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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려사 : 세가

문종 9년(1055) 을미년

• 9년 봄 2월

을사일. 동여진의 봉국장군(奉國將軍) 이다불(尼多弗) 등 27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무신일. 한식(寒食)날을 맞아 송나라 상인 섭덕총(葉德寵) 등 87명은 오빈관(娛賓館)1)에서, 황증(黃拯) 등 1백 5명은 영빈관(迎賓館)2)에서, 황조(黃助) 등 48명은 청하관(淸河館)3)에서, 탐라국의 수령인 고한(高漢) 등 1백 58명은 조종관(朝宗館)에서 각각 음식을 대접했다.

• 여름 4월

신축일. 우박과 눈이 내렸다.

• 5월

신유일. 거란이 야율혁(耶律革)과 진의(陳顗)를 보내 왕을 책봉했다. 그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은 선대의 위훈(偉勳)을 계승하여 문교(文敎)를 성하게 펼쳤으며, 정성을 기울여 공물을 바침으로써 황실을 높이 받들고 자신의 나라[藩圭4)]를 잘 다스림으로써 동방을 평화롭게 만들었다. 마침 이러한 예식(禮式)을 행하게 되어 경과 함께 기쁨을 나누려고 생각한다. 이에 특별히 책명을 내리고 아울러 진귀한 선물을 보내어 경에 대한 나의 총애를 보이니, 그 은혜와 영광을 마땅히 체득할지어다. 이제 광의군절도사(匡義軍節度使) 야율혁(耶律革) 등을 경의 나라로 보내 예를 갖추어 책명을 전하게 하노라. 아울러 수레·관복(冠服)·규검(圭劍)5)등과 특별히 하사하는 여러 선물들을 별지 목록과 같이 갖추어 보내니 도착하는 대로 받을지어다.”

보내온 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된 이는 모든 제후들을 예절로 대우하고 온 나라들의 화목을 추구해야 하는 법이니, 붉은 활과 검은 활을 내려줌으로써 번국들의 성대한 공을 표창하고 종묘에 제사지낸 고기6)를 하사함으로써 제례의 폐막을 알려 왔던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전례를 따져보면 제후들은 응당 큰 특전을 받아야 한다. 짐의 통치기에 창성한 국운이 비로소 이룩되매 신하들의 강권에 따라 억지로 큰 휘호(徽號)를 받게 되었다. 사방의 나라들에서 저마다 우리 조정에 대한 의례를 지켜오니[緜蕝7)] 먼 지역까지도 짐의 은택8)을 베풀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에 따라 좋은 날을 선택해 책명[昆命9)]을 선포하노니, 광시치리갈절자충봉상공신(匡時致理竭節資忠奉上功臣)·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수태보(守太保) 겸 중서령(中書令)·상주국(上柱國)·고려국왕으로, 식읍 1만호와 식실봉 1천 3백호를 받은 왕휘(王徽)는 학식이 깊고 풍부하며 성품이 충직하고 떳떳한 도리를 굳게 지켜왔다. 인(仁)을 주관하는 동방의 목덕(木德)의 정수를 한 몸에 모았고10), 빼어난 성현의 영특한 관상11)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았다. 나라를 이어 받으면서부터 선조의 위업을 계승해 제나라 환공(桓公)과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위대한 패업을 수립하고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의 전 봉토를 장악하였다. 선정으로 백성들을 소생시키니 그 공덕을 칭송하는 노래가 아름답게 울려 퍼진다. 우리 조정의 신하로서12) 우리의 정삭(正朔)13)을 청해오니 오래토록 큰 나라를 섬기는 정성이 변함없으며, 절후와 풍향을 살필 수 있으니14) 능히 나라를 지켜나갈 능력을 갖추었도다. 우리 조정의 울타리로서 번국 가운데 정예군의 역할을 다하니 동쪽 변경에 대한 우리의 걱정거리15)를 덜어주었으며 신하로서 충성할 힘을 더욱 쌓게 되었다.
이제 우리나라의 경사를 맞아 경이 대대로 쌓아온 공훈을 길이 생각해 사신을 보내 특별히 조정의 책명을 전달하는 바이다. 경의 품계를 태사(太師)로 올리고 식읍을 덧붙여 줌으로써 먼 나라를 우대하고 공적에 보답하는 전례상의 은전을 베풀고자 한다. 이제 정사(正使)로 광의군절도사(匡義軍節度使)·요주자사(饒州刺史) 겸 어사대부(御史大夫) 야율혁(耶律革)과 부사(副使)로 숭록경(崇祿卿)·호군(護軍) 진의(陳顗)를 나의 뜻을 받든 사신으로 보내 예를 갖추어 그대를 수태사(守太師)로 책봉하고 식읍 5천호와 식실봉 5백호를 덧붙여주며 나머지는 종전대로 한다.
아! 난새를 수놓은 면류관과 여덟 종류의 관복16)은 특별히 경을 우대한 것이며[禮數17)] 상아로 장식한 수레와 아홉가지 깃발18)은 예법에 맞게 한 것이다. 의례를 맡은 관청[曲臺]에서 하사품을 예법에 맞게 준비한 것은 다른 여러 나라에 비하여 더욱 영예로운 것이니, 이 특별한 예우를 공손히 받을지며 나라를 위한 좋은 계책을 만드는 데 힘쓰라. 더구나 이처럼 융성한 시대를 만나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업적을 더욱 드러냄으로써 제후들의 모범이 되고 후손들을 편안하게 만들도록 하라. 짐이 훈계하는 말을 명심한다면 많은 복록을 받을 것이다.”

