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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려사 : 세가

공민왕 5년(1356) 병신년

• 봄 정월

신묘일.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태조(太祖)의 진전(眞殿)을 참배했다.
갑오일. 태양의 좌우에 몇 자가 넘는 붉은 기운이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 모두 태양같이 둥근 것이 들어 있어 사람들이 “3개의 해가 함께 나왔다.”라고 떠들었다.
갑진일.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홍탁(洪鐸)이 죽었다.

• 2월

을묘일. 왕이 영안왕대부인(榮安王大夫人)의 집에 행차하였다.
경신일. 원나라 황제가 왕에게 하사하는 의복과 술을 가지고 판도총랑(版圖摠郞) 선천계(宣天桂)가 원나라로부터 귀국했다.
을축일. 연등회 참석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신미일.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功臣號)를 내려주니, 왕이 선의문(宣義門) 밖까지 출영한 후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갑술일.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김영후(金永煦)를 원나라에 보내 공신호를 내려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는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리게 했다.

“참으로 만나기 힘든 영예를 내려주신 천자의 분부를 기쁘게 받으니 온 천하만국에서 이 희대의 영광을 귀를 세우고 듣고 있습니다. 그 높으신 은덕은 몸이 가루가 되도록 노력해도 보답하기 어려우니 뼈에 아로새겨 잊지 않겠나이다.
황제폐하께서는 아랫사람에게 늘 관용을 베푸시고 변함없이 불편부당한 자세를 취하시어 선조의 규범을 그대로 따르니 노하지 않으셔도 위엄이 넘치며 말씀하지 않으셔도 절로 믿음이 있나이다. 천제(天帝)가 정한 법칙에 순응하니 거치시는 곳마다 만물이 다 교화되며 계시는 곳은 다 신묘하게 감화되니 이는 마치 하늘과 땅이 온갖 초목을 길러내는 것과도 같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부터 폐하의 존귀한 모습을 뵈옵고 황궁에서 숙위(宿衛)의 임무를 맡았으나 조금의 도움도 드리지 못했으며 접역(鰈域)1)에서 왕위를 이었지만 사소한 공적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아무런 재능도 없는 저 같은 사람에게 외람되이 내려주실 줄이야 어찌 감히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제가 오랫동안 상국에 봉사한 공적을 잊지 않으시고 또한 제가 폐하를 사모하는 정성을 어여삐 여기사 특별히 저를 공신의 반열[鼎鐘2)]에 올린다는 조칙[綸綍3)]을 내리셨습니다. 이제 저는 인정(仁政)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며 절의를 실천하여 폐하께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먼 지역의 우매한 백성들4)을 잘 보호하여 태평성대를 이루기를 원하오며 상국의 밝은 훈계를 엄수해 잘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병자일. 왕이 내불당(內佛堂)에서 승려 보우(普愚)에게 음식을 대접했는데 보우(普愚)는 곧 보허(普虛)를 말한다.

• 3월

병술일. 왕과 공주가 태비(太妃)를 모시고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보우(普愚)의 선(禪)에 관한 설법을 듣고 정례(頂禮)5)한 후, 폐백(幣帛), 은으로 만든 바릿대, 수놓은 가사를 산더미처럼 시주했다. 그 문하의 승려 3백여 명에게도 빠짐없이 흰 베 두 필과 가사 한 벌씩을 시주하니, 남녀백성들이 너도 나도 뒤질세라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갑진일. 왕이 충숙왕(忠肅王)의 기일을 맞아 왕이 신효사(神孝寺)6)에 갔다.
○ 손용(孫涌)을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임명했는데, 이는 원나라 태사(太師) 왕가노(汪家奴)의 청탁에 따른 것이었다.
○ 이 달에 우리 환조(桓祖 :이성계의 부친)가 입조하자 왕이 영접하는 자리에서, 완악한 백성들을 어루만지느라 고생이 많노라고 위로했다. 당시 기씨(奇氏) 일족들이 기황후(奇皇后)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렸는데, 어떤 사람이,
“기철(奇轍)이 몰래 쌍성(雙城)의 반민(叛民)들과 내통해 파당을 맺고 그들의 도움아래 반역을 일으키려 합니다.”
라고 밀고했다. 이에 왕이 환조더러,
“경은 귀향해서 우리 백성들을 잘 진무할 것이며 만약 변란이 발생하면 나의 명령을 따르도록 하라.”
고 지시했다.

• 여름 4월

임술일.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태조(太祖)의 진전(眞殿)을 참배했다.
무진일. 지도첨의(知都僉議) 차포온(車蒲溫)이 황제가 왕에게 하사하는 의복과 술을 가지고 원나라로부터 귀국했다.
계유일. 보우(普愚)를 왕사(王師)로 봉하는 한편 부(府)를 설치해 원융부(圓融府)라 하고 좌우사(左右司)·윤(尹)·승(丞)·사인(舍人)·주부(注簿)·좌우보마배(左右寶馬陪)·지유(指諭)·행수(行首)의 관속을 두었다.
무인일. 보우(普愚)를 연경궁(延慶宮)으로 초치해 왕이 사제(師弟)의 예(禮)를 행했는데, 그 의장과 경호가 왕의 행렬[鹵簿]과 비슷했다.

