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주제분류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국역 고려사 : 세가

고려세계

[ 高麗世系 ]

고려의 선대는 역사기록이 없어 상세하지 않다. 『태조실록(太祖實錄)』1)에는,
“즉위 2년(919) 왕의 삼대조고(三代祖考)를 추존하여 시책(諡冊)2)으로 시조의 존시(尊謚)를 올려 원덕대왕(元德大王)이라 하고 비(妣)는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였으며, 의조(懿祖)는 경강대왕(景康大王)이라 하고 비는 원창왕후(元昌王后)라 하였으며, 세조(世祖)는 위무대왕(威武大王)이라 하고 비는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3)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름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불렀다.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두루 유람하다가 부소산(扶蘇山 : 지금의 개성직할시 송악산)의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는데 집은 부유했으나 자식이 없었다.
활쏘기를 잘하여 사냥을 일삼던 터에 하루는 같은 마을 사람 아홉 명과 평나산(平那山 : 지금의 개성직할시 장풍군과 황해북도 금천군 우봉면 사이에 있던 성거산)에서 매사냥을 했다. 마침 날이 저물어 바위굴에서 하룻밤을 묵으려 하는데 범 한마리가 굴 입구에 와서 울부짖었다. 열 사람은, ‘범이 우리들을 잡아먹으려 하니 시험삼아 쓰고 있는 관을 던져 범이 움켜잡는 관의 임자가 맞서기로 하자’고 상의한 후 모두 관을 던지자 범이 호경의 관을 움켜잡았다. 호경이 나가 범과 싸우려 했는데 범은 갑자기 사라지고 바위굴이 무너져 아홉 명은 모두 빠져 나오지 못했다.
호경이 돌아가 평나군(平那郡)에 알린 후, 되돌아와 아홉 명의 장사를 지내려고 먼저 산신제를 올렸는데 산신이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과부의 몸으로 이 산을 주관하고 있소. 성골장군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서 같이 신정(神政)을 펴고자 하니 성골장군을 이 산의 대왕으로 봉하고 싶소.’ 말을 마치자 호경과 함께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이에 평나군의 백성들은 호경을 대왕으로 봉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4)를 지냈으며 아홉 사람이 함께 매몰되었다 하여 산 이름을 구룡산(九龍山)으로 고쳤다.
산신이 된 호경이 옛 부인을 잊지 못하고 밤마다 항상 꿈결처럼 와서 교합하여 아들을 낳으니 강충(康忠)이라 했다. 강충은 외모가 단정하고 근엄하며 재주가 많았는데, 서강(西江 : 예성강) 영안촌(永安村)의 부잣집 딸인 구치의(具置義)를 아내로 맞아 오관산(五冠山 : 지금의 개성직할시 장풍군 소재) 아래 마아갑(摩訶岬)5)에서 살았다.
당시 신라의 감간(監干)6) 팔원(八元)은 풍수에 밝았는데, 부소군(扶蘇郡)에 왔다가 군이 부소산(扶蘇山) 북쪽에 있을 뿐 아니라 산의 형세는 빼어나나 초목이 나지 않은 것[童7)]을 보고는 강충에게 ‘만약 군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 삼한(三韓)8)을 통일할 인물이 태어날 것이오.’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강충이 고을 사람들과 함께 산의 남쪽으로 거처를 옮긴 후 온 산에 소나무를 심고 군의 이름을 송악군(松嶽郡 : 지금의 개성직할시)으로 고쳤다. 강충은 군의 상사찬(上沙粲)9)이 되었으며 또 마아갑의 집을 영업지(永業地)10)로 삼고서 두 곳을 오가며 생활했다.
재산을 많이 모으고 두 아들까지 낳았는데 막내의 이름을 손호술(損乎述)이라 부르다가 보육(寶育)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보육은 성품이 자혜로웠으며 출가하여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도를 닦고는 평나산(平那山)의 북갑(北岬)으로 돌아와 살다가 다시 마아갑으로 이사했다. 어느 날 곡령(鵠嶺 : 지금의 개성직할시 송악산)에 올라가 남쪽을 향해 소변을 보니 삼한(三韓)의 산천에 오줌이 넘쳐 은빛 바다로 변한 꿈11)을 꾸었다. 다음날 그의 형 이제건(伊帝建)에게 꿈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이제건이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걸출한 인물을 낳게 될 것이다.’라 하고 자기 딸 덕주(德周)를 아내로 삼게 했다. 뒤에 보육은 거사(居士)가 되어서 마아갑에 나무를 엮어 암자를 지었다.
어떤 신라의 술사(術士)가 그를 보고 ‘이 곳에서 살고 있으면 반드시 당나라의 천자가 와서 사위가 될 것이오.’라고 예언했다. 뒤에 두 딸을 낳았는데 막내딸의 이름은 진의(辰義)로 얼굴이 예쁜데다 지혜와 재주가 많았다. 나이 겨우 15세[笄12)] 때 그의 언니가 오관산 꼭대기에 올라가 소변을 보니 오줌이 천하에 흘러넘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 진의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자 진의가, 비단치마로 꿈을 사겠다고 청하기에 허락했다. 진의가 언니에게 다시 꿈 이야기를 하도록 한 후 꿈을 움켜다가 품는 시늉을 세 번 하니 이윽고 몸에 무엇이 들어온 듯 움직거렸으며 마음이 매우 뿌듯했다.
당나라의 숙종(肅宗) 황제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산천을 두루 유람하려고 명황제(明皇帝) 천보(天寶 : 당나라 玄宗의 연호, 742~756) 12년 계사년(753) 봄에 바다를 건너 패강(浿江)13)의 서포(西浦)에 이르렀다. 막 썰물 때가 되어 강기슭이 진창이 되자 따라온 신하들이 배 안에서 돈을 꺼내어 진흙 위에 깔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러한 연유로 후에 그 포구의 이름을 전포(錢浦)라고 했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14)에는 『벽암록(碧巖錄)』15) 등의 선록(禪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나라 선종(宣宗)16)의 나이 13세 때 목종(穆宗)이 황제로 있었는데, 그가 장난삼아 황제의 용상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응대하는 시늉을 하니 목종의 아들인 무종(武宗)이 내심 언짢아했다.17) 무종이 즉위한 후 선종이 궁중에서 습격을 받고 거의 숨이 끊어졌다가 깨어났는데, 선종은 몰래 궁중을 빠져 나와 멀리 달아나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온갖 풍상을 겪었다. 염관현(鹽官縣)의 안선사(安禪師)18)가 언뜻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특별히 후대했으므로 염관현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또 선종은 일찍이 광왕(光王)이 되었는데19) 광군(光郡)은 곧 양주(楊州 : 지금의 중국 장쑤성 양저우시)의 속군(屬郡)이고 염관현은 항주(杭州 : 지금의 중국 저장성 항저우시)의 속현으로 모두 동해에 연접하여 상선이 왕래하는 지방이었다. 선종은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는 처지였고 완전히 몸을 숨기지 못한 것을 우려해 산수를 유람한다는 핑계로 상선을 타고 바다를 건넜다.
당시는 『당사(唐史)』20)가 아직 편찬되기 전이어서 당나라 황실의 일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숙종선황제(肅宗宣皇帝) 때 안록산(安祿山)21)의 난이 일어났다는 것은 들었으나 선종이 난리를 만나 달아났다는 일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앞의 기록에서는 선종황제를 숙종선황제라 잘못 적은 것이다.”
또 이런 말이 세상에 전해진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충선왕과 교류했던 어떤 사람이 충선왕에게 물었다. ‘언젠가 들어보니 왕의 선조께서는 당나라 숙종의 후손이라고 하던데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숙종은 어려서부터 대궐 문을 나와 본 적이 없고 안록산의 난 때 영무(靈武 : 지금의 중국 닝샤후이족 자치구 링우)에서 즉위했으니 어느 겨를에 동쪽으로 유람하여 아들까지 두었겠습니까?’ 왕이 크게 난처해하며 대답을 못하자 곁에 있던 민지(閔漬)가,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잘못 썼을 뿐입니다. 숙종이 아니고 선종이십니다.’라고 응대했다. 한림학사는, ‘선종이라면 오랫동안 외지에서 고생했으니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수긍했다.”】

