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주제분류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고고학사전

움무덤

[ 土壙墓 ]

석촌동 3호분 동쪽 대형 토광묘 노출전경

석촌동 3호분 동쪽 대형 토광묘 노출전경

움무덤은 특별한 시설이 없이 땅을 파서 시신을 묻는 무덤으로, 유골 또는 유물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으므로 알려진 예는 비교적 적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방대형(方臺形)의 봉토라든가 유물을 통하여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삼국시대의 것으로 구별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약간의 지역적인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초기철기시대부터 출현하여 삼국시대 전기까지 유행한 묘제로 정의되고 있으며 대동강유역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차 한국 전역에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1959년 태성리(台城里) 고분군이 발굴된 이후 북한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과 협봉동모(狹鋒銅矛)가 출토되는 분묘들을 ‘토광묘’로 명명한 이래, 이 묘제는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남부지방에서는 김해 예안리(禮安里) 고분군의 발굴로 인하여 움무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움무덤에 대한 용어도 논란이 많은데 김원용은 토광묘라 부르는 것을 지양하고 초기철기시대의 토광묘계통 묘제로 토광목곽묘만을 설명하고 있으며, 김기웅은 직장토광묘(直葬土壙墓), 목관토광묘(木棺土壙墓), 목곽토광묘(木槨土壙墓)의 3종류로 분류하였다. 이후에도 이와 같은 묘제를 토광묘라고만 불러왔으나 최근에 움무덤에서 나무널(木棺)이나 나무덧널(木槨)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어 이를 움무덤(土壙直葬墓), 널무덤(土壙木棺墓, 木棺墓), 덧널무덤(土壙木槨墓, 木槨墓) 등으로 나누고 있다.

움무덤이란 장방형(長方形)의 무덤구덩이를 파고 바로 시신을 안치하거나 목판을 깔고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하는 가장 간단한 구조의 움무덤으로 서울 석촌동, 서산 명지리· 소소리, 청주 신봉동 등 백제 전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널무덤이란 장방형의 무덤구덩이를 파고 따로 나무널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한 다음 그 나무널을 무덤구덩이 안에 묻은 것으로서 서울 석촌동 3호 돌무지무덤 동쪽 고분군의 대형움무덤과 1호 움무덤 등 3세기 중엽 이전에 해당하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움무덤이 여기에 속한다. 덧널무덤이란 나무덧널의 시설을 마련하고 매장한 것을 말하는데 백제지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주로 경주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 무덤구덩이의 형태는 장방형이나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은 것, 4벽이 수직 또는 경사지거나 계단을 이룬 것이 있으며 매장방법에도 단장(單葬) 또는 합장(合葬)이 있다.

이들 움무덤은 서울·충청도 등지의 백제 중심지역에서는 항상 독널무덤(甕棺墓)과 같은 묘역, 또는 동일한 봉분 내에서 발견됨으로써 돌무지무덤과 돌방무덤을 쓰는 백제 지배세력과 구별되는 토착민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서는 독널무덤과 움무덤이 비슷한 규모로 공존하고 있는데 반해, 전라도지역에서는 독널 위주로 조사되어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 움무덤의 주체가 되는 무덤구덩이는 그 크기가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인을 안치할 수 있는 정도인 길이, 너비, 깊이가 2.0~2.5×0.8~1.2×0.2~0.5m 내외의 규모인데 나무널이 들어가는 경우에는 약간 더 깊고 크다. 무덤구덩이에는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그 크기를 알 수 있는 예가 거의 없지만 영암 만수리의 경우 직경 10여 m 내외의 봉분이, 서산 명지리 1호분의 경우에는 8×7m 크기의 봉분이 남아 있어 작지 않은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울 석촌동의 대형 움무덤은 한쪽 끝이 이미 파괴되어 전체 크기를 알 수 없지만 10×3×1m 내외의 대형 무덤구덩이 안에 나무널 8기가 나란히 안치된 집단 움무덤으로서 무덤구덩이 내부는 흙으로 채우면서 무덤구덩이 상부에는 20~30㎝ 크기의 깬돌(割石)을 2~3겹으로 덮고 별도의 봉분은 씌우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특수한 것이다.

무덤구덩이의 장축방향은 침향과 직결되는 문제로 백제 움무덤의 경우 초기에는 평지에 축조되면서 동~서 방향을 취하다가 이후 구릉지역으로 옮겨가면서 남~북 방향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서침으로 판단되는 서산 명지리, 영암 만수리, 내동리 초분골 고분이 있어 그 방향이 일정하지 않고 약간씩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무덤구덩이 내부에는 주로 2~3점의 토기와 몇 점의 철기가 부장되는데 토기는 주로 머리쪽, 손칼(刀子)이나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은 허리쪽, 기타 철기는 발쪽에 부장되는 경향이 있지만 침향의 문제와 연결되면서 반드시 고수되는 것은 아니고, 서울 석촌동 일대에서는 무덤구덩이 내부 뿐 만 아니라 무덤구덩이 외부 어깨선 인접지역에 1~2점씩의 토기를 따로 부장하는 특색도 보여주고 있다.

