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0.29 김정일
by Silla on 2021-02-19
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우리 나라 력사를 학습하면서 학생들 속에서 삼국통일에 대한 문제가 많이 토론되였다.
삼국통일문제는 우리 나라가 어느때부터 통일국가를 이루고 발전되여왔으며 우리 나라 력사의 흐름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지난 시기 써놓은 조선력사자료들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여 삼국의 통일을 이룩하였다고 하고있다. 지금 력사학계에서는 지난 시기에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였다고 한 자료를 인정하는데로부터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신라가 매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있으며 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우리 나라 력사를 신라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있다.
그러나 력사자료들을 분석하여보면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였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맞는 것 같지 않다.
ᐥ신라는 당나라침략자들과 결탁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는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 하나의 통일적인 주권국가를 세우지는 못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밖에 차지하지 못하였으며 대동강 이북의 옛 고구려땅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국이 창건되여 200여 년 동안 존재하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령토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주권국가인 발해와 신라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다.ᐥ
더우기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여 우리 나라를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들려는 지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삼국통일을 실현할만 한 힘도 없었다. 신라통치배들은 다만 백제와 고구려를 침공하여 령토를 넓히려는 야망밖에 가지고있지 않았다.
신라통치배들은 령토를 넓히려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당나라의 침략세력을 끌어들이는 죄악적인 행동을 감행하였다. 당시 신라통치배들의 대표자였던 김춘추는 당나라통치배들과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데 대한 비밀협약을 맺었다. 그는 당나라통치배들과 신라와 당나라가 련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대동강 이남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대동강 이북의 넓은 고구려땅은 당나라가 차지할 것으로 흥정하였다.
신라통치배들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삼국의 령토와 주민을 다 통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나라침략자들은 신라와 련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신라와 한 《약속》을 줴버리고 고구려와 백제땅을 모두 독차지하려 하였으며 신라마저 강점하려고 하였다. 당나라의 침략적 야망이 로골화되자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련합은 파괴되였으며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였다. 당시 삼국인민들이 당나라침략자들을 반대하여 곳곳에서 힘찬 투쟁을 벌린 것만큼 신라통치배들이 삼국의 통일을 진심으로 원하였다면 삼국인민들의 투쟁을 옳게 이끌어 당나라침략자들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삼국을 하나로 통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삼국통일에 대한 지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침략자들을 삼국의 전령토에서 몰아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대동강 이남 지역에서만 몰아내고 그곳에서 저들의 통치를 유지강화하려고 하였다. 력사적 사실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지향하지 않았으며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운데서 삼국을 통일하려는 지향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여온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오래 전부터 삼국의 통일을 중요한 정책으로 내세웠으며 삼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주변 나라들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과 밀접히 결합하여 힘있게 밀고나갔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한때 온 겨레와 강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백제와 신라는 일부 지역만 차지하고 있었다. 참으로 고구려는 삼국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나라였다.
그러나 삼국통일을 위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은 신라와 당나라 통치배들의 침략책동으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말았다.
고구려 인민들은 70년 동안이나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규모적이고 집요한 침략을 격퇴하고 나라의 존엄과 독립을 지켜냈다. 고구려의 군대와 인민들은 을지문덕장군의 지휘밑에 300만에 달하는 수나라 침략군을 격멸소탕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지휘 밑에 당나라의 침략과 압력을 짓부셔버렸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통치배들사이에서는 알륵과 분렬이 급격히 심화되였다. 당시 고구려통치배들은 저마다 연개소문의 아들들을 끼고 권력을 잡기 위한 암투를 벌림으로써 고구려에는 심각한 정치적 혼란과 위기가 조성되였다. 권력다툼과정에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당나라에 변절투항하고 동생 연정토가 신라통치배들에게 투항함으로써 고구려의 국가통수체계와 방위체계는 전면적으로 마비되였다. 국가통수체계와 방위체계가 마비된 틈을 리용하여 당나라와 신라가 대규모적인 공격을 들이댐으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동족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던 고구려의 지향은 10세기초에 창건된 고려에 의하여 계승되였다. 고려는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대동강 이남 지역의 주민들은 물론 멀리 북쪽에서 이주하여 온 발해의 유민들까지도 하나의 주권 밑에 통합하였으며 광활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힘찬 투쟁을 벌렸다. 고려라는 이름도 고구려에서 유래한것이다.
력사적 사실은 삼국시기 우리 나라의 력사는 신라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온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중심으로 발전하여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객관적인 력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문제를 다시 검토하여야 한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문제를 다시 검토하는 것과 함께 삼국통일과 관련하여 제기된 력사적 사실과 인물들에 대한 평가도 다시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삼국통일에 대한 신라통치배들의 견해를 바로 평가하여야 한다.
신라통치배들은 강토와 겨레를 하나로 합쳐 우리 나라를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동족의 나라인 백제와 고구려를 강점하고 저들의 통치를 유지확장하려고 한 것만큼 삼국통일에 대한 신라통치배들의 견해는 호전성에 기초한 반동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신라통치배들이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반대한 전쟁의 성격과 전쟁을 조직지휘한 인물들에 대한 평가도 다시 하여야 한다. 지금까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고 보는 데로부터 백제와 고구려를 반대하여 진행한 전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신라군사를 통솔한 인물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력사적 사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신라통치배들이 강토와 겨레를 하나로 통일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령토팽창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외래침략자들을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반대한 것만큼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반대하여 진행한 전쟁은 침략적인 전쟁으로 보아야 하며 김춘추와 김유신을 비롯하여 전쟁을 조직지휘한 신라통치배들은 전쟁의 성격에 따라 평가하여야 할것이다.