• 5월

초하루 경진일. 왕이 보평청(報平廳)7)에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했는데 경천흥(慶千興)과 원송수(元松壽)가 왕을 모셨다.
임오일. 정원군(定原君) 왕균(王鈞)과 대호군(大護軍) 김진(金瑨)이 황제가 왕에게 하사하는 의복과 술을 가지고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을유일. 왕의 생일을 맞아 보우(普愚)를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이면서 승려 108명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당시 승도(僧徒)로서 사찰(寺刹)의 주지자리를 구하는 자가 다들 보우에게 빌붙어 청탁했는데, 왕이,
“금후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각 절의 주지는 왕사의 추천대로 임명할 것이며[注擬8)] 과인은 임명장만 내릴 것이오.”
라고 언질을 주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승도들이 다투어 보우의 문도가 되었다.
병술일. 전 밀직(密直) 안우(安祐)가 황제가 왕에게 하사하는 의복과 술을 가지고 원나라로부터 귀국했다.
무자일. 원나라가 기울제이부카[奇完者不花]를 보내 영안왕(榮安王 : 기황후의 부친 기자오(奇子敖)를 말한다)을 경왕(敬王)으로 고쳐 책봉하고 3대(代) 조상에게 왕호(王號)를 추증했다.
정유일. 대사도(大司徒) 기철(奇轍), 태감(太監) 권겸(權謙),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 노책(盧頙)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하고9) 그 일당들은 죄다 도주했다. 궁성을 삼엄히 경계하는 한편 정지상(鄭之祥)을 석방하고 순군제공(巡軍提控)으로 임명해 왕을 경호하게 했다.
○ 홍언박(洪彦博)을 우정승(右政丞)으로, 윤환(尹桓)을 좌정승(左政丞)으로, 원호(元顥)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허백(許伯)·황석기(黃石奇)를 찬성사(贊成事)로, 전보문(全普門)·한가귀(韓可貴)로 삼사우·좌사(司右左使)로, 김일봉(金逸逢)·김용(金鏞)·인당(印璫)을 첨의평리(僉議評理)로 각각 임명했다. 얼마 후 고의로 기철·권겸·노책(盧頙)의 일당을 놓아준 혐의로 원호(元顥)·한가귀(韓可貴)와 면성군(沔城君) 구영검(具榮儉)을 하옥시켜 처형한 다음 그 가산을 적몰했다.
○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10)했다.
○ 평리(評理) 인당,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강중경(姜仲卿)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사윤(司尹) 신순(辛珣)11)·유홍(兪洪), 전 대호군(大護軍) 최영(崔瑩), 전 부정(副正) 최부개(崔夫介)를 부사(副使)로 각각 임명해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게 했다. 또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12)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전 대호군(大護軍) 공천보(貢天甫), 전 종부령(宗簿令) 김원봉(金元鳳)을 부사(副使)로 각각 임명해 쌍성(雙城) 등지를 수복13)하게 했다. 인당이 먼저 출발했는데 강중경(姜仲卿)이 술에 골아 떨어졌다가 뒤늦게 와서 객기를 부렸다. 인당이 제지했으나 듣지 않자 신순에게 눈짓해 처형해 버린 후 왕에게 “강중경이 역심(逆心)을 품었으므로 군법에 따라 처치했습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온 나라 사람들이 처형한 이유를 알지 못해 물의가 분분했다.
기해일. 정휘(鄭暉)14)를 서북면 병마사(兵馬使)로, 홍거원(洪巨源)·이사경(李思敬)15)를 그 부사(副使)로, 정인(鄭絪)을 강릉교주도(江陵交州道)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신청(申靑)을 평양도 순문사(巡問使)로 각각 임명했다.
경자일. 전 밀직(密直) 홍의(洪義)가 죽었다.
임인일. 왕이 각 부대의 만호(萬戶)·진무(鎭撫)·천호(千戶)·백호(百戶)들의 패(牌)를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계묘일. 진병도량(鎭兵道場)을 강안전(康安殿) 및 여러 사원에서 닷새간 열었다.

• 6월

계축일. 인당(印璫)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 : 지금의 랴오닝성 단둥시 일대) 등 세 참(站)을 공격해 격파했다.
을묘일. 김경직(金敬直)을 전라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임명했다.
기미일. 쌍성인(雙城人) 조도적(趙都赤)이 입조해오므로 금패(金牌)를 하사하고 고려 쌍성지면관군천호(高麗雙城地面管軍千戶) 벼슬을 주었다.
경신일. 전 찬성사(贊成事) 윤시우(尹時遇)를 제주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임명했다.
계해일. 원나라에서 직성사인(直省舍人)편에 기철(奇轍)을 태사도(太司徒)로 임명한다는 명령서와 인장(印章)을 보내오자, 서북면 병마부사(兵馬副使) 신순(辛珣)이 도중에 그 일행을 만나 명령서와 인장을 빼앗는 한편 사인(舍人)을 가두고 수행인[傔從] 세 명을 죽였는데 사인은 밤중에 도망쳐버렸다.
을축일. 전 호군(護軍) 임중보(林仲甫)가 영릉(永陵 : 충혜왕)의 서자 석기(釋器)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16)를 꾸민다는 말을 들은 왕이 그를 순군(巡軍)에 수감시켰다. 그 공술에 전 정승(政丞) 손수경(孫守卿) 등 10여 명이 거명되었다.
기사일. 손수경(孫守卿) 등을 참형에 처하는 한편, 그 일당인 찬성사(贊成事) 강윤충(康允忠)을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폄출하고 한양윤(漢陽尹) 홍중원(洪仲元) 등을 장형에 처했으며 석기는 외지로 내쫓았다.
을해일. 왕이 지정(至正 : 원나라 순제의 연호) 연호(年號)의 사용을 중지17)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18)

“우리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여신 이후 역대 선왕들께서 왕업을 잘 계승하신 결과 모든 제도와 예악이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그런데 근래에 나라의 풍속이 일변해 오직 권세만을 추구하게 되었으니, 기철(奇轍)의 일당들이 임금조차도 무시하고 마구 위세를 부려 나라의 법도를 뒤흔드는 일이 벌어졌다. 제 기분에 따라 관리의 임용과 승진을 멋대로 행하니 이 때문에 행정명령이 아무렇게나 변경되었으며 남이 소유한 토지나 사람을 제멋대로 빼앗곤 했다.
이러한 일은 과인이 부덕하기에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국가의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아 제어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가? 혹은 천지만물이 극성하면 반드시 변하게 마련이라는 하늘의 이치에 따라 성세가 난세로 바뀐 것인가? 그 까닭을 깊이 생각해 보면서 늘 조심스럽게 처신해 오던 중 최근 다행이 조종 영령 덕분에 기철 등을 처단할 수 있었다.
석기는 서자일 뿐 아니라 계집종[私婢]의 소생에 지나지 않는 자인데도 손수경(孫守卿) 등이 그를 의지해 반역을 꾀했기에 형법에 따라 처단하였다. 금후로는 더욱 정치에 마음을 다 쏟을 것이며 법의 권위를 확립하고 기강을 정돈함으로써 우리 조종들께서 세우신 법을 회복해 온 나라 백성들과 함께 새롭게 출발하고자 한다. 이에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고 천명天命을 다시 잇기 위한 조치로 참수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를 모두 사면한다. 또 기철·노책(盧頙)·손수경 등으로부터 속임을 당해 죄에 연루된 자들도 용서할 것이다.
태조와 역대 선왕들께는 존호를 덧붙여 드리고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낼 것이며 능을 지키는 인호(人戶)는 요역을 면제해 줄 것이다. 사전(祀典)에 등록된 사직(社稷)과 산천(山川)의 신령을 모신 사당에도 덕호(德號)를 덧붙이며 부정한 귀신에 대한 제사는 일절 폐지할 것이다.
역적의 노비인 자가 주인의 권세에 의지해 남의 토지를 점탈하고 평민들을 노역에 동원하거나 양가의 자녀들을 모아 떼를 지어 악행을 일삼는 자들은 철저히 조사해 그 괴수는 끝까지 치죄하고 집은 헐어버릴 것이며 죄질에 따라 처벌할 것이다. 또 양가의 자녀들은 그 부모에게 돌려보내고 가산은 몰수하여 국가재정에 귀속시킬 것이며 점탈한 민호는 그대로 생업을 유지하면서 국가의 각종 부역에 종사하게 할 것이다.
세곡을 조운(漕運)하는 일이 불가능하여19) 모두 육로를 이용하고 있으니 해당 관청에서는 각 지역의 거리를 측량해 원(院)과 관(館)을 설치하고 그 유지에 필요한 토지를 다시 지급하도록 하라. 또 행성과 역적들이 점유했던 인민들은 그 곁에 집을 짓게 해 주거의 편리를 도모해 주도록 할 것이다.
아아! 반란을 제압해 나라를 정상으로 회복했으니 관용을 베풀어야 마땅할지며 어진 이와 재주있는 사람에게 정사를 맡겨 융성한 태평성대를 이제 이루려고 하노라.”

