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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려사 : 세가

우왕 14년(1388) 무진년

• 정월

○ 정몽주(鄭夢周)가 요동(遼東)까지 갔다가 명나라에는 입국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1)
○ 재상들의 녹봉 지급을 중지시켰다.
○ 삼사좌사(三司左使) 염흥방(廉興邦), 영삼사사(領三司事) 임견미(林堅味), 찬성사(贊成事) 도길부(都吉敷)2), 우시중(右侍中) 이성림(李成林), 찬성사(贊成事) 반복해(潘福海), 대사헌(大司憲) 염정수(廉廷秀)3),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김영진(金永珍)4), 밀직부사(密直副使) 임치(林imagefont)5) 등을 하옥시키고 그 일가친척들을 죄다 사형에 처했는데6) 이에 관한 기록은 「임견미전」에 나온다.
○ 우왕이 환관 김량(金亮)과 김완(金完)7)을 경기좌우도찰방(京畿左右道察訪) 겸 제창고전민사(諸倉庫田民事)로 임명하고 전권을 집행하라는 의미로 칼을 내려주어 파견했다.
○ 우왕이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에게 일본도 20자루를 내려주었다.
경인일. 우왕이 네 번이나 정비전(定妃殿)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화원(花園)8)으로 돌아왔다.
○ 최영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우리 태조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이색(李穡)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우현보(禹玄寶)·윤진(尹珍)·안종원(安宗源)을 함께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문달한(文達漢)·송광미(宋光美)9)·안소(安沼)를 함께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성석린(成石璘)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왕흥(王興)10)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인원보(印原寶)11)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각각 임명했다.
○ 밀직사사(密直司使) 조림(趙琳)12)을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입조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게 했는데 그 표문은 다음과 같았다.

“영명하신 천자께서 밝은 가르침을 주시면서 백성들의 세세한 일까지도 자세히 보고 들으시니 이에 어리석은 저도 용기를 내어 사정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저는 천성이 무지몽매하고 배운 바가 없는데다 불행히도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는 바람에 오로지 천자의 큰 은혜[洪造]13)가 내리기만을 고대할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황제폐하께서는 저의 선고(先考)에게 시호를 하사하시고 저에게는 작위를 계승하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으며, 우리를 다 같은 백성으로 대하겠다는 어지신 뜻을 조서로 반포하셨고 새로운 복식을 입게 허락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중국의 문명을 본받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분수에 넘치는 은혜를 받자와 조금이라도 보답하겠다는 일념으로 해마다 조공을 올림으로써[歲事]14) 저의 충성을 만분의 일이라도 펼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내려온 칙서에 엄한 견책의 말씀이 있는지라 진실로 두려운 마음에15) 손발을 어디에 둘지도 모르게 당황했습니다. 이에 급히 사신을 보내 저의 진심을 말씀드리려 했는데 그냥 돌려보내게 하시니 두려운 마음이 배나 더하게 되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제가 나이가 어린 탓에 왕위에 오른 초기에 신하인 임견미·이성림·염흥방·반복해·도길부·이존성(李存性)16) 등을 임용해 국정을 맡겨 효율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했는데 뜻밖에 그 자들이 내 눈을 가리고 제멋대로 불법을 저질러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위에 열거한 자들은 이미 법에 따라 처벌함으로써 그 간특한 마음을 도려냈습니다. 스스로 간절히 호소하오니, 부디 폐하께서는 자식을 감싸는 부모의 마음을 발휘하시고 천지가 만물을 살려내는 큰 덕을 본받으시와 특별히 저희들이 상국 조정에 입조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는 삼가 제후의 도리를 지켜 더욱 경건히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겠나이다.”

그러나 조림은 요동(遼東)까지 갔다가 명나라에 입국하지 못한 채 그냥 돌아왔다.
○ 우왕이 하루도 빠짐없이 수창궁(壽昌宮)에서 기생들의 가무를 관람하며 즐겼다.
○ 가까스로 백관들에게 녹봉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 우왕이 화원(花園)으로 가서 기생들의 가무를 보려하자 환관 이광(李匡)이 간언을 올려 중지시켰다.
○ 종실(宗室), 기로(耆老), 대간(臺諫)과 육조(六曹)로 하여금 문무(文武)에 걸쳐 뛰어난 인재를 추천하게 했다.
○ 우왕이 남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 이인임(李仁任)을 경산부(京山府 :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에 안치하고 전 문하평리(門下評理) 이인민(李仁敏)17)을 계림부(鷄林府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로 유배 보냈다.
○ 왜적을 방어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순군(巡軍)에 수감되었던 강화만호(江華萬戶) 김신보(金辛寶)가 탈옥하자 순군령사(巡軍令史)를 처형했다.

• 2월

○ 우왕이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이 가지고 있는 악기를 화원(花園)에서 살펴보느라고, 각종 현악기와 타악기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울려대었다.
○ 안숙로(安淑老)18)의 딸을 현비(賢妃)로, 기생 소매향(小梅香)19)을 화순옹주(和順翁主)로, 연쌍비(燕雙飛)20)를 명순옹주(明順翁主)로 각각 봉했다. 우왕이 동강(東江)에 가서 봉천선(奉天船)21)을 타고 제멋대로 풍악을 울리다가 거기서 유숙했다.
○ 연쌍비에게 말 두 필을 내려주고 기생 열다섯 명에게도 각각 한 필씩을 내려주었는데 이는 연쌍비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 우왕이 호곶(壺串)에 가서 하루 종일 뱃놀이를 즐기다가 한밤중에 술이 취하자 칼을 뽑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찌르려고 하니 사람들이 다들 흩어져 버렸다. 왕이 배에 남아 있던 뱃사공[蒿工]22) 두 명을 찌르려다가 마침 칼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 이튿날 환궁하는 길에 왕이 소라를 불며 앞장서고 스무 명이 넘는 기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 우왕이 몰수한 김영진(金永珍)의 가옥과 금·은 기명을 소매향에게 내려주는 한편 임견미와 염흥방 등으로부터 몰수한 어마어마한 재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경신일. 연등회(燃燈會)23) 참석차 왕이 봉은사(奉恩寺)24)에 갔다.
○ 설장수(楔長壽)가 명나라로부터 귀국해 황제의 지시를 구두로 전달했다.
“고려에서 짐의 지시를 따르겠노라고 스스로 원하기에 짐은 해마다 말을 바치라고 지시했으나 바친 말들은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공납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기에 내가 바치지 말게 하고 다만 3년에 종마(種馬) 50필만을 바치게 하였더니 바친 말이 또한 쓰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뒤에 사서 바친 5천 필도 모두 작고 약해져서 우리 말 한 필의 값으로 그런 말 두세 필을 넉넉히 살 만한 정도였다.
지금 또 복색을 개정해 준 은혜에 감사하다면서 바친 것도 발굽이 제멋대로 생긴 데다 다리에 종기까지 났으니 기왕 바칠 것이라면 어째서 이런 따위를 바쳤는지 알 수 없다. 이는 필시 사신이 오는 길에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특별시)에서 원래 말을 팔아버리고 나쁜 말로 바꾸어 온 것이 틀림없기에 장자온(張子溫)을 금의위(錦衣衛)에 여러 해 동안 수감하는 벌을 내린 것이다. 그대가 귀국하거든 이 사실을 정무를 맡고 있는 대신에게 알리도록 하라.
짐이 이미 통상(通商)을 허락했는데도 고려에서는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내 무역을 하려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태창(太倉)으로 보내 우리의 군사태세와 전함 건조여부를 정탐하게 했으며 또 우리 명나라 사람으로 그곳에 가서 정보를 누설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길거리에 노는 어린아이의 짓거리니 지금부터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지며 또한 사신도 보내지 말라.
철령(鐵嶺 : 지금의 강원도 안변군 신고산면과 강원도 회양군 하북면 사이에 있는 고개) 이북지역은 애당초 원나라에 속했으니 함께 요동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 기타 개원로(開元路 : 지금의 중국 지린성과 랴오닝성 동남부지역)·심양(瀋陽 :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선양)·신주(信州 : 지금의 중국 장시성 상라오시) 등지의 군민(軍民)은 다시 생업에 종사할 것을 허락한다.”

○ 명나라 사신 서질(徐質)이 귀국해 우왕이 병이 났다고 보고하자 황제가 약재(藥材)를 보내주었다.
○ 우왕이 5도(道)의 성곽을 수리하게 하는 한편 원수(元帥)들을 서북 국경지대로 보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게 했다.
○ 우왕이 동강(東江)에 갔다.
○ 태주군사(泰州郡事) 이진(李眞)이 공금을 훔쳤다가 탄로나 국문을 받았다.
○ 우왕이 동강에서 돌아오는 길에 말이 놀라 날뛰자 활을 쏘아 죽여 버렸다.
○ 우왕이 최영(崔瑩)과 몰래 요동 공략에 관해 의논한 후 개경 각 방(坊)·리(里)의 군사를 동원해 한양(漢陽 : 지금의 서울특별시)의 중흥성(重興城)을 수축하게 했다.
○ 우왕이 반복해(潘福海)의 준마(駿馬)를 빼앗아 타보고는,
“이 말은 잘 놀라지 않느냐?”
라고 묻자 판도판서(版圖判書) 송빈(宋贇)이 반복해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노라고 대답했다. 이에 우왕이,
“네가 사람 해치는 말을 주었느냐?”
고 벌컥 화를 내더니 결국 송빈을 죽여 버렸다.
○ 우왕이 정당문학(政堂文學) 곽추(郭樞)25)를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약재를 내려준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하는 글을 올리게 했다.

