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마대산 동쪽의 여진을 정벌하고 공험진에서부터 함주, 영주, 복주, 웅주 그리고 길주까지 성을 쌓았다가 1년만에 물러났다.
여진은 이 지역에 수백년 동안 살아왔었고 이후로도 수백년 동안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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蓋馬大山·單單大領
서해로 흘러가는 압록강·대동강 유역과 동해로 흘러가는 여러 강들의 유역을 가르는 산줄기는 험준한 지형으로 그 동쪽과 서쪽의 문화권을 갈라 놓았다.
그 동쪽에는 沃沮와 濊가 있었는데, 沃沮의 서쪽 산줄기를 蓋馬大山이라 하고 濊의 서쪽 산줄기를 單單大領이라 한다.
군데군데 이 산줄기를 넘는 고개가 있었는데, 黃草嶺이 대표적이다.
한편, 동해안을 따라가는 길도 군데군데 작은 산줄기로 막혀서 그것을 넘는 고개가 있었는데, 磨雲嶺이 대표적이다.
20656#2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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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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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5 高麗史(1451) 登州團練使
安邊都護府 登州는 본래 고구려의 比列忽郡(淺城郡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556년에 比列州라 하고 군주를 두었는데 경덕왕 때에 朔庭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登州라고 불렀다. 995년에 團練使를 두었다. 1018년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고종 때에 定平 이남의 여러 성이 몽고의 침입을 받자 江陵道 襄州에 임시로 머물렀다가, 다시 杆城으로 옮겨 거의 40년을 지냈다. 충렬왕 1298년에 각자 본성으로 돌아갔다. 별호는 朔方이다. (성종 때 정하였다.)
20656#2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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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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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5 高麗史(1451) 湧州防禦使
泉井(於乙買) → 井泉 ➔ 湧州 → 宜州(東牟·宜春·宜城)
┆ 宜州는 본래 고구려의 泉井郡(於乙買라고도 한다.)으로, 681년에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고 井泉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湧州라 불렀다. 995년에 방어사를 두었고, 뒤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1108년에 성을 쌓았다. 별호는 東牟이고(성종 때 정하였다.), 또 宜春·宜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요해처로 鐵關이 있다. 바다섬인 竹島가 있다.
20656#2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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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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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高麗史(1451) 和州防禦使
長嶺鎭·唐文·博平郡 → 和州 → 和州安邊都護府 ➔ 和州防禦使 → 雙城摠管府
┆和州는 혹은 長嶺鎭이라 불렀고 혹은 唐文이라 불렀고 혹은 博平郡이라고도 불렀는데 고려 초에 和州라고 하였다. 995년에 和州安邊都護府라 고쳤다. 1018년에 和州防禦使로 강등시키고 본영으로 삼았다. 고종 때에 몽고에 편입되어 雙城摠管府가 되었다. 화주가 이로 인해 登州에 합병되었지만 여전히 방어사로 불렀다. 뒤에 通州에 합병되었다. 충렬왕 때에 복구되었다.
20656#22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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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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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 金史(1344) 乙離骨水
遂使斜葛經正疆界 至乙離骨水·曷懶甸活禰水 留之兩月
사갈로 하여금 국경을 확정하게 하였다. 사갈이 을리골수와 갈라전 활녜수에 이르러 두 달을 머물렀다.
▐ 을리골령에서 을리골수가 흘러내리고 활녜수는 갈라전에 있다.
이후 을리골은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왕고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부각되었지만 작은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후 주목을 받지 못한 듯하다.
20656#2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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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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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 ❶ 乙離骨
乙離骨은 왕고에 인접해 있었지만 그 동쪽과 서쪽의 여러 부족들은 완안부에 종속되었으므로 乙離骨은 왕고의 북쪽에 있었다.
완안부는 乙離骨을 거쳐 曷懶에 이르렀는데, 曷懶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乙離骨은 개마대산의 서쪽에 있었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을리골의 위치로는 허천강 유역이 가장 적합하다.
이 지역은 토지가 척박하여 큰 세력이 등장하지 못했다.
20656#2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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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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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0.20+ 金史(1344)
1106년에 고려가 黑歡方石을 사신으로 보내와 직위 계승을 축하하자 康宗은 盃魯로 하여금 보빙하도록 하고 망명한 백성들을 요구하였다. 고려가 허락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국경에 이르러 인수하여 가라.”
