민으로 구분되는데, 노비는 사내종[]과 계집종을 일컫는다. 노비제가 실시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조선에서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 또는 부여에서 “살인자의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는 기록은 당시에 이미 노비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 뒤 삼국시대에는 전쟁포로 ·채무자 ·극빈자 등에 의한 노비가 생겨났는데, 특히 삼국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면서 국가기관 및 공로를 세운 귀족에게 포로를 지급하여 노비로 삼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이러한 노비는 국가와 귀족의 전장()에서 농경을 담당하였다. 통일신라 때 “재상의 집에 노동()이 3천이나 되었다”는 기록은 당시 귀족의 노비소유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 인구 가운데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신라촌락문서>를 통해 보면, 4개 촌락 인구 442명 중 노비는 25구()에 불과하였다는 점에서 노비 노동력이 부차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후삼국 이후 호족()은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이를 경제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고려가 건국된 뒤 왕권강화책을 실시하면서 이것이 문제가 되자 956년(광종 7)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귀족이 불법적으로 소유한 노비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에 대한 호족의 반발이 일어나면서, 987년(성종 6)에는 노비환천법()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노비

고려시대의 노비는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는데, 공노비는 반역 ·이적행위 등의 범죄자와 그 가족 및 사노비를 관몰()하면서 형성되었으며, 이는 다시 관청에서 노역을 하는 공역노비와 농경생활에 종사하는 외거노비로 구분되었다. 공역노비는 10여 세에서 60세까지 역을 부담하면서 대가로 국가의 급료를 받았으며 독자적인 가정을 가질 수도 있던 반면에, 외거노비는 국유지를 경작하여 수확의 일정량을 조()로 국가에 납부하고 그 밖에 공역을 부담하였다. 한편, 사노비는 주인의 재산으로 인정되어 상속·매매·증여가 가능하였으며, 특별한 공역이 없었다.

공노비(고려시대 노비의 분류)_690.jpg 공노비사노비솔거노비외거노비

이들은 부모 가운데 하나가 노비이면 노비가 되었으며, 소유권은 종모법()에 따라 모()의 주인에게 있었으나 모가 양인(良)일 경우에는 부()의 주인이 소유하게 하였다. 주인은 사노비를 죽이는 경우 외에는 법의 제제를 받지 않았고, 노비도 주인이 반역하지 않는 이상 배반할 수 없었다.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되는데, 솔거노비는 주인에게 의식주를 제공받으면서 무제한 ·무기한적 노동을 제공하였고, 온전한 가정생활과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반해 외거노비는 주인의 호적에 기재되는 외에 현 거주지에서 별도의 호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전호()로서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여 수확의 일부를 주인에게 조로 바치고 나머지로 생활하였으며,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의 토지를 경작하여 경제력을 향상시킬 수도 있었다. 국가에서는 외거노비에 대해 수취하지 않았으나 우왕 때 일정액을 수취하였으며, 이성계(李)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귀족을 억압하기 위한 방편으로 외거노비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강화하였다. 그래서 1391년(공양왕 3) 노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물추변도감()을 설치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직후에는 고려왕실과 귀족 및 죄인의 노비를 정리하고 노비쟁송의 기준을 정하였으며, 1395년(태조 4)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였다.

이어 1397년에 합행사의() 19조를 발표하였으며, 1405년(태종 5) 영위준수노비결절조목() 20조를 발표하였다. 이처럼 국가의 재정기반 마련과 신분제 안정을 목적으로 한 노비정책이 시행되면서, 1406년에는 232개의 사찰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사사()를 정리하면서 8만 여 구의 공노비를 확보하여, 전농시() ·군기감() ·내섬시() ·내자시() ·예빈시(禮) 등에 배속시키고 신공을 받아 제용감()의 경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그 후에도 1419년(세종 1)과 1424년에 남아 있는 사사노비를 없애고 전농시를 비롯한 여러 관청에서 사역하게 하였다. 조선의 노비도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하였는데, 공노비는 16세에서 60세까지 역을 부담하였으며, 역의 종류가 노역인가 현물 납공인가에 따라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구분하였다. 선상노비는 서울 또는 지방의 각 관청에서 노역에 동원되었는데, 특히 중앙관청의 경우 각 관청의 수요가 정해져 있어 이에 따라 입역하였고, 지방에 사는 노비가 중앙에 동원될 때는 두 번에 나누어 교대시키고 2구의 봉족노비()를 주어 선상노비에게 매년 면포 및 정포 각 1필을 지급하게 하였다. 그리고 납공노비는 노의 경우 매년 면포 1필과 저화 20장, 비의 경우 면포 1필과 저화 10장을 상납하였으며, 그 밖에 소속관청의 공궤()를 부담하고 수전가() 및 작지() 등을 납부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신공은 국가재정의 주요 수입원이 되어 1485년(성종 16)에는 면포 72만 여 필, 정포 18만 여 필이 되었다. 조선 초에 농장이 발달하면서 노비의 숫자가 증대하였고, 노비가 직접 토지를 소유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한편 사노비는 주인에 의해 매매 ·상속 ·증여가 가능하였는데, 이에 《경국대전()》에서는 16세 이상 50세 이하의 노비는 저화 4천 장, 16세 이하 50세 이상은 3천 장으로 정하였다. 주인은 사노비를 죽이는 경우에만 관청에 보고하고 나머지는 어떤 형벌도 가할 수 있었으며, 노비는 주인이 모반이 아닌 이상 관청에 고발할 수 없었고, 고발하는 경우는 강상을 어지럽히는 것으로 간주하여 교살되었다.

