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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려사 : 세가

예종 10년(1115) 을미년

• 10년 봄 정월

초하루 임신일. 신년 하례행사를 생략했다.
계유일. 건덕전에서 요나라의 횡선사(橫宣使)1)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을해일. 건덕전에서 요나라의 낙기복사(落起復使)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병자일. 요나라에서 관찰사(觀察使) 고경순(高慶順)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무인일. 건덕전에서 생일을 축하하러 온 요나라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무자일. 왕의 아우인 왕서(王偦)를 검교태보·수태위로 책봉했다.
기축일. 상서 이수(李壽)2)와 시랑 황군상(黃君裳)을 요나라에 보내 횡선사를 보내 준 데에 대해 사의를 표했다.
경인일. 왕의 아우인 왕교(王僑)를 검교태보·수태위로 책봉했다.
○ 이 달에 생여진(生女眞) 완안부(完顔部)의 아구타(阿骨打)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이름을 민(旻)이라 고치고,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그 풍속은 흉노3)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는 성곽이 없었고 백성들은 산과 들에 흩어져 살았다. 또 문자가 없어서 입말과 결승4)으로 의사를 소통했다. 그 지역에는 돼지·양·소·말 등의 가축이 풍부했으며 준마가 많아 그 중에는 하루에 1천 리를 달리는 것도 있었다. 사람들은 사납고 용맹하여 아이 때부터 활로 새나 쥐 등을 쏘다가 커서는 활시위를 당기고 말을 달리면서 전투기술을 익혀 강한 병사가 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든 부락이 저마다 그 중에서 으뜸간다고 다투는 통에 부족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의 땅은 서쪽으로는 거란, 남쪽으로는 우리 영토와 접해 있었기 때문에, 옛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겨 왔다. 입조해올 때마다 사금(砂金)·담비 가죽·좋은 말 따위를 예물로 가져왔고, 우리 조정에서도 또한 해마다 은화를 후하게 주곤 했다. 혹자는, 옛날 우리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의 승려 금준(今俊)이 여진5)에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서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금나라의 선조라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김극수(金克守)가 애초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는,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고을태사(古乙太師)라 했다. 고을이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고, 활라는 아들을 많이 두었다. 장남이 핵리발(劾里鉢)이고, 막내아들은 영가(盈歌)였는데, 영가가 슬기와 용맹이 가장 빼어나 민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남 우야소(烏雅束)가 지위를 계승했고, 우야소가 죽자 그 동생인 아구타가 그 자리에 올랐다.”

• 2월

계묘일. 아들 왕구(王構)를 왕태자로 책봉했다. 그 책봉의 글은 다음과 같다.

“옛날 명철한 선왕들이 천하6)를 다스리면서 반드시 태자를 세워 천자의 자리를 잇게 한 것은, 부자간의 사사로운 감정에서가 아니라 인심을 결속시킴으로써 국가의 근본을 굳건히 하려는 의도였다. 짐이 왕업을 계승한 이후 전해온 치국의 대도를 따라 현량한 후사를 염두에 두고 태자의 지위에 어울릴 자[重明7)]를 물색해 왔다. 이에 점을 쳐서 따져보고 신하들의 자문을 구한 결과, 길일을 택하여 책봉의 명령을 내린다.
아아! 내 맏아들 왕구(王構)는 올바른 마음씨8)와 특출한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다. 인의(仁義)와 효우(孝友)는 천성에서 나왔으며, 독실하고 빛나는 덕행은 천지신명도 아는 바이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모든 말과 행동을 법도와 규범에 맞게 행하였다. 쓸데없는 오락을 일삼지 않고 올바른 도리를 즐겨 따르며, 시종일관 배움에 전념해 일상생활에서 근본도리를 찾아내었다.9) 또한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궁구해 부자와 군신간의 도리를 밝혔으니, 옛날 주나라의 문왕(文王)이 부친 왕계(王季)를 섬기고, 한나라 혜제(惠帝)가 부친 한고조(漢高祖)을 모셨던 것과도 부합한다. 그러므로 전대의 가르침에 따라 태자의 지위를 부여하고, 종묘의 제사를 받들게10) 함으로써 조종의 뜻에 부응하는11)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에 짐을 대신해 사자를 보내 너를 왕태자로 책봉하노라. 아아! 겸손한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해야만 효성을 다할 수 있고, 매사에 근신하는 마음을 지녀야 고귀한 지위를 길이 누릴 수 있는 법이다. 너는 스승의 가르침을 엄수해 안일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지며, 올바른 사람이 아니면 친하지 말고 바른 말이 아니면 듣지 말지어다. 임금과 부친과 어른[三善12)]을 섬기는 올바른 규범을 발양함으로써 온 나라의 민심을 바로 잡는다면, 짐이 아들을 둔 것이 옛날 명철한 선왕들에 비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이 원대한 뜻을 변함없이 지킴으로써 길이 큰 복록을 누릴지어다.”

