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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려사 : 세가

공민왕 18년(1369) 기유년

• 봄 정월

신축일. 요양성(遼陽省)의 나하추[納哈出]와 평장(平章) 홍보보(洪寶寶)가 사자를 보내 왕을 예방했다.
임인일. 왕이 친히 공주 혼전(魂殿)에 제사를 지내면서 생시처럼 매우 즐겁게 춤추고 노래하게 했다. 덕녕공주(德寧公主)와 신돈도 잔치에 참가했으며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마쳤다.

• 2월

정묘일. 왕이 친히 정릉(正陵)에서 제사를 지냈다.
계유일.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갔다.
무자일. 원나라에서 중서성(中書省) 우승(右丞) 투르칸[豆利罕]을 보내 왕에게 의복과 술을 내려주었는데 왕이 그에게 의복과 금띠를 선물로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 3월

계묘일.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왕을 우승상(右丞相)으로 승진시킨다고 알려왔다.
갑인일. 동지밀직사사 왕중귀(王重貴)를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게 하는 한편 왕을 승진시켜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는 글을 전달하게 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폐하께서 보내주신 뜻밖의 조서를 받고 깜짝 놀라 살펴본 즉 저를 높은 지위에 올려주시고 덧붙여 하사품까지 주시는 내용이라 너무나 황송하고 더욱 큰 은혜를 느낍니다. 황제께서 각기 봉토를 주어 국왕들을 세우신 것은 마치 배와 심장이 팔과 다리에 의존하는 것과 같으며, 국왕들이 유사시에 황제를 위해 군대로 적을 막는 것은 마치 손과 발이 머리와 눈을 구원하는 것과도 흡사하니 이는 예로부터 이어온 공통의 큰 원칙이며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함께 지녀온 지극한 정분인 것입니다.
저의 가계는 대대로 황실의 사위가 되어 외람되게도 황제의 은총을 받아 작위를 계승해 왔습니다. 천자의 군대가 남쪽 지방에서 승승장구 할 때 약간의 도움도 드리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폐하께서 명나라 군사를 피해 상도(上都)로 옮기신 것을 보고는 반드시 분골쇄신해 충성을 다하려 맹세했습니다. 방숙(方叔)과 소호(召虎)1)가 주나라를 중흥시키고 곽자의(郭子儀)2)와 이광필(李光弼)3)이 당나라를 부흥시켰던 일을 떠올리며 남보다 앞서 표문을 올려 군대를 진격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군마의 사료와 군량의 수송이 신속히 이루어지지 못해 곤란을 겪는 가운데 시간만 빨리 가고 공은 이루지 못했으며 마음만 바쁘고 힘은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뜻밖에 황제폐하께서는 저의 충정을 멀리서도 환히 아시고 먼저는 따뜻한 말을 보내 격려해 주셨으며 그 뒤에는 저를 우승상으로 승진시켜 명예를 드높여 주신 바, 이것만 해도 세상에 드문 지극한 영광이거니와 하물며 열흘 만에 은총을 두 차례나 내려주셨으니 그 영예야말로 참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보내주신 의복과 술은 저로 하여금 아랫사람을 배려해주시는 폐하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주고 있으니 너무나 큰 은총에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황제폐하께서는 천부적인 훌륭한 재능으로 만물이 대통(大通)하는 운수를 만났으며, 침착하고 사려깊게 역사상의 흥망성쇠를 꿰뚫어 보고 국가 중흥의 기운을 진작시켜 상벌(賞罰)과 임면(任免)의 권한을 확고히 잡으셨습니다. 여러 계책을 두루 듣고 종합해 처리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함께 분발하도록 하신다면 천지신명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적을 평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빠트리지 않고 상을 내려 천하로 하여금 모두 폐하에게로 귀복하게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제가 딴 마음 먹지 않고 오로지 충성을 다하는 까닭이지 제가 많은 상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제가 어찌 시종일관 금석같이 굳은 절의를 맹세하지 않겠습니까? 더욱 정성을 다해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드립니다.”

그러나 왕중귀는 길이 막히는 바람에 원나라로 가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왕이 재추들에게 수도를 옮기는 일에 대해 논의해보라고 지시했다.