○ 원나라가 우리나라에서 보낸 절일사(節日使) 김구년(金龜年)을 요양성(遼陽省)에 수감하고 군사 80만 명을 동원해 토벌에 나선다고 공언하니 서북면 병마사(兵馬使) 인당이 수비군의 증원을 요청했다.
병자일. 홍익(洪翊)20)과 황하연(黃河衍)을 처형했다.
정축일.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진영서(陳永緖)21)를 시켜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특별시)의 지세를 살펴보게 했다.
○ 만호(萬戶) 홍유(洪瑜)의 가산을 몰수해 얻은 쌀 1천 석을 구휼용으로 빈민에게 대여해 주었다.

• 가을 7월

초하루 기묘일. 위왕(魏王)22)의 태자가 압록강(鴨綠江)에 당도하자 왕이 수행원 두 명만 데리고 강을 건너도록 허락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임오일. 백성들이 가족과 함께 도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왕이 남경의 지세를 살펴보라는 지시를 내리자 민심이 뒤숭숭해져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는 행렬이 시장바닥을 이루자 이를 금지시킨 것이다.
을유일. 충용(忠勇) 4위(衛)를 설치했다.
정해일. 다시 관제(官制)를 개정했다.
○ 홍언박(洪彦博)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윤환(尹桓)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유탁(柳濯)을 문하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허백(許伯)을 중서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황석기(黃石奇)를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김용(金鏞)을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로 김일봉(金逸逢)과 인당(印璫)을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이인복(李仁復)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전보문(全普門)와 정연(鄭珚)을 수사공(守司空)·좌우복야(左右僕射)로, 경천흥(慶千興)을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로, 최인원(崔仁遠)을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안우(安祐)를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배천경(裴天慶)과 황상(黃裳)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유인우(柳仁雨)와 이춘부(李春富)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김희조(金希祖)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 유숙(柳淑)을 추밀원학사(樞密院學士)로 각각 임명했다.
○ 동북면 병마사(兵馬使) 유인우(柳仁雨)가 쌍성(雙城)을 함락시키고 총관(摠管) 조소생(趙小生)23) 천호(千戶) 탁도경(卓都卿)24)이 도망쳐버리니 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 영흥)·등주(登州 : 지금의 강원도 안변군 안변)·정주(定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장주(長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장원)·예주(預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고주(高州 : 지금의 함경남도 고원군)·문주(文州 : 지금의 강원도 문천시)·의주(宜州 : 지금의 강원도 문천시 덕원) 및 선덕진(宣德鎭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선덕면)·원흥진(元興鎭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면 원흥리)·영인진(寧仁鎭 : 지금의 함경남도 녕원군 녕원)·요덕진(耀德鎭 : 지금의 함경남도 요덕군 요덕)·정변진(靜邊鎭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함주(咸州 : 지금의 함경남도 함주군) 이북은 고종(高宗) 무오년 이후 원나라가 차지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한 것이다.
계사일. 내전에서 우란분재(盂蘭盆齋)25)를 열었다.
정유일. 원나라에서 중서성(中書省) 단사관(斷事官) 사데이칸[撒迪罕]과 상의봉어(尙衣奉御) 도타이[朶歹]를 압록강까지 보내 황제의 조서를 전달했다.

“고려는 우리 세조(世祖)께서 천하를 통일하신 초기부터 천명의 소재를 잘 알아 온 나라가 신하로 복속해 왔으며 서로 혼인관계까지 맺어 지금까지 백 년 동안 우호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근자에 간특한 백성들이 돌연 변란을 일으켜 우리 영토로 넘어와 우리 백성들을 침구했으며 우리 객사(客舍)를 불태우고 우리 행인들의 길을 막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나라의 법률로 따지자면 토벌해 도륙해야 마땅하겠지만, 혹시 너희 나라에서 죄를 짓고 도망친 어쭙잖은 도적떼들이 무리를 불러 모아 그런 짓을 저지른 게 아닌가, 혹은 딴 나라 사람들이 너희 나라 백성을 사칭해 병란을 일부러 야기함으로써 우리간의 오랜 우호관계를 이간질하려는 것이나 아닌지 아직 의심스럽다.
만약 진위(眞僞)를 따지지 않고 우리 군사를 출동시킬 경우 옥석(玉石)의 구분 없이 모두 섬멸되어버릴 것이니 이는 인정상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이에 특별히 사데이칸[撒迪罕] 등을 그리로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딴 마음을 먹지 말고 그대의 군대를 동원해 변란을 일으킨 자들을 투항하게 하거나 체포할 것이며 아니면 우리 군대와 힘을 합쳐 협공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나라와 백성을 안정시키고 이제까지의 우호를 길이 도탑게 지켜나가도록 할 것이며, 향후의 조치사항을 상세히 보고할지어다.”

무신일. 서북면 병마사(兵馬使) 인당(印璫)을 참형에 처하는 한편 사데이칸[撒迪罕]편에 다음과 같은 표문을 보냈다.

“이 어리석은 자가 목숨만을 보전하려고 하오니 황제폐하께서 저희의 사정을 깊이 헤아리사 용서해 주실 것을 감히 바라면서 주제넘게 사정을 설명드리오니 부디 들어주소서. 먼 동쪽 끝에 자리 잡은 저희나라는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같은 성대에도 그저 한 기미(羈縻)26)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상국의 세조(世祖)께서 황휘에 오르시자 저희는 천명(天命)의 소재를 알고서 누구보다 앞서 귀부해 대대로 미미하나마 공로를 쌓았으며 이에 따라 상국에서도 나날이 더욱 큰 은택을 베풀어 주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역적 기철(奇轍)이 노책(盧頙)·권겸(權謙)과 반역음모를 꾸며 나라의 화근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기철 등은 상국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것을 기화로 상국의 위엄에 가탁해 권세를 떨치면서 임금을 협박해 꼼짝 못하게 해 놓고 남이 소유한 인민(人民)을 끝없이 빼앗았으며 남이 소유한 토지는 거리낌 없이 탈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상국의 조정을 두려워 한 나머지 한 번도 감히 문책을 못했으니 백성들의 원한이야 어찌 밝게 드러날 수 있었겠습니까?
기철 등은 죄악이 쌓이고 쌓이면 마침내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할 것을 스스로 알아차렸으며 또한 전쟁이 치열해 천하가 소란한 지금 자신들이 순식간에 힘을 잃고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상황이 닥칠 것을 우려해 스스로의 안전과 권력을 굳게 유지하려고 전국의 관아에 죄다 친척들을 배치하고 요직이라 불리는 곳에는 모조리 심복들을 심어두었습니다. 또 제멋대로 무기를 만들어 공공연히 내놓고 전투훈련을 시행했으며 유언비어를 마구 퍼뜨려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금년 5월 18일에는 무뢰배들을 불러 모아 한날한시에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배에 무기를 싣고 도성 인근 강어구까지 침범하는 한편 일당 몇 명을 시켜 조서를 가지고 온 상국의 사신이라 사칭하고서 궁문까지 와서 저와 신하들을 몰살시킴으로써 제 욕심을 채우려 하니 국가의 안위와 저희들의 생사가 순식간에 갈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황제폐하의 성덕 덕분에 겨우 임기응변의 조치를 취해 역적 도당들을 체포했으며, 또 다른 변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미처 상국에 보고드릴 겨를도 없이 그 모두를 의법 처단했으니 진실로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또한 변방의 백성들이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경거망동할 것과 간특한 자들이 오가며 우리나라의 실상을 그릇되게 전파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관방(關防)을 설치해 출입을 통제하게 했는데, 그 소속관리와 군사가 강을 건너가 상국의 백성들을 약탈한 행위는 진실로 본의가 아니었으며 반드시 그런 죄를 저지른 자를 발본색원해 의법처단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천지(天地)같은 인덕을 넓게 베푸사 부디 진노를 거두시고 바다같이 넓은 은택을 내리시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잔약한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오면 4천 리 우리 강토가 영원히 상국의 바닷가 울타리가 될 것이며 억만 년을 두고 오로지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겠나이다.”