고 하니 康宗은 이를 믿고 完顏部 阿聒·烏林荅部 勝昆 등으로 하여금 국경으로 가 인수하도록 하고 馬紀嶺 乙隻村에서 사냥하면서 기다렸다.
阿聒·勝昆 등이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는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살해하고 曷懶甸으로 출병시켜 9성을 쌓았다.
20656#17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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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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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0.20+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20656#22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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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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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0.20+ 高麗史(1451)
❶ 윤관이 스스로 53,000명을 이끌고 정주 大和門으로 나가고 ❷ 중군병마사 좌복야 김한충이 36,000명을 이끌고 安陸戍로 나갔으며 ❸ 좌군병마사 좌산기상시 문관이 33,900명을 이끌고 정주 弘化門으로 나갔다. ❹ 우군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진이 43,800명을 이끌고 宣德鎭의 安海戍·拒防戍의 2수 사이로 나가고 ❺ 선병별감 이부원외랑 양유송, 원흥도부서사 정숭용, 진명도부서부사 견응도 등이 선병 2,600명을 이끌고 道鱗浦로 나갔다.
20656#23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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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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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0.20+ 高麗史(1451)
大乃巴只村을 지나 한나절을 행군하였다. 文乃泥村에 이르러 冬音城을 파괴시켰다. 石城의 남녀노소 모두 섬멸하였다.
❶ 윤관의 군대는 大乃巴只로부터 37개 촌을 격파하여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고 ❷ 중군은 高史漢村 등 35개 촌을 격파하여 380명의 목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으며 ❸ 좌군은 深昆村 등 31개 촌을 격파하여 950명의 목을 베었고 ❹ 우군은 廣灘村 등 32개 촌을 격파하여 290명의 목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20656#23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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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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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高麗史(1451)
윤관이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지계를 획정하였는데, 동쪽으로는 火串嶺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弓漢伊嶺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蒙羅骨嶺에 이르렀다. 또 일관 최자호을 보내어 몽라골령 아래의 땅을 살펴 성랑 950칸을 짓고 英州라고 불렀고 火串嶺 아래에 992칸을 짓고 雄州라 불렀으며 吳林金村에 774칸을 짓고 福州라고 불렀고 弓漢伊村에 670칸을 짓고 吉州라고 불렀다. 또 護國仁王寺와 鎭東普濟寺 두 절을 英州城 안에 창건하였다.
20656#22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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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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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世宗實錄地理志(1454)
1107년에 윤관과 오연총이 여진을 몰아내고 경계를 획정하였는데, 동쪽으로 火串嶺까지 북쪽으로 弓漢嶺까지 그리고 서쪽으로 蒙羅骨嶺까지를 우리 강토로 삼았다.
火串山 아래에 성곽 952간을 쌓고 이름을 雄州라 하고, 吳林金村에 774간을 쌓고 이름을 福州라고 하고, 蒙羅骨嶺 아래에 952간을 쌓고 이름을 英州라 하고, 弓漢村에 674간을 쌓고 이름을 吉州라고 하였는데, 吉州가 북쪽에 있고 雄州가 남쪽에 있다.
20656#2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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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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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 福州
世宗實錄地理志(1454)┆吳林金村 ➔ 福州防禦使 → 豆乙外·禿魯兀 → 端州安撫使 → 知端州郡事 → 端川┆오랫동안 호인에게 점거되었었는데 별호를 豆乙外라 하고 또는 禿魯兀이라고도 한다. 고려 대장 윤관이 호인을 몰아내고 9성을 설치하여 福州防禦使로 삼았다가 1382년에 端州安撫使로 고쳤다. 1398년 무인에 知端州郡事로 고쳤다가 1413년 계사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20656#22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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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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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 英州 1454
世宗實錄地理志(1454)┆본래 參散이다. 오래 호인에게 점거되어 왔는데 고려 대장 윤관이 몰아내고 9성을 설치하였으나 그 이름은 미상이다. 1356년에 雙城의 옛 지경을 수복하고 安北千戶防禦所를 두었다가 1372년에 北靑州萬戶府로 고쳤다. 1398년에 靑州로 고쳤다가 1416년 병신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니 淸州牧과 이름이 같은 까닭이었다.
