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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려사 : 세가

인종 4년(1126) 병오년

• 4년 봄 정월

갑오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 2월

정사일. 회안백(淮安伯) 왕기(王沂)가 죽었다.
무오일. 순종(順宗)의 연복궁주(延福宮主) 김씨1)가 죽었다.
경신일. 왕비 이씨를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책봉했다.
신유일. 내시지후(內侍祗候) 김찬(金粲),2)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3)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4)·오탁(吳卓),5) 대장군(大將軍) 권수(權秀), 장군(將軍) 고석(高碩) 등과 함께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을 살해하려는 계획6)을 세웠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도리어 이자겸과 척준경이 군사를 동원해 궁궐로 침범해 왔다.
임술일. 그들이 궁궐을 불태웠다.7)
계해일. 이자겸과 척준경이 왕을 협박해 남궁(南宮)으로 옮기게 한 다음, 안보린·최탁·권수·고석과 숙위하던 좌복야(左僕射) 홍관(洪灌) 등 17명을 죽였다.8) 이 외에도 죽은 군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갑자일. 이자겸 등이 지녹연과 김찬을 먼 곳으로 유배보내면서, 지녹연은 도중에 살해해 버렸다.

• 3월

초하루 정묘일. 이자겸이 왕을 협박해 자기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했다.
신미일. 국가 정세가 어지러워 과거를 중지했다.
신묘일. 모든 관리들을 소집해 금나라를 상국으로 대우하는 일의 가부를 의논하게 하자 모두 불가하다고 했으나 이자겸과 척준경만이 찬성하고 나섰다.9)

“금나라가 과거 소국(小國)일 때, 요나라와 우리나라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 금나라는 급격히 세력을 떨쳐 요나라와 송나라를 멸망시켰으며,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군세 또한 막강해 나날이 강대국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와는 국경이 맞물려 있으니 형편상 상국으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대부터 전해온 외교원칙이니 사신을 보내어 먼저 예를 차리는 것이 옳습니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계사일. 누런 안개가 사방을 덮었다.
갑오일. 해의 빛깔이 핏빛으로 변했다.
을미일. 이지미(李之美)를 시켜 현 정세를 태묘에 고한 다음, 금나라를 상국으로 대우하는 일의 가부에 대해 점을 치게 했는데 고하는 글은 다음과 같았다.

“저 여진은 스스로 황제의 나라라 칭하면서 남으로 송나라를 침략하고 북으로 요나라를 멸망시켜 이미 많은 사람을 자기 백성으로 삼았고 영토 또한 크게 넓혔습니다. 우리나라는 저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사신을 보내어 강화할 것인지, 혹은 군사력을 길러 전쟁에 대비할 것인지 점의 결과를 보고 판단코자 하오니 신령께서는 잘 결정해 주소서.”

○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인을 사면했다.
○ 이자겸과 척준경 일당에게 사직을 지켜내었다는 이유를 들어 차등을 두어 벼슬을 주었다.

• 여름 4월

병오일. 왕이 안화사에 갈 때 이자겸이 호종했는데 왕이 예전에 거처하던 궁궐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정미일. 정응문(鄭應文)10)과 이후(李侯)를 금나라에 보내 본국을 신하라고 칭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위대하신 분께서 제업(帝業)을 전하시니 그 위엄이 사방에 빛나서 많은 나라들이 먼 곳에서부터 입조해 오고 있습니다. 하물며 국경을 접한 이웃 나라는 각별히 정성을 바쳐야 마땅할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폐하께서는 하늘로부터 받은 영명함으로 나날이 국위를 선양하시니, 조칙이 내려지기만 하면 천하 백성들이 다들 즐겨 복종하고 있으며 위세를 떨치시면 적국들이 감히 반항11)하지 못합니다. 이는 진실로 천지신명의 외호로 이룩된 제업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하찮은 작은 지방을 다스리는 덕이 부족한 사람이긴 합니다만 황제폐하의 비상한 위업을 듣고, 이미 오랫동안 존경을 바쳐 왔으니, 넉넉지 못한 예물이나마 충성의 뜻으로 바치고자 합니다. 변변치 못한 공물12)을 바치는 것이 부끄럽긴 하오나, 크신 은덕으로 받아주실 것13)을 기대합니다.”

이에 금나라에서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내왔다.

“올린 표문을 살펴보고서 고려가 스스로 신하라 일컬으면서 토산물과 포백을 바쳐온 것을 잘 알았다. 짐이 생각컨대, 멸망해야 마땅한 나라는 버리고 존속할 가치가 있는 나라는 지켜주는 일14)이야 말로 제왕이 해야 할 일이며,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보존하는 상책이다. 또한 웅대한 일을 할 인재15)는 융통성 있게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법이다.
경은 대대로 전해온 왕위를 이어받아 봉토를 다스려 오는 동안 우리 조정을 존숭해 글을 올렸으며 지역에서 나는 토산물16)을 성심껏 공물로 바쳤다. 또한 스스로 자신을 신하로 낮추어 불렀으니 모든 것을 완벽히 처리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군대의 무력을 동원하거나, 값비싼 물건으로 꾀지 않았어도 저절로 찾아왔으니 어찌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으랴?
이제 내가 그대를 군왕의 마음으로 잘 대우할 것이니 그대도 신하로서의 의리를 쉬 망각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해가 지나고 대가 바뀌어도17) 짐의 가르침을 항상 명심하라. 이 밖에 구체적으로 시행해야 할 사안이 있으면 그때마다 사신을 보내어 알릴 것이다.”

