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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장무이묘

[ 張撫夷墓 ]

황해 봉산 대방태수 장무이 분묘

황해도 봉산 대방태수 장무이 분묘

이칭별칭 이칭 도총(都塚)
유형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시대 고대/초기국가

요약

장무이묘(張撫夷墓)는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대방군 태수 장무이의 벽돌방무덤이다. 봉산군에서 문자벽돌이 채집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도총이라고 불리던 무덤에 대하여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911년 최초로 조사를 실시하었다. 부장 유물은 이미 도굴되어 거의 남지 않았는데, 문자벽돌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이 장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피장자는 낙랑 · 대방군의 멸망과 함께 망명하여 허호를 받은 중국계 인물로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장무이묘는 고구려에 의해 4세기 중엽경에 축조된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정의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대방군 태수 장무이의 벽돌방무덤.

발굴 경위 및 결과

장무이묘는 황해북도 봉산군 문정면 태봉리(지금의 구봉리)의 논 사이에 자리하며 높고 큰 분구를 가진 무덤이다. 원래 주민들 사이에서는 도총(都塚)이라고 불렸다. 유해를 동시에 묻어 둔 무덤이라는 의미이다. 원래 세키노 다다시가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황해도 봉산군에서 채집되었다는 문자벽돌을 발견한 것이 장무이묘 발견의 시작이다. 1911년 현지를 조사한 세키노 다다시는 무덤 근처에서 또 다른 문자벽돌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장무이묘를 처음 굴착한 사람은 다른 지역에서의 조사가 급하였던 세키노 다다시를 대신한 조사원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였다. 1911년 10월 20일부터 시작된 발굴에서 분구 남쪽을 굴착할 때 천장이 붕괴된 널길 부분 천장과 널방 천장이 드러나자 널길 부분만을 조사하였다. 출토된 유물은 작은 쇳조각과 짐승 뼈가 전부였기에 이를 도굴된 고분으로 판단하였다. 물론 왼쪽 벽과 널길에 마련된 이실(耳室)에서 문자전을 발견하였다.

그 중요성을 인지한 세키노 다다시는 이듬해 1912년에 본격적으로 재조사를 시도하였으며, 이때 고분의 널방이 조사되었다. 세키노 다다시는 조사 후 이 고분의 평면형이 네모진 것을 근거로 한나라 대 이전의 중국 봉토분과 비슷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를 1909년 석암동 벽돌방무덤 조사 시 확인하였던 궁륭식구조(穹imagefont式構造) 천장의 벽돌무덤이라고 판단하였다.

조사 결과 널방 중앙부에는 대형 널돌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도굴되는 과정에서 교란된 바닥돌이라고 판단하였다. 널방 내부에서도 출토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문자벽돌은 수습되었다. 이후 1916년에는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가 간이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1929년과 1930년에는 오다 쇼고〔小田省吾〕도 조사를 실시하였다.

형태와 특징

장무이묘의 분구 높이는 5.4m에 달하며 직경은 남북으로 32.4m, 동서로 30m이다. 평면은 방대형으로 34도 정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널길은 입구 양쪽을 쌓아 올리고 천장은 도전(刀塼)과 쐐기전을 이용하여 아치형으로 만들었다. 널길의 총 길이는 3.2m이며 상면폭 1.2m, 바닥폭 1.23m이나, 현실 입구에서는 1.3m 정도가 된다.

벽면에는 거의 전면에 석회가 발려 있다. 널길 2.1m 지점에서 동서 방향의 일직선상에 감실(龕室)이 자리한다. 감실은 널길 부분과 같이 아치형 천장을 구축하였으며 두 이실 사이의 거리는 4.16m이다. 이실 하나의 크기는 평면 1.4m×1m 정도인데, 상면 폭 1.02m, 바닥 폭 1.05m이다. 또한, 높이는 이실 입구(0.89m)에서 안쪽 끝(1m)으로 갈수록 높아지지만, 널길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다.