“천자께서 큰 덕을 베푸사 천하 만물을 길러내시고 성스러운 은혜가 물결처럼 밀려와 이 미천한 몸까지 두루 적시었으니 깊이 아로새겨진 그 은혜는 백골이 가루가 된들 보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애초 병약한 기질을 타고나 걸핏하면 질병에 걸리는데도 저희 나라에서는 좋은 약재가 산출되지 않기에 저의 신하를 시켜 상국의 약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의 하찮은 일이 폐하에게까지 알려져 의국(醫局)에 저장된 진귀한 약재를 내어 저의 사신 편에 보내주실 줄이야 어찌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이것은 폐하께서 『역경(易經)』26)을 본받아 만물을 기르시고 『서경(書經)』의 말27)을 좇아 생명을 아끼시는 까닭에 그 혜택을 극진히 베푸심으로써 마음 깊이 기쁨을 느끼시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저는 더욱 제후28)의 직분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늘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할 것입니다.”
○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29)를 설치하려 하자 우왕이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려 중지를 요청하게 했다.

“넓고 큰 하늘이 만물을 빠짐없이 덮어서 키우듯이 제왕이 흥기하면 반드시 나라를 올바르게 통치하게 마련이오니 이에 간곡한 하소의 말씀을 황제폐하께 올리려 합니다. 저희 나라는 먼 변방에 자리잡고 있어 얼굴에 난 사마귀처럼[墨誌]30) 땅이 좁으며 돌밭과 다름없이 지세가 험준한데다 동쪽 귀퉁이로부터 북쪽 변방에 이르기까지 산과 바다에 끼어 지리적 조건이 매우 열악합니다. 이미 조상대로부터 영토가 획정되어 있는 바, 따져보면 철령(鐵嶺) 이북의 문주(文州 : 지금의 강원도 문천시)·고주(高州 : 지금의 함경남도 고원군)·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정주(定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함주(咸州 :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嶮鎭 : 지금의 함경남·북도에 있는 마운령과 마천령 사이 내지 함흥시 대덕리산성·상대리산성에 위치)에 이르는 지역은 계속해서 본국의 영토에 속해 왔습니다.
요나라 건통(乾統 : 요나라 天祚帝의 연호) 7년(1107)에 동여진(東女鎭)31) 등이 난을 일으켜 함주 이북의 땅을 무단으로 점거했으나 우리 예왕(睿王(睿宗))이 토벌에 나선다는 것을 요나라에 통보한 다음 군대를 파견해 영토를 수복하고 나아가 함주와 공험진 등에 성곽을 수축했습니다. 그러다가 원나라 초기 무오년(고종 45년, 1258)에 몽고의 산지대왕[散吉大王]32)과 부지르노얀[普只官人] 등이 군사를 지휘해 여진을 복속시킬 당시 본국 정주(定州)의 반민(叛民)인 탁청(卓靑)33)과 용진현(龍津縣 : 지금의 강원도 문천시 북성) 사람 조휘(趙暉)가 화주 이북의 땅을 가지고 투항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자들이 금나라 때 요동(遼東) 함주로(咸州路) 근처 심주(瀋州 :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선양)에 쌍성현(雙城縣)이 위치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본국 함주 근처 화주에 있는 오래 전 수축한 작은 성 두 개소가 쌍성이라고 모호하게 일러주자 원나라에서는 마침내 화주에다가 아무렇게나 쌍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다음 조휘를 쌍성총관(雙城摠管)으로, 탁청을 천호(千戶)로 각각 임명해 그 지역 백성들을 관할하였습니다.
지정(至正 : 원나라 順帝의 연호) 16년(1356), 본국에서는 원나라 조정에 그간의 사정을 알리고서 소위 쌍성의 총관과 천호 등의 관직을 폐지해 버리는 한편 화북·이북지역을 본국에 다시 소속시켜 현재까지 주현(州縣)의 관원을 임명해 지역 백성들을 관할하게 하고 있습니다. 즉 그 땅은 반적들에 의해 침탈당했다가 우리가 원나라에 알려 다시 우리 영토로 귀속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내려온 폐하의 지시에는,
‘철령(鐵嶺) 이북과 이동과 이서 지역은 애당초 개원로(開元路)에 속했던 것이니 그 관할하에 있던 군인과 민간인도 요동(遼東)에 소속시키도록 하라.’
고 되어 있습니다. 철령은 우리 수도인 개경과 불과 3백 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공험진을 국경으로 삼은 것은 한두 해 전의 일이 아닙니다. 제 부친 때 다행히 현명하신 황제의 치세를 만나 제후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으며 우리 땅도 상국의 판도에 편입된 바 있습니다.
이제 미천한 이 몸에게 각별한 은총을 베푸시어 특별히 조서를 내려주심으로써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혜택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넓으신 도량으로 저희를 감싸주시고 도타운 덕으로 어루만져주시어 앞에 든 몇 주(州)의 땅을 저희 나라 영토로 인정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주신 은혜에 감읍하며 늘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할 것입니다.”

• 3월

초하루 을해일. 우왕이 호곶(壺串)에서 기린선(麒麟船)과 봉천선(奉天船)을 타고 내키는 대로 온갖 놀이판을 벌이다가 측근신하들을 물리친 채 칼을 꼬나쥐고서 혼자 배에 앉아 꼬박 밤을 새우면서,
“부왕께서 밤에 주무시다가 시해를 당했으니 내가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말했다.
○ 우왕이 최영(崔瑩)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 상의국(尙衣局)에서 어의(御衣)를 늦게 바쳤다고 트집을 잡아 별감(別監)과 후덕부 소윤(厚德府小尹) 원윤해(元允海) 및 판서(判書) 강의(康義)를 참형에 처했다.
○ 우왕이 최영의 집으로 가서 최영과 함께 왕비 최씨(崔氏)의 궁전에서 잔치를 열었다.
○ 연안부사(延安府使) 유극서(柳克恕)와 환관 김실(金實)34)을 참형에 처했다. 유극서는 임견미의 문객으로 이존성(李存性)의 부탁을 받고 수감되어 있던 김실을 빼돌린 죄로 처형된 것이다.
○ 최씨를 영비(寧妃)35)로 책봉하고 영혜부(寧惠府)를 설치해 주었다. 또한 신아(申雅)의 딸을 정비(正妃)로, 왕흥의 딸을 선비(善妃)로 각각 봉했다. 이근비(李謹妃)36)로부터 그 아래 최영비(崔寧妃)·노의비(盧毅妃)·최숙비(崔淑妃)·강안비(姜安妃)·신정비(申正妃)·조덕비(趙德妃 : 숙녕옹주)·왕선비(王善妃)·안현비(安賢妃)37) 및 소매향(小梅香)·연쌍비(燕雙飛)·칠점선(七點仙)38) 등 세 옹주(翁主)의 각 궁전에 공급하는 물품이 엄청나게 많았으며, 상만고(常滿庫)39)의 베를 한 달에 3천 9백 필이나 소모하는 바람에 모든 창고의 재고가 다 바닥이 나 버렸다. 이에 삼 년치 공물을 앞당겨 거두어도 부족한지라 다시 더 징수하게 되었다.
○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을 죽였는데 앞서 그가 최영의 요동 공격을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 서북면 도안무사(都按撫使) 최원지(崔元沚)40)가,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指揮) 두 명에게 군사 1천여 명을 딸려보내 강계부(江界府 : 지금의 자강도 강계시)에 와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고 있으며 명나라 황제는 진작 철령위에 진무(鎭撫) 등의 관직을 두어 이들이 모두 요동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요동에서 철령까지 일흔 개소에 참(站)을 설치했으며 각 참마다 백호(百戶)를 두었습니다.”
라는 보고를 올렸다. 동강(東江)에서 돌아오던 왕이 이 보고를 듣자 말 위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신하들이 요동을 정벌하려는 나의 전략을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
고 탄식했다. 그리고 전국에 걸쳐 정예군을 불러 모으게 한 다음,
“내일 내가 직접 서쪽으로 가려 하니 모든 신료들은 원나라의 관복을 착용해야 한다.”
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 태조와 재추들은,
“명나라 사신이 곧 도착하는 마당에 서쪽으로 행차하시면 민심이 동요할 것이니 명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고 건의했으며 왕이 그 말을 따르자 나라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다. 당시 도성 사람들 중에는 몽고식의 변발과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헌부(憲府)에서 명나라 사신의 입국에 대비해 그것을 금지했다.
○ 우왕이 정비전(定妃殿)에 갔다.
○ 명나라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命)을 보내 철령위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해 왔다. 우왕이 병을 핑계로 백관들로 하여금 사신을 도성바깥에서 맞이하게 했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색(李穡)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왕득명을 찾아가서, 귀국하거든 황제에게 잘 보고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왕득명은,
“천자의 처분에 달린 일이지 내가 독단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오.”
라고 말했다.
○ 우왕이 사냥을 나가려고 기생들을 죄다 불렀는데 한 기생이 제 때 오지 못하자 성을 내며 그 여자를 죽여 버렸다.
○ 재차 정비의 궁전에 갔다가 온 거리를 쏘다니며 놀고는 밤에 화원(花園)으로 가서 잔치판을 벌여놓고 몽고 노래를 부르게 하며 즐겼다.
○ 왕득명이 귀국했다.
경자일. 온 나라의 죄수들을 석방한 후 왕이 서해도(西海道)로 갔는데 영비(寧妃)와 최영이 수행했다.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우현보(禹玄寶)를 시켜 개경을 유수(留守)하게 하는 한편 오부(五部)의 장정들을 군사로 징발했는데 겉으로서는 도성 서쪽 해주(海州 :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시)의 백사정(白沙亭)에서 사냥판을 벌인다고 내세웠으나 기실 요동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 우왕이 세자 왕창(王昌) 및 정비(正妃)와 근비(謹妃) 등 왕비들을 한양(漢陽)에 있는 산성(山城)으로 옮기게 했다.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慶尙道)는 왜적의 소굴이 되었고, 동·서·북쪽지역은 명나라가 땅을 분할해 갈 것이 우려되었으며, 경기도(京畿道)·교주도(交州道)·양광도(楊廣道)는 성곽을 수축하느라 지쳐 있었고 서해도(西海道)·평양도(平壤道)는 사냥 나온 왕 일행의 영접에 바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정까지 징집하자 팔도가 죄다 소란해지고 백성들은 농사를 망쳐버려 온 나라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이인임·임견미·염흥방 때보다 심했다.