신해일. 척준경(拓俊京)을 문하시랑(門下侍郞)·판병부사(判兵部事)로, 이수(李壽)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예부사(判禮部事)로, 이자덕(李資德)과 허재(許載)를 참지정사(叅知政事)로, 김부일(金富佾)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이지미(李之美)를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로, 김향(金珦)과 김의원(金義元)18)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김부식(金富軾)을 어사대부(御史大夫)·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각각 임명했다.

• 5월

초하루 병인일. 왕이 연경궁(延慶宮)19)으로 처소를 옮겼다.
을해일. 큰 우박이 쏟아졌다.
경진일. 문무백관들을 시켜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게 했다.
을유일. 이자겸이 군사를 시켜 왕의 침소에 난입하려 하자 왕이 비밀리에 척준경에게 명하여 이자겸을 잡아 가두게 했다.
병술일. 이자겸과 그의 처자를 지방으로 유배보내고 잔당들은 먼 땅으로 나누어 유배20)시켰다.
정해일. 다음과 같은 왕명을 반포했다.

“짐이 어린 나이로 조상의 왕업을 이어 받은지라, 외가에 의지하려는 마음으로 모든 국사를 위임했더니 그들이 제멋대로 포악한 짓을 저질러 백성과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짐이 그 사실을 알았으나 막을 도리가 없던 차에 이 달 20일 졸지에 변란이 발생하자, 판병부사(判兵部事) 척준경이 의병을 일으켜 난리를 평정했다. 그 공은 잊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해당 관청에 명하여 공을 논해서 상을 주게 할 것이다. 군기소감(軍器少監) 최사전(崔思全)도 마음을 합해서 비밀리에 도왔으니,21) 공에 합당한 상을 아울러 주라.”

신묘일. 평장사(平章事) 박승중을 울진(蔚珍 :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으로 유배보냈다.

• 6월

초하루 병신일.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했다.
갑진일. 천복전(天福殿)22)에서 소재도량(消灾道場)을 열었다.
을사일. 척준경을 검교태사(檢校太師)·수태보(守太保)·문하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이공수(李公壽)를 판이부사(判吏部事)로, 김향(金珦)을 호부상서(戶部尙書)·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최사전(崔思全)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각각 임명했다.
을묘일. 이자겸의 딸인 두 왕비를 쫓아내고,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임원애(任元敱)23)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경신일. 이진복(李珍福)을 우복야(右僕射)·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으로, 고공현(高公現)을 병부상서(兵部尙書)·용호군(龍虎軍) 상장군(上將軍)으로, 임수(林修)를 전중감(殿中監)·좌우위(左右衛) 상장군(上將軍)으로 각각 임명했다. 또 정유황(鄭惟晃)24) 등 20명은 왕을 호종하고 적을 체포한 공로가 있다하여 차등을 두어 벼슬을 주었다.