• 여름 4월

정묘일. 신돈이 연복사(演福寺)에서 문수회를 열자 왕이 직접 가서 살펴보고 승려들에게 베 5천 5백 필을 내려주었다.
신미일. 왕이 영전(影殿)에 행차했다.
임신일. 왕이 공주의 혼전(魂殿)에 행차해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계유일. 왕이 화산놀이[火山戱]4)를 구경했다.
갑신일. 경창대군(慶昌大君) 왕유(王瑜)5)가 죽었다.
임진일. 명나라 황제가 부보랑(符寶郞) 설사(偰斯)를 보내6) 자신의 친서와 사라(紗羅)7)와 비단필[緞] 도합 40필을 내려주니,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숭인문(崇仁門)8) 밖까지 출영했는데 황제의 친서는 다음과 같았다.

“대명황제가 고려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송나라가 정치를 그르쳐 하늘의 버림을 받게 되자 우리 한족(漢族)이 아닌 원나라가 천명을 받아 백 년 넘게 중국의 주인 노릇을 해 왔다. 그러나 하늘이 무지하고 문란한 그들을 미워하여 또한 그 국운을 단절시키는 바람에 온 천하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란을 겪게 되었다.
군웅들이 봉기하던 초창기에 짐은 회수(淮水) 서쪽 지방의 한 평민이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폭도들 틈에 잘못 끼어들어 갔다. 그들이 아무 성과도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크게 걱정하던 중 천지신령께서 문무 인재를 내려주신 덕분에 동쪽으로 양자강을 건너 열네 해 동안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리는 통치술을 습득했다. 그 사이 서쪽으로 한주(漢主) 진우량(陳友諒)9)을 평정하고 동쪽으로 고소(姑蘇)10)에서 오왕(吳王)을 생포했으며, 남쪽으로 민월(閩越)지방과 팔번(八蕃)11)의 오랑캐들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원나라 임금을 쫓아버림으로써 마침내 천하를 깨끗이 하고 우리 중국의 옛 강토를 되찾았던 것이다.
금년 정월에 신민들이 짐을 황제로 추대하니 나라 이름을 대명(大明)이라 하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정했다. 다만 사방의 오랑캐 나라들에게 이 사실을 아직 알리지 않았기에 문서로 작성해 사신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고려로 가서 그 국왕에게 알리게 하는 것이다.
옛날 우리 중국은 고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그 국왕은 신하가 되거나 빈객이 되었으니 이는 중국의 덕화를 사모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하늘이 이미 그 국왕의 덕을 살펴 왕으로 삼았으니 우린들 어찌 길이 그를 고려의 국왕으로 삼지 않겠는가? 짐은 중국의 현명한 옛 임금만큼 덕망을 쌓지는 못해 천하의 오랑캐 나라를 다 복속시키지는 못하나, 어차피 이 모든 것을 천하에 두루 알려야겠기에 이렇게 사신을 보내는 것이다.”

설사가 작년 11월에 중국 금릉(金陵)을 출발해 험한 뱃길을 지나 이제야 도착한 것이니, 설사는 곧 설손(偰遜)12)의 동생이다.
○ 우제(禹磾)를 시켜 회왕(淮王)을 예방하게 했다.
○ 가뭄이 들었다.

• 5월

초하루 갑오일. 일식이 있었다.
을미일. 설사(偰斯)가 양 두 마리로 왕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정유일. 설사가 귀국길에 오르자 왕이 안장 딸린 말과 의복을 선물로 주었으나 받지 않았으며 재추들이 준 인삼과 약재들도 역시 거절했으므로 왕이 문신들을 시켜 시를 지어 증정하게 했다.
무술일. 왕이 고라리(高羅里)에 행차해 격구(擊毬)놀이를 구경했다.
기해일. 왕의 생일을 맞아 영전(影殿)에서 승려 3천 명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신축일. 원나라 연호인 지정(至正)13)을 쓰지 못하게 했다.
갑진일. 예부상서(禮部尙書) 홍상재(洪尙載)와 감문위(監門衛) 상호군(上護軍) 이하생(李夏生)을 금릉(金陵)으로 보내 명나라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는 표문을 올리게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명령을 받아 중국 황실의 정통을 회복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니 천하만국이 함께 신하로 복속할 마음을 굳혔으며 천명이 돌아가는 곳에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황제폐하의 빛나는 문덕(文德)은 순(舜) 임금보다 뛰어나며 용맹과 지혜는 탕(湯) 임금을 초월합니다. 천둥과 바람이 몰아치듯 천하를 평정하는 큰 업적을 이루시고 옛 나라 대신 새 나라를 세우셔서 국호를 제정해 전하시니 중국과 오랑캐 나라들이 모조리 그 찬란한 문물과 제도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득히 먼 동쪽 나라에 있으면서 늘 폐하 계신 곳을 우러러 보고 있사오니 비록 하례하는 대열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변함없이 폐하께 간곡한 충성을 바치고자 합니다.”

