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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7> 김씨의 거짓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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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5-10 21:40:27 수정 : 2011-05-10 21:4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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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만명에 달하는 김해김씨, 과연 한 뿌리서 파생된걸까
# 김씨 기원에 대한 다양한 견해


앞의 글(세계일보 4월 13일자)에서 거론했듯이, 김씨의 기원에 대해 4가지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김유신과 김인문 비문, 그리고 대당 고 김씨부인 묘비,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부분적으로 거론되었듯이 김씨의 시조는 중국 삼황오제의 하나인 ‘소호금천씨’라는 주장이 있다. 둘째는 문무왕 비문과 대당 고 김씨부인 묘비문에서 거론된 흉노 왕의 태자이면서 전한의 광무제에게서 김씨 성을 하사받은 투후 김일제가 시조라는 주장이다. 셋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천강설화에 따라 대보공 김알지와 가야 김수로왕이 시조라는 주장이며, 넷째는 신라가 고대국가로 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씨족을 표시하는 한자식 성으로 김씨 성을 쓰게 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주장은 제각각 근거가 있어 현 단계로서는 어느 주장이 진실이라고 단정하기 힘들다. 다만 첫째 소호금천씨가 시조라는 주장과 셋째 김씨의 시조 대보공 김알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주장은 과학적으로 볼 때 신빙성이 높지 않다.

결국, 둘째와 넷째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적 근거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중 문무왕 비문과 중국 사서에서의 ‘투후 김일제’에 대한 기록을 볼 때, 두 번째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일제 이후 7대에 걸쳐 벼슬을 하던 중국 김씨 일족이 왕망의 난과 신나라 건설에 참여한 것까지는 파악되나, 어떻게 해서 한반도 동남단에 흘러왔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일부에서는 김해지역에서 출토된 오수전(일명 왕망전)을 근거로 왕망의 신나라 김씨 일족이 김해 등 한반도 동남단으로 진출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 동남단에 진출하고 가야나 신라 왕족이 된 이후에도 왜 김씨라는 성을 숨기고 살았는지에 대해선 명확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진흥왕 이전의 비문에 왜 왕의 성이 쓰여 있지 않은지, 중국 사서에 법흥왕의 성씨를 모(募)씨로 거론하는지에 대해 반박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일부에서는 募씨를 성씨를 알 수 없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법흥왕의 성씨가 선비족 모용씨의 앞글자인 모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필자는 수많은 성씨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진흥왕(고구려는 장수왕, 백제는 근초고왕) 이전에는 씨족명은 있었을지 모르나, 한자식 성은 삼국의 왕권이 확립된 중엽 이후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씨족의 내력이 대보공 김알지에서 시작하든, 아니면 한무제 때 투후 김일제에서 시작되든, 더 올라가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소호금천씨에서 시작되든 상관없이 김씨라는 성을 사용한 것은 진흥왕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김해김씨도 씨족의 뿌리가 수로왕 등 6가야 왕들에게서 시작되었더라도 신라로 병합된 이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 진흥왕 이후에 신라 왕족의 성씨인 김씨 성을 쓰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김씨 성을 쓴 시조는 신라계에선 진흥왕이, 가야계에선 김유신(또는 조부인 김무력이나 아버지인 김서현)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당대나 후대에 국사를 편찬하면서 씨족의 내력까지 포함해 성씨와 연결하다 보니 마치 대보공 알지의 성이 김씨고, 수로왕의 성이 김씨라고 주장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물론 광무제에게 김씨 성을 하사받은 것이 분명한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라면, 그리고 정치적 우여곡절 끝에 김씨라는 성을 숨기고 살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증거자료는 현재까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김씨의 시조를 소급해서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김유신 묘. 김씨 성을 쓴 시조는 신라계에선 진흥왕이, 가야계에선 김유신(또는 조부인 김무력이나 아버지인 김서현)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김씨의 분화 1, 가야계 김씨


진흥왕 이후 성을 쓰게 된 김씨는 이후 수많은 분화를 겪게 된다. 먼저 분화를 겪은 것은 김유신의 가야계 김씨이다. 태종무열왕과 겹사돈을 맺은 김유신은 외조카 문무왕까지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죽은 후에 흥무대왕에 추존된다. 그때까지는 신라계 김씨나 가야계 김씨는 서로 구분 없이 ‘김씨’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통일신라의 후대에 들어오면서 신라계 김씨에서 가야계 김씨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가야계 김씨는 그동안 통합되어 있던 성씨에서 자신만의 뿌리를 찾게 되었다. 그 과정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은유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혜공왕 때 김유신 묘에서 일어난 회오리바람이 미추왕 묘까지 이어졌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통일신라 후기에 들어와서 신라계 김씨와 가야계 김씨 간에 심각한 권력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 김부식도 ‘기록이 과장되어 일부만 인용했다’는 김장청의 ‘개국공(김유신) 행록’이 나오게 된 것도 몰락한 가야계 김씨가 자신들의 뿌리인 김유신의 공을 기록하려 했던 것 아닌가 짐작된다. 즉, 김유신의 직계 후손인 장청(또는 김장청, 김유신의 손자 윤중의 아들 또는 손자)의 벼슬은 집사성의 미관말직의 하나인 ‘집사랑’이었는데, 김유신의 직계후손이 그 정도로 몰락을 했고, 그나마 김장청 이후로는 맥이 끊겨 사료에서 찾을 길이 없다.

이는 장청의 서동생인 김암(金巖)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즉, 김암은 천문학에 뛰어나 사천박사가 되었으나, 벼슬은 항상 6두품에 머물렀다. 그리고 일본으로 파견되었다가 억류될 뻔했다는 기록만 전한다. 결국 통일신라의 가야계 김씨는 신라계의 견제로 점점 더 몰락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계 김씨가 아닌 가야계 김씨로의 뿌리찾기가 이뤄진 셈이다. 