▐ 蒙羅骨嶺 → 英州 → 參散 → 安北 → 北靑州 → 靑州 → 北
20656#2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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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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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 雄州 1856~1861
東輿圖(1856~1861)┆雄州란 명칭은 1393년에 雄吉州만호부를 吉州牧으로 바꾸며 사라졌다. 30여년 후 1422년에 吉州² 남쪽에 雄平驛이 만들어지는데, 이 雄平驛이 옛 雄州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390년에 雄吉州만호부를 설치할 때 吉州²가 북쪽에 있고 雄州는 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吉州²와 雄平驛의 위치 관계가 그 묘사와 같기 때문이다.
1413년에 定州를 定平으로 고친 사례를 볼 때, 雄州가 雄平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20656#2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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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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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 吉州┆弓漢村
夫瑞坪 남쪽에서 多信浦項 바닷가까지의 거리만큼 서북쪽으로 浮瑞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이 吉州가 처음 있던 西之委다.
그리고 夫瑞坪 남쪽에서 多信浦項 바닷가까지의 거리를 40리로 설정하면, 吉州²에서 豆里山까지 거리가 88리가 되므로, 이 산이 吉州²에서 90리 떨어져 있고 甲山과 접경에 있다는 大山이 된다.
@다신포항 @多信浦項 @부서천 @浮瑞川 @두리산 @豆里山 @궁한촌 @弓漢村 @웅주 @雄州 @화곶령 @火串嶺 @길주 @吉州
20656#22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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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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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 吉州┆弓漢村
弓漢村은 왕고와 완안부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불씨였다. 왕고가 갈라전을 점령할 때도 弓漢村은 전쟁의 계기이자 전략의 소재였고 그래서 깊은 골짜기였지만 왕고는 이곳에 吉州¹를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20656#2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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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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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02 世宗實錄地理志(1454)
公險鎭에 성을 쌓고 이택으로써 咸州대도독부사를 삼아서 비로소 英州·福州·雄州·吉州의 4주와 公險鎭에 방어사를 두었다. 윤관이 북계에 여러 성을 쌓고 남계의 백성들을 옮겨서 이를 채웠는데, 咸州를 鎭東軍이라 하여 1만 3천 호를 두고, 英州를 安嶺軍이라 하고, 雄州를 寧海軍이라 하여 각각 1만 호를 두고, 吉州·福州·宜州의 3주에는 각각 7천 호를 두었고, 公險鎭·通泰鎭·平戎鎭 3진에는 각각 5천 호를 두었다.
20656#2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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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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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02.27± 윤관의 옥저인 학살
여진은 본디 高麗의 부락으로서 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長州·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高麗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 삼국지(289)에 나오는 東沃沮와 묘사가 비슷하므로 沃沮가 女眞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20656#23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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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04.08ꜛ 金史(1344)
강종이 돌아오자 여러 사람들은 모두
“병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합니다. 요나라 사람들이 앞으로 우리를 탓할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태조만이 홀로
“만약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찌 曷懶甸만 잃어버릴 뿐이겠는가? 여러 부가 모두 우리 소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강종도 그렇게 여기고 마침내 斡塞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도록 하여 고려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 강종은 오아속이고 태조는 아골타다.
20656#23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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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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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斜卯阿里
斜卯阿里 父渾坦 穆宗時內附 數有戰功 阿里年十七 從其伯父胡麻谷討詐都 獲其弟沙里只 高麗築九城於曷懶甸 渾坦攻之 遇敵於木里門甸 力戰久之 阿里挺槍馳刺其將於陣中 敵遂潰 渾坦與石適歡合兵於徒門水 阿里首敗敵兵 取其二城
사묘아리의 아버지는 혼탄이다. 고려가 갈라전에 9성을 쌓자 혼탄이 목리문전에서 오래 싸웠다. 사묘아리가 그 장수를 찌르자 적이 무너졌다. 혼탄은 석적환과 도문수에서 군대를 합하였는데 사묘아리가 앞장서서 성 2개를 획득하였다.