• 8월

임자일. 첨의평리(僉議評理) 황순(黃順)을 강릉도와 삭방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임명했다.
무오일. 채하중(蔡河中)을 순천(順天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으로, 인승단(印承旦)을 보안(保安 : 지금의 전라남도 부안군 보안면)으로 유배 보내는 한편, 정연(鄭珚)을 청주목사(淸州牧使)로 폄출했다.
기사일. 왕이 『서경』 「무일편(無逸篇)」27)을 20여 본 필사하게 한 다음 근신들에게 하사했다.

• 9월

경진일. 양광도(楊廣道)와 전라도(全羅道)에 사자를 보내 제주(濟州) 사람들과 화척(禾尺)·재인(才人)28)을 몰아다가 서북면의 수졸(戍卒)로 충당했다.
신사일. 내첨사(內詹事)와 내상시(內常侍)29) 등의 관청을 신설했다.
계미일. 곡성백(曲城伯) 염제신(廉悌臣)을 서북면 도원수(都元帥)로, 형부상서(刑部尙書) 유연(柳淵),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김지순(金之順)과 상장군(上將軍) 김원명(金元命)을 그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해 각각 담비가죽옷과 금띠를 내려주고 이어 지휘권의 표시로 월(鉞)을 주어 출정시켰다.
○ 평양 도순문사(都巡問使) 이여경(李餘慶)30)이 포로로 잡은 여진(女眞) 남녀 20여 명을 바치자 그들을 양광도에 나누어 거주시키게 했다.
기축일. 동북면 병마사(兵馬使)가 포로로 잡은 여진 여자 20명을 바치자 각 관청의 여종으로 나누어 소속시켰다.
기해일. 왕이 구정(毬庭)에서 열병했다. 이 달에 우리 환조(桓祖)를 대중대부(大中大夫)·사복경(司僕卿)으로 임명하면서 집 한 채를 내려주었다.

• 겨울 10월

갑인일. 원나라에서 다시 사데이칸[撒迪罕] 편에 조서를 보내오자 왕이 호위병과 무기를 잔뜩 벌여놓고 궁문 밖까지 나가 맞이했는데 그 조서는 다음과 같았다.

“옛날 우리 세조황제께서 중국을 통일하시자 그대 고려국에서 남보다 앞서 귀순해오므로 동쪽의 번국(藩國)으로 삼아 주었으며, 또 고려에서 우리 황실에 혼인을 요청하니 황제께서는 또한 윤허하셨다. 그 후 백 년이 다 되어가도록 두 나라가 계속 우호를 유지하며 전혀 불화가 없었는데 올해 여름에 그대 나라의 유병(游兵)31)이 우리 강역에 들어와 우리 역참을 훼손하는 통에 변방의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다. 이 때문에 사신을 보내어 상황을 알리게 했더니 사신이 돌아오는 편에 근자에 방비가 소홀한 틈을 타 국경을 침범한 무리를 이미 처단했다는 그대의 보고를 받았다. 또한 그대는, 기철의 변란이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났던지라 우선 평정하기에 급급해 미처 상황을 보고하지 못했노라고 알려왔다.
그간 그대가 변란에 대처했던 정황에 대해서는 우리 중서성에서 짐에서 상세히 보고하였기로 짐이 사정을 잘 알고 있다. 역대 우리 선황들께서 아래 나라들을 어여삐 여기사 베푸셨던 은덕과, 고려의 역대 국왕들이 우리를 사모해온 정성을 생각하면 한번 실책을 저질렀다고 옛날부터 내려준 은택을 단번에 끊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엄격히 판단하건대, 만약 그대가 당초 그 수괴를 체포했을 때 죄상을 상세히 보고했더라면 짐 또한 천하와 함께 권선징악의 도리에 따라 처결했을 터이지 어찌 사사로운 정리를 좇아 천하의 공변된 원리를 무시했겠는가? 또한 워낙 갑자기 변란이 발생해 보고할 겨를이 없다고 말하지만, 일이 진정된 뒤에도 어찌해 먼저 우리에게 급히 보고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고 게다가 죄를 뉘우치고 솔직히 말해 왔기로, 특별히 관용을 베풀어 그대의 잘못을 용서하는 바이니, 금후로는 근신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조심하고 규범을 철저히 따를 것이며 백성들을 잘 위무해 우리의 동쪽 변방을 잘 지키도록 하라. 짐의 분부를 어기지 아니하면 그대에게 경사가 찾아 올 것이다. 아아! 하해와 같은 은덕[大造之心]32)을 베풀어 그대의 과오와 죄과를 용서하는 바이며, 지극히 어진 덕을 펴서 먼 변방을 위무해 안도시키노라.”

○ 왕과 공주가 함께 원나라 사신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무오일.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인복(李仁復)을 원나라에 보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리게 했다.

“폐하께서는 천지와 같은 큰 은혜로 만백성의 삶을 보존해 주시고 부모와 같은 지극한 인덕으로 이 어리석은 저의 과오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역신이 신하로서의 도리를 저버리고 나라를 거진 전복시키려 하므로 어리석은 제가 급히 대응하느라 미처 천자께 사정을 보고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폐하께서는 멀리 내다보시는 밝은 혜안과 천하를 아우르는 넓은 도량으로 저의 조처가 부득이 한 것이었음을 헤아리시고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이에 진노를 거두시고 지난 일을 탓하지 않으셨으며 도리어 은택을 내리시어 함께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부여하셨으니 이는 천지가 만물을 온전히 살리고 부모가 자식의 과오를 떨어주는 것보다 더욱 큰 은혜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목석(木石)이 아닐진대 어찌 그 은혜에 감사드릴 줄을 모르겠습니까? 앞으로 저는 폐하의 덕음을 모든 신민들에게 공표함으로써 온 나라를 편안하게 할 것이며 해마다 조공을 빠짐없이 바쳐 영원토록 변함없이 충성하겠나이다.”

