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백선엽의 6·25 징비록
by Silla on 2023-12-18
ᐥ개전 초 3개월이 지난 뒤 우리의 진정한 싸움 대상은 중공군이었다. 화력에서는 미군과 유엔군에 미치지 못했지만 내전과 항일전쟁의 10년에 걸친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전술을 펼치며 다가서던 군대였다. 국군은 사실 그들의 우회와 매복, 기습과 야습 등의 현란한 전술 때문에 기록적인 패배에 직면하곤 했다. 당시의 전쟁터에서는 “중공군이 공격해 오면 밥을 먹던 국군이 숟가락을 던지고 도망친다”는 말이 나돌았다.ᐥ

조선 500년, 아니 어쩌면 한반도가 유사 이래 맞은 전쟁터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를 꼽으라면 이순신 장군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훌륭한 장수, 즉 명장(名將)이라는 말로도 싸움터에서 거둔 그 전과를 형용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부는 이순신 장군을 성장(聖將)으로도 적는다.

이순신 장군의 당시 싸움 모습을 그린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칼의 노래』라는 이름의 작품이다. 한 때 우리 사회의 중장년 남성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소설이다. 나도 그런 책의 명성 때문에 직접 읽었다. 작가의 심리적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긴박감 있게 구성한 솜씨도 아주 빼어났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즐거웠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슬며시 웃음을 지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작가가 소설에서 장군의 심리를 묘사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죽음 앞에 선 장수의 심리를 작가는 바람과 칼, 떨림, 두려움과 불안 등으로 그렸다. 충분히 그러리라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이 뛰어난 작가가 실제로는 전쟁을 겪지 않았구나,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다가오는 적에 맞선 적은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적의 위협은 상존하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평화를 구가하는 요즘의 우리 군대 장군들도 전쟁을 치른 경험이 없다. 지금 사회를 이끄는 세대 모두 그런 전쟁을 밑바닥에서 체험한 적이 없다. 따라서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 그런 전쟁의 직접적인 경험을 요구하면 무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칼의 노래』가 그 빼어난 문장과 뛰어난 구성으로 우리 사회의 많은 독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그런 점이 보였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전쟁터의 장군과 실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에 선 장군은 매우 다르다는 점 말이다.

실제 전쟁터에 선 장군은 사실이지,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그 나머지의 여러 사념(思念)들에 휩싸일 여유가 없다. 그만큼 바쁘고 분주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여러 상상을 펼치면서 불안감에 싸이는 장수가 이끄는 군대라면, 그 군대는 적 앞에 제대로 나서서 싸울 수가 없다. 더구나 이순신 장군처럼 모든 전투에서 이긴 경우라면 그 전승(全勝)의 비결은 다른 각도에서 살펴야 한다.

장수는 외로울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외로움에 더해 죽음마저 떠올리며 내 안의 불안을 반추하거나 사색할 여지는 더욱 없다. 작가의 상상력이 빛을 낸 대목이기는 하지만, 격렬하면서 참혹했던 전선을 직접 이끌었던 내게는 그런 점이 ‘옥에 티’로 보였다. 전쟁에 나선 장수는 어떻게 보면 촌각을 다투는 환자를 앞에 둔 외과 의사와 흡사하다.

피가 쏟아져 나오는 곳을 우선 막고, 그 상처의 뿌리를 찾아 약을 넣고, 흘러넘치다 맺힌 곳에 부종(浮腫)이라도 생기면 그를 가라앉혀야 한다. 곪은 곳은 째고, 터진 곳은 꿰매며, 무너진 곳은 일으켜 세우고, 헤진 곳은 조심스레 어루만져야 한다.

전선은 줄곧 요동친다. 싸움이 붙을 때의 그 격렬함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싸움 속의 장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전선을 떠받쳐야 한다. 전선이 요동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다. 식량을 챙기고, 무기를 점검하며, 병력의 보충을 생각해야 한다. 전선으로부터 나아갈 때를 상정하고, 후퇴를 대비해 방어선을 살펴야 한다.

하루는 24시간이지만,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시간 빼면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런 시간을 쪼개서 수많은 업무를 챙겨야 한다. 그나마 이는 일상(日常)이라는 단어에 묶이는 작업들이다. 전세(戰勢)를 살펴 전략과 전술을 가다듬는 일은 늘 머릿속을 오가는 주제들이다. 날씨는 어떨까, 전선의 지형은 우리에게 유리할까, 예하 부대의 지휘관들은 연락 체계를 잘 운용하고 있을까, 전황 보고서에 거짓은 없었을까…. 이런 문제가 숱하게 이어진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적정(敵情)의 문제다. 적의 동태와 보급 및 무장 상황, 그들 머리 위로 뻗은 구름, 적 장병이 입고 있는 복장도 전선의 장수가 늘 살펴야 하는 대상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주시하면서도 전선의 장수는 예기치 않은 변수에 늘 대응해야 한다. 수많은 병력이 집결해 있는 상황이라면 어느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아군의 요소에 적군의 요소를 더해 모두 고려하고, 그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변수에 대응하려면 전선의 지휘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정상이다. 일과가 끝난 뒤 차분하게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에 그런 삶과 죽음, 불안과 희망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지만 그나마 피곤에 절어 군화를 신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게 정상이리라.