20656#2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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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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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斜卯阿里
高麗入寇 以我兵屯守要害 不得進 乃還 阿里追及于曷懶水 高麗人爭走冰上 阿里乘之 殺略幾盡 遂合兵於石適歡 道遇敵兵五萬 擊走之 又與石適歡遇敵七萬 阿里先登 奮擊大敗之 石適歡曰 汝一日之間 三破重敵 功豈可忘 乃厚賜之
고려가 쳐들어왔으나 요해처를 지키니 돌아갔는데, 사묘아리가 추격하여 갈라수에서 거의 다 죽이고 석적환과 군대를 합쳤다. 길에서 적병 5만여 명을 만나자 쫓아버렸고 또 7만 명의 적병을 만났는데, 사묘아리가 나서 대파하였다.
20656#2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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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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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斜卯阿里
▐ 사묘아리의 무용담과 가장 비슷한 사건은 공험진 전투다. ① 力戰久之(힘써 오래 싸웠다)가 圍吉州數月(길주를 몇달간 포위하였다)와 비슷하고 ② 渾坦與石適歡合兵於徒門水(혼탄이 석적환과 도문수에서 합류하였다)가 聚遠近諸部(원근의 여러 부족을 모았다)와 비슷하며 ③ 取其二城(그 두 성을 빼앗았다)가 웅주성과 공험진성이 인접한 상황과 어울리고 ④ 무엇보다 高麗築九城於曷懶甸 이후 수만명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전투는 공험진 전투 밖에 없기 때문이다.
20656#23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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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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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斜卯阿里
▐ 그러나 追及于曷懶水高麗人爭走冰上(갈라수까지 추격하니 왕고인들이 다투어 얼음 위로 달아났다)는 5월에 벌어졌던 공험진 전투와 어울리지 않고 하루에 수만명이 참여하는 전투를 세 번이나 벌였다는 점도 비현실적이다.
▐ 사묘아리의 무용담이 공험진 전투에서 있었던 일이라면 曷懶水는 길주를 흐르는 浮瑞川이 된다. 그리고 1108년에 윤관이 점령지에 명칭을 붙일 때 合懶를 咸州라 한 것처럼 吉州라는 명칭도 曷懶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생긴다.
20656#23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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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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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 高麗史(1451)
나라에서 처음 9성을 쌓았을 때 거란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女眞弓漢里 乃我舊地 其居民 亦我編氓 여진의 궁한리는 우리의 옛 땅이므로 그곳에 거주하는 민들도 역시 우리의 백성입니다. 근래에 변방을 노략질 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수복하고 그 성을 쌓았습니다.’라 하였습니다. 표문에 말을 그렇게 하였으나 궁한리의 추장에는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가 많기 때문에 9성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거란이 반드시 우리를 책망하고 꾸짖을 것입니다.
20656#23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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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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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 高麗史(1451)
▐ 我舊地라 한 것은 옥저가 고려에 병합되었고 왕씨고려가 그 고려의 계승을 표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왕고 이전에 이미 발해가 고려 계승을 표방하였고 옥저 지역에 책성부를 두어 다스렸기 때문에 왕고의 주장은 억지였다.
더구나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옛 고려의 땅이 모두 요나라의 것이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옥저 고지에 대한 왕고의 소유권 주장은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었다.
20656#23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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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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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09 高麗史(1451)
東蕃의 적은 祖宗 이래로 우리나라의 힘에 의지하여 큰 은택을 입어 왔는데도 지금은 배은망덕하게도 멀리 있는 적까지 불러 모아 국경을 침범하였다. 1104년에는 끊임없이 군사를 내어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였으며 때로는 생포하여 노예로 삼은 자들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자 군사를 일으키고 고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그러나 적의 잔당은 場寨를 설치하고 吉州를 공격해 왔기에 다시 군사를 독려해 공격하고자 한다.
20656#21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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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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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16 @공험진(公嶮鎭)
▐ 吉州¹를 구원하려는 병력은 雄州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雄州에서 吉州¹에 가려면 雄州 북쪽에 있는 夫瑞坪을 거쳐야 한다. 夫瑞坪 남쪽은 雄州보다 더 火串嶺에 가까운 곳으로, 火串嶺이 동쪽 경계였으니 이곳에 정계비를 세울 만하다. 이곳은 수백년 후 吉州²가 설치되어 남쪽의 옛 雄州까지 관할하게 된 곳이다.
이곳이 公嶮鎭의 조건에 가장 부합한다.