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요사이 역신 기철(奇轍) 등이 변란을 일으켜 나라를 위태롭게 할 음모를 꾸몄으나 요행히 폐하의 성덕(聖德)에 의지하여 화근(禍根)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이 난 집에서 불끄기에만 급급하듯이 너무나 창졸간의 일이라 미처 보고를 드리지 못했으나, 다급한 나머지 경솔하게 무력을 사용한 저로 하여금 다행히 죽음을 면하게 해 주시니 너무나 황공해 무어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천지간에 몸 둘 곳이 없이 두려움에 떠는 저에게 특별히 사면의 은택을 베푸시니 분골쇄신하여 노력한들 어찌 그 은택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왕 천지나 부모처럼 저에게 재생의 은덕을 베풀어주셨으니 이제 폐하께 감히 저희나라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아뢰고자 합니다. 돌이켜보면 과거 세조황제께서 일본을 정벌할 당시 고려국왕을 승상으로 임명해 상례와는 달리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모든 관리들의 인사권을 국왕에게 위임했으니 그 권한은 다른 행성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도진무사(都鎭撫司)·이문소(理問所)·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의학제거사(醫學提擧司)를 계속 세우는 바람에 근래에는 행성의 관리들이 저마다 환관에게 청탁을 넣어 상국 조정의 인사명령을 함부로 받음으로써 국왕이 행사해야 할 권한을 멋대로 침범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한 저희나라는 감찰사(監察司)와 전법사(典法司)가 설치되어 행형(行刑)과 소송 업무를 관장해 비리를 바로잡고 있는데도 행성의 관리들이 사람들의 거짓 소청을 듣고서 각 관청에서 판결한 문건을 빼앗아다가 옳은 것을 그른 것으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도 시비를 따질 수가 없는 형편이니 사람들은 그들을 이리나 범처럼 질시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현재 행성의 관리로 있는 자들 가운데는 역적과 반란을 모의한 자까지 있습니다. 금후로는 행성 좌·우사의 관리들에 대한 인사권을 저에게 부여하심으로써 과거의 폐단을 되풀이하지 말게 하시고 이문소 등의 관청은 일절 폐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세조황제께서 일본을 정벌할 당시에는 만호(萬戶)·중군(中軍)·우군(右軍)·좌군(左軍)을 두었을 뿐이었으나, 그 후 순군(巡軍)과 합포(合浦)·전라(全羅)·탐라(耽羅)·서경(西京) 등의 만호부(萬戶府)를 증설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소속된 관리들은 모두 휘하의 군사도 없이 그저 금부(金符)만 차고서 황제의 분부를 내세우며 평민들을 꾀어서 모은 후 함부로 호계(戶計)33)라 칭하면서 각 고을들이 이들을 징발하지 못하게 강압적으로 지시하니 저희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디 세조황제께서 제정하셨던 옛 제도에 따라 일본의 침공을 수비할 만호 셋을 제외하고 뒤에 증설했던 다섯 만호부(萬戶府)와 도진무사(都鎭撫司)는 모두 폐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상국 조정에서 보내는 사신과 각 부(府)·시(寺)·원(院)·감(監)·사(司)에서 우리에게로 파견하는 관리들은 거의가 본래 저희나라 사람이온대, 그들은 황제의 후의를 전달하는 일은 등한시한 채 다만 향리에서 위세를 과시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제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면서 개인적으로 은혜를 갚거나 보복을 일삼고 있습니다. 또한 재상들을 깔보아 욕보이고 국왕마저 능멸하면서 여러 해가 지나도록 눌러 붙어 앉은 채 여러 명의 처첩(妻妾)을 거느리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해마다 두 차례씩 금강산(金剛山) 사찰들에 폐하께서 하사하신 향(香)을 내려주려 가면서 백성들을 괴롭히고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니 이는 도리어 폐하께서 복을 비는 뜻과 완전히 어긋나는 행위인 것입니다. 본국은 왜적이 침구하기 시작한 이후 방어태세를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하니 상국의 추밀원(樞密院)에서 체복사(體覆使)를 파견하는 일을 중지시켜 주시고, 그 밖에 선휘원(宣徽院)·자정원(資政院)·장작원(將作院)·대부감(大府監)·이용감(利用監)·태복시(太僕寺)의 각 관청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것을 일절 중지시켜 주십시오. 상국에서 필요로 하는 본국의 특산물은 명확한 수량을 정해 본국에서 자발적으로 바칠 수 있게 허락하심으로써 수송로에 거주하는 변방의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쌍성(雙城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삼살(三撒 :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은 애당초 저희나라 영토이온데, 저의 선조인 충헌왕(忠憲王 : 고종) 무오년(1258)에 범죄자인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여진(女眞)을 꾀어 들여 우리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관리들을 살육하고 남녀 백성들을 사로잡아가서 모조리 노비로 삼았습니다. 이에 부로(父老)들은 지금까지도 그 일을 말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근래 역신 기철(奇轍)·노책(盧頙)·권겸(權謙)이 여진의 추장들과 결탁하여 본국에서 죄를 짓고 도망가 있는 자들을 불러 모은 다음 장차 역모를 일으킬 때 내응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기철 등이 처형당한 후 많은 잔당들이 저들에게로 도주했기에 수색을 명령했더니 저들이 도리어 군사를 동원해 역적들을 도우는지라 어쩔 수 없이 군사 행동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적 무리 중 총관(摠管) 조소생(趙小生)과 천호(千戶) 탁도경(卓都卿)이 도주해 현재 그곳에 숨어 있으니 그 놈들이 우리를 이간질해 사단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생각해보면 온 천하가 죄다 상국의 영토이온데 어찌하여 상국 조정에서는 한 뼘에 불과한 황폐한 땅을 가지고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고 따지십니까? 엎드려 비옵건대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셔서 쌍성(雙城)과 삼살(三撒) 이북 땅에 관방(關防)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또 여진 족속들이 이성(泥城 :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군) 등지의 산간지역으로 넘어와 거처하면서 백성들을 못 살게 굴고 가축을 빼앗으며 본국에서 죄를 저지른 자들을 끌어다 도주시켜 추적할 수 없게 만들고 있으니, 쌍성이나 삼살과 동일하게 금지조항을 못 박아 과거처럼 무단으로 침범하는 일이 없게 조치해 주십시오.
우리나라에서 조왕(祖王 : 고려 태조) 이래로 서자를 반드시 승려로 만든 것은 적손과 서손의 구분을 명확히 함으로써 왕위를 넘보는 것을 시초부터 막자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타스테무르[塔思帖木兒]34)란 자가 충선왕(忠宣王)의 서자라고 자칭하고 있는데, 그는 일찍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가 장성한 뒤 환속한 자로서 상국의 수도로 도망쳐가서는 본국에 불만을 품고 있는 불량배들을 꾀어다가 헛소문을 불러 일으키며 민속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상국의 조정에도 전혀 보탬이 되지 않으니 부디 당사자와 그 일당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병인일. 제주(濟州)에서 가을적(加乙赤)과 홀고탁(忽古托) 등이 반란35)을 일으켜 도순문사(都巡問使) 윤시우(尹時遇), 목사(牧使) 장천년(張天年), 판관(判官) 이양길(李陽吉)을 살해했다.
병자일. 추밀원사(樞密院使) 김희조(金希祖)를 원나라에 보내 황태자(皇太子)36)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다.

