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史書 > 0289 三國志(晉 陳壽) > > 三國志(289) 06

其後絕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하였다.
 
三國志(三國志)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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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魏略) 01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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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魏略) 01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에 조공하는 번국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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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魏略) 02
至王莽地皇時 廉斯鑡為辰韓右渠帥 聞樂浪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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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위략(魏略) 02
왕망의 지황 연간에, 염사착이 진한의 우거수가 되어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한인(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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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魏略) 03
問之 男子曰 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 為韓所擊得 皆斷髮為奴 積三年矣 鑡曰 我當降漢樂浪 汝欲去不 戶來曰 可 鑡因將戶來 來出詣含資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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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魏略) 03
물으니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한(漢)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이다. 우리들 천 5백 명은 재목을 벌채하다가 한(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고 하였다. 착(鑡)이 “나는 한(漢)의 낙랑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호래는, “좋다.” 하였다. 그리하여 착(鑡)은 호래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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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魏略) 04
縣言郡 郡即以鑡為譯 從芩中乘大船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尚得千人 其五百人已死 鑡時曉謂辰韓 汝還五百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辰韓曰 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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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魏略) 04
함자현에서 군(郡, 낙랑)에 연락을 하자, 군(郡)은 착(鑡)을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서 호래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착(鑡)이 이때 진한에게 따지기를,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만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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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魏略) 05
辰韓曰 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 乃出辰韓萬五千人 弁韓布萬五千匹 鑡收取直還 郡表鑡功義 賜冠幘田宅 子孫數世 至安帝延光四年時 故受復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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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魏略) 05
진한은 “5백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 하고는, 진한 사람 만 5천명과 변한포 만 5천필을 내어놓았다. 착(鑡)은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군(郡)에서는 착(鑡)의 공과 의를 표창하고, 관책과 전택을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지나 안제 연광 4년(125년)에 이르러서는 그로 인하여 부역을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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