@길주 @吉州 @웅주 @雄州 @부서평 @夫瑞坪 @화곶령 @火串嶺
20656#23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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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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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16ꜛ 高麗史(1451)
여진이 다시 여러 부족을 모아 吉州를 수개월 포위하고 성에서 10리 거리에 작은 성을 쌓아 6개의 목책을 세우고 매우 급하게 성을 공격하였다. 오연총이 그것을 듣고 분개하여 나가려고 하니 왕이 다시 부월을 주어 보냈다. 행렬이 公嶮鎭에 이르니 적이 길을 막고 갑자기 공격하여 우리 군사들이 크게 패하였으며 장졸들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여러 성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성이 함락될 때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20656#23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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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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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16ꜛ 高麗史(1451)
여진이 다시 여러 부족을 모아 吉州를 수개월 포위하고 성에서 10리 거리에 작은 성을 쌓아 6개의 목책을 세우고 매우 급하게 성을 공격하였다. 오연총이 그것을 듣고 분개하여 나가려고 하니 왕이 다시 부월을 주어 보냈다. 행렬이 公嶮鎭에 이르니 적이 길을 막고 갑자기 공격하여 우리 군사들이 크게 패하였으며 장졸들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여러 성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성이 함락될 때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20656#2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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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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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16¦公嶮鎭
公嶮鎭의 위치를 추정하는 데는 두 가지 기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는 그곳에 경계비를 세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吉州를 구원하러 가다 그곳에서 적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경계비를 세울 곳으로는 동쪽 경계인 火串嶺이 최적이고 吉州를 구원하는 군대는 雄州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雄州 북쪽이자 火串嶺 아래인 夫瑞坪 남쪽을 公嶮鎭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수백년 후 다시 설치된 吉州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吉州다.
20656#22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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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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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06 高麗史(1451) 許載
9성의 役에 중군녹사로서
守吉州城 女眞來攻 載與兵馬副使李冠珍等 固守數月 城幾陷 勵士卒 一夜更築重城 以拒之 虜乃退
길주성을 지키다가 여진이 와서 공격하니, 허재는 병마부사 이관진 등과 함께 수개월을 굳게 지켰다. 성이 거의 함락되려고 하자 사졸을 독려하여 하룻밤에 다시 중성을 쌓고 그들을 막아내니 적이 마침내 물러났다.
▐ 길주가 1109년 5월에 포위되어 윤관과 오연총이 구원하러 가던 중 6월에 강화가 체결되어 되돌아간 사건을 말하는 듯하다.
20656#2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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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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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6.27 高麗史(1451)
褭弗과 史顯 등 6인을 접견하고 입조한 연유를 묻자 “옛날 우리 太師인 盈歌가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조상도 大邦으로부터 나왔으니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귀부하는 것이 의리에 맞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인 烏雅束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9성을 되돌려주어 우리의 생업을 편안하게 해주시면, 자손대대에 이르기까지 공물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국경에 던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20656#21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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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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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6.27 高麗史(1451)
▐ 1101년에 동여진의 弓漢伊忽村 도령 麻浦 등 55인이 왕고에 입조하였는데, 이 때문인지 1104년에 烏雅束이 군사를 일으켜 弓漢村 사람들 중 자신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응징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1104년에 동여진의 추장 烏雅束이 별부의 夫乃老와 사이가 벌어지자 公兄之助를 시켜 군대를 동원해 공격하게 했는데, 기병이 정주 관문 밖까지 와서 진을 쳤다고도 한다.
20656#23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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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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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7.18 高麗史(1451)
최홍정과 문관이 여진 추장 居熨伊 등에게 “너희가 9성의 반환을 요청했으니 마땅히 이전에 했던 약속처럼 하늘에 대해 맹세하라.”라고 하였다. 추장 등은 咸州 성문 밖에 제단을 설치하고 “지금 이후 대대손손까지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맹세하고 물러갔다.
弘正等始自吉州 以次收入九城戰具資粮于內地
최홍정 등은 길주부터 차례로 9성의 전투 장비와 군량을 내지로 거두어 들였다.
20656#2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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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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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 合懶路
合懶路 置總管府 합라로에 총관부를 두었다.
貞元元年 改總管為尹 仍兼兵馬都總管 년에 총관을 尹로 개칭하고 병마도총관을 겸했다.
承安三年 設兵馬副總管 년에 병마부총관을 설치했다.