널무덤은 B.C. 2500년경의 중국 은대(殷代)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유적에서 다수 발굴되고 있다. 널의 크기는 덧널무덤과 비교해 보면 훨씬 작은 규모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태성리(台城里) 12호와 운성리(雲城里) 2호의 경우 목질(木質)의 너비가 50㎝ 정도 밖에 되지 않아 확실한 널무덤으로 보인다. 서북한지역에서는 나무널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는 널무덤의 벽면은 경사진 무단형(無段形), 2단형, 수직벽의 형태로 되어 있고, 순움무덤에서 보이지 않던 합장 양식이 보이기 시작한다. 서북한지역에서는 순움무덤과 더불어 평안남도와 황해도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으며 남부지방에서는 경북지방과 경남지역 등 낙동강을 중심으로 주로 분포하고 있다. 또한 전라도지방에서도 일부 나타나고 있는데 영암 만수리, 무안 사창리 등이 있다. 이러한 널무덤의 대표적인 유적은 의창 다호리 유적을 들 수 있다.

덧널무덤은 서북한지역에서는 경사진 단면형태를 갖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 수직 단면의 무덤구덩이에 각재(角材)나 판자(板子), 또는 각재와 판자 혼용의 나무덧널을 단장(單葬) 내지 합장(合葬)으로 시설한 후 그 내부에 나무널을 안치하고 있다. 그 중 합장묘의 구조는 남녀를 개별의 무덤구덩이 내에 매장한 양식과 동일 봉토 내에 2개의 나무덧널을 시설한 양식의 2종류가 보인다. 또한 널무덤과는 달리 평양지역에 집중 분포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태성리, 정백동, 운성리 유적 등이 있다. 남부지방에서는 이 덧널무덤단계에 접어들면 청동기는 부장되지 않고 철기만 다량으로 부장되며 토기로는 와질토기(瓦質土器)가 출현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양동리 유적과 노포동 유적 전기가 이에 해당한다. 한편 딸린덧널(副槨)을 가진 덧널무덤단계의 유적으로는 부산 복천동, 김해 예안리·칠산동, 창원 도계동 등이 있는데 단독 덧널무덤단계 보다 규모가 훨씬 커진다.

조양동(朝陽洞) 유적의 발굴을 통해 제시된 움무덤의 형식에 대한 편년은 다음과 같다. Ⅰ형식묘는 나무널을 사용하였고, 무덤구덩이의 규모는 2.0×0.75×2.0m이며, 무덤구덩이의 네 모서리가 둥글어서 평면이 장타원형(長楕圓形)을 이룬다. 부장품은 검은간토기(黑陶), 목긴항아리(長頸壺), 신창리식바리, 쇠꺾창(鐵戈), 청동제검파두식쇠도끼(靑銅製劍把頭飾鐵斧), 다뉴소문경(多紐素文鏡) 등이 함께 출토되고 있다. 상한연대를 B.C. 1세기 후반기로 추정하고 있다.

Ⅱ형식묘는 역시 나무널을 사용하였고 무덤구덩이의 규모는 2.5~3.0×1.0~1.5×1.0~1.5m로서 Ⅰ형식에 비해 평면이 넓어지나 깊이는 얕아진다. 부장품은 한경(漢鏡)과 청동제검파두식철검, 판상쇠도끼(板狀鐵斧), 쇠도끼 등이 있고 새로이 와질토기가 등장한다. 이 형식의 상한연대는 A.D. 1세기 전반기로 보고 있다.

Ⅲ형식묘는 나무널이 아니라 나무덧널이고 무덤구덩이는 4.0×2.0×0.6m인 장방형이다. 부장품은 청동기는 없고 철기가 다량으로 부장되었다. 토기로는 다리(臺脚)가 붙은 와질토기가 출현하고, 토기 정형에 예새깎기 기법이 나타나고 있다. 장신구로는 수정(水晶)의 굽은옥(曲玉)과 여러면옥(多面玉)이 있다. 연대는 A.D. 2세기 후반기로 비정하고 있다.

이처럼 움무덤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독특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구조도 아주 복잡하게 나타나고 있다.

참고문헌

  • 百濟初期 漢城時代 古墳에 관한 硏究(林永珍, 韓國考古學報 30, 韓國考古學會, 1993년)
  • 百濟 土壙墓의 硏究(安承周, 百濟文化 第十六輯, 百濟文化硏究所, 1985년)
  • 鐵器時代-墓制(金基雄, 韓國史論 13, 國史編纂委員會, 1983년)
  • 慶州朝陽洞遺蹟發掘調査槪要とその成果(崔鍾圭, 古代文化 35-8, 1983년)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 고고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정리한 용어에 대한 정의와 함께 그간 우리나라에서 발굴조사된 중요 유적들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수록한 『한국고고학사전』. 우리나라 고고학을 총괄하는 고고학일반편과 주요 시대를 망라한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고구려 및 발해 시대, 백제시대, 신라시대 등 7개편의 총 8개 분야로 구분하여 1,650여 항목의 원고를 작성하고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면과 도판을 수록했다. 자세히보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외부 저작권자가 제공한 콘텐츠는 네이버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