신라통치배들이 백제와 고구려를 반대하여 벌린 전쟁이 침략적인 전쟁인 것만큼 그것을 반대하여 투쟁한 백제인민들과 군대의 투쟁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 일부 사람들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였다고 보는 데로부터 그것을 반대하여 싸운 계백을 비롯한 백제군대의 행동에 대하여 그릇된 평가를 내리고있다. 5 000명의 병력으로써 10배에 달하는 신라군대의 네 차례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하여 끝까지 싸운 백제군대와 계백장군의 투쟁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나라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세 나라 인민들의 투쟁성격도 바로 분석평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나라침략자들은 오래전부터 고구려와 백제, 신라를 강점할 기회를 노리고있었다. 그들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무력간섭을 끊임없이 감행하였으며 다른 편으로는 횡포한 정치, 외교적 압력을 가하였다. 당나라침략자들은 《라당련합》에 대한 신라통치배들의 제의를 좋은 기회로 삼고 신라통치배들과 련합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뿐 아니라 신라까지도 집어삼킬 것을 타산하였으며 백제와 고구려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때로부터 대국주의적이며 침략적인 본성을 로골적으로 드러내 놓았다. 그들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자 그곳에 군정을 실시하고 인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 백제와 고구려를 영원히 지배하려고 하였을 뿐 아니라 신라까지도 침략하려고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인민들은 당나라침략자들이 나라를 강점한 첫날부터 곳곳에서 항쟁군을 뭇고 당나라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싸움을 힘있게 벌렸다. 신라에 대한 당나라의 침략책동이 날로 로골화되자 신라인민들까지 당나라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일떠섰으며 당나라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인민들의 투쟁은 날을 따라 더욱 강화되였다.
당시 삼국인민들은 대동강 이남 지역에서만 당나라의 군정을 철페하려고 한 신라통치배들과는 달리 우리 나라의 전령토에서 당나라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싸웠다. 삼국인민들의 줄기찬 투쟁에 의하여 마침내 당나라침략자들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게 되였다.
당나라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고구려와 백제, 신라인민들의 투쟁은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자기 강토와 겨레를 다시 찾기 위한 정의의 전쟁이였다.
우리 나라 력사서술에서 삼국통일문제와 함께 발해를 어떤 위치에 놓고 취급하겠는가 하는 문제도 정확히 해명하여야 한다.
지금 력사학계에서는 발해를 7세기 후반기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취급하는 부분에서 마지막에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발해가 논 역할을 무시하는 것으로 된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7세기말부터 10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에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옛 고구려땅에 세워진 강력한 주권국가로서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발전시켰으며 우리 나라에 대한 북방 여러 나라들의 거듭되는 침입을 막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런 것만큼 7세기말부터 10세기초에 이르는 우리 나라 력사서술에서 발해를 신라와 함께 기본체계에서 취급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였다는 력사적 사실로부터 《통일신라》라는 표현도 고쳐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지금 《통일신라》라는 말을 많이 쓰고있는데 《통일신라》라는 말은 신라가 삼국을 통합함으로써 우리 나라가 하나의 통일국가로 되였다는 말이므로 그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7세기를 전후한 시기 우리 나라 력사와 삼국통일문제를 전면적으로 검토하여 보면 이 밖에도 많은 문제들이 제기될 것이다.
지금 써놓은 우리 나라 력사책들 가운데는 삼국통일문제뿐 아니라 다른 문제들도 외곡된 것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난날 대국주의자들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과 간섭을 합리화하며 조선인민을 저들의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조선력사를 혹심하게 외곡하였으며 사대주의에 물젖은 우리 나라의 봉건통치배들과 어용사가들은 대국주의자들이 외곡하여 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의 정설처럼 여겨왔다.
해방 후 수령님의 옳바른 령도 밑에 우리 인민은 잃었던 력사를 다시 찾았으며 대국주의자들과 사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외곡되였던 많은 력사적 사실들을 바로잡게 되였다.
그러나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난날 대국주의 사가들과 사대주의 사가들이 써놓은 책들을 깊이 검토하여보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것을 근거로 삼아 조선력사를 서술하고있다.
우리는 대국주의 사가들과 사대주의 사가들이 써놓은 력사사료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우리 나라의 력사를 주체적 립장에서 정확히 해명하여야 한다.
력사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인민대중이다. 우리는 착취계급의 개별적인 대표자들이나 왕조들의 력사를 연구할 것이 아니라 인민대중의 투쟁의 력사, 창조의 력사를 연구하여야 하며 그것을 우리 인민의 리익에 맞게 연구하고 서술하여야 한다. 력사적 사건들과 사실들을 우리 인민의 리익의 견지에서 분석하고 평가하여야 지난날의 력사적 사실들에서 교훈을 찾고 경험을 살려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을 더 잘해나갈 수  있다.
력사적인 사실들과 사건들을 인민의 리익에 맞게 분석평가하란다고 하여 사실과 맞지 않게 과장하거나 왜소화하여서는 안된다. 력사적으로 있었던 사건들과 사실들은 아무러한 편견이나 선입견도 없이 그대로 인정하여야 하며 력사에 없었고 또 있을수도 없었던 사건을 꾸며내지 말아야 한다.
나는 앞으로 력사학계에서 지난 시기에 대국주의 사가들과 사대주의 사가들에 의하여 외곡서술된 우리 나라 력사를 전면적으로 검토하여보고 주체적 립장에서 다시 서술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