무오일. 비정례적인 연등회13)를 특별히 열었다. 왕이 중광전에서 풍악을 구경하다가 중서령으로 은퇴한 최사추(崔思諏)의 부음을 듣고는 잔치를 중지했다.
정묘일. 승려들을 모아 놓고 닷새 동안 내전(內殿)에서 불경(佛經)을 독송하게 했다.

• 3월

임신일. 왕태자의 책봉을 기념하여 왕이 신봉문(神鳳門)에서 사면령을 내렸다.
임오일. 왕이 건덕전에서 신하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는 만년사(萬年詞)를 지어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계미일. 왕이 내전에서 소연(小宴)을 베풀었다.
무자일. 왕이 친히 구정(毬庭)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
무술일. 왕비 연덕궁주(延德宮主)의 생일을 맞아 내전에서 소연을 베풀었다.

• 여름 4월

임인일.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했다.
○ 이수(李壽) 등이 요나라에서 귀국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나라 황제의 회답을 가지고 왔다.

“요즘 들어 변방 관리들의 수비태세가 해이해진 바람에 하찮은 도적들이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만들기에 이 죄인들을 처형하기 위해 일부 군대를 동원할 것을 결정한 바 있다. 경이 다스리는 지역은 적의 땅과 가까운데다 경은 우리 조정의 번국을 맡고 있으므로, 특별히 군사를 정비해 폭도를 축출하라는 조칙을 보낸 바 있다. 이제 경이 사신을 보내 답장을 올렸으니, 짐의 명령을 좇는 경의 충절을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봄철을 맞은 지금 군사를 동원하면 농사를 해칠 우려가 있으니 우선 훈련에 힘쓰면서 작전 시행은 따로 기다리도록 하라.”

계축일. 왕이 종친과 재추들을 상춘정(賞春亭)으로 불러 술자리를 마련해 한껏 즐겁게 놀면서 사(詞) 두 편을 지은 다음 좌우의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하게 했다. 양부(兩府)의 재추가 표문을 올려 사양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갑인일.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왕자지(王字之)와 문공미(文公美)14)를 중서문하성의 시신(侍臣)과 추밀원의 승제(承制)15) 등이 순천관(順天館)의 낙빈정(樂賓亭)에서 전송(餞送)했다. 왕이 내시(內侍) 임경청(林景淸)16)을 시켜 자신이 지은 시 한 수를 보여주게 했으며, 아울러 술과 과일도 하사했다.
을묘일.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했다.

• 5월

무인일. 우박이 쏟아졌다.
기묘일. 왕이 구산사(龜山寺)17)에 행차했다.
정해일. 조중장(趙仲璋)18) 등에 명해 진사를 선발19)하게 했다. 당시 합격한 자의 답안[對策20)]이 거의 앞 사람의 것을 베낀 것이었으므로, 낙제한 사람들이 고소했다.
경인일. 왕이 건덕전에서 시(詩)와 부(賦)를 출제해 복시(覆試)를 보였다. 또 종친·재추·시신들을 전각 위에 앉도록 지시한 후 ‘중신(重臣)들이 현량하니, 만사가 평안하네.’라는 제목을 내려 글하는 신하로 하여금 시를 지어 올리게 했으며 왕 자신도 시를 지었다.