왕이 남쪽 교외19)에서 책명을 받았다.
계해일. 거란이 이주자사(利州刺史) 소록(蕭祿)을 보내 왕태자를 책봉했다. 그 관고(官告)20)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제후들이 세자를 둔 것은 나라를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대사[冢社21)]를 지켜나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영원토록 왕가를 빛내려면 반드시 먼저 적자(嫡子)를 세워야 하는 법이다. 근자에 올린 보고를 살펴보고 고려의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생각건대, 우리의 정삭(正朔)을 그대로 따르고 황실을 존숭하니, 이는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은총을 구하는 것이리라. 특별히 옛 규범에 의거하여 은전을 내리노니 영광스럽게 받을지어다.
광시치리갈절자충봉상공신(匡時致理竭節資忠奉上功臣)·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수태부(守太傅)·중서령(中書令)·상주국(上柱國)·고려국왕으로, 식읍 1만호와 식실봉 1천 3백호를 받은 왕휘(王徽)의 아들 왕훈(王勳)은 대대로 쌓아온 두터운 덕에 의지하고 조상들이 남긴 훌륭한 계책을 물려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재능을 지녔으며 태자로 경연(經筵)에 참가해서는 어른을 공경하고22), 스승에게로 나아가서는 현묘한 진리의 탐구에 참여했다.23) 더구나 왕실의 혈통24)은 끝이 없을 것이며, 국가 창성의 연원도 유구하다. 선대가 쌓은 위업을 자손들이 잘 계승해25) 대대로 내려오는 유풍을 잘 이었으니, 부친에 이어 장자가 책봉을 받는 것은26) 황실의 규범에 맞는 일이다. 삼한(三韓)의 서쪽 땅은 원래 백제(百濟)의 영토였는데 고려가 그 지역을 차지해 우리 조정과 영광을 나누었고 공후(公侯)의 작위를 새롭게 차지했다. 이제 그대의 공적을 칭찬하고 북돋우는 나의 마음을 보임으로써 길한 징조를 널리 펴고자한다.
아! 그대는 젊은 나이27)에 영광스럽게도 황제의 조서를 받았으니 앞으로 훌륭한 수레를 타고28) 곤룡포를 입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를 것이다.29) 큰 효도와 공경으로 양친을 받들고 돈독한 신의와 관대함으로 종실[公族]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만하거나 게으르지 말고 시종일관 나의 당부를 흠숭할 것이며 자상한 훈계를 욕되게 하지 말라. 그대를 특별히 삼한국공(三韓國公)에 책봉하노라.”

태자가 합문(閤門) 뜰에서 책명을 맞이했다.
을해일. 우박이 크게 쏟아졌다.