조선의 노비

조선 초의 노비수는 성종 때 전국의 호구가 100만 호에 340만 명이며, 노비도 총 150만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므로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 이래로 노비의 소생은 부모 중에 하나가 노비이면 노비가 되게 하였기 때문에 숫자가 늘어나 군역부담자가 감소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자, 1414년(태종 14) 양인을 증가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종부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에 따른 폐단이 생겨나면서 시행과 폐지에 대한 논의가 거듭되다가 세조 때 다시 종래의 법으로 환원하였으며 이를 《경국대전》에 법제화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 국가재정이 악화되고 기근이 발생하면서 납속하는 노비에게 면천을 허락하였고, 이를 계기로 재정과 변방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납속이 계속 시행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는 군량문제 해결과 군공에 대한 대가로서 면천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 후기에도 계속되어 노비에 대한 규제도 완화되었으며, 1755년(영조 31)에 납공노비의 신공을 줄여 노 1필, 비 반 필을 부과하다가 1774년에는 노에게만 1필을 부과하고 비의 신공은 없앴다. 그리고 양천교혼이 성행하게 되자, 1669년(현종 10) 서인(西)은 양역인구 확보의 일환으로 종모법 대상자를 양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남인이 이를 반대하면서 서인과 남인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이 조처들이 번복되어, 1679년(숙종 5) 천민으로 돌렸다가 1684년에 다시 양인으로 삼았으며, 1689년에 또다시 천민으로, 1731년(영조 7)에 최종적으로 양인으로 삼을 것을 확정하였다.

한편, 신분제의 변동이 활발해지면서 노비 중에 부를 축적한 자는 납속하거나 관리와의 결탁을 통해 신분상승을 도모하였는데, 《속대전》에는 쌀 13석을 지불하면 사노비가 양인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에 노비의 신분해방이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고, 1801년(순조 1) 내수사 ·궁방 ·관청의 노비안()을 소각하고 6만 여 구를 방량하였다. 그 후 1886년(고종 23) 노비세습제를 폐지하고 노비 소생의 매매를 금지하고 그들이 양인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였으며, 1894년 최종적으로 노비제를 폐지하였다.

참조항목

참조항목
납공노비 조선시대에 노역 대신 일정액의 신공(身貢)을 매년 소속관서에 바친 공노비.
내노비 조선시대 내수사(內需司)에 딸린 노비.
노비면천첩 조선 후기 진휼비(賑恤費)의 부족을 보충할 목적으로 발행한 노비면천의 증명서.
노비변정도감 조선시대 노비의 쟁송(爭訟)을 담당하던 관청.
노비수모법 고려 ·조선시대의 양민(良民) 남자와 여종[婢] 사이의 소생은 자동적으로 노비로 간주한 법.
노비시정귀양법 조선시대 늙은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공노비(公奴婢)에게 신공(身貢) 또는 입역(立役)을 면제한 법.
노비종모법 조선시대 노비 소생의 신분과 역(役) 및 주인을 결정하는 데 모계(母系)를 따르게 한 법. 조선 후기 양인이 감소하여 보다 많은 양인이 필요하게 되자, 아버지가 노비신분인이고 어머니가 양인인 경우 그 자녀는 어머니 신분을 따라 양인화한 제도.
노비종부법 양인(良人) 남자와 천인처첩(賤人妻妾)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신분은 부계(父系)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한 신분법.
노비추쇄도감 고려 ·조선 시대 공노비 가운데 도망자 ·은루자(隱漏者) ·불법 종량(從良)된 자를 색출할 목적으로 설치한 임시관청.
노비환천법 고려 성종 때 해방된 노비를 다시 노비로 되돌리기 위하여 제정하고 실시한 법.
대구 조선시대 노비가 면천(免賤)되어 양인이 되려고 할 때 그 자리에 다른 노비를 바친 일.
사노비 한국 전근대사회의 최하층 신분으로 개인에게 상속되면서 사역한 노비.
속량 돈이나 곡식을 내고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거나, 국가 또는 주인에게 공을 세워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良人)이 되는 제도.
외거노비 고려 ·조선시대의 최하층 신분.
인신매매 사람을 물건처럼 매매함으로써 타인에 대하여 예속적인 상태에 두는 일.
천인 고려·조선 시대 양천제(良賤制)라는 신분관념하에서 양인(良人)과 대비되는 하급신분을 가리키는 말.
공노비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왕실(王室)과 관아(官衙)에 예속되었던 노비.
노비공 조선시대 노비의 수가 늘어나자 국가가 이들에게 신역 대신 일정한 대가를 부과하도록 한 것.
노예제 노예가 존재하는 제도.
만적의 난 1198년(고려 신종 1)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 미수에 그친 노비해방운동.
노비안검법 고려 초기 광종 때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하여 다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조처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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