• 6월

기해일.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했다.
○ 김정(金精) 등을 급제21)시켰다.
병진일. 억울하게 수감된 죄수들이 없는지 재심사했다.
신유일. 왕이 내전에서 곡연(曲宴(小宴))을 베풀었다.
병인일.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이자겸(李資謙)을 수태위(守太尉)로 임명했다.

• 가을 7월

초하루 무진일. 일식이 있었다.
경진일. 왕이 명의태후(明懿太后)22)의 기일을 맞아, 개국사(開國寺)23)에 가서 분향했다.
무자일. 이부상서(吏部尙書) 왕자지(王字之)와 호부시랑(戶部侍郞) 문공미(文公美)를 송나라에 보내 황제의 후의에 사의를 표하고 아울러 공물도 올렸다. 그리고 진사 김단(金端)24)·견유저(甄惟低)25)·조석(趙奭)26)·강취정(康就正)27)·권적(權適)28) 등 다섯 명을 송나라 태학(太學)에 입학시켰는데29) 그 표문은 다음과 같았다.

“백성을 교화해 미풍양속을 이룩하는 일은 대학(大學)의 힘을 빌어야 하며, 중화(中華)의 문물로 오랑캐를 문명화시키는30)데는 선왕들의 가르침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호한(呼韓)31)이 자기 아들을 한나라에 보냈고, 토번(吐蕃)은 당나라에 서적을 요청했으니 그 사례는 비록 다르지만 그 뜻은 같은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위대한 송나라는 천년을 기약하여32) 개국하고 하늘의 뜻에 따라 천하를 통일했으며 으뜸가는 정치의 도를 떨치며 그제까지 쌓아온 폐단을 말끔히 없애버렸습니다. 학교를 3사(舍)33)로 나누고 교육은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나아가 태학(太學)을 설립해 융숭한 예법을 연구해 강의하고 명당(明堂)을 세워 성대한 전례(典禮)를 부흥시켰습니다. 훌륭한 통치가 달성되매 백 년 동안에 모든 제도34)가 일신되었고 어진 정치의 도가 융성하매 천하의 모든 제도와 글이 하나로 통일되게 되었습니다. 저희나라는 일찍부터 중국의 문화를 흠모한 나머지 개보(開寶)35) 연간으로부터 신종(神宗, 1067~1085)대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사신이 가는 편에 생도들을 딸려 보내 상국의 문물을 관찰함으로써 저희나라를 올바른 도가 실행되는 나라로 변화시키고자36) 했습니다.
그 후 어쩌다 중도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유학생을 보내던 관례를 한참동안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상국으로부터 배우고 익혔던 것을 잊게 되었고, 해박하고 상세한 기록조차[廣記備言37)] 태반이 없어지는 바람에 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이론으로 수없이 많은 학파를 만들어내니 이에 따라 이미 오랫동안 말세와 같은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규범이나 법률의 적용, 교화와 제도의 의례, 대대로 전해온 경전, 여러 학파의 학설 등의 사항을 그 방면의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이에게 물어보지 않는다면 어찌 후대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이 거론될 때마다 유학생을 보냈던 옛 관례를 좇아야겠다고 다짐해 오던 차에, 이제 마침 좋은 기회를 만나 평소의 뜻을 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상국에 입조하는 사신 편에 학생 다섯 명을 보내오니, 이 학생들이 모두 빼어난 재능을 갖춘 자는 아니어서 아직까지 학당의 예절과 정통의 문예38)를 듣고 본 바가 없으니,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정도로 학식이 부족한 것39)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지신 공자께서는 궐리(闕里)40)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푼 바 있습니다.41)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제폐하께서는 저의 깊은 충정(衷情)을 애틋하게 여기사, 이러한 옛 일을 상고하여 우리 유학생들이 국자감(國子監)이나 천자의 학교[璧雍]42)에 입학하는 특전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학업에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되면 상국 학생들의 끄트머리에나마 자리를 차지하고 박사(博士)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천자의 덕음을 생각해 저희들로 하여금 야만에서 벗어나43) 문명된 세계로 나아가게44) 함으로써 이 땅에 유학의 도가 행해지게45) 해주신다면, 그 밝으신 은혜를 길이 받들겠나이다.”

