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마대산 동쪽의 여진을 정벌하고 공험진에서부터 함주, 영주, 복주, 웅주 그리고 길주까지 성을 쌓았다가 1년만에 물러났다.
여진은 이 지역에 수백년 동안 살아왔었고 이후로도 수백년 동안 살았다.
•
1107.10.20+ 金史(1344)
1106년에 고려가 黑歡方石을 사신으로 보내와 직위 계승을 축하하자 康宗은 盃魯로 하여금 보빙하도록 하고 망명한 백성들을 요구하였다. 고려가 허락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국경에 이르러 인수하여 가라.”
고 하니 康宗은 이를 믿고 完顏部 阿聒·烏林荅部 勝昆 등으로 하여금 국경으로 가 인수하도록 하고 馬紀嶺 乙隻村에서 사냥하면서 기다렸다.
阿聒·勝昆 등이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는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살해하고 曷懶甸으로 출병시켜 9성을 쌓았다.
17550
SHARED
•
1107.10.20+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22984
SHARED
•
1107.10.20+ 高麗史(1451)
❶ 윤관이 스스로 53,000명을 이끌고 정주 大和門으로 나가고 ❷ 중군병마사 좌복야 김한충이 36,000명을 이끌고 安陸戍로 나갔으며 ❸ 좌군병마사 좌산기상시 문관이 33,900명을 이끌고 정주 弘化門으로 나갔다. ❹ 우군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진이 43,800명을 이끌고 宣德鎭의 安海戍·拒防戍의 2수 사이로 나가고 ❺ 선병별감 이부원외랑 양유송, 원흥도부서사 정숭용, 진명도부서부사 견응도 등이 선병 2,600명을 이끌고 道鱗浦로 나갔다.
23387
SHARED
•
1107.10.20+ 高麗史(1451)
大乃巴只村을 지나 한나절을 행군하였다. 文乃泥村에 이르러 冬音城을 파괴시켰다. 石城의 남녀노소 모두 섬멸하였다.
❶ 윤관의 군대는 大乃巴只로부터 37개 촌을 격파하여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고 ❷ 중군은 高史漢村 등 35개 촌을 격파하여 380명의 목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으며 ❸ 좌군은 深昆村 등 31개 촌을 격파하여 950명의 목을 베었고 ❹ 우군은 廣灘村 등 32개 촌을 격파하여 290명의 목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23388
SHARED
•
1107.12.15┆ 雄州
▐ 윤관은 동쪽으로 火串嶺에 이르고 북쪽으로 弓漢伊嶺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火串嶺 아래에 雄州를 설치하고 弓漢伊村에 吉州를 설치하였다가 이내 모두 돌려주었다.
250여년 후 다시 이 지역을 차지하였을 때는, 吉州를 옛 雄州 북쪽에 설치하고 옛 雄州까지 관할하였다.
23053
SHARED
•
1108.02.27 高麗史(1451)
윤관이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지계를 획정하였는데, 동쪽으로는 火串嶺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弓漢伊嶺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蒙羅骨嶺에 이르렀다. 또 일관 최자호을 보내어 몽라골령 아래의 땅을 살펴 성랑 950칸을 짓고 英州라고 불렀고 火串嶺 아래에 992칸을 짓고 雄州라 불렀으며 吳林金村에 774칸을 짓고 福州라고 불렀고 弓漢伊村에 670칸을 짓고 吉州라고 불렀다. 또 護國仁王寺와 鎭東普濟寺 두 절을 英州城 안에 창건하였다.
22973
SHARED
•
1108.02.27 高麗史(1451)
6성을 새로 설치하였으니, 첫 번째는 鎭東軍 咸州大都督府로, 병민이 1,948정호이다. 두 번째는 安嶺軍 英州防禦使로 병민이 1,238정호이다. 세 번째는 寧海軍 雄州防禦使로 병민이 1,436정호이다. 네 번째는 吉州防禦使로 병민이 680정호이다. 다섯 번째로 福州防禦使로 병민이 632정호이다. 여섯 번째는 公嶮鎭防禦使로 병민이 532정호이다.