• 7월

정묘일. 송나라에서 합문지후(閤門祗候)인 후장(侯章)과 귀중부(歸中孚) 등 60여 명을 보내왔다. 왕이 천복전(天福殿)에서 그 편에 부쳐온 황제의 조서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하 사람들이 아다시피 짐이 십년 넘게 태자의 자리에 있는 동안 태만하거나 안일하게 행동한 일이 없었다. 도군태상황제(道君太上皇帝 : 송나라 휘종(徽宗))께서는 오랫동안 재위하신 나머지 번잡한 정무에 염증을 내어 황위를 선양할25) 생각을 내시었다. 집이 사양했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결국 중책을 맡게 되었으니, 위대하신 역대 선조의 위업과 상황께서 맡기신 중임을 깊이 생각하면서 밤낮으로 마음을 졸이고 임무를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이런 상황에서 금나라인들이 무도하게도 곽약사(郭藥師)26)의 배반을 틈타 연산(燕山)27)을 함락시키고 변경을 소란하게 만들다가 결국 우리 도읍 부근까지 침략해 왔다. 짐이 즉위한 초기에 이런 경천동지할 일을 당하는 바람에 그대 고려국왕에게 미리 통보하지 못했다. 짐이 생각건대 국왕은 대대로 우리 조정에 충성하여 제후로서의 책봉을 받아왔으며 오랫동안 우리의 번방으로 황제의 은택을 누려왔다.
우리 선조[烈祖]28)이신 신종(神宗) 황제께서 사신을 시켜 우호관계를 맺을 당시 그 극진한 의례와 정성이 마치 골육지간 같았고 군신의 의리가 지켜졌다. 또 우리 도군태상황제께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예물을 보내면서 각별히 우대했다. 중국과 고려는 요해(遼海)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처럼 은혜와 예우를 베푼 것은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려울 때 함께 적을 물리칠 것을 바란 것이다.
고려는 금나라와 서로 마주보고 수백 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데도 오랑캐의 소굴을 소탕해 중국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니 이는 우리가 여러 대에 걸쳐 특별히 우대한 뜻을 어긴 것이다. 금나라인들은 본디부터 고려에 신하로 복속하면서 바닷가 모퉁이에 모여 살던 천한 족속인데도 천지신명의 뜻을 거역해 거란을 멸망시켰고 드디어는 중국으로 침범해 와 말할 수 없는 횡포를 부리고 있다. 만약 그들이 바라던 대로 된다면 고려는 무슨 이득을 얻겠는가? 지금 고립된 적군이 우리 영토 깊숙이 들어왔으니 마땅히 모조리 섬멸시킬 것이로되, 숙왕(肅王)29)이 인질로 잡혀갔기 때문에 짐은 다만 군사들로 하여금 적군을 국경 밖으로 쫓아내라고만 명령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는 천하의 군사를 동원해 추악한 오랑캐들의 죄를 묻고자 하니 고려국왕은 군대를 지휘해 우리 군대와 협력해 적에게 천벌을 내리도록 하라.
천자에게 죄를 지은 자를 정벌해30) 우리 조정에 포로로 바침으로써 중국이 고려에 여러 대 동안 베푼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큰 충성에 해당된다. 또한 포악무도한 자들을 토벌해 난리를 평정시킴으로써 오랑캐 땅 너머에까지 위세를 떨치는 것은 큰 의리에 해당된다. 또한 적도의 소굴을 뒤엎어 국토를 확장함으로써 교만하고 무례한 오랑캐에게 보복을 가하는 것은 큰 위엄에 해당된다. 군사를 일으키기만 하면 세 가지 이로움을 다 얻을 수 있으리니, 왕은 무엇이 거리끼기에 선뜻 나서지 않는가? 짐은 왕에게 높은 벼슬과 후한 선물을 아낌없이 내릴 것이니 잘 생각해보도록 하라.”