널방은 3.75m×3.97m 규모로 평면 형태는 방형이다. 널방의 네 벽은 벽돌로 쌓았으며 널길 부분과 마찬가지로 벽면에는 회칠을 하였다. 천장은 붕괴되어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으나 비교적 낮은 것으로 보인다. 널방 내부 중앙에서는 1.92m×2.02m 크기의 삼각형 모양의 널돌이 발견되었다.

껴묻거리는 이미 도굴되고 남아 있지 않았으나, 장무이묘에서 발견된 문자벽돌은 의미가 크다. 모두 10여 종의 문자가 발견되었는데, 좌서인 것과 우서인 것이 있으며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太歲戊漁陽張撫夷塼(태세무어양장무이전)」

「大歲在戊漁陽張撫夷塼(대세재무어양장무이전)」

「天生小人供養君子千人造塼以葬父母旣好且堅典齎記之(천생소인공양군자천인조전이장부모기호차견전재기지)+使郡帶方太守張撫夷塼(사군대방태수장무이전)」

「哀哉夫人庵背百姓子民徇(애재부인암배백성자민순), 夙夜不寧永側玄宮痛割人情(숙야불령영측현궁통할인정)+張使郡(장사군)」

「張使君塼(장사군전)」

「趙主簿令塼懃意不臥(조주부령전근의불와)」

「大歲申漁陽張撫夷塼(대세신어양장무이전)」

「大歲戊在漁陽張撫夷塼(대세무재어양장무이전)」

「(八)月二八日造塼日八十石酒((팔)월이팔일조전일팔십석주)」

이들 문자를 검토하면 묘주는 무신년에 사망한 어양군 출신으로 대방태수를 역임한 장무이임이 드러난다. 문자벽돌에서 무덤 주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이 무덤은 장무이묘라 명명될 수 있었다.

연대 비정 문제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세키노 다다시는 평양 지역에서 일반적인 중앙 널길식의 이실이 딸린 궁륭형 벽돌무덤이라고 판단하였다. 이 복원안을 바탕으로 학계에서는 이를 낙랑군과 대방군이 존속하던 시기의 대방태수묘라고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이 장무이묘의 발견을 통해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4㎞ 떨어진 봉산군 지탑리의 당토성(唐土城)이 대방군치지(帶方郡治址)였을 것이라는 유력한 증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요 몇 해 사이 발굴 당시의 상황이 재검토되면서 이 무덤의 널방 바닥에 비스듬히 놓여 있던 널돌을 천장석으로 이해하였다. 아울러 천장을 널돌로 덮은 구조의 벽돌무덤이 대부분 고구려무덤이라는 점과 석회가 발리는 점, 그리고 널길 부분에 이실이 달리는 무덤이 4세기 대 고구려무덤에서 일반적인 구조인 점을 들어 장무이묘를 대방군 멸망 후의 고구려무덤이라고 판단하였다.

널방 천장에 석개를 하는 사례는 연대가 353년으로 알려진 동리묘가 있으며 승리동3호, 노암리고인돌 등이 있다. 대체로 4세기 대의 고구려무덤이다.

장무이묘와 비교되는 인물로 안악3호분에 묻힌 동수(冬壽)가 주목된다. 동수는 고구려로 망명한 외래인으로 357년에 사망하였는데 그 묵서에서는 생전에 고구려로부터 관등과 관직을 수여받았다는 언급은 없다. 다만 중국의 관직만을 전하고 있다.

이를 볼 때,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계 인사가 옛 낙랑 · 대방 고지에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고구려 정부가 인접 지역 주민들의 통치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장무이 역시 동수의 사례처럼 낙랑 · 대방군의 멸망과 함께 망명하여 '대방태수'란 허호를 받은 중국계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즉, 대방군이 멸망한 314년 이후에 축조된 무덤이라면, 무신년(戊申年)의 연대는 348년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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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원 대방태수 장무이 명전 출토 전축분 전경

사리원 대방태수 장무이 명전 출토 전축분 전경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사리원에 위치한 대방태수 장무이 명전 출토 전축분의 모습이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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