병신일. 문하시랑평장사로 은퇴한 허경(許慶)이 죽었다.

• 8월

경자일. 선정전(宣政殿) 남쪽 곁채에서 전국의 중죄수들을 심사하고 형량을 결정했다.
○ 요나라에서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했다.
을사일. 재추와 시신, 도병마판관(都兵馬判官)과 여러 위(衛)의 대장군 이상의 고위 문·무관을 소집해 지원군 파병에 대한 의견을 여러 차례 물었으나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46)
임자일. 장령전에서 소연(小宴)을 베풀었다.
계축일. 태백성47)이 낮에 나타났다.
을묘일. 왕이 외제석원에 행차했다.
무오일.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해 불공을 올렸다.
경신일. 왕이 친히 평민 노인들에게 구정(毬庭)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차등을 두어 물품을 내려주었다. 또 평장사(平章事)로 은퇴한 국가 원로 오수증(吳壽增)48) 등을 위해 합문(閤門)에서 음식을 대접했다.
○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박경작(朴景綽)이 임지로 떠나면서 하직인사를 올리자 왕이 그의 이름을 박경인(朴景仁)이라 고쳐 주고, 차와 약을 내려주었다.
갑자일. 왕이 보제사에 행차했다.
을축일. 우박이 쏟아졌다.

• 9월

정묘일. 근신(近臣)을 어원(御院)에 모아 놓고 활을 쏘는 것을 사열한 다음 상춘정(賞春亭)에서 소연(小宴)을 베풀었다.
신미일. 왕이 달밤을 틈타 처사(處士) 곽여(郭輿)가 살고 있는 순복전(純福殿)49)의 청심대(淸心臺)에 몰래 가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측근 신하들과 함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마쳤다.
임신일. 억울하게 수감된 죄수들이 없는지 재심사했다.
병술일. 동지(東池)50)에서 왕이 친히 무사(武士)를 선발했다.
정해일. 왕이 물놀이51)를 구경했다.

• 겨울 10월

기해일. 숙종(肅宗)의 기일을 맞아 왕이 개국사(開國寺)에 가서 분향했다.
갑진일. 회경전(會慶殿)에서 사흘동안 백좌인왕도량을 열고, 대궐 뜰에서 승려 만 명에게, 주·부(州府)에서 승려 2만 명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정미일. 왕이 동지(東池)에서 친히 6도(道)의 신기군(神騎軍)의 장병들을 사열했다.
경술일. 중서시랑평장사 김연(金緣)52) 등을 시켜 동교(東郊)에서 열병식을 크게 거행하게 했다.
신해일. 왕이 순복전(純福殿)에서 친히 하원(下元)53)의 초제(醮祭)를 지냈다.
계축일. 시어사 윤언순(尹彦純)을 요나라에 보내 천흥절(天興節)54)을 축하하게 했다.
○ 왕이 동지에서 친히 서경의 장병을 선발했다.

• 11월

임신일. 응건전(膺乾殿)55)에서 소연(小宴)을 베풀었다.
○ 낭중 김인관(金仁琯)을 요나라에 보내 낙기복사(落起復使)를 보내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게 했다.
경신일. 팔관회를 열었다. 왕이 구정(毬庭)에서 돌아오다가 합문(閤門) 앞에서 행차를 멈춘 채 한참이나 시를 주고받았으며, 거진 3경까지 광대를 시켜 호위행차 안에서 가무판을 벌이게 했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최지56)와 잡단(雜端) 허재(許載)가 지나치다고 간언하자, 왕이 기꺼이 용납했다.
임오일. 내전에서 소연(小宴)을 베풀었다.