• 11월

기묘일. 홍언박(洪彦博)을 면직시키고 윤환(尹桓)·허백(許伯)·유탁(柳濯)을 유배 보내는 한편, 이제현(李齊賢)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염제신(廉悌臣)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경천흥(慶千興)을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로, 이천선(李千善)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 이인복(李仁復)을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안우(安祐)를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각각 임명했다.
을유일.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배천경(裴天慶)을 동북면 병마사(兵馬使)로, 강중상(姜仲祥)을 전라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각각 임명했다.

• 12월

정미일.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천선(李千善)과 이부판서(吏部判書) 이수림(李壽林)을 원나라로 보내 신년을 하례하게 했다.
병인일. 죄질이 경미한 죄수를 사면했다. 남경의 궁궐을 보수했다.

五年 春正月 辛卯 王如奉恩寺, 謁太祖眞殿. 甲午 赤氣挾日, 長數尺餘, 其中皆有日輪, 人言, “三日並出.” 甲辰 益城府院君洪鐸卒.

二月 乙卯 幸榮安王大夫人第. 庚申 版圖摠郞宣天桂奉賜王衣酒, 還自元. 乙丑 燃燈, 王如奉恩寺. 辛未 元遣使, 錫王功臣號曰, 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 王出迎宣義門外, 宴群臣. 甲戌 遣福昌府院君金永煦如元, 謝功臣號, 表曰, “千載一時, 欣戴自天之命, 四方萬國, 聳聞稀代之榮, 銘骨何忘? 粉身難報. 欽惟皇帝陛下, 以簡臨下, 惟精執中, 率祖攸行, 不怒而威, 不言而信. 順帝之則, 所過者化, 所存者神, 至如草木之生成, 皆是乾坤之休養. 臣爰從弱歲, 獲覲淸光, 充宿衛於龍樓, 旣乏絲毫之補, 襲藩宣於鰈域, 亦微尺寸之功. 何圖十有二字之褒, 謬及百無一能之品? 伏遇皇帝陛下, 記累歲勤王之效, 憐愚臣戀主之誠, 特垂綸綍之言, 用比鼎鐘之列. 臣謹當志求仁, 而務惠於物, 身服義, 而願忠於君. 保遠民蠢蠢之情, 庶幾致於安靖, 嚴上國明明之訓, 敢不奉以周旋?” 丙子 王飯僧普愚于內佛堂, 普愚卽普虛.

三月 丙戌 王及公主奉太妃, 如奉恩寺, 聽普愚說禪, 頂禮, 施幣帛銀鉢繡袈裟, 積如丘山, 其徒三百餘僧, 皆施白布二匹袈裟一領, 士女奔波, 猶恐不及. 甲辰 王以忠肅王忌辰, 如神孝寺. 以孫涌爲監察大夫, 元太師汪家奴之請也. 是月, 我桓祖來朝, 王迎謂曰, “撫綏頑民, 不亦勞乎?” 時奇氏族倚后勢, 暴橫, 人有密告, “奇轍潛通雙城叛民, 結爲黨援謀逆.” 王諭桓祖曰, “卿宜歸鎭吾民, 脫有變, 當如我命.”

夏四月 壬戌 王如奉恩寺, 謁太祖眞殿. 戊辰 知都僉議車蒲溫, 奉賜王衣酒, 還自元. 癸酉 封普愚爲王師, 立府曰圓融, 置官屬左右司·尹·丞·舍人·注簿·左右寶馬·陪指諭·行首. 戊寅 王邀普愚于延慶宮, 行師弟禮, 其儀衛, 擬於鹵簿.

五月 庚辰朔 王御報平廳, 觀棊, 慶千興·元松壽侍. 壬午 定原君鈞, 大護軍金瑨, 奉賜王衣酒, 還自元. 乙酉 王以誕日, 邀普愚于內殿, 飯僧百八. 時僧徒求住寺者皆附愚干請, 王曰, “自今禪敎宗門寺社住持, 聽師注擬, 寡人但下除目爾.” 於是僧徒爭爲門徒, 不可勝計. 丙戌 前密直安祐奉賜王衣酒, 還自元. 戊子 元遣奇完者不花來, 改冊榮安王, 爲敬王, 追贈三代爲王.
丁酉 太司徒奇轍, 太監權謙, 慶陽府院君盧頙, 謀反伏誅, 親黨皆逃. 宮城戒嚴, 釋鄭之祥, 爲巡軍提控, 令侍衛. 以洪彦博爲右政丞, 尹桓爲左政丞, 元顥判三司事, 許伯·黃石奇爲贊成事, 全普門·韓可貴爲三司右左使, 金逸逢·金鏞·印璫爲僉議評理, 尋以故縱奇·權·盧支黨, 下顥·可貴, 沔城君具榮儉于獄, 殺之, 籍其家. 罷征東行中書省理問所. 以評理印璫, 同知密直司事姜仲卿爲西北面兵馬使, 司尹辛珣·兪洪, 前大護軍崔瑩, 前副正崔夫介爲副使, 攻鴨江以西八站. 以密直副使柳仁雨爲東北面兵馬使, 前大護軍貢天甫, 前宗簿令金元鳳爲副使, 收復雙城等地. 璫先發, 仲卿被酒, 後至使氣. 璫止之不聽, 璫目辛珣, 斬之, 報王曰, “仲卿有二心, 處以軍法.” 國家莫知其故, 物議紛紜.
己亥 以鄭暉爲西北面兵馬使, 洪巨源李思敬爲副使, 鄭絪爲江陵交州道都指揮使, 申靑爲平壤道巡問使. 庚子 前密直洪義卒. 壬寅 命收諸軍萬戶·鎭撫千戶·百戶牌. 癸卯 設鎭兵道場于康安殿及諸佛宇, 五日.