씨족의 뿌리가 수로왕 등 6가야의 왕들로부터 시작된 김해김씨 족보.
# 김씨의 분화 2, 신라계 김씨


신라계 김씨가 본격적으로 분화한 것은 경순왕 이후이다. 지금 일부 김씨의 성관은 그 뿌리를 대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한다든지, 문성왕계 또는 신무왕계 등을 그 시조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경순왕 이전에 분화되었다기보다는 경순왕 이후, 고려조에 들어와 분봉되면서 경순왕과 다른 신라계 김씨들이 자기들의 조상을 찾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면, 더 후대에 내려와 고려와 조선 시대 새로운 본관을 개관하면서 그 뿌리를 경순왕이 아닌 신라의 다른 왕으로부터 찾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2010년 신라김씨총연합 대종원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신라계 김씨 본관은 총 356개이며, 다른 성씨를 쓰고 있는 성관은 9개(감천문씨, 강릉왕씨, 곡산연씨, 광주이씨, 수성최씨, 안동권씨, 영양남씨, 철원궁씨, 태안사씨)이다. 그중 다른 성을 쓰고 있는 9개를 제외한 356개 본관 중에서 경순왕을 뿌리로 삼고 있는 본관은 총 179개이며, 177개 본관이 대보공 김알지를 뿌리로 삼고 있다. 또 대보공 김알지를 뿌리로 삼고 있는 본관도 각각 내물왕 1, 태종무열왕 4, 신무왕 9, 헌안왕 4, 희강왕 1, 문성왕 2로 나타나 있다.

결국 신라계 김씨는 경주 김씨를 비롯하여 절반 이상이 경순왕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며, 절반 가까이는 대보공 김알지의 직계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는 셈이다. 그중 일부는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조를 내물왕(안성김씨), 태종무열왕(강릉김씨·강릉왕씨 등), 신무왕(광산김씨·태안사씨 등), 헌안왕(아산김씨·광주이씨·철원궁씨 등), 희강왕(성주김씨), 문성왕(선산김씨 등)이라고 주장하는 본관들도 있다.

이들 중에는 본관이 같으면서 다른 뿌리를 주장하는 성관들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안동김씨(경순왕의 손 김숙승계, 태종무열왕 후손 김선평계), 강릉김씨(태종무열왕의 김주원계, 경순왕의 6자 강릉군계), 광산김씨(신무왕의 후손 김흥광계, 경순왕의 후손 김법노계), 아산김씨(헌안왕 후손 김신검계, 경순왕의 자 대안군 후손 김구계), 영광김씨(경순왕의 자 대안군의 후손 김심언계, 경순왕의 자 대안군의 후손 김석공계)가 그들이다.

또한 음은 같으나 한자가 틀린 본관들도 다수 있다. 예를 들어 경주김씨와 경주(京州)김씨, 경산(京山)김씨와 경산(慶山)김씨, 경성(慶城)김씨와 경성(鏡城)김씨, 광주(光州)김씨와 광주(廣州)김씨, 금산(金山)김씨와 금산(錦山)김씨, 김화(金化)김씨와 김화(金華)김씨, 무주(茂州)김씨와 무주(務州)김씨, 보은(保恩)김씨와 보은(報恩)김씨, 상산(尙山)김씨와 상산(常山)김씨, 연평(延平)김씨와 연평(連平)김씨, 영산(永山)김씨와 영산(靈山)김씨, 예천(醴川)김씨와 예천(醴泉)김씨, 옥천(沃川)김씨와 옥천(玉川)김씨, 이천(伊川)김씨와 이천(利川)김씨, 정주(定州)김씨와 정주(貞州)김씨, 등이 그들이다.

# 김씨의 거짓과 진실

결국 김씨는 진흥왕 이후 신라계, 가야계 동일하게 ‘김씨’라는 성을 썼다가 통일신라 후기에 들어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가야계 김씨가 독자적인 뿌리를 찾으며 분화되기 시작했다. 그 후 신라계 김씨 안에서도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면서 경순왕을 뿌리로 하는 김씨와 그렇지 않은 김씨로 분화했으며, 경순왕계에서도 고려 초기 사성정책과 분봉에 따라 분화가 가속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김씨의 분화와 역사에서 의문시되는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한 본관으로 400만명이 넘는 대본관을 형성할 수 있는가이다. 현재 김해김씨는 총인구가 98파에 412만5000명(2000년 인구센서스)이 넘는 대본관을 형성하고 있는데, 과연 김유신 이후 1300여년 동안 그 많은 후손을 배출할 수 있는가이다(사실 과학적으론 불가능하다).

둘째, 경순왕의 후손들은 총 179개의 본관으로 분화되었다. 여기에 다른 성씨로 분화된 곡산연씨, 수성최씨까지 더하면 181개 본관이다. 현재 이들 본관 인구를 합하면 김해김씨의 412만5000명과 비슷하다. 1000년 동안, 한 사람의 후손이 181개 본관으로 분화된 것도, 또 400만명 가까운 후손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과학(생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셋째,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를 자처하는 대다수의 본관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개관(開貫)한 본관들이다. 앞서 성씨와 족보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족보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개관을 하면서 어떻게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후손)임을 증명하고 표명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국의 대표 성씨인 김씨의 역사에서 보듯이 그 진실은 역사적 과정을 거쳐 윤색되고, 채색되고, 각색되어온 것이다. 또한 창작되고, 개작되고, 첨작되어 그 진실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게 되었다. 그중에는 진실도 있을 것이며, 거짓도 있을 것이다.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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