송나라 사신 후장(侯章)이 객사에서 다시 왕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저희들은 황제의 분부를 받들어 귀국에 왔습니다. 우리 역대 조종께서는 요(堯)·순(舜)과 같이 어진 정치를 시행하고 천하를 교화하는 데 힘썼으니 귀국과 근 2백 년 동안 우호관계를 맺어오면서 언제나 외교상의 의례를 준수했으며 우리 도군태상황제께서도 이러한 정책을 이어받아 더욱 후한 은혜를 베푼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 간악한 자들의 주장에 따라 국경지대에 사단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금나라인들로 하여금 아무런 까닭도 없이 미친 듯이 군사를 일으켜 오합지졸로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우리 중국을 기습해 약탈을 자행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당시 황제를 모시던 우리 군사가 수백만에 달했기에 대신들은 중원 땅으로 깊이 침입해 온 적군을 황하의 남쪽이나 대하(大河)의 북쪽에서 대군으로 일거에 요격하면 남김없이 섬멸시킬 수 있다는 계책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황제께서 등극하신 초기라, 효성스럽고 우애로우시며 공손하고 검소하신 황제께서는 밤낮으로 정무에 몰두하시면서31)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시는 한편 신의를 지키느라 적군을 완전히 섬멸하려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되자 금나라인들도 잘못을 뉘우치고 화의를 간청하면서 자기 나라로 돌아갈 길을 터달라고 부탁해 왔으며 이에 황제께서는 값진 물품들을 주어 군사를 다독거리기32)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다시 탐욕을 내어 하북(河北)지역의 요새들을 넘보고 있으니, 이는 천인이 공노할 짓입니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음력 8월을 기다렸다가 반드시 토벌을 위한 작전을 개시할 예정이니 그 때 귀국에서도 어찌 좌시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국경지역으로 군사를 동원해 와서 함께 적을 소탕한다면 우리와 무궁한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전을 통해 전공을 이루면 황제께서는 별도로 사신을 보내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 왕은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본국은 조상대대로 상국을 섬겨왔는 바 한 번도 빠짐없이 사대의 성의를 다해 왔습니다. 신종황제께서도 천하를 두루 비추는 태양처럼 요해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본국에까지 사신을 보내어 우호관계를 맺는 한편 예물까지 후하게 보내주셨습니다. 도군태상황제께서도 이러한 정책을 이어 본국을 더욱 우대하셨으며 상례보다 훨씬 많은 하사품을 보내셨으니 이는 실로 백대를 두고 갚더라도 보답하기 어려운 은혜였습니다. 천지 신령이 은혜 갚기를 재촉하기 않더라도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 싶은 것이 저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지금 귀하께서 사신으로33) 오면서 전한 조서를 받아보니, 무도한 금나라인들이 더욱 광포하게 구는 까닭에 장차 천하의 군대를 동원해 그 추악한 자들의 죄를 묻고자 하신다면서 저희나라도 군사를 이끌고 서로 협공해 적들에게 천벌을 내리자고 분부하셨습니다. 저는 그 조서를 봉독하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금나라인들은 진작부터 우리나라에 신하로 복속하면서도 노상 약탈과 침구를 일삼았지만 우리는 변방의 사정이 겨우 안정된 마당에 불필요한 사단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이 침략해 들어오면 응징하고 물러나면 수비를 강화했으니 이는 적들을 회유해 엉뚱한 짓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전략[羈縻34)]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 숙왕(肅王)대에 그 나라 추장 영가(盈歌)35)란 자가 다른 무리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여러 부족들을 굴복시킨 후 백산(白山)지역을 압도하면서 자주 우리 영토를 침범해 왔습니다. 또한 그 뒤를 이은 오달(吳達)과 혜노(惠奴)도 더욱 군사력을 강화해 우리를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이 귀환해, 송나라의 사신이 금나라 땅에 도착했는데 그전에 항복한 북요(北遼)의 사신과 꼭 같이 대우하더라고 보고했습니다. 또 국경지역 사람들은, 금나라인들이 거란을 멸망시킨 후 송나라 영토까지 침범해 왔으나 갓 즉위한 황제께서 그들을 섬멸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요청에 따라 화친을 허락했다고 알려왔습니다. 중국처럼 큰 나라도 이러한데 하물며 고립된 처지에 있는 저희나라는 장차 무엇에 의지하겠습니까? 금년 4월에 따로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맺자고 제의한지 이미 여러 달이 경과했지만 아직도 회답이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 본국은 천재지변이 자주 발생하는 바람에 국가 재정이 바닥나고 적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도 보유한 것이 없기에 기술자들을 모아 다시 군사력을 재정비하려는 참입니다. 보내신 조서에서 자세히 말씀하신대로 지금이야말로 과거의 치욕을 설분하고 상국의 큰 은혜를 보답할 좋은 기회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약한 군사력으로 지금 막 기세를 떨치는 오랑캐를 당해내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생각됩니다. 앞으로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정비해 두었다가 상국의 군대가 오랑캐의 땅을 압도할 때 저희나라도 있는 힘을 다해 협격하겠습니다. 천자의 위대한 힘36)을 빌려 오랑캐의 평정을 돕는 것은 또한 저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하늘도 아실 저의 진실된 뜻37)을 사신께서 복명할 때 잘 아뢰어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계미일. 후장이 송나라로 돌아가는 편에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전달하게 했다.

“상국의 사신이 갑자기 저희나라에 와서 천자의 조서를 전달하니 그 각별한 은혜를 생각하면 황공해 어찌할 바38)를 모르겠나이다. 천자는 천하의 으뜸가는 분이시라 마땅히 제후들의 존숭을 받게 마련인데다가 지금의 황제께오서는 명철하신 아홉 선황(先皇)의 뒤를 이어 천하의 모든 나라를 통어하고 계시니 모든 중생들은 응당 복속해야 옳을 것이며 만약 등을 돌린 자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로 무지의 소치39)일 것입니다.
저 금나라인들이 횡포를 부리게 된 것은 거란국이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은 이후부터였습니다. 새로이 승승장구하는 기세를 타서 점점 무도한 마음을 품더니 망령되이 상국을 어지럽게 하고는 결국 상국의 땅에까지 침범하고 말았습니다. 황제폐하께서는 천명을 받아 새로 즉위하신 후 성스러운 선대의 정치를 충실히 계승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적들이 계속 나라를 소란케 하자 크게 분노하신 나머지 하늘과 백성의 뜻에 따라 반역자를 정벌해 그 죄를 묻고자 하셨습니다. 이에 특별히 사신을 보내, 중국을 침범해 온 자에게는 정의에 입각해 반드시 벌을 내릴 것이니, 천자의 나라를 받드는 모든 자들은 예법에 따라 정벌에 나서야 한다고 간곡히 훈시하시면서 함께 군대를 동원해 적을 협격할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저희나라는 대대로 후한 은덕을 입었기에, 충성을 다해 상국에 보답하려는 뜻을 늘 지녀 왔으니, 어찌 황제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려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갑작스런 조서를 받들고 보니 흐르는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으며 분부에 따라 군대를 동원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저희나라는 본래 강성한 나라[勝國40)]가 아닐 뿐더러, 최근 온갖 천재지변을 겪는 통에 국가 재정이 소진되어 버렸으니 군량의 비축과 무기의 정비가 완료된 후라야 군사를 가동시킬 수 있으며 졸지에 일을 계획하기가 난감한 상황입니다. 더욱이 적의 군세가 매우 강성하기 때문에 경솔히 맞붙어서는 안 될 것이며, 오랑캐의 땅이 험준하니 깊이 진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분부가 이왕 내린 마당에 도리상 회피할 수가 없으니 상국의 군사가 적을 제압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적으나마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저의 간곡한 성의를 밝으신 눈으로 살펴주실 것을 바랄 뿐입니다.”41)

임진일.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했다.