• 6월

병인일. 명나라 황제가 환관 김여연(金麗淵) 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작년 겨울에 특별히 사신을 배편으로 보내 중국을 안정시키게 된 그간의 사정을 알려주게 했으니 이미 오래 전에 그곳에 도착했으리라 믿는다. 그 후 다시 옛 진나라 기주(冀州)지역과 옛 진나라 농서(隴西)지역까지 평정함으로써 백성들이 겨우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데 근자에 유연(幽燕)지방의 백성을 남쪽으로 옮겨 살게 했는데 그 중에 고려 백성이 156명이 있었으니 이역만리에서 고향에 두고 온 골육에 대한 그리움이 어찌 없겠는가? 짐이 매우 가련하게 생각한 나머지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선박을 마련하게 한 다음 사신을 시켜 그들을 호송해 본국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마침 짐을 곁에서 모시고 있는 내사감승(內使監丞) 김여연도 고려인으로 언젠가 고향집에 있는 노모를 오랫동안 보지 못했노라고 한탄한 적이 있기에 짐이 그의 심정을 헤아려 호송을 맡기는 한편 모친을 뵈려하는 소원도 풀게 했다. 그 편에 사라(紗羅) 각 여섯 필씩을 보내니 예물이 도착하면 받도록 하라.”

기사일. 관제(官制)를 개정했다.
경진일. 왕이 평복차림으로 몰래 궁궐을 나와 영전을 찾았다.
신사일. 또 몰래 영전에 갔다.
임오일. 왕이 총애하는 신하인 상장군 노숙(盧璹)이 환관의 처와 간통했다는 죄목으로 측근들을 시켜 몽둥이로 8백 번을 때리게 했다. 또 역시 총애하는 신하인 대호군(大護軍) 정희계(鄭熙啓)14)에게는 “너도 행실이 노숙처럼 추잡한데 벌을 내리지 않으면 어찌 고치랴?”하며 몽둥이로 4백 번을 때리게 한 다음 헌부(憲府)를 시켜 국문하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거진 죽게되자 더 이상 신문할 수 없었으며 노숙은 이내 죽었다.
계미일. 유백유(柳伯濡)15) 등을 급제시켰다.

• 가을 7월

무술일. 왕이 노숙(盧璹)이 정말 죽었는가 의심한 나머지 그 무덤을 파헤치고 머리를 잘라 장대에 매달아 전시하는 한편 그의 아비인 노정(盧楨)과 처를 동경(東京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으로 유배 보냈다. 또 헌부에서 노숙의 죄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며 잡단(雜端) 민수생(閔壽生)을 여흥(驢興)으로 유배 보냈다.
신축일. 거제현(巨濟縣)과 남해현(南海縣)에 거주해온 귀화 왜인들이 배반하고 제 나라로 돌아갔다.
갑진일. 왕이 불은사(佛恩寺)에 행차했다가 다시 흥국사(興國寺)와 법왕사(法王寺)에 들러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옛날 우리 태조께서는 십이지(十二支)에서 자(子)·오(午)·묘(卯) 유(酉)가 들어간 해마다 삼소(三蘇)16)를 순행해 그곳에 머물곤 하셨다. 나 또한 평양에 갔다가 금강산을 둘러본 후 충주(忠州)에 머물려고 한다.”