• 4월

초하루 을사일. 우왕이 봉주(鳳州 :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에 당도했다. 당초 우왕이 최영과 둘이서만 의논해 요동 공격을 결정지어놓고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날 최영과 우리 태조를 불러,
“과인이 요양(遼陽)을 공격하려고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해야 할 것이오.”
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태조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지금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안 될 이유가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역격(逆擊)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입니다. 넷째 때가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우왕이 자못 수긍하는 빛을 보이자 태조가 물러 나와 최영더러, 방금 했던 말로 내일 다시 왕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하니 최영은 그 자리에서는 좋다고 했으나 밤에 다시 입궐해 공격 이외 다른 간언을 용납하지 말라고 일렀다.
○ 이튿날 우왕이 태조를 불러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 없다.”고 하자 태조가 다시 반대했다.
“전하께서 꼭 이 계책을 성취하려고 하신다면 일단 서경에 머물러 계시다가 가을철에 군사행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때는 대군이 먹을 군량이 풍족할 것이니 사기가 높은 가운데 행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군사행동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오니 비록 요동의 성 하나를 함락시키더라도 쏟아지는 비 때문에 군대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면 군사가 지치고 군량이 떨어져 참화를 재촉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우왕이,
“경은 군사행동을 반대하다가 죽은 이자송의 꼴을 보지 못했는가?”
라고 협박하니 태조는,
“이자송이 죽긴 했으나 후대에 훌륭한 인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살아 있긴 해도 이미 전략상 착오를 범했으니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라고 응수했다. 그래도 우왕이 막무가내로 듣지 않자 태조가 물러 나와 슬피 울었다. 부하가 왜 그리 슬퍼하느냐고 묻자 태조는
“이제부터 백성들의 참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했다.
정미일. 우왕이 평양에 머물면서 각 도 병사들의 징집을 독려해 압록강(鴨綠江)에 부교를 놓게 하면서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에게 감독을 맡기는 한편 몰수한 임견미와 염흥방 등의 재산을 배편으로 서경에 운반해 놓고 군사들에게 줄 상금으로 쓰려했다. 또 전국의 승려들을 군사로 징발하고 경기도(京畿道)의 군사를 추려서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에 진지를 구축해 왜적에 대비하게 했다.
○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승진시키는 한편,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 심덕부(沈德符)와 부원수(副元帥) 이무(李茂)41), 양광도도원수(楊廣道都元帥) 왕안덕(王安德)과 부원수(副元帥) 이승원(李承源)42), 경상도상원수(慶尙道上元帥) 박위(朴葳), 전라도부원수(全羅道副元帥) 최운해(崔雲海), 계림원수(鷄林元帥) 경의(慶儀)43), 안동원수(安東元帥) 최단(崔鄲)44), 조전원수(助戰元帥) 최공철(崔公哲)45), 팔도도통사·조전원수(助戰元帥) 조희고(趙希古)46)·안경(安慶)47)·왕빈(王賓)48)을 최영 휘하에 예속시켰다. 또한 우리 태조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임명하고 그 휘하에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 정지(鄭地), 상원수(上元帥) 지용기(池湧奇), 부원수(副元帥) 황보림(皇甫琳)49), 동북면부원수(東北面副元帥) 이빈(李彬)50), 강원도부원수(江原道副元帥) 구성로(具成老)51), 조전원수(助戰元帥) 윤호(尹虎)52)·배극렴(裴克廉)53)·박영충(朴永忠)54)·이화(李和)55)·이두란(李豆蘭)·김상(金賞)·윤사덕(尹師德)56)·경보(慶補)57), 팔도도통사·조전원수(助戰元帥) 이원계(李元桂)58)·이을진(李乙珍)·김천장(金天莊)59)을 예속시켰다. 좌군과 우군을 합친 총 병력은 38,830명이었고, 사역하는 인원이 11,634명이었으며 동원된 말이 21,682필이었다.
○ 우대언(右大言) 이종학(李種學)60)을 보내 조병육정신(助兵六丁神)61)에게 초례(醮禮)를 거행하게 했다.
○ 봉천선도원수(奉天船都元帥)·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이광보(李光甫)62)로 하여금 개경(開京)의 서강(西江)으로 돌아가 진지를 구축해 두고 왜적의 침구에 대비하게 했다.
○ 우왕이 대동강으로 가서 하루종일 온갖 놀이판을 벌여놓고 몽고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 지인(知印)이 왕명을 위조해 군졸 열 명을 귀환시키자 참형에 처하고 그 머리를 전시했다.
신유일. 좌·우군도통사(左右軍都統使)가 출정하려는데, 술에 취한 왕이 대낮이 되도록 일어나지 않으므로 하직 인사를 올리지 못했다. 늦게야 술에서 깬 왕이 석포(石浦)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저녁 무렵에 돌아와서 원수(元帥)들에게 술자리를 베풀고는 계급에 따라 차등을 두어 의복·갑옷·활·칼·말을 내려 주었으며 새벽까지 몽고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임술일. 좌·우군이 평양에서 출발했는데 사람들이 십만 대군이라고들 말했다.
○ 우왕이 대동강으로 가서 부벽루(浮碧樓)에서 몽고 음악을 연주하게 하면서 스스로 호적(胡笛)을 불었다.
○ 마부 한 사람이 벌거벗은 채 강물에서 말을 씻기는 것을 본 왕이 자신을 모욕한다며 그 사람의 목을 베게 했다. 이후로 왕은 노상 대동강으로 놀러나가 놀이판에 푹 빠져 지냈다.
을축일. 명나라 홍무(洪武) 연호의 사용을 중지시키고 나라사람들로 하여금 몽고 복장을 다시 착용하도록 지시했다.
○ 왜적이 초도(椒島 : 지금의 황해남도 과일군 초도)를 침구했다. 당시 개경의 장정들은 모두 군사로 징발되고 노약자들만 남아 있었는데 밤마다 여러 차례 봉화가 오르니 도성 안은 텅 비어 버렸으며 민심은 뒤숭숭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 우왕이 사냥을 나가려다 말고 말 한 필을 끌어내 죽여 버리고는
“이놈의 말이 나를 자주 놀라게 했다.”
고 말했다. 또 사냥 가던 길에 도망병 두 사람을 보고는 바로 참형에 처하게 했으니 이런 식으로 우왕이 황음하게 놀면서 사람을 무참히 죽이는 일이 나날이 심해갔다
무진일.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신미일. 문달한(文達漢)·김종연(金宗衍)·정승가(鄭承可)63)와 환관 조순(曹恂)·김완(金完)을 보내 좌·우도통사(左右都統使)와 장수들에게 금은으로 만든 술그릇을 내리고 도진무(都鎭撫)에 이르기까지 다들 의복을 내려주었다.
○ 우왕이 대동강으로 가서 뱃놀이판을 벌여놓고 몽고 음악을 연주하게 했으며 자신은 스스로 호적(胡笛)을 불고 몽고 춤도 추었다.