• 8월

을사일. 천복전(天福殿)에서 불정도량(佛頂道場)42)을 열었다.

• 9월

을축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부식과 형부시랑(刑部侍郞) 이주연(李周衍)43)을 송나라에 보내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게 했다.
경오일.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신미일. 금나라에서 선유사(宣諭使)로 동첨서추밀원사(同僉書樞密院事) 고백숙(高伯淑)과 홍여경(鴻臚卿) 오지충(烏至忠) 등을 보냈는데 금나라 임금은 고백숙 등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

“고려가 사신을 보내는 격식은 옛날 요나라 당시의 전례를 따를 것이며, 보주로(保州路)와 변방의 우리 백성 가운데 현재 고려에 들어가 있는 자는 모두 돌려보내도록 설득하라. 고려가 우리의 말을 모두 수용하면 보주(保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의 땅을 선물로 주도록 하라.”

• 겨울 10월

병신일. 왕의 생일인 경용절(慶龍節)을 맞아 천복전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무술일. 왕이 대명궁(大明宮)44)에서 금나라 사신을 전송하면서 그 편에 사의를 표하는 회답 표문을 보냈는데, 전적으로 요나라와의 옛 외교관례를 따랐다.
임자일. 김찬(金粲)을 되불러들여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임명했다.
계축일. 왕이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특별시)에 행차했다.
기미일. 왕이 장의사(藏義寺)45)에 행차했다.

• 11월

초하루 임술일. 왕이 연흥전(延興殿)46)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갑자일. 왕이 인수사(仁壽寺)47)에 행차했다.
경오일. 남경에서 돌아와 연경궁(延慶宮)에 거처를 정했다.
정해일. 왕이 수창궁(壽昌宮)48)으로 거처를 옮겼다.

• 윤11월

초하루 임진일. 사면령을 내렸다. 참형과 교수형에 해당하는 범죄자는 형을 면제하여 유배시키고, 유배형 이하에 해당하는 범죄자는 그 형을 면제했다. 또 여든 이상의 노인 및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이, 효자와 효손, 열녀와 의부(義夫)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차등을 두어 물품을 내려주었다.
을미일. 중화전(重華殿)에서 반야도량(般若道場)49)을 열었다.
병진일. 궁궐 안에서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 12월

병인일. 이자겸이 유배지에서 죽었다.
계유일. 위위경(衛尉卿) 김자류(金子鏐)50)와 형부낭중(刑部郞中) 유덕문(柳德文)을 금나라에 보내 선유사(宣諭使)를 보내 준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하게 했는데 그 표문은 다음과 같다.

“고백숙(高伯淑)이 도착해 보주성(保州城) 지역을 본국에 귀속시키고 차후로는 되찾으려 하지 않겠다는 황제의 밀지를 전달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옛날 고구려는 본디 요산(遼山) 부근을 영토로 했고, 평양의 옛 터는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으며, 그 후 여러 차례 변동을 겪은 바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조상 때에 이르러 북쪽 요나라가 그 곳을 차지하고 이어 삼한(三韓)의 영토까지 침범해 왔는데 당시 강화를 맺기는 했으나 옛 땅은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상국이 천명을 받아 새 황제가 즉위하시고 상국의 군대가 그 지역으로 출동하자 적들은 도망쳐 버리고 결국 보주성은 무인지경이 되었습니다.
저의 부왕 대에 대요(大遼)의 변방 관리인 사을하(沙乙河)가 와서, 보주(保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는 본래 고려의 땅이니 고려가 회수하도록 하라는 황제의 칙명을 전했습니다. 이에 따라 저의 부왕은 보주성을 수리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켰습니다. 당시 저희나라는 아직 상국에 신하로 복속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선대 황제께서는 특별히 이웃 번방에 조서를 내리는 은총을 베푸시고 옛 영토를 되돌려 주셨습니다. 그 후 자손이 자리를 계승하자 천명을 받은 성스러운 황제의 덕치를 만나 그 은혜로운 말씀을 새겨듣고 신하로서의 직분을 다해왔습니다.
동쪽 귀퉁이에 위치한 작은 보주는 저희나라 변방의 땅으로서, 한 때 거란에 의해 침탈당하긴 했지만 과거에 이미 선대로부터 은사를 받았으며 이제 다시 각별한 은택으로 저희나라에 예속시켜 주시니 이 일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황제폐하의 특출한 성덕을 만난 덕분입니다. 폐하의 크고 깊은 인의를 어찌 말로 다 나타내겠습니까? 저의 미약한 힘과 천박한 자질로 그 은혜를 갚으려면, 춘추로 바치는 공납의 의례51)를 온 나라가 기꺼이 준수해야 할 것이니, 이 법도를 자손에게 영원 무궁히 전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하늘이 내려다보는 터에 오직 지성을 다할 따름입니다.”