• 가을 7월

초하루 정사일.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거란의 전 태후와 황제는 조서를 내려 압록강(鴨綠江) 동쪽 지역을 우리의 영토로 인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거란이 성과 교량을 가설하거나 전투용 방책과 사격용 궁구30)를 설치하면서 점차 국경선을 넘어오니 이는 욕심이 지나친 것입니다. 이제 또 우정(郵亭)까지 새로 만들어 우리 영토를 잠식하고 있으니 『춘추』에서 지적한 ‘제멋대로 뻗어나가게 방치하지 말리니 더 이상 방치하면 제어하기 어렵다.’31)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에게 국서를 보내 더 이상의 군사행동을 중지하도록 경고하되, 그들이 거부하면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건의에 따라 거란의 동경유수에게 다음과 같은 국서를 보냈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나라를 계승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국경으로 삼아왔습니다. 하물며 전 태후와 황제께서도 책문을 보내 은혜를 베풀면서 영토를 분봉32)할 때에도 또한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상국에서는 우리 영토 안으로 들어와 교량과 보루를 다수 설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부지런히 조공을 바치고 사신을 보내 입조해왔으며, 또한 조정에 글을 올려 옛 땅을 돌려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아직까지 허락을 얻지 못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 최근에는 내원성(來遠城 : 지금의 압록강 검동도)의 군사들이 우리 성 바로 근처까지 사격용 궁구(弓口)를 이설했으며, 망루를 만들려고 건축자재까지 쌓아 놓음으로써 변경의 주민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니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동경유수께서는 이웃나라와의 친선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실정을 잘 헤아려 황제께 잘 보고해 주셔서 우리 땅을 돌려받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임의로 설치한 성과 교량, 전투용 방책과 궁구 및 망루는 모두 철거하도록 해주십시오.”

경신일. 최충(崔冲)을 내사령(內史令)으로 임명해 퇴직시켰다. 그리고 이자연(李子淵)을 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로, 김정준(金廷俊)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박성걸(朴成傑)을 내사시랑평장사·상주국(上柱國)으로, 김원정(金元鼎)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叅知政事) 겸 태자소보(太子少保)로 각각 임명했다.
○ 거란의 강경준(康慶遵) 등 15명이 투항해 오면서 번인(蕃人)에게 잡혀갔던 우리나라 사람 53명을 돌려보냈다.
계해일. 지맹(智猛)33)을 수사공(守司空)으로, 구승(仇勝)을 형부상서(刑部尙書)로, 김소보(金所寶)를 호부상서(戶部尙書)로, 황보연(皇甫延)34)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각각 임명했다. 이들은 모두 무관직에 있으면서 이 관직을 겸임했다.
임신일. 동여진의 수령인 야시로(耶時老) 등 26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자, 차등을 두어 벼슬과 상을 내렸다.
계유일. 왕이,
“돌아가신 모친의 친언니인 김씨(金氏)는 과인과 덕종이 어릴 때에 힘써 보살펴 준 바 있다. 짐이 작위와 식읍을 높여줌으로써 지난날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하니 중추원(中樞院)으로 하여금 규정에 따라 시행토록 하라.”
고 지시했다.

• 8월

경인일. 억울하게 수감된 죄수들이 없는지 재심사했다.
기해일. 상서이부(尙書吏部)에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검교장작소감(檢校將作少監) 유공의(庾恭義)는 대광(大匡) 유금필(庾黔弼)의 증손으로서 과거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오랫동안 산질(散秩)에 머물고 있습니다. 주상께서, 태조의 묘정에 배향된 공신35)의 후손들은 죄를 범한 사실이 있더라도 모두 서용해야 한다고 분부하신 바 있으니, 이제 유공의에게 숙주방어사(肅州防禦使) 벼슬을 주어야 옳습니다.”
그러자 문하성(門下省)에서 반대했다.
“유공의는 과거 아부죄를 저질러 이름이 죄인명부에 실렸으니 임용해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목민관(牧民官)의 직무는 비단을 재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36)로 진정한 적임자가 아니면 반드시 직무를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그 건의를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왕이 문하성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 9월

계해일. 거란 흥종(興宗)의 부음을 알리러 홍려소경(鴻臚少卿) 장사복(張嗣復)이 고애사(告哀使)로 왔다. 왕은 장사복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보고를 받자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풍악을 중지시켰으며 가축의 도살과 사냥을 금지했다.
을축일. 왕이 흰 상복 차림에 백관을 거느리고 창덕문(昌德門)37) 앞에 나가 장사복이 전하는 조서를 접수했다. 애도 의식을 거행한 뒤 상복을 입고 사흘 동안 조회를 중지했으며 시장도 문을 닫게 했다.
신미일. 예빈성(禮賓省)에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송나라의 도강(都綱)38)인 황흔(黃炘)이 글을 올려, ‘제가 자식 황포안(黃蒲安)과 황세안(黃世安)을 데리고 투항했는데 본국에 82세된 노모를 남겨두고 와 애절한 그리움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라고 호소해왔습니다. 장남 황포안을 돌려보내 자기 조모를 봉양하도록 조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왕이, “월나라에서 온 새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트는 법인데39)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겠는가?”라며 허락했다.
병자일.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최유선(崔惟善)과 공부시랑(工部侍郞) 이득로(李得路)를 거란에 보내 조문하고 흥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했다.