六月 癸丑 印璫引兵渡鴨綠江, 攻婆娑府等三站, 破之. 乙卯 以金敬直爲全羅道都巡問使. 己未 雙城人趙都赤來朝, 賜金牌, 授高麗雙城地面管軍千戶. 庚申 以前贊成事尹時遇爲濟州都巡問使. 癸亥 元使直省舍人, 齎奇轍太司徒宣命印章而來, 西北面兵馬副使辛珣遇諸道, 奪宣命印章, 囚舍人殺傔從三人, 舍人夜逃. 乙丑 王聞前護軍林仲甫欲奉永陵孽子釋器, 啚不軌, 繫巡軍, 辭連前政丞孫守卿等十餘人. 己巳 斬守卿等, 貶其黨贊成事康允忠, 爲東萊縣令, 杖漢陽尹洪仲元等放釋器于外.
乙亥 停至正年號, 敎曰, “洪惟我太祖創業, 列聖相承, 咸能繼述, 衣冠禮樂, 燦然可觀. 比來國俗一變, 惟勢是求, 奇轍等憑震主之威, 撓爲邦之法. 選調隨其喜怒, 政令由之伸縮, 人有土田則攘之, 人有人民則奪之. 斯豈寡人無德之所致歟, 抑紀綱不立, 無術以御之歟? 無乃理亂循環, 必極而變, 天道之然耶? 深惟玆故, 每用惕然. 日者, 幸賴祖宗之靈, 轍等伏辜. 釋器非止庶孽, 又係私婢所出, 而倚望謀逆, 若孫守卿等, 亦置典刑. 自今伊始, 勵精圖治, 修明法令, 整頓紀綱, 復我祖宗之法, 期與一國更始. 敷實德於民, 續大命于天, 二罪以下, 一切除之, 其轍·頙·守卿等詿誤連累者, 亦從原免.
太祖及歷代先王加上尊號, 修其祀事, 務盡精潔, 守陵人戶, 復其徭役. 社稷山川諸祠在祀典者, 亦加德號, 其諸淫祀, 一皆撤去. 賊臣之奴, 倚其主勢, 占奪土田, 役使平民, 多聚良家子女, 成群逞惡, 存撫按廉, 究治渠魁, 撤毁屋舍, 量罪罪之. 良家子女, 歸其父母, 籍沒家産, 以贍國用, 所占民戶, 仍令安業, 以從公役. 漕運不通, 凡所轉輸, 皆從陸路, 宜令有司, 量地遠近, 營立院館, 復其土田. 又以行省及逆賊所占人民, 廬其旁, 以便止宿. 於戱! 撥亂反正, 宜施寬大之恩, 任賢使能, 庶致隆平之治.”
元囚本國節日使金龜年于遼陽省, 聲言發八十萬兵來討, 西北面兵馬使印璫, 請濟師以備. 丙子 洪翊·黃河衍賜死. 丁丑 命判書雲觀事陳永緖, 相地于南京. 籍萬戶洪瑜家, 以米千石, 賑貸貧民.

秋七月 己卯朔 魏王太子到鴨綠江, 王命許傔從二人渡江. 壬午 禁人挈家出城. 自相地南京, 人心動搖, 負戴南行者, 如歸市故, 禁之. 乙酉 置忠勇四衛. 丁亥 復改官制. 以洪彦博爲門下侍中, 尹桓守門下侍中, 柳濯爲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許伯爲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黃石奇爲門下平章事, 金鏞爲中書平章事, 金逸逢·印璫叅知政事, 李仁復爲政堂文學, 全普門·鄭珚守司空左右僕射, 慶千興判樞密院事, 崔仁遠爲樞密院使, 安祐知樞密院事, 裴天慶·黃裳同知樞密院事, 柳仁雨·李春富爲樞密院副使, 金希祖簽書樞密院事, 柳淑爲樞密院學士. 東北面兵馬使柳仁雨陷雙城, 摠管趙小生, 千戶卓都卿遁走, 收復和·登·定·長·預·高·文·宜州, 及宣德·元興·寧仁·耀德·靜邊等鎭. 咸州以北, 自高宗戊午, 沒于元, 今皆復之. 癸巳 設盂蘭盆齋于內殿.
丁酉 元遣中書省斷事官撒迪罕·尙衣奉御朶歹, 到鴨江, 傳帝旨曰, “高麗自我世祖混一之初, 灼知天命, 擧國臣服, 爰結婚親, 于今百年. 邇者, 姦民遽生邊釁, 越我封疆, 擾我黎庶, 焚我傳舍, 阻我行人. 揆諸天憲, 討戮何疑, 尙慮叢爾賊徒, 或得罪爾邦, 逋逃嘯聚, 或從他國, 妄稱汝民, 盜用兵戈, 以閒世好. 若不詢問情僞, 大兵一臨, 玉石俱焚, 誠所不忍. 特遣撒迪罕等前去, 爾其毋生疑貳, 發爾士卒, 就便招捕, 或約我天兵, 倂力挾攻. 期於靖國安民, 永敦前好, 具悉奏聞.”
戊申 斬西北面兵馬使印璫, 附表撒迪罕, 表曰, “下愚嗇命, 但要生全, 大聖原情, 儻加存恤? 肆陳瞽說, 庶感聰聞. 竊惟小邦, 邈處東極, 隋唐之盛, 羈縻而已. 世祖龍興, 灼知天命, 首先歸附, 世著微勞, 東漸恩澤, 日新月盛, 不意賊臣奇轍, 與盧頙·權謙謀爲不軌, 生我禍階. 切詳轍等, 連姻掖庭, 假威大朝, 氣焰熏天, 脅制國主, 人有人民, 不奪不已, 人有土田, 不奪不饜. 臣畏天朝, 一不敢問, 群黎百姓, 怨豈在明? 轍等自知罪盈惡積, 人所不容, 而又妄意, 天下擾攘, 甲兵方熾, 一朝勢去, 身不能保, 乃謀自安, 務固其權, 中外官司, 皆置親戚, 凡曰要職, 無非腹心. 擅造兵器, 閑習射御, 公然爲之, 不少隱匿, 扇動訛言, 惑亂衆聽, 今年五月十八日, 召集無賴, 一時俱起, 舟載兵器, 已至江口, 又令數輩, 詐爲天使, 稱有詔旨, 已至宮門, 將欲殲我君臣, 以逞己欲, 安危死生, 閒不容髮. 尙賴聖德, 粗能應變, 旣獲賊徒, 恐有他變, 不暇申聞, 俱致於法, 誠惶誠恐, 無地措躬. 又慮邊鄙之民, 乘釁妄動, 或有奸人往來, 亂我情實, 故置關防, 以謹出入, 而其吏士, 過江劫掠, 實非本意, 考其罪人, 以正邦典. 伏望, 弘天地之仁, 霽雷霆之怒, 垂蕩蕩之洪恩, 保哀哀之微喘. 則四千餘里, 永爲薄海之藩, 億萬斯年, 專祝如岡之壽.”

八月 壬子 以僉議評理黃順爲江陵朔方道都巡問使. 戊午 流蔡河中于順天, 印承旦于保安, 貶鄭珚, 爲淸州牧使. 己巳 命寫無逸篇二十餘本, 賜近臣.

九月 庚辰 遣使于楊廣·全羅道, 刷濟州人及禾尺才人, 充西北面戍卒. 辛巳 新設內詹事·內常侍等官. 癸未 以曲城伯廉悌臣爲西北面都元帥, 刑部尙書柳淵, 判司宰寺事金之順, 上將軍金元命, 副之, 賜貂裘金帶, 仍授鉞遣之. 平壤都巡問使李餘慶, 獻俘女眞男女二十餘人, 分置楊廣道. 己丑 東北面兵馬使, 獻俘女眞女二十人, 分屬各司爲婢. 己亥 閱兵于毬庭. 是月, 以我桓祖爲大中大夫司僕卿, 賜第一區.