기묘일. 천복전(天福殿)에서 소재도량을 열었다.
경진일. 김인존(金仁存)을 검교태사(檢校太師)·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김향(金珦)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최유적(崔惟迪)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각각 임명하고, 한주(韓柱)를 소환하여 형부낭중(刑部郞中)·지제고(知制誥)로 임명했다.

四年 春正月 甲午 白虹貫日.

二月 丁巳 淮安伯沂卒. 戊午 順宗延福宮主金氏卒. 庚申 冊王妃李氏, 爲延德宮主. 辛酉 內侍祗候金粲, 內侍錄事安甫鱗, 與同知樞密院事智祿延, 上將軍崔卓·吳卓, 大將軍權秀, 將軍高碩等, 謀誅李資謙·拓俊京, 不克, 資謙·俊京擧兵犯闕. 壬戌 焚宮闕. 癸亥 劫王移御南宮, 殺安甫鱗·崔卓·權秀·高碩, 及宿衛左僕射洪灌等十七人. 其餘軍士死者, 不可勝計. 甲子 資謙等流智祿延·金粲于遠地, 道殺祿延.

三月 丁卯朔 資謙劫王, 移御其第. 辛未 以國家多事, 停選擧. 辛卯 召百官, 議事金可否, 皆言不可. 獨李資謙·拓俊京曰, “金昔爲小國, 事遼及我. 今旣暴興, 滅遼與宋, 政修兵强, 日以强大. 又與我境壤相接, 勢不得不事. 且以小事大先王之道, 宜先遣使聘問.” 從之. 癸巳 黃霧四塞. 甲午 日色如血. 乙未 遣李之美, 告太廟, 筮事金可否. 其文曰, “惟彼女眞自稱尊號, 南侵皇宋, 北滅大遼, 取人旣多, 拓境亦廣. 顧惟小國與彼連疆, 或將遣使講和, 或欲養兵待變, 稽疑大筮, 神其決之.” 赦斬絞以下罪. 以李拓之黨謂之衛社, 授職有差.

夏四月 丙午 王如安和寺, 李資謙扈從. 王回望舊宮, 泫然淚下. 丁未 遣鄭應文·李侯如金, 稱臣上表曰, “大人垂統, 震耀四方, 異國入朝, 梯航萬里, 况接境之伊邇, 諒馳誠之特勤. 伏惟, 天縱英明, 日新德業, 渙號一發, 群黎無不悅隨, 威聲所加, 隣敵莫能枝梧. 實帝王之高致, 宜天地之冥扶. 伏念, 臣塉土小邦, 眇躬涼德, 聞非常之功烈, 久已極於傾虔, 惟不腆之苞苴, 可以伸於忠信. 雖愧蘋蘩之薦, 切期山藪之藏.” 金回詔曰, “省所上表, 稱臣幷進奉土宜匹物等事具悉. 朕以推亡固存, 寔帝王之造, 以小事大, 乃社稷之圖. 繄魁偉之渠材, 蘊變通之遠業. 卿家傳王爵, 世享胙封. 抗章竭尊獎之誠, 任土盡委輸之節. 仍稱卑號, 足見全能. 加非兵革之威, 誘不玉帛之惠, 自然來者, 不曰良哉? 且君父之心, 予已堅篤, 而臣子之義, 汝毋易忘. 卜世卜年, 是彝是訓. 外有合行條件事等, 卽次發使前去宣諭.” 辛亥 以拓俊京爲門下侍郞判兵部事, 李壽爲門下侍郞平章事判禮部事, 李資德·許載並叅知政事, 金富佾爲政堂文學, 李之美判樞密院事, 金珦·金義元並同知樞密院事, 金富軾爲御史大夫樞密院副使.

五月 丙寅朔 移御延慶宮. 乙亥 大雨雹. 庚辰 命文武百官齋僧祈雨. 乙酉 李資謙遣兵, 將犯御寢, 王密諭拓俊京, 執資謙囚之. 丙戌 流李資謙及妻子于外. 餘黨分配遠地. 丁亥 宣旨, “朕以幼冲, 承襲祖業, 意欲倚賴外家, 事無大小, 一切委任, 而縱爲貪暴, 殘民害國. 朕雖知之, 無以防閑. 至今月二十日, 患起倉卒, 判兵部事拓俊京倡義定難. 功不可忘, 宜令所司論功懋賞. 軍器少監崔思全同心密輔, 可幷賞功.” 辛卯 流平章事朴昇中于蔚珍.