• 8월

을축일. 서경(西京 : 평양), 의주(義州), 정주(靜州), 이성(泥城), 강계(江界) 등지에 만호(萬戶)와 천호(千戶)를 두었다. 당시 왕이 삼소를 순행하겠다는 지시를 내리자 지방관청에서 백성들을 동원해 길을 닦느라고 농사에 큰 피해를 끼쳤으며, 또 평양과 충주에서는 다들 이궁(離宮)17)과 공주의 혼전(魂殿)을 짓고 왕이 머물 동안 사용할 각종 물자를 준비하느라 백성들이 큰 고초를 겪었다.
병인일. 판사천감사(判司天監事) 진영서(陳永緖)18)가 최근 들어 낮에 태백성에 나타났고 흉년까지 든 터라 왕이 길을 나서면 흉(凶)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길(吉)하다고 주장했다. 왕이 반색하며 “왜 이제야 그런 말을 하는가?”하며 순행 지시를 취소했다.
무진일. 총부상서 성준득(成准得)을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천자의 생일을 축하하게 하는 한편, 대장군(大將軍) 김갑우(金甲雨)는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게 하고 공부상서(工部尙書) 장자온(張子溫)은 신년을 하례하게 했다. 또한 이 기회에 본국에서 명나라 조정에 하례할 경우 필요한 의례규범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계유일. 강안전에서 공덕천도량(功德天道場)을 열었다.
병술일. 북원(北元)19)의 중서성과 태위승상(太尉丞相) 기평장(奇平章)이 사절을 보내 왕을 예방하게 했다.

• 9월

기해일. 북원의 오왕(吳王)·회왕(淮王)·쌍합달왕(雙哈達王)이 다들 사절을 보내 답방하게 하면서 말 40여 필을 바쳤다. 당시 오왕 등이 먼저 사절을 보내 우리나라를 예방하자 우리도 우제(禹磾)를 보내 답방하게 했는데 오왕은 왕실간의 혼인을 요청해 왔고 회왕은 우제를 크게 우대하며 자기 딸을 우리 왕실에 시집보내려 하면서 딸을 한번 봐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우제가,
“저는 우리 국왕의 지시에 따라 예방했을 따름이지 혼인 요청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고 사양했으나 회왕은 억지로 딸을 보게 했다.
경신일. 관리를 경기지방으로 보내 농지를 측량하게 했다.
신유일. 왕이 왕륜사에 행차해 천병신중도량(天兵神衆道場)20)을 이레간 열고 환궁했는데 이 자리에서 왕이 손수 축문을 쓰고 승려들에게 베 1천 5백 필을 내려주었으며 신돈도 베 1천 5백 필을 시주했다.
○ 이 달에 숭인문(崇仁門) 밖에서 집채만한 주춧돌을 떠내어 마암(馬岩)까지 운반했는데 끄는 소리와 사람들의 함성이 마치 수천마리 소가 우는 것 같았다. 또 주현(州縣)에서 일꾼[丁]을 징발해 건축자재를 강이나 바다를 통해 운반하게 했는데 압사하거나 익사하는 사람이 속출하는 등 온 나라가 엄청난 고초를 겪었으나 아무도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당시 왕이 원나라 사람인 도목수 원세(元世)를 제주도에서 불러 들여 영전 건축을 맡기자 원세 등 11명이 자기 가족까지 데리고 왔는데 원세가 재상들에게 이렇게 일러주었다.

“원나라 황제가 쓸데없이 건축공사를 많이 일으켰다가 민심을 잃고는 결국 천하를 보존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깨닫고서 저희들에게 제주도에 궁전을 짓게 했습니다. 애당초 피난지로 삼을 요량이었는데 공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원나라가 망해 버리는 바람에 생계가 막막했는데 지금 여기로 불려 와서 다시 생계를 잇게 되었으니 저희로서는 천만다행입니다. 하오나 그 큰 천하를 소유했던 원나라도 백성들을 괴롭혔기에 멸망했는데 아무리 큰 고려라도 이렇게 해서야 어찌 민심을 잃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재상께서는 부디 국왕께 잘 아뢰어 주십시오.”

그러나 재상들은 감히 왕에게 간언을 올리지 못했다.
○ 제주가 항복하자 박윤청(朴允淸)21)을 목사(牧使)로 임명했다.