숙종이 송악군(松嶽郡)까지 오자 곡령(鵠嶺)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고, ‘이 땅은 반드시 도읍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자, 따르던 자가, 바로 그곳이 팔진선(八眞仙)22)이 사는 곳이라고 일렀다. 마아갑의 양자동(養子洞)에 다다라 보육(寶育)의 집에 묵게 되었는데 숙종이 두 딸을 보고 좋아하며 옷이 터진 곳을 꿰매 달라고 부탁했다. 보육은 그가 중국에서 온 귀인임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과연 술사(術士)의 말과 부합된다고 생각하고는 즉시 큰 딸에게 부탁을 들어주도록 시켰다. 그러나 겨우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피가 쏟아지는 바람에 동생 진의(辰義)를 대신 들여보내 잠자리를 모시게 했다. 숙종이 한 달을 머무르다가【민지(閔漬)의 『편년강목』에는 혹은 1년이라고 했다.】 진의가 임신하였다는 것을 알고 작별하면서, 자신이 당나라의 귀족이라 밝힌 뒤 활과 화살을 주며,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라고 일렀다.
그 후 과연 아들을 낳아 이름을 작제건(作帝建)이라 했다. 뒤에 보육을 추존하여 국조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이라 하고 그의 딸 진의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고 했다. 작제건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용맹이 빼어났다. 대여섯 살이 되자 모친에게,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는데 그 모친은 당나라 사람이라고만 대답했다. 이는 이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장하자 육예(六藝)23)를 두루 잘했는데 특히 글씨와 활쏘기 솜씨가 빼어났다. 16세 때 그 모친이 부친이 남기고 간 활과 화살을 주자 작제건이 매우 기뻐했는데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이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신궁(神弓)이라 불렀다.
이리하여 아버지를 찾아뵈려고 상선에 몸을 맡기고 가다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니 구름과 안개로 사방이 어두컴컴해져서 배가 사흘 동안이나 나아가지 못했다. 배에 탄 사람이 점을 쳐보는, 고려 사람이 없어져야 한다고 하므로【민지의 『편년강목』에는 달리, “신라의 김양정(金良貞)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갈 때 작제건이 그 배를 빌려 탔는데, 김양정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고려 사람을 남겨놓고 가면 순풍을 탈 수 있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작제건이 활과 화살을 지니고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마침 바다에 바윗돌이 있어 그 위에 섰더니 안개가 개이고 순풍이 불어 배는 나는 듯이 가버렸다.
잠시 후 한 늙은이가 나타나 절을 올리며 말했다. ‘나는 서해의 용왕이오. 늘 해질녘이 되면 어떤 늙은 여우가 치성광여래상(熾盛光如來像)24)으로 변신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구름과 안개 사이에 해와 달과 별들을 쭉 벌여놓고는 패라(貝螺)를 불고 북을 치는 등 풍악을 울리며 와서는 이 바윗돌에 앉아 『옹종경(臃腫經)』25)을 읽어대면 내 머리가 쪼개질 듯 아프오. 듣건대 귀공자께서는 활을 잘 쏜다고 하니 나의 괴로움을 없애주기 바라오’ 이에 작제건이 허락했다.