六月 丙申朔 王如奉恩寺. 甲辰 設消灾道場于天福殿. 乙巳 以拓俊京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李公壽判吏部事, 金珦爲戶部尙書知門下省事, 崔思全爲兵部尙書. 乙卯 出李資謙女二妃, 納殿中內給事任元敱女爲妃. 庚申 以李珍福爲右僕射鷹揚軍上將軍, 高公現爲兵部尙書龍虎軍上將軍, 林修爲殿中監左右衛上將軍. 又以鄭惟晃等二十人有扈駕及捕賊功, 賜職有差.

秋七月 丁卯 宋遣閤門祗候侯章·歸中孚等六十餘人來. 王迎詔于天福殿. 詔曰, “朕居春宮十有餘載, 罔敢怠逸, 四方所聞. 道君大上皇帝享國日久, 厭於萬機之煩, 爰議內禪. 朕辭不獲命, 遂登大寶, 深惟祖宗基構之崇, 上皇付托之重, 夙夜兢惕, 懼不克任. 而金人不道, 乘郭藥師背叛之故, 陷沒燕山, 俶擾邊境, 達于都畿. 方朕卽位之初, 遭此震驚, 以故未及與王相聞. 朕惟王世濟忠孝, 膺授顯冊, 屛翰之舊, 久受國恩. 肆我烈祖神宗皇帝, 命使修聘, 禮意備至, 情同骨肉, 義則君臣. 以至于我道君太上皇帝, 錫賚不貲, 待遇加等. 朕惟中國與王遠隔遼海, 而恩禮如此, 豈有他庶幾? 艱難有以敵愾耳. 王國與金相望, 無數百里之遠, 而不能蕩其巢穴, 以報中國, 豈累朝待遇殊絶之意耶? 金人者固嘗臣屬於王, 以叢爾海隅之醜, 背天逆神, 滅絶契丹, 遂陵中國, 淫暴滋甚. 使其得志, 何有於王哉? 孤軍深入, 理當勦殄, 朕以其劫質肅王而去, 第命將士驅逐出境. 方將起天下之兵, 問罪小醜, 王其率勵師衆, 相爲表裏, 以行天誅. 夫糾逖王慝, 獻俘本朝, 以報中國數世之恩, 大忠也. 取亂攻昧, 誅討淫暴, 以伸威沙漠之外, 大義也. 拓地開境, 覆其巢穴, 報驟驕不臣之虜, 大威也. 一擧而三者皆得, 王何憚而不爲? 高爵厚賜, 朕於王無所愛惜, 王其勉之.”
侯章在館又致書於王曰, “章等來時, 奉皇帝聖旨. 祖宗行堯舜之道, 務本敦化, 與本國講好, 幾二百年, 禮無不備, 我道君太上皇帝繼而承之, 恩崇益厚. 比緣奸人啓議, 悉興邊事, 使金人猖蹶, 興無名之師, 雜烏合之衆, 襲其不備, 擾我中原, 恣行劫掠. 是時, 有勤王之師數百萬, 大臣獻議曰, ‘不擊於黃河之南, 可邀於大河之北. 正玆深入, 若大兵一擧, 則無遺矣.’ 今皇帝登祚之初, 孝悌恭儉, 旰食晏寢, 任賢使能, 崇信顧義, 未欲殄滅. 於是, 金人悔過告和, 請路求歸沙漠, 主上因而資之以金帛, 爲犒軍之具. 復有無厭之求, 窺伺河北關鎭, 人神共怒. 事不獲已, 待以秋涼, 必興師討伐, 乘此之時, 本國安可坐視? 若將兵境上, 共爲掃除, 是結無窮之好耶? 因玆成功, 別遣使人前來.”
答云, “本國自祖先以來, 承事上朝, 恭順之誠, 未嘗敢怠. 神宗皇帝, 雖遠隔遼海, 而天日之明, 無不鑑炤, 降使修聘, 恩禮尤厚. 道君太上皇帝, 繼而承之, 待遇加等, 錫賚倍常, 實百生難報之恩也. 惟天地不責其報, 而區區感激之心, 庶幾萬一. 今者, 伏承奉使宣贊來傳詔書, 以金人不道淫暴滋甚, 方將起天下之兵, 問罪小醜, 令小國率勵師衆, 相爲表裏, 以行天誅. 孤自初奉讀, 不覺流涕. 惟金人之始也, 固嘗臣屬於我國, 而常以寇掠爲事, 我國以邊鄙甫寧, 不欲生事, 來則懲而禦之, 去則備而守之, 要在羈縻而已. 我祖肅王代, 有酋長盈歌, 力以制群兇, 威以降諸部, 雄視白山, 數侵吾境. 吳達·惠奴相繼, 而作凶勢益振. 昨者, 被掠人自大金還來言, ‘上朝使臣到蕃土, 禮數一如降使北遼之例.’ 又聽邊人之言, ‘金人陷沒契丹, 遂犯上朝地界, 皇帝以登祚之初, 未欲殄滅, 因其請和, 而許之.’ 以中國之大, 而如此, 况小國孤立其將安恃乎? 今年四月, 特遣使修好, 已經累朔, 尙未回報. 載念本國, 天灾流行, 府庫焚蕩. 凡爲禦戎之具, 靡有孑遺, 方議鳩工, 以圖興復. 今詔書委曲諭示, 此實雪舊恥, 報大恩之日也. 然以殘弊之兵, 當新勝之虜, 恐非勉强所能及也. 但冀訓勵師徒, 修整器械, 待王師臨壓彼境, 則弊國敢不盡力相爲表裏. 假托威靈, 助平戎醜, 孤所願也. 天實臨之, 惟奉使宣贊復命日, 宜以此意奏聞.”
癸未 侯章還, 王附表以聞. 略曰, “王人驟至, 天詔俯頒, 拜命殊尤, 撫躬隕越. 竊以一王乃域中之大, 諸夏爲天下之尊. 况九聖之承明, 統庶邦而無外, 凡爾含識, 固宜歸心, 苟或爲讎, 實云匪茹. 惟金人之爲暴, 値丹國之不天. 旣乘新勝之鋒, 浸有橫行之意, 妄圖猾夏, 遂及侵疆. 恭惟, 皇帝陛下, 新握乾符, 遹追聖政. 遭繹騷於京國, 軫赫怒於淵衷, 將欲應天而順人, 伐叛而問罪. 特馳使, 指曲示訓詞謂, ‘犯漢者義必加誅, 而尊周者禮當敵愾.’ 遂令師旅並擧, 表裏相攻. 言念小藩世蒙厚德, 常願盡忠於報上, 豈能無意於勤王? 忽奉讀於絲綸, 第難禁於涕淚. 宜卽奔命, 以待興師. 但爲弊封, 本非勝國, 近經灾孽, 焚盡畜藏, 其於儲偫資糧, 繕修器械, 必也整齊而後動, 固難造次而可圖. 况又賊勢兇强, 未宜輕觸, 虜地險隘, 豈易長驅? 然帝命之臨門, 理無迴避. 俟王師之制敵, 少助威靈. 但願聖明灼知誠懇.” 壬辰 幸普濟寺.