• 겨울 10월

갑자일. 왕이 왕륜사(王輪寺)에서 회왕(淮王)과 오왕(吳王)의 사신 두 명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황금 불상 하나씩을 선물로 주었는데, 당시 왕이 불교에 혹해 있었으므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예물로 삼았던 것이다.
정묘일. 왕이 영전(影殿)에 행차해 일꾼들에게 음식을 내려주었다.
을유일. 참지문하(參知門下)·대장군(大將軍) 최백(崔伯)과 유운(柳雲)편에 시중(侍中) 김일봉(金逸逢)의 딸을 오왕에게 시집보내는 한편 회왕의 딸을 데리고 오게 했는데 최백은 여행길에 객사했고 회왕은 딸을 보내지 않았다.
병술일. 왕이 평복차림으로 몰래 대궐을 나와 신돈의 집을 찾아갔다.

• 11월

초하루 임진일. 아주(牙州 : 충남 아산)에서 왜적의 배 세 척을 노획하고 포로 두 명을 바쳤다.
무오일. 나하추[納哈出]가 사자를 보내 말을 바쳤다.
○ 왜적이 영주(寧州)·온수(溫水)·예산(禮山)·면주(沔州)의 조운선을 약탈했다. 애초 왜인들이 거제도에 거주시켜주면 영구히 화친을 맺겠다고 원하기에 조정에서 그 말을 곧이 듣고 허락했었는데 이 때 와서 도적으로 돌변해 노략질한 것이다.
경오일. 우리 태조를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 겸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지용수(池龍壽)를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 겸 평양윤(平壤尹)으로 각각 임명했다.
신미일. 전 시중 유탁을 하옥시켰다가 곧 다시 석방시켰다.22)
○ 서원군(瑞原君) 노은(盧訔)이 원나라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황주(黃州)에 당도하자 왕이 대장군 송광미(宋光美)를 보내 죽여버리게 했다.
○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인임(李仁任)을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로 임명하고 큰 깃발을 주어 임지로 보냈다. 왕이 과거 서경을 순행할 때 그 깃발을 만들고는 지키는 관리까지 두어 때맞추어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이때에 출정하는 이인임에게 준 것이다. 대청관(大淸觀)23)에서 마제(禡祭)24)를 지낸 다음 오군(五軍)을 시켜 이인임을 황교(黃橋)까지 호위해 보내게 하는 한편 밀직부사 양백안(楊伯顔)25)을 부원수로 임명했다. 가을 이후 동북면과 서북면의 전략상 요충지에 만호(萬戶)와 천호(千戶)26)를 많이 배치하고 또 원수를 시켜 동녕부(東寧府)27)를 공격함으로써 북원과의 관계를 단절하려 했다.

十八年 春正月 辛丑 遼陽省納哈出及平章洪寶寶遣使, 來聘. 壬寅 王親祭公主魂殿, 奏妓樂極懽, 如平生. 德寧公主及辛旽侍宴, 夜分乃罷.

二月 丁卯 親祭正陵. 癸酉 幸王輪寺. 戊子 元遣中書省右丞豆利罕, 賜王衣酒, 王贈豆利罕衣服·金帶, 不受.

三月 癸卯 元遣使, 進王爲右丞相. 甲寅 遣同知密直司事王重貴如元, 賀聖節, 又謝恩表曰, “敷告明綸, 方深驚省, 登庸峻級, 冞極震惶, 重以匪頒, 益知顚隕. 竊以分封建長, 譬腹心之賴股肱, 敵愾勤王, 猶手足之捍頭目, 此古今共由之大體, 實上下相與之至情. 如臣者, 係出館甥, 恩叨襲爵. 當天弋月捷南土, 恨未報於分毫, 値龍馭冬巡上都, 誠不辭於糜粉. 想方召中興周室, 思郭李再造唐家, 抗表出師, 非敢後也. 飛芻輓粟, 厥惟艱哉, 時易逝, 而功莫成, 志徒勤, 而力不逮. 何圖聖慮, 遠燭愚衷, 賜溫言於前, 旣先之以獎誘, 進右揆於後, 復繼之以褒崇, 斯皆希世之至榮, 况乃連旬而倂得? 酒導投河之飮, 衣興挾纊之情, 祗荷寵靈, 愈增憂責. 皇帝陛下, 躬生知之聖, 履交泰之時, 恭黙淵冲, 洞進退存亡之故, 作興振起, 收予奪廢置之權. 屈群策以雜施, 感衆心而齊奮, 神明恊贊, 旦夕削平. 賞不遺遐, 悉令歸極, 非謂臣多多益辦, 盖緣臣斷斷無他. 臣敢不誓節義, 金石之堅, 惟一終始? 伸壽考岡陵之祝, 倍萬尋常.” 重貴道梗, 不達而還. 命宰樞議移都.