승장(勝將)과 패장(敗將)-. 싸움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승장이고, 그 반대의 경우가 패장이다. 그렇듯 가혹한 싸움이 벌어진 뒤 승과 패로 갈리는 전쟁의 마지막 책임은 장수에게 있다. 그래서 승리가 장수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영광이고, 패배는 반대로 장수에게 씻을 수 없는 오욕이다. 그래서 장수는 싸움에서 이기려 절치부심(切齒腐心)을 반복한다.

돌이켜 보면, 6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참혹한 6.25전쟁은 사실 중공군과의 싸움이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 김일성의 군대가 적화의 야욕으로 38선을 넘은 것도 사실이고, 우리를 낙동강 전선의 막바지 보루에 몰아넣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전 초 3개월이 전부였다.

그 이후로 김일성의 군대는 중공군의 ‘향도(嚮導)’에 불과했다. 한반도의 싸움에서 승패를 가리는 핵심 영역인 부산과 서울, 이어 다시 평양과 신의주로 이어지는 축선에서 그들은 사라졌다. 대신 동해안과 서해안에서 일부 중공군의 공격로 앞에서 방향을 안내하는 향도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개전 초 3개월이 지난 뒤 우리의 진정한 싸움 대상은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진출한 중공군이었다. 그들은 강했다. 화력에서는 대한민국 군대를 돕기 위해 이 땅에 올라선 미군과 유엔군에 미치지 못했지만 내전과 항일전쟁의 10년에 걸친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전술을 펼치며 다가서던 군대였다.

그들과의 싸움은 격렬했다. 미군과 유엔군에 비해 대한민국 군대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착잡하기만 했다. 대규모의 전투에서 그들을 꺾은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국군은 사실 그들의 우회와 매복, 기습과 야습 등의 현란한 전술 때문에 기록적인 패배에 직면하곤 했다. 실제 군단 전체가 무너지는 참패를 두 번이나 당했다.

그들과의 싸움을 다시 회고해보자. 우선 휴전을 눈앞에 둔 1953년의 초여름이었다. 잠깐 찾아왔던 봄이 여름으로 바뀌던 무렵이었다. 5월에 들어서 강원도를 비롯한 중부의 산간 지역은 해토기(解土期)에 접어들었다. 눈과 얼음이 녹으면서 흙이 물러지는 무렵이었다. 그러다가 땅이 조금이라도 굳어지면 군사의 기동이 가능해진다.

그들이 노리는 먹잇감은 늘 국군이었다. 미군은 화력이 강했고, 중공군에게는 부족한 막강한 공군력이 있었다. 유엔군 또한 그런 미군의 옆에서 강력한 전력을 발휘하던 군대였다. 그러나 1950년 10월 중공군 개입 이후 국군은 그들에게는 늘 허약한 상대였다. 자주 궁지에 몰렸고, 초반에 힘겹게 버티다가 공세를 지속한 중공군에게 등을 보이며 쫓겼던 군대였다.

해토기를 지나 땅이 굳어질 무렵인 1953년 5월 중공군이 자신들의 먹잇감으로 여긴 국군의 전면에 다시 출몰하기 시작했다. 이어 6월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병력을 더 집중해 국군의 전면을 압박하고 있었다. 장소는 중부 전선인 강원도 금성 돌출부였다. 1951년 봄 중공군 초기 공세 때 역습을 시도해 전선을 밀고 올라간 적이 있던 곳이었다.

북한강이 남북으로 흐르고, 그 중간을 금성천이 동서로 지나는 지역이었다. 1951년 때의 역습으로 길이 30여㎞, 종심의 깊이가 10㎞에 이르는 지역이 옆의 전선에 비해 북쪽으로 솟아 있어 ‘금성 돌출부’로 불렀던 곳이다. 그곳에 다시 중공군의 대규모 부대가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대구의 육군본부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공군의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할 수 없었다. 휴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 과정 중 가장 민감한 현안으로 꼽혔던 반공(反共) 포로 석방 문제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국군을 다시 노리고 덤볐다. 6월 10일이었다. 금성 돌출부 전면을 기습적으로 때리기 시작한 중공군은 여느 때처럼 캄캄한 야밤에, 강렬한 사전 포격을 벌이며 기습을 벌였다. 빈틈을 노리고 물밀 듯이 쳐들어오는 중공군은 이번에도 작전에 성공하는 듯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당시의 전쟁터에서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중공군이 공격해 오면 밥을 먹던 국군이 숟가락을 던지고 도망친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도 처음에는 그랬다. 국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전선의 부대는 빠른 속도로 전면을 내준 채 등을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