• 5월

초하루 갑술일. 일식이 있었다.
○ 우왕이 대동강에서 방탕하게 놀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왕이 밖에서 놀 때마다 몽고 음악을 연주하고 광대들을 시켜 놀이판을 벌이게 했으며 최영은 날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드나들면서 피리를 부는 등 군신(君臣)이 함께 황음무도하게 행동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 전라도 안렴사(安廉使) 유량(柳亮)64)으로부터 왜적이 배 80여 척을 진포(鎭浦 :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에 정박시켜 놓고 인근 고을들을 노략질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 우왕이 상호군(上護軍) 진여의(陳汝宜)65)를 전라도(全羅道)·양광도(楊廣道)로 보내 질병을 핑계로 요동정벌에 종군하지 않고서 자제나 노예를 대신 보낸 자들을 모조리 징발해 왜적을 방어하게 하는 한편 도피한 자들을 수색해 군법으로 처단하고 재산을 몰수하게 했다.
○ 우왕이 자기 뜻을 조금 거슬렸다는 이유로 환관 김강(金剛)을 참형에 처하게 했다. 또 영비(寧妃)와 함께 부벽루에 가서 활쏘기와 격구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마부를 죽이려하자 최영이 말렸다. 왕이,
“장인께서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면서 왜 나는 못하게 하는 거요?”
라고 대들자 최영은,
“제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일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왕은 측근들에게 눈짓해 결국 그 마부를 죽이고야 말았다.
○ 왜적의 침구가 더욱 심해지자 원수(元帥) 김입견(金立堅)66)을 한양(漢陽)으로 보내 세자와 왕비들을 경호하게 했다.
경진일. 좌군과 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威化島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에 진지를 구축했는데 탈영병이 길을 메우자 왕이 해당 지휘관에게 즉각 참형에 처하도록 지시했으나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
○ 우왕이 풍월루(風月樓)에 갔다가 환관인 대호군(大護軍) 김길상(金吉祥)과 호군(護軍) 김길봉(金吉逢)을 죽였으나 사람들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갑신일. 이성원수(泥城元帥) 홍인계(洪仁桂)67)와 강계원수(江界元帥) 이의(李薿)68)가 앞장서 요동(遼東) 땅에 들어가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돌아오니 우왕이 기뻐하며 금으로 만든 정아(頂兒)69)와 무늬 놓은 고운 비단을 상으로 주었다.
○ 이날 밤에 우왕이 환관 한 명을 죽였다.
병술일. 좌·우도통사(左右都統使)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저희들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는데 비로 물이 불어나 큰 내가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첫 번째 여울에서 수백 명이 허우적거리다가 익사했으며 두 번째 여울은 더욱 깊은지라 강 중간의 모래톱 가운데 머문 채 군량만 허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요동성에 이르기까지는 군데군데 큰 내가 있어 쉽게 건너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근자에 애로사항들을 조목별로 적어 도평의사사 지인(都評議使司知印) 박순(朴淳)70)편에 보고 드리게 했으나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대사를 치르면서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는데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곧 불충이니 어찌 죽음[鈇鉞]71)을 피하기 위해 잠자코 입을 닫고 있겠습니까?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지켜나가는 길이니 우리나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래 성실히 큰 나라를 섬겨 왔으며 현릉(玄陵 : 공민왕)께서는 홍무(洪武) 2년(공민왕 18년, 1369) 명나라에 귀복하면서,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신하가 되겠나이다.’라는 표문을 올려 지극한 정성을 표시한 바 있습니다. 전하께서도 그 뜻을 이어 상국의 조서에서 지시한 대로 해마다 공물을 바치자 이에 명나라 황제도 특별히 고명(誥命)72)을 보내 현릉의 시호를 내리고 전하를 국왕으로 책봉했으니 이는 국가의 복이며 동시에 전하의 성덕(盛德)덕분이라 하겠습니다.
이번에 유지휘(劉指揮)가 군사를 지휘해 철령위를 설치했다는 소식을 들으시자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을 시켜 표문을 가지고 가 황제에게 그 부당함을 건의한 것은 매우 훌륭한 계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황제의 명령이 내리기도 전에 갑자기 큰 나라를 침범하는 것은 국가와 백성들에게 결코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장맛비에 활줄이 느슨해지고 갑옷이 무거워 군사와 말이 모두 지쳐 있으니 억지로 몰아서 진격시킬 경우 방비태세가 굳건한 성을 아무리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국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이러한 때 군량의 보급이 끊어져 오도가도 못 하는 상황이 되면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부디 전하께서는 회군의 특명을 내리시어 온 나라 백성들의 소망에 부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회군을 허락하지 않았다.
○ 우왕이 대동강에 가서 환관들에게 차등을 두어 모시베를 내려주었다.
○ 환관 김완(金完)을 과섭찰리사(過涉察理使)로 임명해 금·비단·말을 가지고 가서 좌·우도통사(左右都統使) 및 원수(元帥)들에게 내려주면서 부대의 진격을 독려하게 했으나 군중(軍中)에서는 김완을 억류한 채 돌려보내지 않았다.
○ 양광도 안렴사(按廉使) 전리(田理)73)로부터, 왜적이 40여 군(郡)을 침구했는데 현재 잔류 병력이 취약해 적들이 무인지경을 밟는 것같이 횡행하고 있다는 보고가 급히 올라오자 원수(元帥) 도흥(都興)74)·김주(金湊)·조준(趙浚)·곽선(郭璇)75)·김종연(金宗衍) 등을 보내 적을 방어하게 했다.
○ 한양(漢陽)에 있는 여러 왕비들을 모두 개경으로 귀환시켰다.
을미일. 우왕이 성주(成州 :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군) 온천까지 가서 밤새도록 몽고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 좌·우도통사(左右都統使)가 사람을 보내어 최영더러, 아사하는 군사가 속출하는 데다 수심이 깊어 더 이상 진격하기가 곤란하니 속히 회군을 허락해 달라고 건의했으나 최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날 군사들 사이에, 태조가 휘하의 친위병을 거느리고 동북 방면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는 유언비어가 돌자 온 군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조민수(曹敏修)가 어쩔 줄을 몰라 단신으로 태조에게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공이 가 버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겠소?”
라고 말리자 태조는,
“제가 떠날 리가 있겠습니까? 공께서는 이러지 마십시오.”
하고 달랜 후 마침내 장수들을 이렇게 설득했다.
“만일 명나라 영토를 침범함으로써 천자로부터 벌을 받는다면 즉각 나라와 백성들에게 참화가 닥칠 것이다. 내가 이치를 들어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노쇠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자세히 아뢰고 측근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이 말을 듣자 모든 장수들이,
“우리나라의 안위가 오직 공의 한 몸에 달렸으니 어찌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라고 동의했다. 이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회군하는데, 태조는 백마를 타고 동궁(彤弓)76)과 백우전(白羽箭)77)으로 무장하고 모든 군사가 도강하기를 기다리며 강 언덕에 서 있으니 그 모습을 멀리서 본 군사들이 저마다,
“고금천지에 어찌 저런 분이 다시 계시랴?”
하고 감탄했다. 당시 여러 날 장맛비가 내렸어도 강물이 불어나지 않다가 군사가 다 건너자 큰물이 갑자기 들이닥쳐 섬 전체가 완전히 잠겨 버리니 사람들이 다들 신기하게 여겼다. 그때 유행하던 동요(童謠)에,
“목자(木子)가 나라를 얻으리.78)
라는 것이 있어 군사들과 백성들 노소 할 것 없이 다들 그 노래를 부르곤 했다.
정유일. 서북면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79)이 회군 사실을 우왕에게 급히 보고했다. 이날 밤 우리 공정왕(恭靖王 : 李芳果 곧 조선 定宗)이 형인 이방우(李芳雨)80), 이두란(李豆蘭)의 아들 이화상(李和尙), 상호군(上護軍) 유용생(柳龍生)81)·최고시첩목아(崔高時帖木兒)82)와 함께 우왕이 머물고 있는 성주(成州)에서 회군하고 있는 태조의 부대로 달려가다가 왕에게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오던 수령과 맞닥뜨리자 그가 지니고 있던 말들을 죄다 빼앗아 갔으나 우왕은 한낮이 되도록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무술일. 대군이 벌써 안주(安州 :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시)까지 도달했다는 소식을 접한 우왕이 급히 말을 달려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밤에 자주(慈州 :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시)의 이성(泥城 :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군)에 이르러,
“출정했던 장수들이 제멋대로 회군하고 있으니 너희들 모든 군사와 백성들이 충성을 다해 막아준다면 반드시 큰 상을 내리리라.”
하고 약속했다. 회군하는 장수들이 어가(御駕)를 급히 추격하자고 건의했으나 태조는,
“너무 급히 진격하면 필시 전투가 벌어질 것이고 그리되면 많은 사람이 죽게 된다.”
고 반대했다. 태조가 매양 군사들더러,
“너희들이 만일 주상 일행에게 해를 끼친다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또 오이 하나라도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다면 또한 벌을 받을 것이다.”
라고 경계하고는 행군 도중에 일부러 사냥을 하면서 진격 속도를 늦추었다.
기해일. 우왕이 평양(平壤)에 당도해 값나가는 물품을 거두어 들인 다음 대동강을 건너 밤에 중화군(中和郡 : 지금의 평양특별시 중화군)까지 갔다.
신축일. 우왕이 도중에 회군하는 군사들이 근처까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름길로 급히 말을 달려 기탄(岐灘)에 이르렀다가 이튿날 아침에 개경에 돌아와 화원(花園)에 들어갔는데 따라온 사람이 겨우 쉰 명 남짓했다.
○ 회군하는 군사가 서경에서 개경으로 진군하자 우왕을 따르던 신료와 백성들이 술을 준비해와 연도에 늘어서서 맞이했다.
○ 최영이 대항해 전투를 벌일 심산으로 백관(百官)들로 하여금 무장을 갖추어 왕을 호위하게 했다.