【민지의 『편년강목』에는 달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작제건이 바위 근처에 난 한 갈래 길을 보고 그 길을 따라 1리쯤 가니 또 한 개의 바위가 나타났는데 그 위에는 한 채의 전각이 서있었다. 문이 활짝 열렸고 안에 금자(金字)로 사경(寫經)26)하는 곳이 있어 가서 자세히 보니 붓으로 쓴 점획이 아직도 촉촉했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의 흔적이 없는지라 작제건이 그 자리에 앉아 붓을 잡고 불경을 베끼고 있노라니 어떤 여인이 홀연히 와서 그의 앞에 섰다. 작제건이 관음보살(觀音菩薩)27)의 현신이라 여기고 벌떡 일어나 자리에서 내려와 배례하려 했으나 여인은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다시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불경을 베끼고 있으니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나 말했다, ‘나는 용녀(龍女)로서 여러 해 동안 불경을 베껴 왔으나 아직도 다 쓰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귀공자께서는 글씨도 잘 쓰시고 활도 잘 쏘시니 그대로 머물면서 제가 공덕 닦는 일을 도와주시고 또 우리 집안의 어려움을 없애 주셨으면 합니다. 그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이레 뒤에 아시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되자 공중에서 풍악소리가 들리더니 과연 서북쪽에서 누가 오고 있었다. 작제건이 진짜 부처가 아닌가 하여 감히 활을 쏘지 못하자 늙은이가 다시 와서, ‘바로 그 늙은 여우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마시오’라고 일렀다. 작제건이 활에 화살을 쟁여두고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쏘니 과연 늙은 여우가 화살을 맞고 떨어졌다.
늙은이가 크게 기뻐하며 그를 궁궐로 맞아들여 사례하면서, ‘귀공자 덕분에 나의 근심이 사라졌으니 그 큰 은덕에 보답하고 싶소. 이제 서쪽으로 당나라에 들어가 천자이신 부친을 뵙겠소, 아니면 부자가 되는 일곱 가지 보물[七寶28)]을 가지고 동쪽으로 돌아가 모친을 봉양하려오?’라고 물었다. 작제건이, 자신은 동쪽 나라의 왕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자, 늙은이는, ‘동쪽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은 그대의 자손인 삼건(三建)29)의 때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되오. 그 밖의 것은 다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겠소’라고 했다.
작제건이 그 말을 듣고 천명이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머뭇거리며 미처 소원을 말하지 못하고 있자 뒤에 있던 한 노파가 우스개로, ‘왜 용왕의 딸에게 장가들지 않고 떠나려 하는거요?’라고 일러주었다. 작제건이 그제서야 알아차리고 장가들기를 청하니, 늙은이가 맏딸 저민의(翥旻義)를 아내로 삼아 주었다.
작제건이 일곱 가지 보물을 가지고 돌아가려 하자 용녀가, ‘아버님이 갖고 있는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는 일곱 가지 보물보다 훨씬 귀한 것이니 달라고 청하시지요.’라고 귀뜸해 주었다. 작제건이 일곱 가지 보물을 돌려주며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를 가지겠다고 청하니, 늙은이는 ‘그 두 가지는 내가 가진 신묘한 물건이오만 그대가 청하니 어찌 주지 않겠소?’라 하면서 돼지까지 얹어 주었다.
옻칠한 배[漆船]에 일곱 가지 보물과 돼지를 싣고 바다를 건너 순식간에 해안에 닿아보니 창릉굴(昌陵窟) 앞의 강가였다. 백주(白州 : 지금의 황해남도 배천군)의 정조(正朝)30) 유상희(劉相晞) 등이 그 말을 듣고는, ‘작제건이 서해의 용녀를 처로 삼고 돌아왔으니 참으로 큰 경사로다’고 치하하면서, 개주(開州 : 지금의 개성직할시)·정주(貞州 : 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염주(鹽州 : 지금의 황해남도 연안군)·백주와 강화현(江華縣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교동현(喬桐縣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하음현(河陰縣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백성들을 데리고 와 영안성(永安城 : 지금의 개성직할시 예성강 상류로 세조의 능 창릉이 위치)을 쌓고 궁실을 지어주었다.
용녀가 도착하자 바로 개주(開州)의 동북산(東北山) 기슭에 가서 은그릇으로 땅을 파고 물을 길어 사용하였는데 그곳이 지금 개성(開城)의 대정(大井)이다. 그 땅에서 1년을 살았는데도 돼지가 우리에 들어가지 않자 돼지더러, ‘만약 이 땅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면 나는 이제 네가 가는 곳을 따르겠노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돼지가 송악(松嶽) 남쪽 기슭에 이르러 드러누우므로 그곳에 새 집을 지으니 곧 강충(康忠)이 옛날 살았던 집이었다.
작제건은 영안성(永安城)을 오가며 그 곳에서 30여년을 살았다. 용녀는 일찍이 송악의 새 집 침실의 창 밖에 우물을 파고 우물을 통해 서해의 용궁을 오갔는데 이것이 바로 광명사(廣明寺)31)의 동상방(東上房)에 있는 북정(北井)이다.
평소 용녀는, 자신이 용궁으로 돌아갈 때 절대 엿보지 말라고 하며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작제건과 다짐했다. 어느 날 작제건이 몰래 엿보았더니 용녀는 어린 딸을 데리고 우물에 들어가 함께 황룡(黃龍)으로 변해 오색구름을 일으켰다. 작제건이 기이하게 여겼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다.
용녀가 돌아와 화를 내며, ‘부부의 도리는 신의를 지킴이 중요한데 이제 이미 약속을 저버렸으니 저는 이곳에 살 수 없습니다’하면서 어린 딸과 함께 다시 용으로 변해 우물에 들어 가버린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작제건은 만년에 속리산(俗離山)의 장갑사(長岬寺)32)에 살며 항상 불교 경전을 읽다가 죽었다. 후에 추존하여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이라 하고 용녀를 원창왕후(元昌王后)라 했다.
원창왕후는 사내아이 넷을 낳았는데 장남의 이름을 용건(龍建)이라 했다가 뒤에 융(隆)으로 고쳤으며 자를 문명(文明)이라 하니 이 사람이 바로 세조(世祖)이다. 체격이 헌칠하고 수염이 멋지며 도량이 넓고 커서 삼한을 모조리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일찍이 꿈에서 한 미인을 보고 처로 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뒤에 송악(松嶽)에서 영안성(永安城)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용모가 너무나도 닮아 드디어 혼인했다. 그러나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몽부인(夢夫人)이라 불렀다. 혹자는, 그 여인을 삼한의 어머니로 모셨기에 성을 한씨(韓氏)라고 했다고도 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위숙왕후(威肅王后)이다.
세조가 송악의 옛집에서 살다가 몇 년 후 다시 그 남쪽에다 새 집을 지으려 했는데 바로 연경궁(延慶宮)33)의 봉원전(奉元殿) 터이다.
당시 동리산파(桐裏山派)34)의 조사(祖師) 도선(道詵)35)이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36)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왔다.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가 새로 지은 저택을 보더니,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을 심었을꼬?’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이 알려주자 세조가 급히 좇아가 만나보고는 마치 진작부터 안 듯 친밀해졌다.
그리고 함께 곡령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조사하고 천문과 운수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이렇게 일러주었다. ‘이 지맥은 임방(壬方 : 북쪽)의 백두산 수모목간(水母木幹)37)으로부터 뻗어와 마두명당(馬頭明堂)38)까지 이어져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하시오’ 그리고는 봉인한 봉투를 만들고 그 겉봉에다가, ‘삼가 글월을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께 바치나이다.’라고 썼다. 그 때가 당나라 희종(僖宗) 건부(乾符, 874~879) 3년 4월이었다. 세조가 그의 말대로 집을 짓고서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威肅王后)가 임신하여 태조를 낳았다.

