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백제와 고려는 369년부터 399년까지 31년 동안 15차례나 전쟁을 했으나 400년부터 468년까지 69년 동안은 전쟁 기록이 전혀 없다.
② 472년에 백제는 30여년간 고려와 전쟁을 이어오고 있으니 구원해 달라고 북위에 사신을 보냈다.
③ 백제는 475년에 고려에 한성을 함락당하고 웅진으로 쫓겨가는데 기록은 한성 이북과 예성강에서 고려와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고 되어 있다.
정황에 맞지 않는 이 기록들을 60년 앞당기면 모순이 모두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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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09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 왕 사유가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이끌고 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니 군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급히 쳐부수고 5천여 명을 잡았는데 사로잡은 포로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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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09 고려의 상황
▐ 고려가 314년에 대방군을 멸망시킬 때, 백제는 그 남부인 예성강 유역을 차지한 듯하다.
고려는 342년에 모용씨의 침공을 받아 도읍이 파괴되는데, 이듬해에 낙랑군의 치소가 있던 평양의 동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곳은 백제와 가까웠으므로, 이때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내려 한 듯하다.
고려와 백제의 충돌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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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듣고 군사를 浿河 가에 매복시켜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 전후 관계를 보았을 때 이때의 패하는 예성강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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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 三國史記 百濟
왕이 태자와 정예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다. 平壤城을 공격하니 고구려 왕 사유가 힘껏 싸우며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 이때 고려는 도읍을 다시 국내성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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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5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가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와 水谷城을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막도록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보복하려 하였다가 흉년이 들어 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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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2.07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왕 담덕이 4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잘 부린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막지 못하니, 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을 많이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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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3.08 三國史記 百濟
왕이 진무에게 말하기를, “關彌城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충지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진무는 몸소 군사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石峴城 등 다섯 성을 되찾으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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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5.08 三國史記 百濟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왕 담덕이 몸소 군사 7,000명을 이끌고 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해 죽은 자가 8,00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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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5.11 三國史記 百濟
왕이 浿水 전투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000명을 이끌고 漢水를 건너 靑木嶺 아래에 진을 쳤다. 마침 큰 눈을 만나 군사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대를 돌려 漢山城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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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7~0436 前燕→後燕➔北燕
후연에서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모용희를 죽이고 이전 황제의 양자였던 고운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2년 뒤 고운이 살해되자 풍발이 난을 수습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풍발이 죽자 풍발의 동생 풍홍이 풍발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북위의 침공을 받아 북연은 망하고 풍홍은 고려로 망명했다가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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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2 魏書(554) 百濟 개로왕 표문
馮氏의 국운이 다하여 그 유민이 도망하여 온 후로부터 추악한 무리가 점점 강성하여져 끝내 침략과 위협을 당하여 원한이 얽히고 전쟁이 연이은 것이 30여년입니다. 물자도 다되고 힘도 떨어져서 자꾸만 쇠잔해지고 있습니다.
만일 천자의 인자와 간절한 긍휼이 멀리라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면 급히 장수 한 사람을 보내어 신의 나라를 구원하여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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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5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두려워하여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왕은 궁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고구려 사람이 추격하여 왕을 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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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2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漢山城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 475년에 고려는 한성을 함락시키고 왕족들을 몰살한 뒤 돌아간 듯하다. 그러나 이 지역은 피폐해진 상황이라 북유말갈로부터도 약탈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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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4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와 신라가 薩水 벌판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犬牙城으로 물러나 지키자 고구려가 포위하였다. 왕이 군사 3,000명을 보내 구원하여 포위를 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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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5✘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가 와서 雉壤城을 포위하자 왕이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나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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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가 加弗城을 습격하여 빼앗고 군사를 옮겨 圓山城을 깨뜨렸는데, 죽이거나 약탈한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용감한 기병 3,000명을 거느리고 葦川의 북쪽에서 싸웠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왕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쉽게 생각하여 진을 치지 않았다. 왕이 나아가 갑자기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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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 왕 흥안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 穴城을 쳐들어와서 빼앗았다. 좌평 연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거느리고 五谷 벌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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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0553 百濟와 新羅의 고려 침공
백제는 가라와 함께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과 그 건너편의 평양을 빼앗아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이때 신라도 고려를 침공하여 죽령 북쪽 10군을 차지하였다.
고려는 돌궐의 침공을 막느라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북제로부터도 유민을 송환당하는 등 고립에 처하자 신라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제가 위기를 느껴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고 그 땅은 신라가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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