• 6월

초하루 계묘일. 각 부대가 도성 밖 교외까지 와서 진지를 구축한 후 김완 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리게 했다.

“현릉(玄陵 : 공민왕)께서 지성으로 명나라를 섬기는 동안에는 천자가 무력으로 우리를 억누를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최영이 총재(冢宰)가 되자 조종(祖宗) 이래로 큰 나라를 섬기던 뜻을 망각한 채 먼저 대군을 일으켜 상국을 침범하려 했습니다. 한 여름에 많은 사람을 동원하니 온 나라의 농사가 결단나고 왜놈들은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내륙 깊이까지 침입해 약탈을 저지르며 우리 백성들을 살육하고 우리 창고를 불살랐습니다. 게다가 한양 천도 문제 때문에 온 나라가 소란한 지금, 최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필시 나라가 전복되고 말 것입니다.”

갑진일. 우왕이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진평중(陳平仲)편에 장수들을 회유하는 글을 보냈다.

“명령에 따라 출정했으면서 진군하라는 지시를 위반한데다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려하니 또한 이는 인륜을 어기는 짓이다. 이러한 불미스런 일이 일어난 것은 부족한 이 몸 때문이긴 하나 군신(君臣)간의 대의는 진실로 역사에 있어서의 보편적인 원칙이니 글 읽기를 즐기는 경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강토를 어찌 쉽사리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여러 사람들과 논의했으며, 그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어찌 감히 어기는가? 그대들이 최영을 지목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만, 최영이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은 경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며 우리나라를 위해 힘써 수고한 것도 또한 경들이 잘 아는 사실이다. 이 교서를 받아보는 즉시 쓸데없는 망상을 버리고 개과천선하여 끝까지 함께 부귀를 보존할 것을 생각하라. 나는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 다시 설장수(楔長壽)를 군영으로 보내 장수들에게 술을 하사하는 한편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게 했으나 장수들은 도성 문 밖까지 진격해 진지를 구축했다.
○ 동북면지역 백성들과 여진인들 가운데 당초 종군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태조의 회군 소식을 듣고 분연히 앞 다투어 모여들어 밤낮없이 달려 왔는데 그런 사람들이 1천 명이 넘었다.
○ 우왕은 궁궐 창고의 금과 비단을 내어 군사 수 천여 명을 모았으나 죄다 창고의 노예와 시정잡배들에 지나지 않았다.
○ 각 도로부터 구원병을 징발해 개경으로 집결시키는 한편 수레를 긁어모아 거리 입구를 봉쇄하고 군사를 나누어 사대문(四大門)을 지키게 했다. 또 조민수 등의 관작을 삭탈하고 최영을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으로, 우현보(禹玄寶)를 우시중(右侍中)으로, 송광미(宋光美)를 찬성사(贊成事)로, 안소(安沼)를 평리(評理)로, 우홍수(禹洪壽)83)를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정승가(鄭承可)를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으로, 조규(趙珪)84)를 밀직부사(密直副使)로, 김약채(金若采)85)를 지신사(知申事)로 각각 임명했다. 또 큰 거리에,
“조민수 등의 장수들을 체포해 오는 사람은 관아나 개인의 노예에 이르기까지 높은 벼슬과 큰 상을 내릴 것이다.”
라는 방을 붙이게 했다.
기사일. 우리 태조가 숭인문(崇仁門)86) 밖 산대암(山臺巖)에 진지를 구축한 다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유만수(柳曼殊)를 숭인문으로 들여보내고 좌군을 선의문(宣義門)87)으로 들여보냈으나 최영이 맞서 싸워 모두 물리쳤다. 유만수를 보내면서 태조가 주위 사람들더러,
“유만수가 눈은 크지만 광채가 없으니 담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반드시 패하여 달아날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과연 그러했다. 마침 태조가 안장을 풀고 말을 쉬게 하고 있던 차에 유만수가 도망해 오기에 주위 사람들이 그 사실을 보고했으나 태조는 아무 말 없이 장막 안에 그냥 누워 있었다. 주위에서 재삼 보고를 올리자 그제야 느직히 일어나 식사를 한 다음 마구(馬具)를 갖추고 군사를 정돈시켰다. 출발에 앞서 태조가 승리의 조짐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고 백보 쯤 떨어진 키 작은 소나무 줄기를 활로 쏘아 단번에 부러뜨려 버렸다. 그리고는 “또 어느 것을 쏘랴?”하고 말하니 군사들이 다들 치하했으며 진무(鎭撫) 이언(李彦)88)은 무릎을 꿇고서 “우리 영공(令公)과 함께라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하고 감격했다.
○ 태조가 숭인문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가 좌군과 서로 협격해 나아가자[猗角]89)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아무도 막지 않았다.
○ 도성의 남녀백성들이 다투어 술을 가지고 나와 군사를 영접하고 장애물로 설치했던 수레를 치워 길을 틔워 주었으며 노약자들은 성에 올라가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기뻐 날뛰었다.
○ 흑대기(黑大旗)90)를 앞세운 조민수가 영의서(永義署) 다리까지 갔으나 최영의 군사에게 패해 도망쳤다. 잠시 후 태조가 황룡대기(黃龍大旗)91)를 앞세우고 선죽교(善竹橋)92)를 거쳐 남산(男山)에 올라가니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북소리는 땅을 뒤흔들었다.
○ 최영의 부하인 안소(安沼)가 정예군을 거느리고 먼저 남산(男山)을 점거하고 있다가 태조의 깃발을 바라보고 그냥 무너져 버리니 최영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것을 알고서 화원(花園)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 태조가 마침내 암방사(巖房寺)의 북쪽 고개로 올라가서 대라(大螺)93)를 한 차례 불게 하자 모든 부대들이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최영을 내놓으라고 고함을 질렀다. 통상 전투를 벌일 때 다른 장수들은 대라를 사용하지 않았고 태조만이 선두에서 대라를 불게 했기 때문에 도성 사람들은 대라 소리만 듣고도 다들 태조의 부대가 도착했다고 기뻐했다.
그 때 우왕은 영비(寧妃)와 최영을 데리고 팔각전(八角殿)94)에 있었는데 최영은 나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때 조라치[吹螺赤]95) 송안(宋安)이 담장 위로 올라가 대라를 한 차례 불자 모든 군사가 일시에 담장을 무너뜨리고 뜰로 달려 들어갔으며 곽충보(郭忠輔)96) 등 서너 명이 곧장 전각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수색했다. 우왕이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자 최영이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태조는 최영더러,
“이번 사태는 내 본심에서 일으킨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동정벌이 대의(大義)에 거역되는 일일뿐만 아니라 나라가 불안해지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어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에 부득이 이런 일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하면서 마주보고 울었다. 결국 최영은 고봉현(高峯縣 :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으로 유배되었다. 이인임이 언젠가,
“판삼사(判三司) 이성계가 필시 나라의 주인이 될 게다.”
라고 예언한 적이 있었는데 최영이 듣고 매우 성이 났으나 감히 반박하지 못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탄식하며 “이인임의 말이 정말 옳았다.”고 뇌까렸다. 송광미·안소·조규·정승가 등은 달아나 숨었으며 두 도통사(都統使)와 원수(元帥) 36명은 대궐을 찾아가 하직 인사를 하고 부대를 사대문 밖으로 철수시켰다. 이 일이 벌어지기 전에 다음과 같은 동요가 퍼졌다.

“서경의 성 밖에는 번쩍이는 불빛이요
안주(安州)성 밖에는 자욱한 연기라.
그 사이로 오가시는 이성계 원수여
바라건대 이 백성을 구원해 건지소서.”