【민지의 『편년강목』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태조 나이 17세 때 도선이 다시 와서 뵙기를 청하고는, ‘족하께서는 백육(百六)의 운39)에 응하여 천부(天府)40)의 명허(名墟)에서 탄생하셨으니 삼계(三季)의 창생이 족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전쟁에 나가 진을 칠 때 유리한 지형과 적합한 시기를 선택하는 법, 그리고 산천을 차례로 제사지내어[望秩41)] 신과 교통하고 도움을 받는 법을 알려주었다.
건녕(乾寧 : 당나라 昭宗의 연호, 894~898) 4년 5월에 세조가 금성군(金城郡 : 지금의 강원도 금화군 김화)에서 돌아가시니 영안성(永安城) 강변의 석굴에다 장사지내고 능의 이름을 창릉(昌陵 : 태조 왕건의 아버지 세조의 능)이라 했으며 위숙왕후(威肅王后)를 합장했다.” 실록(實錄)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현종 18년(1027)에 세조의 시호를 올려 원렬(元烈)을 더하고 위숙왕후는 혜사(惠思)를 더하였으며, 고종 40년(1253)에는 세조에게는 민혜(敏惠)를 더하고 위숙왕후에게는 인평(仁平)을 더했다”】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김관의는,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虎景)이 아간(阿干) 강충(康忠)을 낳고 강충이 거사 보육(寶育)을 낳으니 이 분이 바로 국조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이다. 보육이 낳은 딸이 당나라 귀인의 배필이 되어 의조(懿祖)를 낳고 의조가 세조(世祖)를 낳고 세조가 태조를 낳았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대로라면 당나라의 귀인이라고 한 이는 의조에게는 부친이 되고 보육은 부친의 장인이 된다. 그런데도 국조(國祖)라고 일컫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제현이 또 말했다.

“김관의는, ‘태조가 삼대의 조상 및 그 후비(后妃)를 추존하여 부친을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이라 하고 어머니를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했으며, 조부를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이라 하고 조모를 원창왕후(元昌王后)라 했으며, 증조모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고 증조모의 부친 보육을 국조원덕대왕이라 했다’고 한다. 증조를 빠트린 대신 증조모의 부친을 써넣어 삼대 조고(祖考)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42)를 살펴보니, ‘국조는 태조의 증조이고 정화왕후는 국조의 비이다’라고 했으며, 『성원록(聖源錄)』43)에는 ‘보육성인(寶育聖人)은 원덕대왕의 외조부이다.’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원덕대왕은 당나라 귀인의 아들로서 의조에게는 부친이 되고, 정화왕후는 보육의 외손부(外孫婦)로서 의조에게는 비가 된다. 그러므로 보육을 국조원덕대왕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제현이 또 말했다.

“김관의는, ‘의조가 당나라의 부친이 남기고 간 활과 화살을 받아가지고 바다를 건너 멀리 가서 부친을 뵈려 했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그 뜻이 매우 절실했을 것인데도 용왕이 소원을 물었을 때 즉시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고 했다. 의조가 과연 그렇게 했을까 의심스럽다. 『성원록』에는 ‘흔강대왕(昕康大王)【곧 의조】의 처인 용녀는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 사람인 두은점(豆恩坫) 각간(角干)의 딸이다’고 했으니 김관의가 기록한 것과는 다르다.”