갑신일. 요나라에서 이주관내 관찰사(利州管內觀察使) 야율의(耶律義)와 대리소경(大理少卿) 손양모(孫良謀)를 보내 군대 동원을 독촉했는데 그 조서는 다음과 같다.

“지난번 여진이 불공한 행동을 보이기에 정벌을 통해 그 죄를 묻고자 지난 겨울부터 여러 방면으로 토벌에 나서라는 지시를 내렸다. 현재 모든 군비는 갖추어졌으나 아직 적을 섬멸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제 각 부대가 모두 집결해 적지를 향해 진군하고 있는 바, 그대 나라의 부대는 진작 군세를 점검했으니 즉시 먼저 출발하여 적을 협격하는 일에 늦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에 사신을 시켜 고려군의 출정을 살펴보게 했으니 충성을 다해 짐의 명령에 따라 공적을 떨치라.”

그리고 포백등의 물품을 보내왔다.

경인일. 북로병마사가 다음과 같은 급보를 올렸다.
“요나라 동경(東京)에서 보낸 공문에 따르면, 요나라에서 생신사(生辰使)·횡선사(橫宣使)·낙기복사(落起復使)를 파견해 준데 대해 사례하기 위해 우리가 보낸 사신이 최근 잦은 국경 부근의 변고 때문에 아직 입국하지 못했으므로 황제의 지시에 의해 귀국하도록 조치했다고 합니다.”
신묘일. 야율의(耶律義) 등이 합문(閤門)까지 와서 하직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우리가 출병 여부를 결정짓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예를 차리지 않고 그냥 물러갔다가, 이튿날에야 하직 인사를 했다.

• 12월

경자일. 억울하게 수감된 죄수들이 없는지 재심사했다.
임인일. 요나라의 동경유수(東京留守)가 회사지례사(回謝持禮使)로 예빈부사(禮賓副使) 고효순(高孝順)을 보내 왔다.

十年 春正月 壬申朔 放朝賀. 癸酉 宴遼橫宣使于乾德殿. 乙亥 宴落起復使于乾德殿. 丙子 遼遣觀察使高慶順, 來賀生辰. 戊寅 宴遼生辰使于乾德殿. 戊子 冊弟偦, 檢校太保守太尉. 己丑 遣尙書李壽, 侍郞黃君裳如遼, 謝橫宣. 庚寅 冊弟僑檢校太保守太尉. 是月, 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 更名旻, 國號金. 其俗如匈奴, 諸部落無城郭, 分居山野. 無文字, 以言語結繩爲約束. 土饒猪羊牛馬, 馬多駿, 或有一日千里者. 其人鷙勇, 爲兒能引弓射鳥鼠, 及壯, 無不控弦走馬習戰, 爲勁兵. 諸部各相雄長, 莫能統一. 其地西直契丹, 南直我境, 故嘗事契丹及我朝. 每來朝, 以麩金·貂皮·良馬爲贄, 我朝亦厚遺銀幣, 歲常如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 遁入女眞, 居阿之古村, 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 初入女眞阿之古村, 娶女眞女, 生子曰古乙太師. 古乙生活羅太師, 活羅多子. 長曰劾里鉢, 季曰盈歌, 盈歌最雄傑, 得衆心. 盈歌死, 劾里鉢長子烏雅束嗣位, 烏雅束卒, 弟阿骨打立.”