21325
SHARED
•
1108.02.27 世宗實錄地理志
1107년에 윤관과 오연총이 군사 17만 명을 거느리고 여진을 몰아내고 장군을 나누어 보내 경계를 획정하였다. 동쪽으로 火串嶺까지 북쪽으로 弓漢嶺까지 서쪽으로 蒙羅骨嶺까지를 우리 강토로 삼았는데 火串山 아래에 성곽 9백 52간을 쌓고 이름을 雄州라 하고 吳林金村에 7백 74간을 쌓고 이름을 福州라고 하고 蒙羅骨嶺 아래에 9백 52간을 쌓고 이름을 英州라 하고 弓漢村에 6백 74간을 쌓고 이름을 吉州라고 하였다. 길주가 북쪽에 있고 웅주가 남쪽에 있다.
21319
SHARED
›
1108.02.27± 윤관의 옥저인 학살
여진은 본디 高麗의 부락으로서 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長州·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高麗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 삼국지(289)에 나오는 東沃沮와 묘사가 비슷하므로 沃沮가 女眞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20656#23058
SHARED
•
1108.03.30 高麗史(1451)
윤관이 宜州·通泰·平戎에 세 성을 쌓고 남계의 백성을 이주시켜 새로 쌓은 9성을 채웠다.
▐ 咸·英·雄·福·吉·宜六州 及公嶮·通泰·平戎三鎭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의주의 6주 및 공험진·통태진·평융진의 3진이 9성이다.
20907
SHARED
•
1108.04.02 高麗史(1451)
윤관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로, 오연총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임명하였다. 내시낭중 한교여를 보내 조서와 고신, 자주색으로 수를 놓은 안장과 구마 2필을 가지고 雄州에 이르러 그것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20909
SHARED
•
1108.04.08┆金史(1344)
강종이 돌아오자 여러 사람들은 모두
“병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합니다. 요나라 사람들이 앞으로 우리를 탓할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태조만이 홀로
“만약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찌 曷懶甸만 잃어버릴 뿐이겠는가? 여러 부가 모두 우리 소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강종도 그렇게 여기고 마침내 斡塞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도록 하여 고려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23068
SHARED
•
1108.04.09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왔다. 왕이 고취와 군위를 갖추어 그들을 맞이하도록 명령하였다. 帶方侯 왕보와 齊安侯 왕서를 보내 동교에서 위로연을 베풀었다. 윤관과 오연총이 경령전에 이르러 복명하고 부월을 반환하여 바치자, 왕이 문덕전에 나아가 윤관과 오연총, 여러 재추를 불러 전각 위로 오르게 하고 친히 변방의 일을 물었는데,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20971
SHARED
•
1109.05.09 高麗史(1451)
東蕃의 적은 祖宗 이래로 우리나라의 힘에 의지하여 큰 은택을 입어 왔는데도 지금은 배은망덕하게도 멀리 있는 적까지 불러 모아 국경을 침범하였다. 1104년에는 끊임없이 군사를 내어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였으며 때로는 생포하여 노예로 삼은 자들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자 군사를 일으키고 고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그러나 적의 잔당은 場寨를 설치하고 吉州를 공격해 왔기에 다시 군사를 독려해 공격하고자 한다.
21285
SHARED
•
1109.05.16ꜛ 高麗史(1451)
여진이 다시 여러 부족을 모아 吉州를 수개월 포위하고 성에서 10리 거리에 작은 성을 쌓아 6개의 목책을 세우고 매우 급하게 성을 공격하였다. 오연총이 그것을 듣고 분개하여 나가려고 하니 왕이 다시 부월을 주어 보냈다. 행렬이 公嶮鎭에 이르니 적이 길을 막고 갑자기 공격하여 우리 군사들이 크게 패하였으며 장졸들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여러 성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성이 함락될 때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23056
SHARED
•
1109.05.16¦公嶮鎭
公嶮鎭의 위치를 추정하는 데는 두 가지 기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는 그곳에 경계비를 세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吉州를 구원하러 가다 그곳에서 적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경계비를 세울 곳으로는 동쪽 경계인 火串嶺이 최적이고 吉州를 구원하는 군대는 雄州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雄州 북쪽이자 火串嶺 아래인 夫瑞坪 남쪽을 公嶮鎭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수백년 후 다시 설치된 吉州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吉州다.
