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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사전

고인돌

[ Dolmen음성듣기 ]

탁자식 고인돌 (고창 도산리)

탁자식 고인돌 (고창 도산리)

개석식 고인돌(여수 평여동 다호)

개석식 고인돌(여수 평여동 다호)

탁기반식 고인돌 (담양 궁산리)

탁기반식 고인돌 (담양 궁산리)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서, 거대한 바위가 지상에 드러나 있고 그 밑에 고임돌〔支石〕, 묘역시설(墓域施設), 무덤방〔墓室〕 등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고 있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墓標石) 또는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祭壇) 혹은 기념물로 사용되는 것도 있다.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른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 또는 지석묘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지석묘, 중국에서는 석붕(石棚)과 대석개묘(大石蓋墓)라 하고, 유럽에서는 대체로 거석기념물 또는 돌멘(Dolmen)이라고 부른다.

고인돌〔支石墓〕은 굄돌 또는 고임돌에서 연유된 명칭으로 고인(支, 撑)과 돌(石)에서 지석묘라 한다. 북한에서는 고인돌무덤이라 쓰고 있다. 켈트어인 돌멘은 탁자란 뜻인 ‘Dol’과 돌이란 의미인 ‘Men’의 합성어로 탁자식 고인돌을 연상시킨다. 영어로는 ‘Table Stone’이라 한다.

우리나라 고인돌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은 자연석이 땅에 묻혀있다고 하여 독배기, 바우배기, 독바우로, 기반식(碁盤式) 고인돌의 경우 괸바우, 암탉바우로, 덮개돌〔上石〕의 형상에 따라 배바우, 거북바우, 두꺼비바우, 개구리바우로, 고인돌의 배치상에서 칠성바우, 옛날 장군이 돌을 옮기다가 말았다는 전설이 많아 장군바우 등으로도 부르기도 한다.

고인돌은 북유럽, 서유럽, 지중해 연안지역, 인도, 동남아시아, 일본 큐슈(九州)지방, 중국 동해안지역과 동북지방,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드물게 발견되고 있다.

아시아지역에서는 우리나라에 약 4만여 기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전남지방에서 2만여 기로 밀집분포 되어있다. 이처럼 고인돌은 거의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나 각 지역마다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한국의 고인돌은 외형적 형태에서 크게 탁자식(卓子式), 기반식, 개석식(蓋石式), 위석식(圍石式) 등 4종류가 있다.

탁자식 고인돌은 잘 다듬어진 판돌〔板石〕 3매 또는 4매로 짜맞춘 돌무덤방〔石室〕을 지상에 축조하고 그 위에 편평하고 거대한 판돌상의 돌을 얹어 놓아 마치 책상모양이며, 주로 한강 이북의 북쪽에서 주 분포권을 이루고 있어 북방식(北方式)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돌로 된 천막처럼 생겨서 석붕이라 부른다. 대형의 탁자식은 리야오도옹(遼東)반도와 한국 대동강유역에서만 나타나고 구릉이나 산중턱에 1기씩만 있다. 이 외 지역의 북방식은 규모가 작고 돌무덤방의 폭도 좁고 덮개돌이 두터운 것들이다.

기반식 고인돌은 판돌을 세우거나 깬돌〔割石〕로 쌓은 무덤방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고임돌을 4매에서 8매 정도를 놓고 그 위에 커다란 바위같은 돌로 덮어 마치 바둑판모양이며, 주로 호남과 영남 등 남쪽에 집중되어 있어 남방식(南方式)이라고도 부른다. 덮개돌이 거대하고 괴석상(塊石狀)을 한 것은 호남과 영남지방에서만 보이고 무덤방이 없는 경우가 많다.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뚜껑으로 덮개돌이 놓인 형식으로 리야오도옹반도, 한반도, 일본 큐슈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이는 고임돌이 없는 기반식으로 분류하여 무지석식(無支石式)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무덤방을 큰 돌로 덮고 있는 형태에서 대석개묘(大石蓋墓)라 한다.