夏四月 丁卯 辛旽設文殊會於演福寺, 王往觀之, 賜僧布五千五百匹. 辛未 幸影殿. 壬申 幸公主魂殿, 飯僧. 癸酉 王觀火山戲. 甲申 慶昌大君瑜卒. 壬辰 大明皇帝, 遣符寶郞偰斯, 賜璽書及紗羅·段匹摠四十匹, 王率百官, 出迎于崇仁門外, 其書曰, “大明皇帝, 致書高麗國王. 自有宋失馭, 天絶其祀, 元非我類, 天命入主中國, 百有餘年. 天厭其昏滛, 亦用隕絶其命, 華夷擾亂, 十有八年. 當群雄初起時, 朕爲淮右布衣, 忽暴兵疾至, 誤入其中. 見其無成, 憂懼不寧, 荷天之靈, 授以文武, 東渡江左, 習養民之道, 十有四年. 其閒, 西平漢主陳友諒, 東縛吳王於姑蘇, 南平閩越, 勘定八蕃, 北逐胡君, 肅淸華夏, 復我中國之舊疆. 今年正月, 臣民推戴, 卽皇帝位, 定有天下之號曰大明, 建元洪武. 惟四夷未報, 故修書遣使, 涉海洋, 入高麗, 報王知之. 昔我中國之君, 與高麗, 壤地相接, 其王或臣或賓, 盖慕中國之風, 爲安生靈而已. 天監其德, 豈不永王高麗也哉? 朕雖德不及中國之先哲王, 使四夷懷之, 然不可不使天下周知.” 斯以去年十一月, 發金陵, 海道艱關, 至是乃來, 斯卽遜之弟也. 遣禹磾, 聘于淮王. 旱.

五月 甲午朔 日食. 乙未 偰斯以二羊, 享王. 丁酉 斯還, 王餽鞍馬·衣服, 不受, 宰樞贈人參·藥物, 亦不受, 王命文臣, 賦詩以贈. 戊戌 幸高羅里, 觀擊毬. 己亥 以誕日, 飯僧三千於影殿. 辛丑 停至正年號. 甲辰 遣禮部尙書洪尙載, 監門衛上護軍李夏生, 奉表如金陵, 賀登極, 仍謝恩, 其表曰, “秉籙膺圖, 復中國皇王之統, 體元居正, 同萬邦臣妾之心, 景命有歸, 懽聲旁達. 皇帝陛下, 文明邁舜, 勇智躋湯. 雷厲風飛, 集大勳於戡定, 鼎新革古, 熙洪號以創垂, 典章文物之粲然, 華夏蠻貊之率俾. 臣邈處東表, 顒望北辰, 雖未叅稱賀之班, 願恒貢蘄傾之懇.”

六月 丙寅 皇帝遣宦者金麗淵, 致書曰, “去年冬, 專使涉海, 具述安定中國之由, 諒達已久. 繼又削平晋冀, 以及秦隴, 生民庶有休息之期矣. 比移幽燕之民, 南來就食, 內有高麗民百六十五人, 豈無鄕里骨肉之思? 朕甚憫焉, 卽命有司具舟, 欲遣使護送東歸. 適內使監丞金麗淵在側, 麗淵亦高麗人, 嘗言家有老母, 久不得見, 朕念其情, 就令其行, 幷遂省親之願. 仍齎紗羅各六匹, 侑緘至可領也.” 己巳 改官制. 庚辰 王微行, 幸影殿, 辛巳 亦如之. 壬午 王以倖臣上將軍盧璹奸閹人妻, 令左右棒八百. 又謂倖臣大護軍鄭熙啓曰, “爾亦行同於璹, 不罰何懲, 棒四百, 命憲府鞫之, 二人瀕死, 不得更訊, 璹尋死.” 癸未 賜柳伯濡等及第.