八月 乙巳 設佛頂道場于天福殿.

九月 乙丑 遣樞密院副使金富軾, 刑部侍郞李周衍如宋, 賀登極. 庚午 王如安和寺. 辛未 金宣諭使同僉書樞密院事高伯淑·鴻臚卿烏至忠等來, 金主勑伯淑等曰, “高麗凡遣使往來, 當盡循遼舊仍取, 保州路及邊地人口在彼界者, 須盡數發還. 若一一聽從, 卽以保州地賜之.”

冬十月 丙申 慶龍節, 宴群臣於天福殿. 戊戌 王餞金使于大明宮. 附回表謝, 一依事遼舊制. 壬子 召還金粲爲殿中內給事. 癸丑 幸南京. 己未 幸藏義寺.

十一月 壬戌朔 宴群臣於延興殿. 甲子 幸仁壽寺. 庚午 至自南京入御延慶宮. 丁亥 移御壽昌宮.

閏月 壬辰朔 赦. 犯二罪者, 免刑流之, 犯流以下, 免罪. 饗年八十以上及鰥寡孤獨孝順節義者, 賜物有差. 乙未 設般若道場于重華殿. 丙辰 飯僧於禁中.

十二月 丙寅 李資謙死於貶所. 癸酉 遣衛尉卿金子鏐, 刑部郞中柳德文, 如金謝宣諭, 表曰, “高伯淑至, 密傳聖旨, ‘保州城地許屬高麗, 更不收復.’ 切以勾麗本地, 主彼遼山, 平壤舊墟, 限於鴨綠, 累經遷變. 逮我祖宗, 値北國之兼幷, 侵三韓之分野, 雖講隣好, 未歸故疆. 及乎天命惟新, 聖王旣作, 見兵師之起義, 致城堡之無人. 當臣父先王時, 有大遼邊臣沙乙何來, 傳皇帝勑旨曰, ‘保州本高麗地, 高麗收之可也.’ 先王於是理其城池, 實以民戶. 當此之時, 雖小邦未嘗臣屬上國, 而先帝特欲寵綏隣藩, 霑以訓辭, 賜之舊土. 及後嗣之繼序, 遭聖德之承天, 備認德音, 恭修臣職. 惟此東濱之寸土, 本爲下國之邊陲, 雖嘗見奪於契丹, 謂已拜恩於先代, 特推異渥, 仍屬弊封, 豈僥倖而致玆? 盖遭遇之異甚. 深仁大義, 不可名言. 緜力薄材, 若爲報效, 惟當備春秋之事, 守藝極之常, 擧邦國而樂輸 傳子孫而永誓. 高明在上, 悃愊無他.” 己卯 設消灾道場于天福殿. 庚辰 以金仁存檢校太師門下侍中, 金珦爲兵部尙書, 崔惟迪爲戶部尙書, 召還韓柱爲刑部郞中知制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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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역 고려사: 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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