위석식 고인돌은 덮개돌 밑에 자연석 또는 판돌 수 매를 돌려놓은 형태이다. 자연석을 이용한 것은 소형 고인돌 아래에 마치 무덤방처럼 방형이나 원형으로 돌을 돌려놓은 것이다. 판돌을 이용한 것은 소위 제주식이라 부른 형태로 덮개돌의 가장자리를 따라 6매에서 12매 정도 서로 잇대어 세우고 한쪽 면이 개방된 것이다.

북한에서는 외형적인 형태와 묘역시설, 무덤방 구조 등에서 탁자식을 오덕형(五德型)으로, 개석식을 침촌형(沈村型)과 묵방형(墨房型)으로 대별하고 있다. 오덕형은 하나의 묘역에 1기의 무덤방이 있는 것으로 지상에 두터운 판돌 4매를 세워 축조한 형태이다. 이 형식에는 대형 고인돌과 중형 고인돌이 있는데, 중형 고인돌에서는 칸막이된 무덤방이 있는 것도 있다. 침촌형은 하나의 묘역시설 안에 5∼6기의 무덤방이 있는 소위 집합식 고인돌이다. 무덤방은 판돌을 이용해 축조한 구조로 되어있다. 묵방형은 하나의 묘역에 1기의 무덤방이 있는 것으로 깬돌이나 판돌편, 강돌〔川石〕 등으로 쌓아 지하에 무덤방을 축조한 형태이다.

고인돌의 무덤방은 판돌로 된 돌널형〔石棺形〕, 깬돌이나 강돌로 쌓은 돌덧널형〔石槨形〕, 구덩이만 있는 움형〔土壙形〕, 덮개돌 아래에 돌만 돌려진 돌두름형〔圍石形〕 등이 있고, 그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 대부분이다.

출토유물은 크게 무덤방 내의 껴묻거리〔副葬品〕용과 무덤방 주변의 의례용(儀禮用)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껴묻거리 유물은 돌검〔石劍〕, 돌화살촉〔石鏃〕,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 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 청동기(靑銅器), 옥(玉)류 등이 있으며, 의례용 유물로는 돌화살촉, 돌칼〔石刀〕, 홈자귀〔有溝石斧〕, 돌끌〔石鑿〕, 숫돌〔砥石〕, 갈판〔耉石〕, 가락바퀴〔紡錘車〕, 그물추〔漁網錘〕 등 다양한 석기류와 토기 파편들이 있다.

대부분 돌검 1점만 부장시킨 경우가 많으며, 돌검 1점과 돌화살촉 수점 또는 수십점이 한 무덤방 안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돌화살촉만 무덤방 안에 부장된 경우는 없고 출토되더라도 무덤방 벽석에 꽂혀져 발견된다. 그리고 남해안지역의 고인돌에서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등 청동기와 옥류, 붉은간토기나 가지무늬토기를 껴묻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시기적인 차이도 있으나 집단이나 신분적인 면에서 각기 다른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에서 발견된 사람뼈〔人骨〕로 보아 하나의 돌무덤방에 한사람만 묻은 것이 보통이나 탁자형의 경우 한쪽 면의 개폐(開閉)가 용이하여 복장제(複葬制)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연탄 오덕리 고인돌처럼 돌무덤방 내부에 몇 개의 칸막이된 공간에 사람뼈가 흩어져 있는 특수한 예도 있다. 고인돌의 매장방법은 펴묻기〔伸展葬〕, 옆으로굽혀묻기〔側臥屈身葬〕, 화장(火葬), 옆으로묻기〔側葬〕, 세골장(洗骨葬) 등이 있다. 펴묻기는 황석리의 예처럼 고인돌의 보편적인 장법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뼈로 본 성별장법을 보면 남자는 펴묻기를, 여자는 옆으로굽혀묻기를 하고 있으며, 나이는 20~30세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상의 장법 중 펴묻기가 고인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무덤방도 훨씬 정교하게 축조하였다.

고인돌을 축조할 때 가장 어렵고 중요한 작업이 덮개돌의 채석과 운반이다. 덮개돌은 주변 산에 있는 바위를 그대로 옮겨온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암벽에서 떼어내서 다듬은 바위를 이용하고 있다. 암벽에서 덮개돌을 떼어내는 데는 바위틈이나 암석의 결을 이용하여 인공적인 구멍에 나무쐐기를 박아서 물로 불리어 떼어내는 방법을 일반적으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얻어진 덮개돌은 동원된 사람들에 의해 고인돌을 축조하려고 하는 장소로 옮겨지게 된다.