병오일. 다시 홍무(洪武)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명나라의 복색제도를 습용하고 몽고 복장을 금지시켰다.
○ 우현보를 파직하고 조민수를 좌시중(左侍中)으로, 우리 태조를 우시중(右侍中)으로, 조준(趙浚)을 첨서밀직사사(簽書密織使事) 겸 대사헌(大司憲)으로 각각 임명했으며, 여러 장수들은 모두 복직시켰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우왕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고려 정벌에 나서기 위해 황제가 친히 종묘에서 점을 치려고 사흘 동안 재계(齋戒)를 하다가 회군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재계를 중지했다.
○ 장수들이 도성 안으로 들어가 흥국사(興國寺)97)에서 회의를 한 후 각 도에서 진행중인 성곽의 수축과 군사의 징집을 모두 중지시켰다. 또한 안소와 정승가를 체포해 순군(巡軍)에 수감했다가 모두 유배 보냈으며 사헌부(司憲府)에서는 환관 조순(曹恂)·조복선(曹福善)·윤상(尹祥)98) 및 전 지신사(知申事) 김약채(金若采)를 논죄해 모두 먼 고을로 유배 보냈다.
○ 이날 밤에 우왕이 환수(宦竪)99) 80여 명과 함께 무장한 채 태조와 조민수(曹敏修)·변안열(邊安烈)의 집으로 쳐들어갔지만 모두 집에서 나와 사대문 밖 군영에 있었으므로 해를 입히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기유일. 장수들이 숭인문에 모여 의논한 후 이화(李和)·조인벽(趙仁璧)100)·심덕부(沈德符)·왕안덕(王安德)을 대궐로 보내 궁궐 안의 병장기와 안장 딸린 말을 모두 내놓으라고 요구하게 했다.
경술일. 장수들이 영비(寧妃)의 축출을 요구하자 우왕은,
“만일 영비를 축출한다면 나도 함께 나갈 것이다.”
라고 버텼다. 이에 원수들이 부대를 동원해 대궐을 지키면서 우왕더러 강화부(江華府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로 갈 것을 요구했다. 우왕이 어쩔 수 없이 대궐을 나와 채찍을 잡고 안장에 올라,
“오늘은 벌써 날이 저물었다.”
고 말하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릴 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결국 왕은 영비 및 연쌍비(燕雙妃)와 함께 회빈문(會賓門)101)을 나와 강화로 떠났으며 백관들은 전국보(傳國寶)102)를 가져다 정비전(定妃殿)에 안치했다.
○ 태조가 왕씨(王氏)의 후손을 택해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조민수는 이인임이 자신을 천거해준 은혜를 생각해 왕창(王昌)을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장수들이 반대할 것을 우려해 당시의 명유였던 이색의 말을 핑계거리로 삼으려고 은밀히 그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이색은,
“당연히 전 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
고 말했다.

十四年 正月 鄭夢周至遼東, 不得入而還. 停頒宰相祿. 下三司左使廉興邦, 領三司事林堅味, 贊成事都吉敷, 右侍中李成林, 贊成事潘福海, 大司憲廉廷秀, 知密直金永珍, 密直副使林imagefont等于獄, 幷其族黨誅之. 語在堅味傳. 禑以宦者金亮·金完爲京畿左右道察訪兼諸倉庫田民使, 賜劒遣之. 禑賜都統使崔瑩, 倭劒二十把. 庚寅 禑四至定妃殿, 暮還花園. 以崔瑩爲門下侍中, 我太祖守門下侍中, 李穡判三司事, 禹玄寶·尹珍·安宗源門下贊成事, 文達漢·宋光美·安沼門下評理, 成石璘政堂文學, 王興知門下事, 印原寶判密直司事.
遣密直司使趙琳如京師, 請通朝覲, 表曰, “聰明作后, 訓戒孔昭, 視聽自民, 幽微必達, 玆當冒昧, 敢以控陳. 臣性資愚蒙, 學術鹵莽, 不幸幼年之孤苦, 惟賴洪造之生成. 先父荷易名之恩, 小臣霑襲爵之寵, 同仁一視, 渙頒綸綍之言, 用夏變夷, 許新冠服之制. 揆分踰望, 圖報矢心, 庶以歲事之往來, 少伸臣衷之萬一. 忽承勑諭之降, 有嚴譴責之加, 實咫尺之不違, 而手足之罔措. 爰馳賤介, 冀達卑忱, 又蒙阻回, 倍增恐懼. 臣禑忖度, 盖因年幼, 署事之初, 任用陪臣林堅味·李成林·廉興邦·潘福海·都吉敷·李存性等, 委以國政, 欲圖治效, 不期蒙蔽用事, 恣行不法, 以致於斯. 已將上項人等, 明正典刑, 旣已除其姦慝. 深自切於籲呼, 伏望, 陛下推父母保子之心, 體乾坤生物之德, 特賜兪允, 俾通朝宗. 臣謹當守侯度, 而益虔祝皇齡於有永.” 琳至遼東, 不得入而還.
禑閱妓樂于壽昌宮, 日以爲常. 始頒百官祿. 禑出花園, 張妓樂, 宦者李匡諫止之. 令宗室·耆老·臺諫·六曹, 擧文武賢良. 禑畋于南郊. 安置廣平府院君李仁任于京山府, 竄前門下評理李仁敏于雞林府. 以不能禦倭, 囚江華萬戶金辛寶于巡軍, 辛寶逃, 斬巡軍令史.

二月 禑閱林堅味·廉興邦等樂器于花園, 鍾鼓絲竹之聲, 晝夜不輟. 封安淑老女爲賢妃, 妓小梅香和順翁主, 燕雙飛明順翁主. 禑如東江, 乘奉天船, 縱奏音樂, 留宿. 賜燕雙飛馬二匹, 又賜妓十五各一匹, 從燕雙飛請也. 禑如壺串, 竟日泛舟爲樂, 夜乘醉拔劒, 欲刺左右, 左右皆散. 蒿工二人獨在船, 禑欲刺之, 劒墜地, 不及害. 翼日還, 吹螺道前, 妓二十餘人隨之. 禑以金永珍家及金銀器, 賜小梅香, 以林·廉等家財, 賜嬖幸, 無筭.
庚申 燃燈, 禑如奉恩寺. 偰長壽還自京師, 口宣聖旨曰, “高麗願聽朕約束, 朕令歲貢馬, 所進馬不中用. 而又訴難, 我令勿進, 只令三年, 進種馬五十匹, 所進馬又不中用. 後買五千匹, 又皆弱小, 以我一匹價, 可買彼兩三馬. 今又以改衣冠, 謝恩進馬, 粗蹄腫腿, 旣是來獻, 何至於此? 是必使臣, 行至西京, 賣換而來耳. 已囚張子溫于錦衣衛, 使經年罪之. 爾歸以告執政大臣. 朕旣許通商矣, 彼反不肯明白通牒使來貿易, 乃陰令人來大倉, 窺覘我興師造艦與否, 重賞我人之去洩消息者. 是街中小兒之見也, 自今愼勿如此, 又毋得遣使來. 鐵嶺迆北, 元屬元朝, 並令歸之遼東. 其餘開元·瀋陽·信州等處軍民, 聽從復業.”
帝以徐質歸言禑有疾, 賜藥材. 禑命修五道城, 遣諸元帥于西北鄙, 以備不虞. 禑如東江. 泰州郡事李眞盜官錢, 事覺鞫之. 禑自東江還, 馬驚, 射殺之. 禑與崔瑩, 密議攻遼, 發京城坊里軍, 修漢陽重興城. 禑取潘福海駿馬, 騎之曰, “無乃善驚乎?” 版圖判書宋贇進曰, “福海所難馭也.” 禑怒曰, “汝以予取賊馬耶?” 遂殺贇.
禑遣政堂文學郭樞, 如京師, 謝賜藥材. 表曰, “大德天施, 生成庶類, 睿恩波及, 浹洽微軀, 銘佩實深, 粉糜難報. 伏念, 臣素因氣禀之弱劣, 動有疾病之侵尋. 惟良藥不産於小邦, 致陪臣爲求於上國. 何圖 末, 獲達高明, 出醫局之珍藏, 附賤介以寵錫? 玆蓋陛下, 法易育物, 體書好生, 推惠澤以曲加, 俾纏緜而有喜. 臣謹當益盡心於蕃翰, 恒祝釐於壽康.”
大明欲建鐵嶺衛, 禑遣密直提學朴宜中, 表請曰, “昊天廣大, 覆育無遺, 帝王作興, 疆理必正, 玆殫卑懇, 仰瀆聰聞. 粤惟弊邦, 僻在遐壤, 褊小實同於墨誌, 崤嶢何異於石田? 况從東隅, 以至北鄙, 介居山海, 形勢甚偏. 傳自祖宗, 區域有定, 切照鐵嶺迆北, 歷文·高·和·定·咸等諸州, 以至公嶮鎭, 自來係是本國之地. 至遼乾統七年, 有東女眞等作亂, 奪據咸州迆北之地, 睿王告遼請討, 遣兵克復, 就築咸州及公嶮鎭等城. 及至元初戊午年間, 蒙古散吉大王, 普只官人等領兵, 收附女眞之時, 有本國定州叛民卓靑, 龍津縣人趙暉, 以和州迆北之地迎降, 聞知金朝遼東咸州路附近瀋州, 有雙城縣, 因本國咸州近處和州, 有舊築小城二坐, 矇聾奏請, 遂將和州, 冒稱雙城, 以趙暉爲雙城摠管, 卓靑爲千戶, 管轄人民. 至至正十六年間, 申達元朝, 將上項摠管千戶等職革罷, 以和州迆北, 還屬本國, 至今, 除授州縣官員, 管轄人民. 由叛賊而侵削, 控大邦以復歸. 今欽見奉, ‘鐵嶺迆北迆東迆西, 元屬開元, 所管軍民, 仍屬遼東. 欽此.’ 鐵嶺之山距王京, 僅三百里, 公嶮之鎭, 限邊界, 非一二年. 其在先臣, 幸逢昭代, 職罔愆於侯度, 地旣入於版圖. 還及微軀, 優蒙睿澤, 特下十行之詔, 俾同一視之仁. 伏望, 陛下度擴包容, 德敦撫綏, 遂使數州之地, 仍爲下國之疆. 臣謹當益感再造之恩, 恒祝萬年之壽.”