• 겨울 10월

을유일. 생신회사사(生辰回謝使)로 거란에 보냈던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종필(崔宗弼)40)이 귀국해,
“거란의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이름이 종진(宗眞)인데 그대의 이름에 종(宗)자가 들어 있으니 고쳐야 마땅하다.’고 지적하기에 제가 표문에 적힌 저의 이름을 고쳐 최필(崔弼)이라고 했습니다.”
고 보고했다. 이에 문하성(門下省)에서 다음과 같이 탄핵했다.
“최종필은, 우리나라가 황제의 이름을 알지 못해 잘못을 저질렀지만 표문에 적은 것은 자신이 함부로 고칠 수 없다고 대답했어야 마땅합니다. 저들이 굳이 고치라고 강요한다면 단지 글자에서 점이나 획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예의에 거진 어긋남이 없는데도 함부로 표문을 고침으로써 왕명을 욕되게 했으니 법에 따라 죄를 묻기 바랍니다.”
그러나 왕은 죄를 묻지 않았다.
병신일. 왕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옛날 제왕들이 불교를 숭상한 사실은 문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태조 이래 대대로 사원을 세워서 복과 공덕을 빌어 왔다. 과인이 왕위를 계승한 후 덕정을 베풀지 못해 재변이 자주 나타나니 불법의 힘에 의지해 나라의 복리를 증진시키려한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길지를 골라 사원을 창건하도록 하라.”

그러자 문하성(門下省)에서 반대했다.

“예로부터 성스럽고 현명한 제왕 가운데 사원과 탑을 세워서 태평성대를 이룩한 분은 없습니다. 불교를 숭상하되 정치와 교화에 미치는 영향을 신중히 살펴서 백성들의 힘을 손상시키지 않아야만 자연히 국운이 장구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달마(達摩)41)가 양나라 무제(武帝)더러, 사원을 짓고 탑을 세운다고 하여 특별히 공덕이 쌓이는 것은 아니라고 깨우쳐 주었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공덕을 숭상해야지 인위적인 공덕을 숭상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또 태조께서 사원을 창건한 것은 한편으로는 국가 통합의 소원을 이루어 준데 대한 보답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왕업에 거역하는 산천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한 일일 따름이었습니다. 지금 새로운 사원을 더 창건하려고 하신다면 불요불급한 일로 백성들을 괴롭힘으로써 원망과 비방이 뒤이어 일어날 것이며, 산천의 기맥(氣脈)을 훼손하여 재해가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이는 신(神)과 사람이 함께 노여워할 일로서,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11월

을축일. 왕이 동지(東池)42)에 갔는데 검교위위소경(檢校衛尉少卿) 최성절(崔成節)이 이유 없이 왕의 장막 앞까지 들어오자, 놀란 왕이 그를 하옥시키라고 명령했다. 법을 맡은 관청에서, 임금의 처소에 난입한 자는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왕은,
“비록 법률에 그처럼 규정되어 있으나 이런 일로 참형에 처한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다. 또 그의 글재주가 쓸 만하니 용서하도록 하라.”
고 지시했다. 문하성(門下省)에서 다시 이의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 거란의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 야율도(耶律道)가 동경회례사(東京回禮使)로 왔다.

• 12월 초하루

갑인일. 거란이 금주자사(金州刺史) 야율장정(耶律長正)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九年 春二月 乙巳 東女眞奉國將軍尼多弗等二十七人來, 獻土物. 戊申 寒食, 饗宋商葉德寵等八十七人於娛賓館, 黃拯等一百五人於迎賓館, 黃助等四十八人於淸河館, 耽羅國首領高漢等一百五十八人於朝宗館.

夏四月 辛丑 雨雹·雪.