덮개돌을 옮기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는가는 실험고고학(實驗考古學)에 의해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다. 1톤의 돌을 1마일(1.6㎞) 옮기는데 16∼20명이 필요하며, 32톤의 큰 돌을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기는데 2백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떼어낸 덮개돌을 운반하는 데에는 여러 개의 둥근 통나무를 두 겹으로 엇갈리게 깔고 덮개돌을 옮겨 놓아 끈으로 묶어 끈다거나 지렛대를 이용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무게가 가볍고 가까운 거리에는 지렛대식이나 목도식이, 먼 거리는 끌기식이 쓰여졌을 것이다. 운반되어 온 덮개돌을 올려 놓는 방법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또는 고임돌에 적당히 흙을 경사지게 돋우고 그 위로 덮개돌을 끌어 올린 후 흙을 제거하였다고 추정된다. 이는 덮개돌과 고임돌 사이에 종종 흙으로 메워져 있는 흔적으로 증명된다.

이와 같은 고인돌의 운반과 축조는 많은 사람이 동원되는데 적게는 50여명에서 많게는 2백∼3백명 정도여서 당시의 고인돌사회에서는 하나의 거족적인 행사였을 것이다.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한 씨족집단 뿐 아니라 이웃씨족이나 부족집단의 인력까지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적 협력체계나 강력한 지배력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노동력을 얻는 대가로 향연을 베풀 수 있을 잉여생산물의 축적이 있어야 가능하다. 고인돌 주변에 발견된 많은 토기편들은 고인돌 축조에 동원된 사람들을 위해 축조 후 제연이 벌어진 증거라고 추정된다. 이처럼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는 북방의 유목사회보다는 정착 농경사회에서 협동하는 사회였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고인돌 사회에 대해서는 씨족사회설, 부계제사회설, 부족사회설, 족장사회설, 공동체사회설 등의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씨족사회나 부계제사회설은 혈연을 중심으로 한 집단들의 가족공동묘로 고인돌이 축조되었다는 설로, 1960년대 이전과 북한지방에서 보는 설이다. 부족사회설은 고인돌이 평등한 공동체 사회로 연장자나 능력있는 지도자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족장사회설은 선사시대 사회발단과정에서 전문인이 출현하여 지역간의 문화전파 및 교역을 촉진하였으며, 토착농경을 바탕으로 하여 계급이 발생한 사회였다는 견해이다.

공동체사회설은 고인돌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개의 군집으로 분포되어 있고 무덤방이 열지어 배치되어 각 집단간의 상호 협동체계에 의해 혈연적이거나 지연적으로 뭉쳐진 공동체사회라는 것이다. 이 공동체사회는 집단간의 영토 확장을 위해 전투를 통한 통합과 흡수 과정으로 유력한 집단과 지배자가 출현하여 소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이 사회에서 인접 집단과의 전투에 과정에서 전사자의 공헌묘로 고인돌을 축조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기원에 대해서는 자생하였다는 자생설, 동남아시아에서 해로를 통해 전파되었다는 남방설, 그리고 북방의 돌널무덤에서 파생되었다는 북방설 등이 있다. 자생설은 우리나라에 고인돌이 가장 밀집 분포되어 있고 형식도 다양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나라에서 고인돌이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세계적인 밀집분포권을 형성한 것은 오랜 기간동안 정착 성행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남방설은 동남아시아로부터 해로를 통해 도작문화(稻作文化)와 함께 중국 동북해안지방과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이는 고인돌의 분포가 평안·황해도·전라도 등 서해안을 따라 집중 분포되어 있고, 남방문화의 요소인 난생설화(卵生設話)의 분포지역과 고인돌 분포지역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과 세골장 풍습이나 벼농사를 배경으로 한 정착농경문화와 함께 동남아시아지역으로부터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북방설은 크게 보면 자생설에 포함시킬 수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청동기문화가 리야오닝(遼寧)지방의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관점에서 리야오닝지방의 돌널무덤에서 변화·발전하였다는 설이다. 그러나 양 지역간 독특한 형태 즉 탁자식과 기반식이라는 형식이 존재한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세계의 거석문화는 신석기시대부터 축조되었다고 하나 지역에 따라 그 형태나 시기가 각 달리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의 상한연대에 대해서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축조설 등이 있다. 신석기시대 축조설은 씨족의 공동무덤의 성격을 띠고 있는 점과 고인돌 주변에서 뗀석기〔打製石器〕,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편 등이 출토된 점을 근거로 삼는다. 청동기시대 설은 기원전 2000년대 말과 1000년대 초와 중기 설이 있다. 기원전 2000년대 설은 중국 리야오닝지방의 고인돌 연대와 비교하는 설이며, 기원전 1000년대 초설은 방사성탄소연대를 참고하여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형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설이다. 기원전 1000년대 중기설은 1960년대 초까지 탁자식 고인돌의 연대에 근거하여 제시된 설이다.