22965
SHARED
•
1109.05.16¦曷懶
金史에 나오는 사묘아리의 무용담과 가장 비슷한 사건은 1109년에 있었던 공험진 전투다. 그렇다면 그 무용담에 나오는 曷懶水는 공험진 전투가 벌어졌던 吉州를 지나는 浮瑞川이 된다. 1107년에 윤관이 점령지에 명칭을 붙일 때 合懶를 咸州라 한 것을 보면 吉州라는 명칭도 曷懶에서 나온 듯하다.
23365
SHARED
•
1109.06.27 高麗史(1451)
褭弗과 史顯 등 6인을 접견하고 입조한 연유를 묻자 “옛날 우리 太師인 盈歌가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조상도 大邦으로부터 나왔으니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귀부하는 것이 의리에 맞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인 烏雅束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9성을 되돌려주어 우리의 생업을 편안하게 해주시면, 자손대대에 이르기까지 공물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국경에 던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21289
SHARED
•
1109.07 金史(1344)
7월에 고려가 다시 강화하자고 요청하니 강종은
“조건이 맞으면 강화하라.”
고 하였다. 고려가 도망하여 들어간 백성의 송환을 허락하고 9성의 병사도 철수시키며 침략한 옛 땅도 반환하겠다고 하자 마침내 그들과 강화하였다.
23067
SHARED
•
1109.07 金史(1451)
七月 高麗請和 盡歸前後亡命及所侵故地 退九城之戍 遂與之和
7월에 고려가 화친을 요청하면서 전후에 망명한 자들과 침략한 옛 땅을 모두 돌려주고 9성 방어에서 퇴각함으로써 드디어 고려와 화친하였다.
23087
SHARED
•
1109.07.03 高麗史(1451)
선정전 남문에 거둥하여 褭弗 등을 접견하고 9성의 반환을 허락하자, 요불이 감격하여 울며 감사의 절을 올렸다. 왕이 물품을 하사하고 돌려보내면서 내시 김향에게 명령하여 국경까지 호송하게 하였다. 이어서 원수 등에게 조서를 내려 9성을 반환하려는 뜻을 타일렀다.
21291
SHARED
•
1109.07.18 高麗史(1451)
최홍정과 문관이 여진 추장 居熨伊 등에게 “너희가 9성의 반환을 요청했으니 마땅히 이전에 했던 약속처럼 하늘에 대해 맹세하라.”라고 하였다. 추장 등은 咸州 성문 밖에 제단을 설치하고 “지금 이후 대대손손까지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맹세하고 물러갔다.
弘正等始自吉州 以次收入九城戰具資粮于內地
최홍정 등은 길주부터 차례로 9성의 전투 장비와 군량을 내지로 거두어 들였다.
21292
SHARED
•
1388 王高 禑王 表
大明欲建鐵嶺衛 禑遣密直提學朴宜中 表請曰 명에서 철령위를 세우고자 하니 우왕이 밀직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표문으로 청하였다.
"切照鐵嶺迆北 歷文高和定咸等諸州 以至公嶮鎭 自來係是本國之地 철령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21737
SHARED
•
1392 高麗史(1451)
速頻·失的覓·蒙骨·改陽·實憐·八隣·安頓·押蘭·喜剌兀·兀里因·古里罕·魯別·兀的改 땅은 원래 우리나라의 공험진 경내여서 이미 초유를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귀부하지 않고 있으니 도리에 어긋난다.
23046
SHARED
•
1404 李朝 太宗 奏
遣計稟使藝文館提學金瞻如京師 瞻與可仁偕行 奏本云 계품사 예문관 제학 김첨을 보내어 경사에 가게 하였는데, 첨이 왕가인과 함께 갔다. 주본은 이러하였다.
"照得 本國東北地方 自公嶮鎭歷孔州吉州端州英州雄州咸州等州 俱係本國之地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공주·길주·단주·영주·웅주·함주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21738
SHARED
•
1451 高麗史
1109년에 길주로부터 시작하여 9성의 전투 장비·군량을 내지로 거두어 들였고 마침내 崇寧·通泰·眞陽의 세 진 및 영주·복주의 성을 철거하였다. 또 함주·웅주 및 宣化鎭의 성을 철거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의주의 6주 및 공험진·통태진·평융진의 3진이 9성이다. 성을 철거하고 여진에게 돌려줄 때에 의주 및 공험진·평융진이 없고 숭령진·진양진·선화진이 추가로 보이고 설치한 호의 수가 각기 같지 않다.
23054
SHARED
-