冬十月 甲寅 元復遣撒迪罕等, 齎詔來, 王盛陳兵衛, 出迎于宮門外, 詔曰, “昔我世祖皇帝, 混一區夏, 爾高麗國, 率先效順, 建爲東藩, 請婚帝室, 帝亦允從. 今將百年, 錫貢相望, 靡有閒言, 玆夏, 爾國游兵, 入我疆域, 毁我驛置, 邊民不寧. 是用遣使, 往告厥由, 使還附奏具稱, ‘近者境上, 乘閒侵軼之徒, 已正其罪.’ 又言‘事釁之生, 在於倉卒, 志圖靖難, 不及禀命.’ 其閒應變之狀, 中書悉以告朕, 肆朕察其事情. 追惟, 我祖宗憫下之惠, 先臣慕義之誠, 詎以一眚, 輒虧舊恩? 然裁以至公, 若爾初獲首事, 具罪以聞, 善善惡惡, 朕與天下共之, 奚肯徇私, 以紊大法? 如云倉卒, 不遑陳奏? 事定之後, 盍先馳聞? 事旣已往, 况能悔罪陳情, 玆示寬容, 特釋爾咎, 自今伊始, 小心敬愼, 率順彝章, 撫我黎庶, 固我東圉. 勿替朕命, 惟爾之休, 於戱! 赦過宥罪, 廣推大造之心, 懷遠招携, 誕布至仁之德.” 王與公主宴元使.
戊午 遣政堂文學李仁復如元, 上表曰, “乾坤洪造, 曲全庶物之生, 父母至仁, 旋弃癡兒之過. 賊子亂常, 殆將覆國, 愚臣應卒, 不及聞天. 伏蒙推視遠之明, 廓包荒之度, 揆事機之非所得已, 矜情實之無可柰何. 霽雷霆之威, 旣往不咎, 霈雨露之澤, 咸與惟新, 乾坤全物之生, 父母弃兒之過, 亦不可爲喩也. 人非石木, 豈不知感哉? 臣謹當布德音於臣庶, 以寧一邦, 修職貢於歲時, 無替萬世.”
又上書曰, “近者, 逆臣奇轍等, 謀動戈兵, 欲危社稷, 專憑聖德, 得遏禍萌, 然而失火之家, 迫于救焚, 倉皇無以先告, 弄兵之子, 幸而脫死, 惶恐難於自言. 跼天蹐地, 無所措躬, 伏蒙特降赦恩, 糜身粉骨, 奚足以報? 旣荷天地父母再造之恩, 敢陳國病, 冀達天聰. 切惟, 世皇征東, 令國王爲丞相, 行省官吏, 委國王保擧, 不入常調, 非他行省比. 其後, 續立都鎭撫司·理問所·儒學提擧司·醫學提擧司, 比來, 省官皆托婦寺, 濫受朝命, 擅作威福. 小邦有監察司·典法司, 掌刑聽訟, 糾正非理, 而省官聽人妄訴, 拘取諸司所斷文券, 以是爲非. 莫敢誰何, 人疾之如狼虎. 况今省官, 有與逆賊謀者. 願自今, 其左右司官, 令臣保擧, 勿蹈前弊, 其理問所等官司, 一切革去. 世皇東征日本時所置, 萬戶·中軍·右軍左軍耳, 其後, 增置巡軍·合浦·全羅·耽羅·西京等萬戶府. 並無所領軍徒, 佩金符, 以夸宣命, 召誘平民, 妄稱戶計, 勒令州縣, 不敢差發, 深爲未便.
如蒙欽依世祖皇帝舊制, 除三萬戶鎭守日本外, 其餘增置五萬戶府, 及都鎭撫司, 乞皆革罷. 朝廷使臣, 及府·寺·院·監司, 所差人吏, 多是小邦之人, 不務宣上德意, 專要誇耀鄕閭, 威福自恣, 恩讎必報. 屈辱宰相, 陵犯國主, 經年不還, 增娶妻妾, 無惡不爲. 金剛山諸寺, 歲再降香, 勞民生事, 反戾陛下求福之意. 本國自有倭寇以來, 備禦無或小弛. 樞密院所差·體覆使, 亦宜停罷, 宣徽院·資政院·將作院·大府監·利用監·太僕寺諸衙門, 所差人吏, 一切禁斷. 其方物, 可充用度者, 明立額數, 聽本國自獻, 庶使站路邊民獲寧, 雙城·三撒, 元是小邦之境, 先臣忠憲王戊午, 趙暉·卓靑等, 犯罪懼誅, 誘致女眞, 乘我不虞, 殺戮官吏, 繫累男女, 皆爲奴婢. 父老至今言之流涕, 指爲血讎.
比來, 逆臣奇轍·盧頙·權謙, 交結酋長, 召集逋逃, 及其謀逆, 約爲聲援, 轍等旣死, 支黨多奔于彼, 故令搜索, 彼反用兵助逆, 勢不獲已, 以致行師, 其總管趙小生, 千戶卓都卿, 今在逃竄, 竊恐構釁生事. 恭惟朝廷, 薄海內外, 莫非王土, 尺寸不毛之地, 豈計彼此哉? 伏乞歸我舊疆, 雙城·三撒以北, 許立關防. 女眞人等, 於泥城等處, 山谷之閒, 越境來居, 擾百姓, 掠牛馬, 導本國犯罪之人, 逃閃莫追, 卽與雙城·三撒無異, 乞立禁約, 毋得擅入, 似前侵害. 祖王以來, 庶孽之子, 必令爲僧, 所以明嫡庶之分, 杜覬覦之萌. 今有塔思帖木兒, 自謂忠宣王孽子, 亦嘗剃髮, 及長還俗, 奔于京師, 誘致本國群不逞之徒, 扇起訛言, 眩惑人心. 若此人者, 其於朝廷, 豈有小益? 乞將此人及其黨與, 發還本國.” 丙寅 濟州加乙赤·忽古托等叛, 殺都巡問使尹時遇, 牧使張天年, 判官李陽吉. 丙子 遣樞密院使金希祖如元, 賀皇太子千秋節.

十一月 己卯 洪彦博免, 流尹桓·許伯·柳濯, 以李齊賢爲門下侍中, 廉悌臣守門下侍中, 慶千興叅知門下政事, 李千善叅知中書政事, 李仁復爲政堂文學兼御史大夫, 安祐知門下省事. 乙酉 以知樞密院事裴天慶爲東北面兵馬使, 姜仲祥爲全羅道都巡問使.

十二月 丁未 遣叅知政事李千善, 吏部判書李壽林如元, 賀正. 丙寅 宥輕罪. 修葺南京宮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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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공민왕 5년(1356) 병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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