방사성탄소연대치가 기원전 1000년을 상회하고 있어 적어도 기원전 11∼12세기까지 상한연대를 올려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종전의 기원전 12세기설에서 단군릉 발견 이후 고인돌을 단군조선과 관련시키기 위해 기원전 24세기 또는 30세기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하한 연대에 대해서는 청동기시대 전기말 설, 후기 설, 기원후 설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 전기말 설은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세형동검(細形銅劍) 문화보다 앞선 시기인 비파형동검 문화 시기로 보는 것이고, 후기 설은 기원전 3∼2세기 또는 서력기원전후로 보는 설로 세형동검 문화시기까지 고인돌이 축조되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세형동검 초기와 관련된 유물이 일부 출토되지만 소위 두드림토기〔打捺文土器〕는 주위에서 발견된 것들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기원후 설은 기원후 1세기와 4세기설이 있으나 1960년대 초까지 금석병용기시대(金石竝用期時代) 또는 가야계 구덩식무덤방〔竪穴式墓室〕과 연결시킨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하한은 세형동검 문화와 덧띠토기〔粘土帶土器〕와 관련하여 기원전 3∼2세기설이 대체로 수용되고 있는 편이다.

역사상의 문헌 기록과 관련시킨 것으로는 예맥족설(濊貊族說)과 고조선족설(古朝鮮族說)이 있다. 전자는 중국 리야오허(遼河)유역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예맥족이 비파형동검 등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한 농경사회 집단으로서 고인돌을 축조하였다는 것이며, 후자는 고조선족이 제작사용한 비파형동검이 대석개묘라는 무지석식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점에 근거한 것으로 북한에서 보는 입장이다. (이영문)

참고문헌

  • 고조선지역의 고인돌 연구(하문식, 백산자료원, 1999년)
  • 한국 지석묘사회 연구(이영문, 학연문화사, 2002년)
  • 한국 지석묘 연구(유태용, 주류성,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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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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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어

지석묘(支石墓)

참조어

거석문화 , 기반식지석묘(碁盤式支石墓), 남방식지석묘(南方式支石墓), 대석개묘(大石蓋墓), 덮개돌, 개석(蓋石), 뚜껑돌, 마구리돌, 막음돌, 묵방형지석묘(墨房型支石墓), 바둑판식지석묘, 무지석식지석묘(無支石式支石墓), 북방식지석묘(北方式支石墓), 상석(上石), 석붕(石棚), 고임돌, 오덕형지석묘(五德型支石墓), 위석식지석묘(圍石式支石墓), 지석(支石), 탁자식지석묘(卓子式支石墓), 폐색석(閉塞石), 개석식지석묘(蓋石式支石墓), 막음돌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 고고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정리한 용어에 대한 정의와 함께 그간 우리나라에서 발굴조사된 중요 유적들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수록한 『한국고고학사전』. 우리나라 고고학을 총괄하는 고고학일반편과 주요 시대를 망라한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고구려 및 발해 시대, 백제시대, 신라시대 등 7개편의 총 8개 분야로 구분하여 1,650여 항목의 원고를 작성하고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면과 도판을 수록했다.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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