三月 乙亥朔 禑在壺串, 乘麒麟·奉天等船, 恣爲雜戱, 按劒辟左右, 獨坐舟中, 通宵不寐曰, “父王夜寢, 爲人所弑, 吾甚戒之.” 禑納崔瑩女爲妃. 以尙衣進衣遲緩, 斬別監厚德府少尹元允海, 判事康義. 禑如崔瑩第, 遂與瑩, 宴于崔氏宮. 斬延安府使柳克恕, 宦者金實. 克恕林堅味之門客, 且聽李存性言, 潛逸實囚也. 封崔氏爲寧妃, 立府曰寧惠. 又封申雅女爲正妃, 王興女爲善妃. 自李謹妃, 而下崔寧妃·盧毅妃·崔淑妃·姜安妃·申正妃·趙德妃·王善妃·安賢妃及小梅香·燕雙飛·七點仙等三翁主, 諸殿供上之物甚夥, 常滿庫之布, 一月用三千九百匹, 諸倉庫俱竭. 乃豫收三年貢物, 猶不足, 又加徵斂.
殺公山府院君李子松, 以子松嘗止崔瑩攻遼也. 西北面都安撫使崔元沚報, “遼東都司遣指揮二人, 以兵千餘, 來至江界, 將立鐵嶺衛, 帝豫設本衛鎭撫等官, 皆至遼東. 自遼東至鐵嶺, 置七十站, 站置百戶.” 禑自東江, 還馬上泣曰, “群臣不聽吾攻遼之計, 使至於此.” 遂徵八道精兵, 下令曰, “明日欲西幸, 臣僚宜皆著大元冠服.” 我太祖及諸宰樞言, “大明使將至, 今西幸, 則民心動搖. 請待大明使還.” 禑從之, 國人皆喜. 時城中人, 編髮胡服者已多, 憲府以大明使將至, 禁之. 禑如定妃殿. 大明後軍都督府, 遣遼東百戶王得明, 來告立鐵嶺衛, 禑稱疾, 命百官郊迎. 判三司事李穡領百官, 詣王得明, 乞歸敷奏, 得明曰, “在天子處分, 非我得專.” 禑將出畋, 點群妓, 有一妓不及, 怒殺之. 再如定妃殿, 遊行閭里, 夜至花園, 使唱胡歌宴樂. 王得明還.
庚子 宥境內, 遂如西海道, 寧妃及崔瑩從之. 命門下贊成事禹玄寶, 留守京城, 發五部丁夫爲兵, 名爲西獵海州白沙亭, 實欲攻遼也. 禑徙世子昌及定妃·謹妃以下諸妃于漢陽山城. 是時, 全羅·慶尙二道, 爲倭寇巢穴, 東西北面, 方憂割地, 京畿·交州·楊廣三道, 困於修城, 西海·平壤二道, 迎候西獵. 加以徵兵, 八道騷然, 民失農業, 中外之怨, 甚於仁任·林·廉時矣.

四月 乙巳朔 禑至鳳州. 初禑獨與瑩, 決策攻遼, 未敢顯言, 是日, 召瑩及我太祖曰, “寡人欲攻遼陽, 卿等宜盡力.” 太祖曰, “今者出師, 有四不可. 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四不可.” 禑頗然之, 太祖退, 謂瑩曰, “明日, 宜以此言復啓.” 瑩曰, “諾.” 夜瑩復入啓, “願毋納他言.” 明日禑召太祖曰, “業已興師, 不可中止.” 太祖復啓曰, “殿下必欲成大計, 宜駐駕西京, 待秋出師. 禾穀被野, 大軍食足, 可鼓行而進矣. 今出師非時, 雖拔遼東一城, 雨水方降, 軍不得前却, 師老糧匱, 祗速禍耳.” 禑曰, “卿不見李子松耶?” 太祖對曰, “子松雖死, 美名垂於後世. 臣等雖生, 已失計矣, 何用哉?” 禑不聽. 太祖退而涕泣. 麾下士曰, “公何慟之甚也?” 太祖曰, “生民之禍, 自此始矣.”
丁未 禑次平壤, 督徵諸道兵, 作浮橋于鴨綠江, 使大護軍裴矩督之. 船運林·廉等家財于西京, 欲充軍賞. 又發中外僧徒爲兵, 抄京畿兵, 屯東西江, 以備倭. 加崔瑩八道都統使, 以昌城府院君曹敏修爲左軍都統使, 以西京都元帥沈德符, 副元帥李茂, 楊廣道都元帥王安德, 副元帥李承源, 慶尙道上元帥朴葳, 全羅道副元帥崔雲海, 雞林元帥慶儀, 安東元帥崔鄲, 助戰元帥崔公哲, 八道都統使助戰元帥趙希古·安慶·王賓, 屬焉. 以我太祖爲右軍都統使, 以安州道都元帥鄭地, 上元帥池湧奇, 副元帥皇甫琳, 東北面副元帥李彬, 江原道副元帥具成老, 助戰元帥尹虎·裴克廉·朴永忠·李和·李豆蘭·金賞·尹師德·慶補, 八道都統使助戰元帥李元桂·李乙珍·金天莊, 屬焉. 左右軍, 共三萬八千八百三十人, 傔一萬一千六百三十四人, 馬二萬一千六百八十二匹. 遣右代言李種學, 行助兵六丁神醮禮. 命奉天船都元帥同知密直李光甫, 還屯開京西江, 以備倭. 禑如大同江, 陳百戱, 奏胡樂竟日. 有巡軍萬戶府知印, 矯禑命, 放卒十人, 斬以徇.
辛酉 左右軍都統使將出師, 禑醉, 日晏不興, 不得拜辭. 禑酒醒, 泛舟石浦, 至夕乃還, 飮諸元帥酒, 賜衣鎧弓劒馬有差, 奏胡樂, 達曉. 壬戌 左右軍發平壤, 衆號十萬. 禑如大同江, 張胡樂于浮碧樓, 自吹胡笛. 有圉人, 裸而洗馬于江, 禑見之, 以爲慢我, 命斬之. 自是, 常至大同江, 樂而忘返. 乙丑 停洪武年號, 令國人復胡服. 倭入椒島. 時京城丁壯皆從軍, 唯餘老弱, 每夜烽火屢擧, 京城單虛, 人情危懼, 莫保朝夕. 禑將出畋, 進一馬而斬之曰, “此馬數驚我也.” 又道見亡卒二人, 卽命斬之, 禑淫樂殺戮日甚. 戊辰 太白晝見. 辛未 遣文達漢·金宗衍·鄭承可, 宦者曹恂·金完, 賜左右都統使及諸將金銀酒器, 至都鎭撫, 皆賜衣. 禑如大同江, 泛舟, 使奏胡樂, 禑自吹胡笛, 且爲胡舞.