二月 癸卯 冊子構, 爲王太子. 其文曰, “古先哲王, 撫有方夏, 必立儲貳, 以承天序者, 非敢私於親愛之閒, 將以繫人心, 而固國本也. 肆朕纘服, 若昔大猷, 眷惟上嗣之良, 久協重明之象. 考從於龜筮, 咨度於臣工, 申擇令辰, 誕揚休命. 咨! 爾元子構, 賦中和之粹, 挺岐嶷之姿. 仁義孝友之誠, 發自天性, 篤實輝光之德, 通於神明. 雖在妙齡, 夙彰全範, 出言而合度, 擧足而中規. 不事盤遊, 樂從善道, 終始典于學, 左右逢其源. 究詩書禮樂之文, 明父子君臣之義, 與夫周昌之事王季, 漢盈之奉高皇, 無以異也. 所宜據前載之言, 正東朝之位, 主之以匕鬯, 對越於祖宗. 是用, 遣使持節, 冊命爾爲王太子. 於戱! 惟敬遜可以能盡心, 惟謹愼可以長守貴. 爾其嚴師傅之訓, 誡宴安之娛, 非正人勿親, 非正音勿聽. 以揚三善之風, 以貞萬邦之心, 則朕之有子, 無愧於古先哲王矣. 尙遠乃猷, 永膺多福.” 戊午 行別例燃燈. 王御重光殿觀樂, 聞中書令致仕崔思諏卒, 罷宴. 丁卯 聚僧, 讀佛經于內殿五日.

三月 壬申 以封王太子, 御神鳳門赦. 壬午 宴群臣于乾德殿, 賦萬年詞, 宣示左右. 癸未 曲宴于內殿. 戊子 親醮于毬庭. 戊戌 以王妃延德宮主生辰, 曲宴于內殿.

夏四月 壬寅 幸妙通寺. 李壽等還自遼, 回詔曰, “近以邊臣弛備, 小寇擾民, 方行有罪之誅, 是議偏師之擧. 以卿地隣賊境, 職守侯藩, 特諭整戎, 庶令逐暴. 卿遣馳使价, 來奉謝章. 諒玆從命之臣, 盡爾爲忠之節. 適當春事, 有慮農妨, 姑務練修, 別期進取.” 癸丑 召諸王·宰樞于賞春亭, 置酒極歡, 制詞二闋, 令左右和進. 兩府宰樞表辭, 不允. 甲寅 王字之·文公美將如宋, 省侍臣, 樞密院承制等餞于順天館樂賓亭, 王遣內侍林景淸, 宣示御製詩一首, 兼賜酒果. 乙卯 幸普濟寺.57)

五月 戊寅 雨雹. 己卯 辛龜山寺. 丁亥 命趙仲璋等, 取進士. 其合格人對策, 頗蹈襲前人, 落第者訴之. 庚寅 御乾德殿, 出詩賦題, 覆試. 詔諸王·宰樞·侍臣坐殿上, 賜詩題“股肱良, 庶事康” 命詞臣製進, 王亦製之.

六月 己亥 王如奉恩寺. 賜金精等及第. 丙辰 慮囚. 辛酉 曲宴于內殿. 丙寅 以中書侍郞平章事李資謙守太尉.