이제현이 또 말했다.

“김관의가, ‘도선이 송악 남쪽에 있는 세조의 집을 보고서 기장을 심을 밭에 삼을 심었다고 했는데 우리말에서 기장은 왕이라는 말과 서로 비슷하다. 그러므로 태조께서는 이로 인해 왕씨(王氏)를 성으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아들이 그 성을 고쳤다는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우리 태조께서 정말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게다가 태조 및 세조께서는 궁예(弓裔) 밑에서 벼슬했다. 궁예는 의심과 시기가 많았는데 태조께서 아무런 까닭 없이 혼자 왕씨를 성으로 삼았다면 그것이야말로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삼가 『왕씨종족기(王氏宗族記)』를 살펴보니 국조의 성을 왕씨라 했다. 그렇다면 태조 때 이르러 비로소 왕씨를 성으로 삼은 것은 아니니 기장을 끌어온 이야기도 또한 거짓이 아니겠는가?
김관의는 또, ‘의조와 세조 이름의 아래 글자가 태조의 이름과 같다’고 기록했다. 개국하기 전에는 풍속이 순박함을 숭상한 나머지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썼을 것이다.
그러나 「왕대력(王代曆)」에는, 의조께서 육예에 통달했고 특히 글씨와 활쏘기가 당대에 가장 빼어났으며, 세조께서는 젊은 시절 재주와 도량을 쌓아 삼한을 차지할 뜻을 지녔다고 했다. 그런 분이 어찌 조부와 부친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자기 이름으로 삼았으며 게다가 아들의 이름으로까지 삼았겠는가? 더구나 태조께서는 창업하여 왕통을 전함에 있어, 모든 일에서 선왕(先王)을 본받았는데 무슨 부득이한 사정이 있기에 태연히 예법에 어긋난 이름을 지었겠는가?
내 생각에는, 신라 때 그 임금을 마립간(麻立干)44)이라 칭하고 그 신하를 아간(阿干)·대아간(大阿干)45)이라 칭했으며 시골 백성들조차도 으례 간(干)을 이름 뒤에 붙였으니 이는 간(干)이 존칭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아간을 간혹 아찬(阿粲)·알찬(閼餐)이라고 한 것도 간(干)·찬(粲)·찬(餐)의 세 글자의 소리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조와 세조 이름의 아래 글자도 또한 간(干)·찬(粲)·찬(餐)의 소리와 서로 비슷하니 이는 존칭을 이름 아래에 붙인 것이 바뀐 것이지 의조와 세조의 이름은 아닐 것이다. 태조께서 마침 이 글자를 이름으로 삼았기 때문에 뒤의 호사가들이 억지로 끌어 붙여다가, ‘삼대가 같은 이름이면 반드시 삼한의 왕이 된다.’는 말을 만들어 내었을 터이니 이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이에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옛 서적을 다시 상고해 보니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병부상서(兵部尙書) 김영부(金永夫)46)와 징사랑(徵仕郞)47)·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김관의는 둘 다 의종 때의 신하이다. 김관의가 『편년통록(編年通錄)』을 편찬하고 김영부가 가려 뽑아 바쳤는데 그 차자(箚子)48)에도 또한, 김관의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모아둔 문서에서 찾아 편집했다고 했다. 그 후 민지(閔漬)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편찬하면서 또한 김관의의 설을 그대로 따랐다.
이제현만이 『종족기(宗族記)』와 『성원록(聖源錄)』을 원용하여 앞 사람의 잘못된 기록을 비판했는 바, 당대의 명유 이제현이 어찌 자기의 뚜렷한 견식도 없이 경솔하게 당시 임금의 세계를 논했겠는가? 작제건의 부친을 두고 당나라의 숙종이니 선종이니 떠들었지만,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면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궁전 밖을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 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의 말이 이치에 맞는 것이다.
그리고 선종이 광왕(光王)에 봉해졌다고 했지만, 『당사(唐史)』에는 번왕(藩王)을 봉지로 내보내는 제도가 나타나있지 않다. 또 그가 난리를 만나 화를 피하였다는 선록(禪錄)과 잡기(雜記)의 설도 모두 근거가 없으니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더구나 용녀에 관한 일은 너무나 허황되고 괴이한 것이다.
『태조실록(太祖實錄)』은 바로 정당문학(政堂文學)·수국사(修國史) 황주량(黃周亮)이 편찬한 책이다. 황주량은 태조의 손자인 현종 때 조정에서 벼슬했으므로 태조 때의 일을 직접 보고 들었을 테니 선대를 추증한 일에 대해서는 사실에 근거하여 썼을 것이다. 정화왕후(貞和王后)를 국조(國祖)의 배필이라 하고 삼대로 삼았으나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설에 대해서는 거의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김관의는 의종 때 하급 관리이며 게다가 태조보다 260여년 뒤의 사람이니, 당시의 실록을 버려둔 채 제대로 상고해 보지 않고 아무데서나 뽑아온 후대의 글만을 어찌 믿으랴?
『북사(北史)』49)를 살펴보니, 탁발씨(拓拔氏)50)를 헌원(軒轅)51)의 후손이라 하였고 신원황제(神元皇帝)52)를 천녀(天女)의 소생이라 했으니 그 허황되고 거짓됨이 너무도 심하다.
또한, 모용씨(慕容氏)53)는 이의(二儀)54)의 덕을 사모하고 삼광(三光)55)의 용모를 계승해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우문씨(宇文氏)56)는 염제(炎帝)57)의 자손으로 황제의 옥새를 얻었는데 그 속언에 천자를 우문(宇文)이라고 부르므로 그것을 성씨로 삼았다고 했다. 그러나 선유(先儒)들은 이를 두고, ‘신하들이 아부하느라 말을 만들어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고 비평했다.
아! 예로부터 임금의 세계(世系)를 논한 말들은 이런 식으로 괴이한 것이 많고 간혹 억지로 끌어다 붙인 설도 있어 후세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실록에 실린 삼대를 추증한 기사를 정설로 삼고 김관의 등의 설도 세상에 전해 내려온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아울러 붙여둔다.”