秋七月 戊戌 王疑盧璹詐死, 發其塚, 梟其首, 流其父楨及妻于東京. 以憲府不能理璹罪, 流雜端閔壽生于驪興. 辛丑 巨濟南海縣投化倭, 叛歸其國. 甲辰 幸佛恩寺, 又幸興國·法王二寺, 下敎曰, “昔我太祖, 每當四仲之年, 巡駐三蘇. 予亦將幸平壤, 巡金剛山, 駐駕忠州.”

八月 乙丑 置萬戶·千戶于西京·義州·靜州·泥城·江界等處. 時以巡駐三蘇之敎, 發民除道, 多損禾穀, 又於平壤·忠州, 皆作離宮及公主魂殿, 儲峙供頓, 民甚苦之. 丙寅 判司天監事陳永緖, 以爲近者, 太白晝見, 年又凶荒. 靜吉動凶, 王悅曰, “何晩奏耶?” 卽收巡駐之命. 戊辰 遣摠部尙書成准得如京師, 賀聖節, 大將軍金甲雨賀皇太子千秋節, 工部尙書張子溫賀正. 仍請賜本國朝賀儀注. 癸酉 設功德天道場于康安殿. 丙戌 北元中書省及太尉丞相奇平章, 遣使來聘.

九月 己亥 北元吳王·淮王·雙哈達王, 皆遣使報聘, 獻馬四十餘匹. 時吳王等, 先聘于我, 我遣禹磾回謝, 吳王請昏于我, 淮王待磾甚厚, 且欲以其女, 歸于我, 請觀其女. 磾辭曰, “臣受命修聘耳, 若請昏, 非臣所知.” 王强使見之. 庚申 遣使度田于京畿. 辛酉 幸王輪寺, 設天兵神衆道場七日, 乃還, 王手書imagefont, 賜僧布一千五百匹, 辛旽亦施千五百匹. 是月, 伐礎石于崇仁門外, 輓致馬岩, 大如屋, 震且吼聲如牛. 又發丁州縣, 需材水運, 或壓或溺, 死者無算. 中外困弊, 無敢言者, 時王召元朝梓人元世于濟州, 使營影殿, 世等十一人, 挈家而來, 世言於宰輔曰, “元皇帝好興土木, 以失民心, 自知不能卒保四海, 乃詔吾輩, 營宮耽羅. 欲爲避亂之計, 功未訖而元亡, 吾輩失衣食, 今被徵, 復衣食, 誠萬幸也. 然元以天下之大, 勞民以亡, 高麗雖大, 其能不失民心乎? 願諸相啓王.” 宰輔不敢以聞. 濟州降, 以朴允靑爲牧使.

冬十月 甲子 王在王輪寺, 宴淮王·吳王使二使, 各獻黃金佛一軀, 時王方惑浮屠, 故因所好爲贄. 丁卯 幸影殿, 餉役徒. 乙酉 遣叅知門下大將軍崔伯·柳雲, 歸侍中金逸逢女于吳王, 且逆女于淮王, 伯道卒, 淮王不果送女. 丙戌 王微行, 幸辛旽家.

十一月 壬辰朔 牙州獲倭船三艘, 獻俘二級. 戊午 納哈出遣使來, 獻馬. 倭掠寧州·溫水·禮山·沔州漕船. 初倭人, 願居巨濟, 永結和親, 國家信而許之, 至是入寇. 庚午 以我太祖爲東北面元帥知門下省事, 池龍壽爲西北面元帥兼平壤尹. 辛未 下前侍中柳濯于獄, 尋釋之. 瑞原君盧訔, 奉元詔, 至黃州, 王遣大將軍宋光美, 殺之. 以守門下侍中李仁任爲西北面都統使, 賜大纛以遣之. 王嘗巡御西京, 製大纛, 置官守衛, 以時致祭, 至是, 授仁任出鎭. 禡于大淸觀, 及行令五軍, 衛送于黃橋, 又以密直副使楊伯顔爲副元帥. 自秋以來, 東西北面要害, 多置萬戶·千戶, 又遣元帥, 將擊東寧府, 以絶北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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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공민왕 18년(1369) 기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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