五月 辛酉 契丹遣耶律革·陳顗, 來冊王. 詔曰, “卿嗣立世勳, 茂修文敎, 効珍職篚, 尊獎於皇家, 奕慶藩圭, 撫寧於靑域. 屬玆行禮, 思與同休. 爰特降於冊函, 仍優加於賄命, 式昭眷想, 當體恩榮. 今差匡義軍節度使耶律革等, 往彼, 備禮冊命. 仍賜車輅·冠服·圭劒等, 及特賜諸物, 具如別錄, 至可領也.” 冊曰, “王者, 禮遇群后, 懷和萬邦, 錫以彤玈, 寵价藩之功茂, 賜之膰胙, 表王室之慶成. 順考前規, 允膺休典. 朕甫鍾嘉運, 勉徇鴻名. 緜蕝之儀, 適交修於朝右, 蓼蕭之澤, 宜遐冒於海隅. 妙簡靈辰, 式揚昆命. 匡時致理竭節資忠奉上功臣開府儀同三司守太保兼中書令上柱國高麗國王, 食邑一萬戶·食實封一千三百戶王徽, 淹融迪裕, 忠肅秉彝. 木德司仁, 旁鍾於醇粹, 珠衡挺異, 逈賦於英標. 而自嗣興乃邦, 纘服前烈, 樹桓文之遐業, 撫辰卞之全封. 善政其蘇, 驩謠允穆. 賓王請朔, 久堅事大之誠, 候律占風, 克謹守邦之職. 作皇家之外蔽, 壯戎翰之中權, 實寬東顧之憂, 率資北面之力. 存逢邦慶, 永念世勳, 乃臨遣於使騑, 特進加於朝冊. 維師陞秩, 奉邑增封, 申昭柔遠之恩, 式協疇庸之典. 今遣使匡義軍節度使饒州刺史兼御史大夫耶律革, 使副崇祿卿護軍陳顗, 持節備禮, 冊命爾, 爲守太師·加食邑五千戶·食實封五百戶, 餘如故. 於戱! 鸞冕八章, 異其數, 象輅九旂, 昭其文. 講備物於曲臺, 溢榮暉於列國, 斂膺殊禮, 永懋令圖. 矧當熙盛之期, 益著匡寧之績, 儀形群岳, 貽燕後昆. 寶朕訓言, 膺受繁祉.” 王受冊于南郊.
癸亥 遣利州刺史蕭祿, 來冊王太子, 官告曰, “古之諸侯, 厥有世子, 貞列邦而爲重, 守冢社以惟艱. 永念亢宗, 必先立嫡. 近省來奏, 深嘉乃誠. 爰念禀朔尊王, 盖絶專封之禮, 瞻天請命, 固求樹本之恩. 特擧舊章, 懋膺榮典. 匡時致理竭節資忠奉上功臣開府儀同三司守太傅中書令上柱國高麗國王, 食邑一萬戶·食實封一千三百戶王徽子勳, 憑積德之厚, 禀貽謀之休. 越在齠年, 鬱爲雅器, 綴冑筵而讓齒, 趨師席以叅玄. 而况寶系莫竟, 昌源寢遠. 肯堂肯構, 旣克紹於世風, 拜後拜前, 是倂敷於朝典. 顧三韓之右地, 摠百濟之舊名, 榮分父母之邦, 爵復公侯之始. 示予綏援, 弘爾善祥. 於戱! 當紈綺之齡, 受絲綸之寵, 黑轓異等, 玄袞升華. 所宜崇孝敬以承親顔, 敦信厚而儀公族. 勿驕勿惰, 有初有終, 欽玆惟休, 無忝慈訓. 可特封三韓國公.” 太子, 迎命于閤門庭. 乙亥 大雨雹.