舊貢海葱 大定二十七年罷之 년에 폐지했다.
有移鹿古水 이록고수가 있다.
西至上京一千八百里 東南至高麗界五百里 서쪽으로 상경까지 1800리고 동남쪽으로 고려의 경계까지 500리다.
▐ 咸州는 合懶에서 나온 듯하다.
20656#2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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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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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雙城을 함락시키자 총관 조소생, 천호 탁도경이 도망쳐버리니 和州·登州·定州·長州·預州·高州·文州·宜州 및 宣德鎭·元興鎭·寧仁鎭·耀德鎭·靜邊鎭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咸州 이북은 고종 무오년부터 원이 차지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하였다.
▐ 咸州 이남 지역을 열거하고 咸州 이북이라 칭하고 있다. 鐵嶺 이북이라 해야 옳다.
20656#2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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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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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雙城을 함락시키자 총관 조소생, 천호 탁도경이 도망쳐버리니 和州·登州·定州·長州·預州·高州·文州·宜州 및 宣德鎭·元興鎭·寧仁鎭·耀德鎭·靜邊鎭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咸州 이북은 고종 무오년부터 원이 차지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하였다.
▐ 咸州 이남 지역을 열거하고 咸州 이북이라 칭하고 있다. 鐵嶺 이북이라 해야 옳다.
20656#23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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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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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12 明史(1739)
命戶部咨高麗王 以鐵嶺北東西之地 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 韃靼 高麗人等 遼東統之 鐵嶺之南 舊屬高麗人民 悉聽本國管屬 疆境既正 各安其守 不得復有所侵越
호부로 하여금 고려왕에게 외교문서를 보내도록 하기를, “철령 북방 동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에 속하였으니 요동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 남쪽은 옛날부터 고려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토록 하오. 서로 국경을 확정하여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20656#23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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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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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12 明史(1739)
命戶部咨高麗王 以鐵嶺北東西之地 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 韃靼 高麗人等 遼東統之 鐵嶺之南 舊屬高麗人民 悉聽本國管屬 疆境既正 各安其守 不得復有所侵越
호부로 하여금 고려왕에게 외교문서를 보내도록 하기를, “철령 북방 동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에 속하였으니 요동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 남쪽은 옛날부터 고려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토록 하오. 서로 국경을 확정하여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20656#23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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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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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2 王高 禑王 表 1258 ②
1258년에 이르러 몽골의 산길대왕·보지관인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정복하던 때에, 본국의 정주의 반란민인 탁청, 용진현 사람인 조휘가 화주 이북 지방을 가지고 나아가 항복하였습니다. 금의 요동 함주로 부근의 심주에 쌍성현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본국의 함주 근처 화주의 작은 옛 성 2개를 모호하게 주청하여, 마침내 화주를 가지고 쌍성이라고 모칭하고 조휘를 쌍성총관으로, 탁청을 천호로 삼아 인민을 관할하게 하였습니다.
20656#2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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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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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2 王高 禑王 表 1258 ③
▐ 우왕의 주장을 요약하면, 천산산맥 북쪽에 금나라의 咸州가 있었는데 철령 이북에 있는 咸州를 이와 혼동하여 원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켰다는 이야기다. 몽골은 1234년에 북경에 있던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산길 대왕이 이끄는 군대가 만주의 여진을 평정하였는데, 이 군대가 철령 이북까지 내려와 1258년에 쌍성부를 설치한 것이다. 당시 왕씨 조정은 1232년에 강화도로 들어간 뒤 1270년까지 육지로 나오지 않았다.
20656#11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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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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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0~1393 世宗實錄地理志(1454) 吉州 ⑨ 公嶮鎭
▐ 1109년에 吉州¹가 포위당하자 오연총이 구원에 나섰는데 그 병력은 인근의 雄州에서 출발했을 듯하다. 雄州에서 吉州¹로 가려면 雄州 북쪽에 있는 夫瑞坪을 거쳐야 한다. 夫瑞坪 남쪽은 雄州보다 더 火串嶺에 가까운 곳으로, 火串嶺이 동쪽 경계였으니 이곳에 경계비를 세울 만하다. 이곳이 公嶮鎭의 조건에 가장 부합되는 곳이다. 그러나 수백년 후 吉州²가 이곳에 설치되면서 公嶮鎭의 위치는 잊혀졌다.