高麗之先, 史闕未詳. 太祖實錄, “卽位二年, 追王三代祖考, 冊上始祖尊謚曰元德大王, 妣爲貞和王后, 懿祖爲景康大王, 妣爲元昌王后, 世祖爲威武大王, 妣爲威肅王后.”
金寬毅編年通錄云, “有名虎景者, 自號聖骨將軍. 自白頭山遊歷, 至扶蘇山左谷, 娶妻家焉, 富而無子. 善射以獵爲事, 一日與同里九人, 捕鷹平那山. 會日暮, 就宿巖竇, 有虎當竇口大吼. 十人相謂曰, ‘虎欲啗我輩, 試投冠, 攬者當之.’ 遂皆投之, 虎攬虎景冠. 虎景出, 欲與虎鬪, 虎忽不見, 而竇崩, 九人皆不得出. 虎景還告平那郡, 來葬九人, 先祀山神, 其神見曰, ‘予以寡婦主此山. 幸遇聖骨將軍, 欲與爲夫婦, 共理神政, 請封爲此山大王.’ 言訖, 與虎景俱隱不見. 郡人因封虎景爲大王, 立祠祭之, 以九人同亡, 改山名曰九龍.
虎景不忘舊妻, 夜常如夢來合, 生子曰康忠. 康忠體貌端嚴, 多才藝, 娶西江永安村富人女名具置義, 居五冠山摩訶岬. 時新羅監干八元, 善風水, 到扶蘇郡, 郡在扶蘇山北, 見山形勝而童, 告康忠曰, ‘若移郡山南, 植松使不露巖石, 則統合三韓者出矣.’ 於是, 康忠與郡人, 徙居山南, 栽松遍嶽, 因改名松嶽郡. 遂爲郡上沙粲, 且以摩訶岬第, 爲永業之地, 往來焉. 家累千金, 生二子, 季曰損乎述, 改名寶育. 寶育性慈惠, 出家, 入智異山修道, 還居平那山北岬, 又徙摩訶岬. 嘗夢登鵠嶺, 向南便旋, 溺溢三韓山川, 變成銀海. 明日, 以語其兄伊帝建, 伊帝建曰, ‘汝必生支天之柱.’ 以其女德周妻之. 遂爲居士, 仍於摩訶岬, 構木菴.
有新羅術士見之曰, ‘居此, 必大唐天子來作壻矣.’ 後生二女, 季曰辰義, 美而多才智. 年甫笄, 其姊夢登五冠山頂而旋, 流溢天下. 覺與辰義說, 辰義曰, ‘請以綾裙買之.’ 姊許之. 辰義令更說夢, 攬而懷之者三, 旣而身動若有得, 心頗自負.
唐肅宗皇帝潛邸時, 欲遍遊山川, 以明皇天寶十二載癸巳春, 涉海到浿江西浦. 方潮退, 江渚泥淖, 從官取舟中錢, 布之, 乃登岸. 後名其浦爲錢浦.”【閔漬編年綱目, 引碧巖等禪錄云, “宣宗年十三, 當穆宗朝, 戱登御床, 作揖群臣勢, 穆宗子武宗心忌. 及武宗卽位, 宣宗遇害於宮中, 絶而後蘇, 潛出遠遁, 周遊天下, 備嘗險阻. 塩官安禪師黙識龍顔, 待遇特厚, 留塩官最久. 又宣宗嘗爲光王, 光卽楊州屬郡, 塩官杭州屬縣, 皆接東海, 爲商船往來之地方. 當懼禍, 猶恐藏之不深, 故以遊覽山水爲名, 隨商船渡海. 時唐史未撰, 於唐室之事, 無由得詳. 但聞肅宗宣皇帝時, 有祿山之亂, 未聞宣宗遭亂出奔之事, 誤以宣宗皇帝, 爲肅宗宣皇帝云.” 又世傳, “忠宣王在元, 有翰林學士從王遊者. 謂王曰, ‘嘗聞王之先出於唐肅宗, 何所據耶? 肅宗自幼未嘗出閤, 祿山之亂, 卽位靈武, 何時東遊, 至有子乎?’ 王大慚不能對, 閔漬從旁對曰, ‘此我國史誤書耳. 非肅宗, 乃宣宗也.’ 學士曰, ‘若宣宗, 久勞于外, 庶或然也.’】
遂至松嶽郡, 登鵠嶺南望曰, ‘此地必成都邑.’ 從者曰, ‘此八眞仙住處也.’ 抵摩詞岬養子洞, 寄宿寶育第, 見兩女悅之, 請縫衣綻. 寶育認是中華貴人, 心謂, 「果符術士言.」 卽令長女應命. 纔踰閾, 鼻衄而出, 代以辰義, 遂薦枕. 留期月【閔漬編年, 或云一年.】 覺有娠, 臨別云, ‘我是大唐貴姓.’ 與弓矢曰, ‘生男則與之.’ 果生男曰作帝建. 後追尊寶育爲國祖元德大王, 其女辰義爲貞和王后. 作帝建幼而聰睿神勇. 年五六, 問母曰, ‘我父誰?’ 曰 ‘唐父.’ 盖未知其名故耳. 及長, 才兼六藝, 書射尤絶妙. 年十六, 母與以父所遺弓矢, 作帝建大悅, 射之百發百中, 世謂神弓. 於是, 欲覲父, 寄商船, 行至海中, 雲霧晦暝, 舟不行三日. 舟中人卜曰, ‘宜去高麗人.’【閔漬編年或云, ‘新羅金良貞, 奉使入唐, 因寄其船, 良貞夢, 白頭翁曰, 「留高麗人, 可得順風.」’】 作帝建執弓矢, 自投海. 下有巖石, 立其上, 霧開風利, 船去如飛.