秋七月 丁巳朔 都兵馬使奏, “契丹前太后皇帝, 詔賜鴨江以東, 爲我國封境. 然或置城橋, 或置弓口欄子, 漸踰舊限, 是謂不厭. 今又創立郵亭, 蠶食我疆, 魯史所謂, ‘無使滋蔓, 蔓難圖也.’ 宜送國書於東京留守, 陳其不可, 若其不聽, 遣使告奏.” 於是, 致書東京留守曰, “當國, 襲箕子之國, 以鴨江爲疆. 矧前太后皇帝, 玉冊頒恩, 賜茅裂壤, 亦限其江. 頃者, 上國入我封界, 排置橋壘. 梯航納款, 益勤於朝天, 霤闥抗章, 乞復其舊土, 至今未沐兪允, 方切禱祈. 又被近日來遠城軍夫, 逼邇我城, 移設弓口門, 又欲創亭舍, 材石旣峙, 邊民騷駭, 未知何意. 伏冀, 大王親隣軫念, 懷遠宣慈, 善奏黈聰, 還前賜地. 其城橋弓欄亭舍, 悉令毁罷.” 庚申 以崔冲爲內史令, 仍令致仕. 李子淵爲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 金廷俊爲內史侍郞平章事, 朴成傑爲內史侍郞平章事上柱國, 金元鼎爲尙書左僕射叅知政事兼太子少保. 契丹康慶遵等十五人來投, 歸我沒蕃人五十三口. 癸亥 以智猛守司空, 仇勝爲刑部尙書, 金所寶爲戶部尙書, 皇甫延爲工部尙書. 皆以武職, 兼之. 壬申 東女眞首領耶時老等二十六人來, 獻土物, 職賞有差. 癸酉 制曰, “先妣太后親姊金氏, 當寡人與德宗幼少之時, 保護有勞. 朕欲封崇爵邑, 酬答43)前勞, 宜令中樞院, 准制施行.”

八月 庚寅 慮囚. 己亥 尙書吏部奏, “檢校將作少監庾恭義, 大匡黔弼之曾孫, 前有所犯, 久滯散秩. 曾降制旨, 太祖配享功臣之後, 雖有罪犯, 並須敍用, 今恭義宜授肅州防禦使.” 門下省奏, “恭義曾犯諂諛, 名載罪籍, 不可敍用. 况牧民之寄, 重於製錦, 苟非其人, 必傷其手. 請罷之.” 制可.

九月 癸亥 契丹興宗告哀使鴻臚少卿張嗣復來. 王聞嗣復過鴨綠江, 减常膳, 輟音樂, 禁屠宰, 斷弋獵. 乙丑 王服索襴, 率百官, 出昌德門前, 嗣復傳詔. 擧哀行服, 輟朝市三日. 辛未 禮賓省奏, “宋都綱黃忻狀稱, ‘臣携兒蒲安·世安來投, 而有母年八十二在本國, 悲戀不已.’ 請遣還長男蒲安供養.” 王曰, “越鳥巢南枝, 况於人乎!” 許之. 丙子 遣知中樞院事崔惟善, 工部侍郞李得路如契丹, 弔喪會葬.

冬十月 乙酉 生辰回謝使戶部侍郞崔宗弼, 還自契丹, 奏, “禮部云 ‘帝名宗眞, 汝名犯宗字, 宜改之.’ 臣於表狀, 改稱崔弼.” 門下省奏, “宗弼宜答以, ‘我國不知所諱, 誤犯之, 表章所載, 未敢擅改.’ 彼若强之, 但减點畫, 庶合於禮, 宗弼擅改表文, 有辱使命, 請科罪.” 原之. 丙申 制曰, “古先帝王, 尊崇釋敎, 載籍可考. 况聖祖以來, 代創佛寺, 以資福慶. 寡人繼統, 不修德政, 灾變屢見. 庶憑法力, 福利邦家. 其令有司, 擇地創寺.” 門下省奏, “自古聖帝明王, 無有創起寺塔, 以致大平. 惟崇重法門, 愼省政敎, 不傷民力, 則自然宗社靈長. 昔達摩對武帝言, ‘造寺造塔, 殊無功德.’ 是尙無爲功德, 不尙有爲功德也. 且聖祖創寺者, 一以酬統合之志願, 一以厭山川之違背耳. 今欲增創新寺, 勞民於不急之役, 怨讟44)交興 毁傷山川之氣脉, 災害必生. 神人共怒, 非所以致大平之道.” 不納.

十一月 乙丑 幸東池, 檢校衛尉少卿崔成節, 無故入至帳殿前, 王驚命下獄. 法司奏, “闌入御所者, 斬.” 王曰, “雖律有正條, 以此加刑, 是爲苛政, 又文筆有用, 可原之.” 門下省駁奏, 不納. 契丹東京回禮使檢校工部尙書耶律道來.

十二月 甲寅朔 契丹遣金州刺史耶律長正, 來賀生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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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문종 9년(1055) 을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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