20656#23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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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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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04.04 太宗實錄(1431)
遼東천호 왕가인이 받들고 온 칙서에
"지금 參散·禿魯兀 등 11처의 溪關만호 寗馬哈, 參散천호 李亦里不花, 禿魯兀천호 佟參哈·佟阿蘆, 洪肯천호 王兀難, 哈蘭천호 朱蹯失馬, 大伸천호 高難, 都夫失里천호 金火失帖木, 海童천호 童貴洞, 阿沙천호 朱引忽, 斡合천호 劉薛列, 阿都歌천호 崔咬納·崔完者를 초유한다."
하였다.
▐ 溪關┆參散(英州)┆禿魯兀(端州)┆洪肯┆哈蘭(咸州)┆大伸┆都夫失里┆海童┆阿沙┆斡合┆阿都歌
20656#2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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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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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05 李朝 太宗 奏
照得 本國東北地方 自公嶮鎭歷孔州吉州端州英州雄州咸州等州 俱係本國之地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공주·길주·단주·영주·웅주·함주 등 고을을 거치는데,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 文州·高州·和州·定州·咸州·公嶮鎭 ➔ 公嶮鎭·孔州·吉州·端州·英州·雄州·咸州
┆公嶮鎭을 제외하면 1388년의 표문은 咸州까지만 언급했고 1404년의 표문은 咸州부터 언급했다.
20656#2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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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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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05 李朝 太宗 奏 1258
1258년에 이르러 몽고의 산길보지 등 관원이 여진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의 반민 조휘와 탁청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를 삼아 군민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의 인민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를 해양이라 칭하고, 단주를 독로올이라 칭하고, 영주를 삼산이라 칭하고, 웅주를 홍긍이라 칭하고, 함주를 합란이라 칭하였습니다.
20656#2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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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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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05 ◾雄州→洪肯
1404년에 명나라가 洪肯의 천호 왕올란 등을 초유한다고 했을 때, 태종이 洪肯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윤관의 동북9성에 나오는 雄州를 끌어다 洪肯에 대응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洪原이 洪獻 또는 紅坑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되어 있어 명나라가 언급한 洪肯은 洪原이 맞는 듯하다. 그러나 그 洪肯이 雄州라는 태종의 주장은 근거를 찾을 수 없고 기록에 나오는 정황과도 맞지 않는다.
20656#2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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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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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05 李朝 太宗 奏 1388
1388년 2월에 호부의 자문을 받았사온데, 호부 시랑 양정 등 관원이 태조 고황제의 성지를 흠봉하기를, ‘철령 이북·이동·이서는 원래 개원의 관할에 속하였으니, 군민을 그대로 요동 관할에 소속시키라.’ 하였습니다. 본국에서 즉시 상항의 사건으로 인하여 배신 밀직 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조정에 가서 호소하여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본국에 환속시켜 주기를 빌었습니다.
20656#2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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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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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05 李朝 太宗 奏
상고하건대 參散 천호 李亦里不花 등 10처 인원이 비록 여진 인민에 속해 있기는 하나, 본국 지면에 와서 산 지가 연대가 오래고 호인 納哈出 등의 군사와 왜구의 침략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조잔하여 거의 다 없어지고 그 유종으로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으며 또 본국의 인민과 서로 혼인하여 자손을 낳아서 부역에 이바지 하고 있습니다.
20656#2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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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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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1109년에 길주로부터 시작하여 9성의 전투 장비·군량을 내지로 거두어 들였고 마침내 崇寧·通泰·眞陽의 세 진 및 영주·복주의 성을 철거하였다. 또 함주·웅주 및 宣化鎭의 성을 철거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의주의 6주 및 공험진·통태진·평융진의 3진이 9성이다. 성을 철거하고 여진에게 돌려줄 때에 의주 및 공험진·평융진이 없고 숭령진·진양진·선화진이 추가로 보이고 설치한 호의 수가 각기 같지 않다.
20656#2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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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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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三國誤記」 高麗史 吉州¹
吉州久爲女眞所據 號弓漢村 睿宗三年 置州 爲防禦使 (六年→)四年 築(中城→)重城 尋以地 還女眞
길주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궁한촌이라 불렀다. 1108년에 州를 설치하여 방어사를 두었다. 1109년에 중성을 쌓았다가 얼마 후에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 1109년에 길주가 포위당하자 許載가 重城을 쌓아 버틴 바 있다. 길주를 포함한 9성은 그 해에 돌려주었다.
