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6~0539 職貢圖(蕭繹)
by Silla on 2023-04-24
ᐥ蕭梁의 蕭繹이 職貢圖를 그렸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있지 않다. 蕭繹은 蕭梁을 세운 蕭衍의 아들로 훗날 元帝(552~554)가 되었다.ᐥ

「梁職貢圖」는 蕭繹(후에 元帝, 508~554) 이 荊州刺史 재임(526~539)시 주변제국 史臣의 용모를 自筆로 묘사한 것을 梁 武帝(502~549 재위)의 재위 40년을 기념하여 결집한 두루마리 그림(畵卷)이다. 「양직공도」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模寫本 4종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1960년 소개된 南京博物院(현 北京 中國國家博物館) 소장의 北宋代 摹本이며, 다른 두 점은 1987년 알려진 臺北의 故宮博物院에 「南唐顧德謙摹梁元帝審客人朝圖」와 「唐閻立本王會圖」, 그리고 2011년 찾아진 張庚(1685~1760)이 연대 미상의 白描 職貢圖를 1739년 모사한 것을 淸末 葛嗣?(1867~1935)이 재록한 「淸張庚諸審職貢圖」 (이하 ‘張庚摹本’)이 그것이다.
「양직공도」模本 4종 가운데 使臣圖와 해당 국가의 題記가 남아있는 것은 南京博物院 舊藏本뿐이며, 臺北 故宮博物院의 2점은 使臣圖만 남아있고, 張庚摹本은 題記만이 전하고 있다. 張庚摹本에 그려져있던 사신도는 현재 확인할 수 없지만, 사신의 크기와 수효 및 채색여부 등은 葛嗣?의 기록이 전한다. 한편 摹本 4종에 그려진 사신은 그 수효가 모두 다르다. 여기에 唐宋 이래 「양직공도」를 所藏ㆍ所見한 기록까지 참조하면 사신의 수효와 기재 순서가 다른 摹本의 수는 10여 종에 달한다. 그리고 동일 국가의 사신이라도 그 모습은 상이하며, 題記 또한 분량과 내용에서 차이가 적지 않다. 摹本은 형태에 있어서도 南京博物院 舊藏本과 故宮博物院 「唐閻立本王會圖」은 비단(娟本)에 彩色 그림(粉本)인 반면 「南唐顧德謙摹梁元帝審客人朝圖」와 張庚摹本은 먹으로만 그린 白描本이다.
현존 「梁職貢圖」 摹本 4종은 蕭繹이 그린 「梁職貢圖」 原圖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모사한 시기로 보면 「南唐顧德謙摹梁元帝審客人朝圖」 → 「南京博物院 舊藏本」 → 「唐閻立本王會圖」 → 「張庚諸審職貢圖」 순이지만, 남아있는 使臣의 수효, 題記 有無 및 내용 차이, 내료와 彩色 유무 등에서 어느 것이 사료적으로 우월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모본 간의 차이는 「梁職貢圖」가 만들어진 이후 唐宋을 거쳐 明淸에 이르는 流傳의 양태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原圖가 粉本인지 아니면 白描로 그려졌는지 알수 없어도, 顧德謙摹本과 같이 完帙에 가까운 것이 있는가 하면 지역별 사신도만을 나누어 제작한 摹本도 상정할 수 있겠다. 나아가 뒤에 보는 대로 題記가 있는 것과 摹本이 있었으며, 그 提起 또한 使臣圖의 수효와 마찬가지로 原文에서부터 여러 분량의 抄錄本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현존 「梁職貢圖」 는 梁代 작성된 原文을 충실하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자의 요구에 따라 변개되고, 변형된 摹本사이의 膠着도 예상된다. 그러나 정작 「梁職貢圖」의 使臣圖과 題記 이해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이미 梁代에 蕭繹의 「職貢圖」 외에 梁武帝 초기에 활동한 江僧寶의 「職貢圖」, 裴子野(467?~530?)가 남긴 20개국의 使臣圖에 역시 地理風俗 기사를 「方國使圖」 등 여러 종의 職貢圖가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사신도와 유사한 이민족 朝貢使行 모습도 성행하였다. 高句麗의 경우만 하여도 劉宋代 陸深微(?-485) 가 그린 「高麗?白馬圖」ㆍ「孫?著高麗依圖」를 비롯하여, 顧寶光의 「高麗鬪鴨圖」 등이 唐代까지 傳存 혹은 模寫되고 있었다. 요컨대 唐宋이래 原圖와 여러 摹本을 所藏ㆍ所見한 기록과 함께 「梁職貢圖」 의 성립과 이의 流傳 그리고 모본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규명은 앞으로의 과제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