秋七月 戊辰朔 日食. 庚辰 王以明懿太后忌辰, 如開國寺行香. 戊子 遣吏部尙書王字之, 戶部侍郞文公美如宋, 謝恩兼進奉. 仍遣進士金端·甄惟底·趙奭·康就正·權適等五人, 赴大學. 表曰, “化民成俗, 由乎大學之風, 用夏變夷, 籍彼先王之敎. 故呼韓遣子於漢室, 吐蕃請書於唐家, 事雖不同, 義則無異. 伏惟, 大宋之興也, 千齡接旦, 一統當天, 發揚大道之源, 掃蕩積年之弊. 學分三舍, 敎本六經, 矧又開璧水, 蒐講上儀, 立明堂, 復興盛典. 功成理定, 新制作於百年, 仁洽道豐, 一車書於萬國. 顧惟弊邑, 夙慕華風, 在乎開寶之時, 及至神宗之世, 每馳使价, 叅遣生徒, 俾以觀周, 期於變魯. 厥後, 偶因中廢, 久闕前修. 傳聞承習之已遙, 廣記備言之半脫, 士無定論, 學有多岐, 混混末流, 寥寥幾歲. 况乎法度憲章之際, 聲名文物之儀, 或歷代之遺經, 或諸家之異說, 苟非質疑於有識, 豈能成法於將來. 每及興言, 思遵舊貫, 今也, 良辰在遇, 素志可伸. 謹遣學生五人, 令隨入朝赴闕, 惟此諸生, 並非秀穎, 目不見膠庠之禮, 耳不聞雅頌之聲, 難可與言, 有類互鄕之童. 未嘗無誨, 盖存闕里之仁. 伏望皇帝陛下, 愍側深衷, 推明故事, 特下國子監, 或於璧雍收管. 許令就便學業. 則容迹於諸生之末, 摳衣博士之前. 懷我好音, 庶見鴞鳴之變, 遷于喬木, 免同鴂舌之頑, 倘令吾道以東行, 永荷大明之下燭.” 丙申 門下侍郞平章事致仕許慶卒.

八月 庚子 御宣政殿南廊, 聽斷內外重刑. 遼將伐女眞, 遣使來請兵. 乙巳 召宰樞·侍臣, 都兵馬判官, 諸衛大將軍以上, 問至再三, 卒無定議. 壬子 曲宴于長齡殿. 癸丑 太白晝見. 乙卯 幸外帝釋院. 戊午 幸妙通寺, 作佛事. 庚申 親饗庶老於毬庭, 賜物有差. 又饗國老致仕平章事吳壽增等於閤門. 西北面兵馬使朴景綽陛辭, 改賜名景仁, 賜茶藥. 甲子 幸普濟寺. 乙丑 雨雹.

九月 丁卯 召集近臣于御院, 閱射, 曲宴于賞春亭. 辛未 王乘月微行, 幸處士郭輿所居純福殿淸心臺, 置酒, 與近臣論文, 至曉乃罷. 壬申 慮囚. 丙戌 親選武士于東池. 丁亥 觀水戲.

冬十月 己亥 王以肅宗忌辰, 如開國寺行香. 甲辰 設百座仁王道場于會慶殿三日, 齋僧一萬于關庭, 二萬于州府. 丁未 親閱六道神騎將士于東池. 庚戌 命中書侍郞平章事金緣等, 大閱于東郊. 辛亥 親醮下元於純福殿. 癸丑 遣侍御史尹彦純如遼, 賀天興節. 親選西京將士于東池.

十一月 壬申 曲宴于膺乾殿. 遣郞中金仁琯如遼, 謝落起復. 庚辰 設八關會. 王自毬庭, 還至閤門前駐蹕, 唱和久之, 命倡優歌舞仗內, 幾至三鼓. 御史大夫崔贄, 雜端許載進諫, 王嘉納之. 壬午 曲宴于內殿. 甲申 遼遣利州管內觀察使耶律義, 大理少卿孫良謀, 來督發兵, 詔云, “昨以女眞不恭, 王師問罪, 自去冬而降詔, 俾分路以進攻. 雖曰整兵, 未能殄寇. 今則諸軍並會, 叩境前行, 况爾兵戎, 早經點閱, 便可卽時而先出, 毋或相應以後時. 仍飭使人, 就觀進發, 勉圖忠效, 惟在敬從.” 仍賜段匹諸物. 庚寅 北路兵馬使馳報, “遼東京牒, ‘昨奉敕旨, 高麗所遣生辰·橫宣·落起復三謝使, 近緣邊境多故, 未得入界, 已令還國.’” 辛卯 耶律義等詣閤門欲辭, 以出兵之議久不決, 不成禮而退, 翼日乃辭.

十二月 庚子 慮囚. 壬寅 遼東京留守遣回謝持禮使禮賓副使高孝順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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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예종 10년(1115) 을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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