20656#29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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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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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옛 孔州로서 혹은 匡州라고도 하는데 오랫동안 호인에게 점거되었다. 윤관이 호인을 몰아내고 公險鎭防禦使를 두었다. 1398년에 德陵과 安陵이 있다고 하여 경원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성을 수축하다가 匡州防禦之印이라 되어 있는 인신을 얻었다. 1409년에 목책을 所多老의 營基에 설치하고 부를 옮겼고 1410년에 야인의 난리로 인하여 鏡城郡에 합쳤다가 1417년에 鏡城의 豆籠耳峴 이북을 떼어서 다시 도호부로 삼고 富家站에 목책을 세우고 치소로 삼았다.
20656#2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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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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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백 리다.
巨陽城이 있는데 본래 고려 대장 윤관이 쌓은 것이다.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先春峴이니 곧 윤관이 비를 세운 곳이다.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이 그 글자를 깎아 버렸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英哥沙吾里站 북쪽으로 蘇下江 가에 公險鎭이 있으니 곧 윤관이 설치한 진이다.
20656#23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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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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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4
東林城 → 北去五里 所多老 → 其北三十里 → 越江十里 → 其北九十里 → 其北三十里 → 其北六十里 → 其東北七十里 巨陽城 城本高麗大將尹瓘所築 → 西距六十里 先春峴 卽尹瓘立碑處 有高麗之境四字
동림성 → 북쪽으로 5리 소다로 → 북쪽으로 30리 → 강을 건너 10리 → 북쪽으로 90리 → 북쪽으로 30리 → 북쪽으로 60리 → 동북쪽으로 70리 윤관이 쌓은 거양성 → 서쪽으로 60리 윤관이 비를 세운 선춘현. 그 밑을 팠더니 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20656#2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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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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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6
동림성 → 북쪽으로 5리 소다로 → 북쪽으로 30리 → 북쪽으로 60리 → 북쪽으로 3리 두만강탄 → 북쪽으로 90리 → 북쪽으로 60리 → 북쪽으로 1백 리 영가 사오리 → 북쪽 소하강 가에 윤관이 설치한 공험진이 있다.┆영가 사오리 → 서쪽으로 60리 백두산
▐ 고려사(1451)에 나오는 公嶮鎭(白頭山東北 一云 在蘇下江邊)과 일치한다.
20656#2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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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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弓漢嶺
두리산 남쪽의 물은 단천을 지나 동해로 들어가지만 두리산 북쪽의 물은 세 갈래로 갈라진다.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허천강을 거쳐 압록강으로 들어가고 또 한 갈래는 북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들어가며 나머지 한 갈래는 동쪽으로 흘러 길주를 지나 동해로 들어간다. 고대에는 물길을 따라 길이 났으므로 세 물길이 만나는 이곳이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 그리고 동해안 지역이 교류하는 통로였다.
20656#2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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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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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1451)
여진의 병사 수만 명이 와서 雄州를 포위하였다. 그 때 척준경이 성 안에 있었는데, 州守가 말하여 이르기를, “성을 지키는 것이 오래되어 군량이 떨어질 것 같은데 밖에서 도움이 오지 않으니, 공이 성을 나가서 군대를 거두고 돌아와 성 안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사졸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 하였다. 척준경은 밤에 줄을 타고 성에서 내려와서 定州로 돌아가 군사를 정돈하여 通泰鎭을 통과하고 也等浦에서 吉州까지 적을 만나 싸워 크게 패배시켰다.
20656#23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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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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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1451)
1108년에 윤관과 오연총이 정예병사 8,000명을 거느리고 加漢村 병목의 작은 길로 나갔다. 적이 갑자기 공격하니 군사가 모두 궤멸되고 10여명만 남았다. 적이 윤관 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고 오연총은 화살에 맞았다. 척준경이 용사 10여 명을 이끌고 와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여 10여 명을 때려 죽였다. 최홍정과 이관진 등이 골짜기에서 병사를 이끌고 오니 적이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 윤관 등은 날이 저물자 돌아와 英州城으로 들어왔다.
20656#23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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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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