五月 甲戌朔 日食. 禑縱樂于大同江, 至夜乃還. 禑每出遊, 輒奏胡樂, 令倡優呈百戱, 崔瑩日領軍士, 出入吹笛, 君臣荒淫, 百姓怨咨. 全羅道按廉使柳亮報, “倭船八十餘艘, 來泊鎭浦, 寇旁近州郡.” 禑遣上護軍陳汝宜于全羅·楊廣道, 凡托疾不赴北征, 而令子弟奴隸代行者, 悉發禦倭, 其隱避者, 斷以軍法, 籍沒其産. 禑以宦者金剛少忤意, 斬之. 與寧妃, 如浮碧樓, 或射或擊毬, 欲殺圉人, 崔瑩請勿殺. 禑曰, “翁嗜殺人, 何禁我耶?” 瑩曰, “臣之殺人, 不得已也.” 禑目左右, 遂斬之. 以倭寇寢盛, 遣元帥金立堅于漢陽, 以衛世子及諸妃. 庚辰 左右軍渡鴨綠江, 屯威化島, 亡卒絡繹於道, 禑令所在斬之, 不能止. 禑如風月樓, 殺宦者大護軍金吉祥, 護軍金吉逢, 人莫知其故. 甲申 泥城元帥洪仁桂, 江界元帥李薿, 先入遼東境, 殺掠而還, 禑喜賜金頂兒·文綺絹. 禑夜殺宦者一人.
丙戌 左右都統使上言, “臣等乘桴, 過鴨江, 前有大川, 因雨水漲. 第一灘漂溺者數百, 第二灘益深, 留屯洲中, 徒費糧餉. 自此至遼東城, 其間多有巨川, 似難利涉. 近日, 條錄不便事, 狀付都評議使司知印朴淳以聞, 未蒙兪允, 誠惶誠懼. 然當大事, 有可言者而不言, 是不忠也. 安敢避鈇鉞而嘿嘿乎? 以小事大, 保國之道, 我國家統三以來, 事大以勤. 玄陵於洪武二年, 服事大明, 其表云, ‘子孫萬世, 永爲臣妾.’ 其誠至矣. 殿下繼志, 歲貢之物, 一依詔旨, 於是, 特降誥命, 賜玄陵之謚, 冊殿下之爵, 此宗社之福, 而殿下之盛德也. 今聞劉指揮領軍立衛之言, 使密直提學朴宜中, 奉表啓禀, 策甚善也. 今不俟命, 遽犯大邦, 非宗社生民之福也. 况今暑雨, 弓解甲重, 士馬俱憊, 驅而赴之, 堅城之下, 戰不可必勝, 攻不可必取. 當此之時, 糧餉不給, 進退維谷, 將何以處之? 伏惟, 殿下特命班師, 以答103)三韓之望.” 禑與瑩不聽.
禑如大同江, 賜宦寺細布有差. 以宦者金完爲過涉察理使, 齎金帛馬匹, 分賜左右都統使及諸元帥, 督令進兵, 軍中留完不遣. 楊廣道按廉田理馳報, “倭寇四十餘郡, 留兵單弱, 如蹈無人之境.” 乃遣元帥都興·金湊·趙浚·郭璇·金宗衍等禦之. 令諸妃在漢陽者, 皆還開城.
乙未 禑至成州溫泉, 作胡樂徹夜. 左右都統使遣人, 告崔瑩曰, “軍多餓死, 水深難以行軍, 請速許班師.” 瑩不以爲意. 是日軍中訛言, ‘太祖率麾下親兵, 向東北面, 已上馬矣.’ 軍中洶洶. 曹敏修罔知所措, 單騎馳詣太祖, 涕泣曰, “公去, 吾儕安往?” 太祖曰, “予何去矣? 公勿如是.” 遂諭諸將曰, “若犯上國之境, 獲罪天子, 宗社生民之禍, 立至矣. 予以逆順, 上書請還師, 王不省, 瑩又老耄不聽. 盍與卿等見王, 親陳禍福, 除君側之惡, 以安生靈乎?” 諸將皆曰, “吾東方社稷安危, 在公一身, 敢不惟命?” 於是, 回軍渡鴨綠江, 太祖乘白馬, 御彤弓白羽箭, 立於岸, 遲軍畢渡, 軍中望見, 相謂曰, “古今來世, 安有如此人乎?” 時霖潦數日, 水不漲, 師旣渡, 大水驟至, 全島塾沒, 人皆神之. 時童謠‘有木子得國’之語, 軍民無老少歌之.
丁酉 漕轉使崔有慶, 以回軍奔告于禑. 是夜, 我恭靖王, 與兄芳雨及李豆蘭子和尙, 上護軍柳龍生·崔高時帖木兒, 自成州禑所, 奔于軍前, 道遇支應守令, 盡奪其馬以行, 禑日午猶未知. 戊戌 禑聞大軍已至安州, 馳還, 夜至慈州泥城, 下令曰, “赴征諸將, 擅自回軍, 惟爾大小軍民, 盡心以禦, 必大加賞賚.” 回軍諸將, 請急追之, 太祖曰, “速行必戰, 多殺人矣.” 每戒軍士, “汝輩若犯乘輿, 予不爾赦. 奪民一瓜, 亦當抵罪.” 沿途射獵, 故綏師行. 己亥 禑至平壤, 收貨寶, 渡大同江, 夜至中和郡. 辛丑 禑於道上, 聞諸軍已近, 從間道疾馳, 至歧灘. 詰朝還京, 入花園, 從者纔五十餘騎. 自西京, 至京城, 從禑臣僚及人民, 以酒漿迎謁大軍者, 絡繹不絶. 瑩欲拒戰, 命百官, 以兵仗侍衛.

六月 癸卯朔 諸軍來屯近郊, 爲書授金完, 以啓曰, “我玄陵, 至誠事大, 天子未嘗有加兵於我之志. 今瑩爲冢宰, 不念祖宗以來事大之意, 先擧大兵, 將犯上國. 盛夏動衆, 三韓失農, 倭奴乘虛, 深入爲寇, 殺我人民, 燔我府庫. 加以遷都漢陽, 中外騷然, 今不去瑩, 必覆宗社.”
甲辰 禑遣前密直副使陳平仲, 以書諭諸將曰, “受命出疆, 旣違節制, 稱兵向闕, 又犯綱常. 致此釁端, 良由眇末. 然君臣之大義, 實古今之通規, 卿好讀書, 豈不知此? 况復疆域, 受於祖宗, 豈可易以與人? 不如興兵拒之故, 我謀之於衆, 衆皆曰可, 今胡敢違? 雖指崔瑩爲辭, 瑩之捍衛我躬, 卿等所知, 勤勞我家, 亦卿等所知. 敎書到日, 毋執迷, 毋吝改, 共保富貴, 以圖始終. 予實望之, 不審卿等以爲如何?” 又遣偰長壽, 往軍前, 賜諸將酒, 欲知其意, 諸將進屯都門外. 東北面人民及女眞之素不從軍者, 聞太祖回軍, 爭奮相聚, 晝夜星奔而至者千餘人. 禑乃發府庫金帛, 募兵得數十餘人, 皆倉庫奴隸市井之徒. 徵兵諸道入援, 聚車塞巷口, 分軍守四大門. 削敏修等官爵, 以崔瑩爲門下左侍中, 禹玄寶右侍中, 宋光美贊成事, 安沼評理, 禹洪壽司憲府大司憲, 鄭承可鷹揚軍上護軍, 趙珪密直副使, 金若采知申事. 牓于大市曰, “執敏修等諸將者, 勿論官私奴隸, 大加爵賞.”
己巳 我太祖屯崇仁門外山臺巖, 遣知門下事柳曼殊入自崇仁門, 左軍入自宣義門, 瑩逆戰皆却之. 曼殊初行, 太祖謂左右曰, “曼殊目大無光, 膽小人也. 往必北走.” 果然. 時, 太祖解鞍放馬, 及曼殊奔還, 左右以白, 太祖不應, 堅臥帳中. 左右再三白之, 然後徐起進膳, 命鞁馬整兵. 將發, 有矮松在百步許, 太祖欲卜勝兆, 以一衆心, 遂射松株, 一矢立斷. 乃曰, “再甚麽?” 諸軍士皆賀, 鎭撫李彦出跪曰, “陪我令公往, 何處不可行乎?” 太祖由崇仁門入, 與左軍掎角而進, 守城之軍, 莫有拒者. 都人男女, 爭持酒漿, 迎勞軍士, 曳車開路, 老弱登城望之, 歡呼踴躍. 敏修建黑大旗, 至永義署橋, 爲瑩軍所奔. 俄而, 太祖建黃龍大旗, 由善竹橋, 登男山, 塵埃漲天, 鼓鼙震地.
瑩麾下安沼率精兵, 先據男山, 望旗奔潰, 瑩知勢窮, 奔還花園. 太祖遂登巖房寺北嶺, 使吹大螺一通, 於是, 諸軍圍花園數百重, 大呼請出瑩. 每征討, 諸將不用螺, 獨太祖於馬前吹螺故, 都人聞螺聲, 皆喜太祖之軍已至矣. 禑與寧妃及瑩, 在八角殿, 瑩不肯出. 吹螺赤宋安登墻, 吹螺一通, 諸軍一時毁垣, 闌入于庭. 郭忠輔等三四人, 直入殿中, 索瑩. 禑執瑩手泣別, 瑩再拜, 隨忠輔而出. 太祖謂瑩曰, “若此事變, 非吾本心. 然非惟逆大義, 國家未寧, 人民勞困, 寃怨至天故, 不得已焉. 好去好去.” 相對而泣. 遂流瑩于高峯縣. 李仁任嘗言曰, “李判三司, 須爲國主.” 瑩聞之, 甚怒而不敢言, 至是嘆曰, “仁任之言, 誠是矣.” 光美·沼·珪·承可等逃匿, 兩都統及三十六元帥, 詣闕拜謝, 還軍門外. 先是, 童謠曰, “西京城外火色, 安州城外烟光. 往來其間李元帥, 願言救濟黔蒼.”
丙午 復行洪武年號, 襲大明衣冠, 禁胡服. 罷禹玄寶, 以曹敏修爲左侍中, 我太祖右侍中, 趙浚簽書密直司事兼大司憲, 諸將皆復職. 時大明聞禑擧兵, 將征之, 帝欲親卜于宗廟, 方致齋, 及聞還軍, 卽罷齋. 諸將入城, 會議興國寺, 罷諸道築城及徵兵. 執安沼·鄭承可囚巡軍, 並流之. 司憲府論宦者曹恂·曹福善·尹祥, 前知申事金若采之罪, 皆流遠州. 是夜, 禑與宦竪八十餘人擐甲, 馳至我太祖及曹敏修·邊安烈之第, 以皆屯軍門外, 不在家故, 不得害而還.
己酉 諸將會議崇仁門, 使李和·趙仁璧·沈德符·王安德詣闕, 請悉出宮中兵仗鞍馬. 庚戌 諸將請出寧妃, 禑曰, “若出此妃, 我當偕出.” 於是, 諸元帥領兵守闕, 請禑如江華. 禑不得已乃出, 執鞭據鞍曰, “今日已暮矣.” 左右俯伏泣下, 無應之者. 遂與寧妃及燕雙飛, 出會賓門, 向江華, 百官奉傳國寶, 置定妃殿. 太祖欲擇立王氏後, 曹敏修念李仁任薦拔之恩, 欲立昌. 恐諸將違己, 以李穡爲時名儒, 欲籍其言, 密問之穡曰, “當立前王之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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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우왕 14년(1388) 무진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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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역 고려사: 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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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려사 세가를 세트로 엮은 『국역 고려사 세가』세트. 전1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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