俄有一老翁拜曰, ‘我是西海龍王. 每日晡, 有老狐作熾盛光如來像, 從空而下, 羅列日月星辰於雲霧閒, 吹螺擊鼓, 奏樂而來, 坐此巖, 讀臃腫經, 則我頭痛甚. 聞郞君善射, 願除吾害.’ 作帝建許諾.【閔漬編年, 或云 ‘作帝建於巖邊, 見有一徑, 從其徑, 行一里許, 又有一巖, 巖上復有一殿. 門戶洞開, 中有金字寫經處, 就視之, 筆點猶濕. 四顧無人, 作帝建就其坐, 操筆寫經, 有女忽來前立. 作帝建謂是觀音現身, 驚起下坐, 方將拜禮, 忽不見. 還就坐, 寫經良久, 其女復見而言, 「我是龍女, 累載寫經, 今猶未就. 幸郞君善寫, 又能善射, 欲留君, 助吾功德, 又欲除吾家難. 其難則待七日, 可知.」’】
及期, 聞空中樂聲, 果有從西北來者. 作帝建疑是眞佛, 不敢射, 翁復來曰, ‘正是老狐, 願勿復疑.’ 作帝建撫弓撚箭, 候而射之, 應弦而墜, 果老狐也. 翁大喜, 迎入宮, 謝曰, ‘賴郞君, 吾患已除, 欲報大德. 將西入唐, 覲天子父乎? 富有七寶, 東還奉母乎?’ 曰, ‘吾所欲者, 王東土也.’ 翁曰, ‘王東土, 待君之子孫三建必矣. 其他惟命.’ 作帝建聞其言, 知時命未至, 猶豫未及答, 坐後有一老嫗戱曰, ‘何不娶其女而去?’ 作帝建乃悟請之, 翁以長女翥旻義妻之,
作帝建賫七寶將還, 龍女曰, ‘父有楊杖與豚勝七寶, 盍請之?’ 作帝建請還七寶, 願得楊杖與豚, 翁曰, ‘此二物, 吾之神通, 然君有請, 敢不從?’ 乃加與豚. 於是, 乘漆船, 載七寶與豚, 泛海焂到岸, 卽昌陵窟前江岸也. 白州正朝劉相晞等聞曰, ‘作帝建娶西海龍女來, 實大慶也.’ 率開·貞·塩·白四州, 江華·喬桐·河陰三縣人, 爲築永安城, 營宮室.
龍女初來, 卽往開州東北山麓, 以銀盂掘地, 取水用之, 今開城大井是也. 居一年, 豚不入牢, 乃語豚曰, ‘若此地不可居, 吾將隨汝所之.’ 詰朝, 豚至松嶽南麓而臥, 遂營新第, 卽康忠舊居也. 往來永安城, 而居者三十餘年. 龍女嘗於松嶽新第寢室窓外鑿井, 從井中, 往還西海龍宮, 卽廣明寺東上房北井也. 常與作帝建約曰, ‘吾返龍宮時, 愼勿見. 否則不復來.’ 一日, 作帝建密伺之, 龍女與少女入井, 俱化爲黃龍, 興五色雲. 異之, 不敢言. 龍女還怒曰, ‘夫婦之道, 守信爲貴, 今旣背約, 我不能居此.’ 遂與少女, 復化龍入井, 不復還. 作帝建晩居俗離山長岬寺, 常讀釋典而卒. 後追尊爲懿祖景康大王, 龍女爲元昌王后.
元昌生四男, 長曰龍建, 後改隆, 字文明, 是爲世祖. 貌魁偉美鬚髥, 器度宏大, 有幷呑三韓之志. 嘗夢見一美人, 約爲室家. 後自松嶽, 往永安城, 道遇一女惟肖, 遂與爲婚. 不知所從來, 故世號夢夫人. 或云, ‘以其爲三韓之母, 遂姓韓氏.’ 是爲威肅王后. 世祖居松嶽舊第, 有年又欲創新第於其南, 卽延慶宮奉元殿基也.
時桐裏山祖師道詵入唐, 得一行地理法而還. 登白頭山, 至鵠嶺, 見世祖新構第曰, ‘種穄之地, 何種麻耶?’ 言訖而去. 夫人聞而以告, 世祖倒屣追之, 及見, 如舊識. 遂與登鵠嶺, 究山水之脉, 上觀天文, 下察時數曰, ‘此地脉, 自壬方白頭山水母木幹來, 落馬頭明堂. 君又水命, 宜從水之大數, 作宇六六, 爲三十六區, 則符應天地之大數, 明年必生聖子, 宜名曰王建.’ 因作實封, 題其外云, ‘謹奉書, 百拜獻書于未來統合三韓之主大原君子足下.’
時唐僖宗乾符三年四月也. 世祖從其言, 築室以居, 是月, 威肅有娠, 生太祖.【閔潰編年, ‘太祖年十七, 道詵復至請見曰, 「足下應百六之運, 生於天府名墟, 三季蒼生, 待君弘濟.」 因告以出師置陣, 地利天時之法, 望秩山川, 感通保佑之理. 乾寧四年五月, 世祖薨于金城郡, 葬永安城江邊石窟, 號曰昌陵, 以威肅王后合葬.’ 實錄, ‘顯宗十八年, 加上世祖謚曰元烈, 后曰惠思, 高宗四十年, 加世祖曰敏惠, 后曰仁平.’】”

李齊賢曰, “金寬毅云, ‘聖骨將軍虎景, 生阿干康忠, 康忠生居士寶育, 是爲國祖元德大王. 寶育生女, 配唐貴姓而生懿祖, 懿祖生世祖, 世祖生太祖.’ 如其所言, 唐貴姓者, 於懿祖爲皇考, 而寶育皇考之舅也. 而稱爲國祖, 何也?”

又言, “太祖追尊三代祖考及其后妃, 考爲世祖威武大王, 母爲威肅王后, 祖爲懿祖景康大王, 祖母爲元昌王后, 曾祖母爲貞和王后, 曾祖母之父寶育, 爲國祖元德大王云. 略曾祖而書曾祖母之父, 謂之三代祖考, 何也? 按王代宗族記云, ‘國祖, 太祖之曾祖也, 貞和, 國祖之妃也.’ 聖源錄云, ‘寶育聖人者, 元德大王之外祖也.’ 以此觀之, 元德大王是唐貴姓者之子, 而於懿祖爲考也, 貞和王后是寶育之外孫婦, 而於懿祖爲妣也. 其以寶育爲國祖元德大王者, 誤矣.”

又曰, “金寬毅云, ‘懿祖得唐父所留弓矢, 涉海而遠覲.’ 然則其志深切矣, 龍王問其所欲, 卽求東歸. 恐懿祖不如是也. 聖源錄云, ‘昕康大王【卽懿祖】之妻龍女者, 平州人豆恩坫角干之女子也.’ 則與寬毅所記者, 異矣.

又曰, “金寬毅云, ‘道詵見世祖松嶽南第曰, 「種穄之田而種麻也.」 穄之與王, 方言相類. 故太祖因姓王氏.’ 父在而子改其姓, 天下豈有是理乎? 嗚呼! 其謂我太祖爲之乎? 且太祖逮世祖, 仕弓裔. 裔之多疑忌, 太祖無故, 獨以王爲姓, 豈非取禍之道乎? 謹按王氏宗族記, 國祖姓王氏. 然則非至太祖, 始姓王也, 種穄之說, 不亦誣哉? 又云, ‘懿祖·世祖諱下字, 與太祖諱並同.’ 金寬毅以開國之前, 俗尙淳朴, 意其或然, 故書之. 王代曆, 懿祖通六藝, 書與射, 妙絶一時, 世祖少蘊器局, 有雄據三韓之志. 豈不知祖考之名爲不可犯, 而自以爲名, 且以名其子乎? 况太祖創業垂統, 動法先王, 寧有不得已, 而恬於非禮之名乎? 竊謂新羅之時, 其君稱麻立干, 其臣稱阿干·大阿干, 至於鄕里之民, 例以干, 連其名而呼之, 盖相尊之辭也. 阿干或作阿粲閼餐, 以干粲餐三字, 其聲相近也. 懿祖·世祖諱下字, 亦與干粲餐之聲爲相近, 乃所謂相尊之辭, 連其名而呼之者之轉也, 非其名也. 太祖適以此字爲名, 好事者遂附會, 而爲之說曰, ‘三世一名, 必王三韓.’ 盖不足信也.”

論曰, “載稽舊籍, 同知樞密兵部尙書金永夫, 徵仕郞檢校軍器監金寬毅, 皆毅宗朝臣也. 寬毅作編年通錄, 永夫採而進之, 其剳子亦曰, ‘寬毅訪集諸家私蓄文書.’ 其後, 閔漬撰編年綱目, 亦因寬毅之說. 獨李齊賢援據宗族記·聖源錄, 斥其傳訛之謬, 齊賢一代名儒, 豈無所見, 而輕有議於時君世系乎? 其云肅宗·宣宗者, 以唐書考之, 則肅宗自幼, 未嘗出閤, 果如元學士之言矣. 宣宗雖封光王, 唐史無藩王就封之制. 而其遭亂避禍之說, 亦是禪錄. 雜記二說皆無所據, 不足信也. 况龍女之事, 何其荒恠, 若是之甚邪? 太祖實錄, 乃政堂文學修58)國史黃周亮所撰也. 周亮仕太祖孫顯宗之朝, 太祖時事, 耳目所及, 其於追贈, 據實書之. 以貞和爲國祖之配, 以爲三代, 而略無一語及於世傳之說. 寬毅乃毅宗時微官, 且去太祖二百六十餘年, 豈可舍當時實錄, 而信後代無稽雜出之書耶? 竊觀北史, 拓拔氏以爲軒轅之後, 而神元皇帝天女所生, 則其荒誕甚矣. 且言, 慕容氏爲慕二儀之德, 繼三光之容, 宇文氏爲出自炎帝, 得皇帝玉璽, 而其俗謂天子曰宇文, 故因以爲氏. 先儒議之曰, ‘其臣子從而爲之辭, 以緣飾耳.’ 嗚呼! 自古論人君世系者, 類多恠異, 而其間或有附會之說, 則後之人, 不能不致疑焉. 今以實錄所載追贈三代爲正, 而寬毅等說, 亦世傳之久, 故幷附云.”

관련이미지 12

고려세계

고려세계

이미지 갤러리

출처: 국역 고려사: 세가

1/12

위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출처사이트 게시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사용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제공처 정보

국역 고려사 세가를 세트로 엮은 『국역 고려사 세가』세트. 전1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세히보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외부 저작권자가 제공한 콘텐츠는 네이버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